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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요한계시록 강해(90) - 천년왕국
본 문 : 계시록20 : 1 ~ 3
계20:1~3절입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요한계시록 강해 중에서 해석상 논란이 많은 부분이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이 천년이란 용이 무저갱에 결박되어 갇혀 있는 기간이며, 동시에 교회공동체가 왕 노릇하는 기간입니다.
이 내용을 역사적인 순서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반복적인 기록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전 천년설, 후 천년설, 무 천년설의 견해로 갈라집니다.
먼저 유럽이나 미국을 포함 한국 교회에서도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전 천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 전에 재림하신다는 설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천년왕국 전에 재림하시고 천년 동안 지상에서 통치하신 후, 사단이 잠깐 놓이게 되어 그 천년왕국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모아, 곡과 마곡의 전쟁을 하게 되고 예수님은 그들을 그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섬멸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연다는 주장이 전 천년설입니다.
이 전 천년설에는 역사적 전 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이 있습니다. 둘 다 천년왕국 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동의하지만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은 예수님께서 7년 대 환난 전에 재림하셔서 성도들은 휴거되고, 이 땅에 7년 대 환난이 있는 동안 성도들은 하늘에서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한 후에 다시 땅으로 내려와(이중재림) 지상에다 천년왕국을 건설한다는 설인데, 특이한 것은 천년왕국은 교회공동체가 아니라 유대인의 회복기간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전 천년설은 예수님의 재림이 7년 대 환난 후에 일어나게 된다는 점이 세대주의와 다릅니다. 즉 교회공동체가 대 환난을 겪고 난 후 천년왕국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곧 천년왕국은 바로 교회공동체를 위한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초기 한국 교회를 위해 세워진 초대 평양신학교의 교장인 ‘곽안련’ (Allen Clark) 선교사의 영향이라 생각됩니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자이지만 요한계시록과 관련해서는 세대주의적 견해를 피력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세대주의자였던 스코필드 박사의 관주성경이 발간되면서 미국 교계에는 세대주의적 해석으로 말미암은 엄청난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세대주의적 견해가 대세였습니다.
이 세대주의자들과 당시 유명한 무디 부흥사와 함께 ‘나아가라’와 같은 대형 집회들을 열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의 재림’을 강조하면서 세계 각지로 파송할 선교사를 위한 결단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요구에 수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로 결단하게 되고, 그들은 신학공부와 선교사 파송을 위한 훈련을 통해 세계 각지로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지요.그런 이유로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에 대해 좀 더 부연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에 따르면 7년 대 환난 기간에 적그리스도가 맹위를 떨치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 144,000명이 구원받고 그들의 활약으로 허다한 무리가 구원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환난 기간 동안 유대인들에게 잘해준 사람들을 양이라 하고, 그들을 핍박한 사람들을 염소라 한다고 마25:31~34절의 양과 염소의 심판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년 대 환난이 끝날 즈음에 땅의 왕들과 짐승들의 군대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항하여 아마겟돈 전쟁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내려오셔서 그 원수들을 멸하시고 아마겟돈 전쟁을 종결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과 7년 대 환난 동안 순교한 신자들이 천국에서 다시 내려와서 천년 동안 다스리는 이스라엘 왕국이 회복되며 구약의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 같은 선지서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모든 예언이 다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진 천년왕국이 끝날 즈음에 사탄이 잠깐 옥에서 풀려나와 천년왕국에 사는 사람 중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 곡과 마곡의 전쟁을 일으키지만, 예수께서 이제 영원히 그들을 불 못에 던져 넣으시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것이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입니다.
그리고 후 천년설은 이제 이 땅에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어서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되고, 이 땅이 자연스럽게 천년왕국화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설입니다.
그러나 이 후 천년설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성경 주석상의 문제라기보다, 역사적 상황이나 역사적 경험으로 인간 스스로가 이 땅은 천년왕국화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개혁주의 신학이 지지하고 있는무 천년설에 대한 것입니다. 무 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천년’이라는 기간을 문자적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다’(마4:17)라고 확언합니다.
마4:17절을 보지요.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가까이 왔다’라고 번역이 된 ‘엥기켄’(ᾔγγικεν)은 ‘엥기조’(ἐγγίζω)라는 동사의 직설법 완료형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천국이 예수님과 함께 이미 이 땅에 와 있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또한 골1:13절도 보겠습니다.
골1:13절을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여기서도 ‘옮기셨다’라고 번역된 ‘메디스테센’(μετέστησεν)도 ‘메디스테미’(μεθίστημι)라는 동사의 직설법 과거형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예수님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소개할 때, 공간적 개념이 아닌 통치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목양관 집회 때 여러 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곧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사탄의 통치로 인한 사탄의 시민이었다는 것이고, 구원을 얻은 후에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이후부터 재림하실 때까지를 바로 상징적인 천년왕국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천년왕국설에 관해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저는 그 모든 설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습니다. 어떤 설이 옳으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분문의 말씀을 기록한 저자와 그 말씀을 계시한 예수님의 의도와 목적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결국 성경적인 눈으로 본문을 읽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한 구절 한 구절을 분석하여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 계20:1~3절의 말씀은 ‘천년왕국’이라는 주제라기보다는 ‘용이 천년동안 무저갱에 결박되어 갇혀 있다’는 내용입니다.
먼저 계20:1절,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라는 구절부터 살펴보기로 합니다.
1절에 보면, 요한은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여기에서 천사는 사탄처럼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중반절에 보면, 그 천사는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저갱’은 우주 속에 있는 어느 일정한 장소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는 이 ‘무저갱’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하고 있는 데, 사실 ‘무저갱’이라는 개념을 먼저 설정해 놓고 본문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막연하게 접근하는 것보다는 구약적 배경과 중간기 문헌의 배경을 추적하여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먼저 ‘무저갱’이라는 우리 말 번역도 적절한가도 검증해야 할 사항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무저갱’이라는 번역이 가능한 것인지 결론 짓기 전에 이 ‘무저갱’이라는 단어를 헬라어 원어, 아뷔소스‘(ἀβύσσος)를 우리말로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려고 합니다.
이 ‘아뷔소스’(ἀβύσσος)는 창1:2의 ‘깊음 위’(ἐπάνω της ἀβύσσου : 이것은 히브리어 ‘태흠’(םוֹה)에 대한 70인경〈히브리어 성경에 대한 헬라어 번역 성경〉 의 번역이다) 이라는 문구에서 출발합니다.
이 ‘깊음 위’ 즉 히브리어 ‘태흠’(헬라어 ‘아뷔소스’)이라는 단어는 시42:7이나 사51:10에서도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태흠’이라는 단어가 ‘깊은 바다’ 혹은 ‘깊은 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63:9과 71:20에서는 ‘땅 깊은 곳’이라고 하여 죽은 자들이 존재하는 장소로 사용됩니다.
이러한 의미는 이 ‘아뷔소스’라는 단어가 본래 창세기에서 ‘깊음’이라는 의미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여기서 발전하여 죽은 자들은 정결치 못한 존재이므로 에녹1서 18:14에서 ‘아뷔소스’는 타락한 천사들이 갇혀 있는 ‘웅덩이’(pit) 혹은 ‘감옥’(prison)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뷔소스’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가 진화를 거듭한 끝에 결국에는 원래의 의미를 벗어나 상징적 성격을 가지게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덧붙여서 신약에서 ‘아뷔소스’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이 되는데, 롬10:7에서는 ‘죽은 자들이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하고, 이와는 달리 눅8:31에서는 ‘악한 영들의 감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롬10:7이나 눅8:31에서의 이러한 두 가지 용법은 각각 모두 앞서 말한 구약이나 에녹서의 내용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롬10:7의 ‘아뷔소스’(헬, ἀβύσσος) 경우에는 ‘셰올’(히,לוֹא) 혹은 ‘하데스’(헬,ἅδης)〈(한글개역성경은 ‘음부’라고 번역)〉 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무저갱’이라는 표현은 4복음서 저자들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저자들 사이에 보편적 이해를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 이 단어의 ‘악한 영들의 감옥’이라는 표현은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에녹1서 18:14을 배경으로 하는 상징적 묘사로서 누가 자신의 독특한 접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아뷔소스’라는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많은 신약성경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그 실제적 대상을 언급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악한 영들을 가두는 감옥’이란 물리적으로 우주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탄을 대표하는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철저하게 제압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여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왕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중이므로 참고로 「지옥」이라는 단어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잠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지옥(地獄)은 ‘땅 속에 있는 감옥’아라는 뜻인데, 개인적으로나 보편적으로 심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죄인들이 형벌을 받는 장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옥’이라는 개념도 의외로 복잡합니다.
일단 구약성경에서 ‘음부’(히, 세올)은 단순히 무덤을 가리키는 말로, 죽은 후 몸과 영혼이 쉬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멸과 멸절의 장소 혹은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에 무가치와 허무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거의 대부분 ‘게엔나’(γέεννα)입니다. ‘게엔나’는 히브리어 ‘게힌놈’을 헬라어로 음차 한 단어인데, ‘게힌놈’은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으로 이곳은 예루살렘 서남쪽에 있는 실제 쓰레기 소각장의 이름입니다.
힌놈의 골짜기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곳의 대명사로, 24시간 쓰레기 소각을 위해 불이 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옥에 던진다’(마5:22,29,30 등)고 말씀 하셨을 때, 이는 ‘불이 타는 쓰레기 소각장에 던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역사 과정 속에서 이러한 의미가 진화되어 상징적 의미가 추가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힌놈의 골짜기는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 ‘아하스’왕과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왕이 이방 풍습을 본받아 자녀를 불태워 인신제사를 드린 곳(대하28:3 ; 33:6)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극도의 분노를 샀던 곳이 바로 힌놈의 골짜기입니다. 따라서 ‘게엔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곳, 또는 종말론적 심판의 장소, 혹 저주의 장소라는 뜻이 덧붙여지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복음서에 주로 나타난 ‘지옥’아라는 말은 고통의 장소라기보다는 심판의 장소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게엔나’에 ‘타르타로스’, ‘하데스’, ‘헬’과 같은 이교적 용어가 덧붙여지며 과도하게 신화적인 이미지가 더해졌습니다.
‘헬’(hell=지옥)은 노르만족의 죽음의 여신의 이름이며, 그녀가 통치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지옥이라는 용어조차도 성경보다는 이교신화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계9:1을 보면,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의 경우와 계20:1절의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내려와서“라는 말씀과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계9:1에서 하늘에서 떨어진 별은 ‘사탄’으로 간주되는데 바로 그 사탄이 무저갱의 열쇠를 가집니다. 그런데 계20:1에서는 열쇠를 가진 자가 하늘로부터 떨어진 사탄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혹은 보냄을 받은)천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물론 문맥의 차이 때문에 발생되는 것입니다. 곧 9:1에서는 ‘무저갱’을 사탄의 ‘처소’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며, 20:1에서는 ‘무저갱’을 ‘감옥’으로 간주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무저갱’은 이 두 가지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20:1의 경우에는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함께 ‘큰 쇠사슬’을 가지는 것으로 소개되는데, 이것은 감옥으로서의 ‘무저갱’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9:1에서 ‘열쇠’는 열기 위한 것이라면, 20:1에서 ‘열쇠’는 잠그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1의 열쇠와 쇠사슬의 용도에 대해서는 20:2~3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여기 2~3절에서 천사의 행동이 다섯 단계를 통해 묘사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잡다’(ἐκράτησεν) → ‘결박하다’(ἔδησεν) → ‘던지다’(ἔβαλεν) → ‘잠그다’(ἔκλεισεν) → ‘인봉하다’(ἐσϕράγισεν)
계20:2절을 분석하여 설명을 하면, 천사는 마귀와 사탄이라는 용, 곧 옛 뱀을 잡습니다. 한글개역성경에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다’라고 한 번역보다는 ‘마귀요 사탄인 용, 곧 옛 뱀’이라고 번역해야 될 것입니다.
용과 옛 뱀이 동격으로 사용되고, 관계대명사로 연결되는 ‘마귀와 사탄’은 그 용에 대해 설명해 주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용과 옛 뱀이 한 쌍을 이루고 마귀와 사탄이 한 쌍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도는 매우 합리적이라 할 수 있는데, 용과 옛 뱀은 일종의 이미지로, 마귀와 사탄은 그 이미지에 대한 실체로 서로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옛 뱀’이라는 표현은 창세기 3장에서 처음으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사탄을 연상하게 합니다. 오늘 계20:2절 본문이 마치 창세기 3장을 떠 올리게 하는 것은 이 분문에서 제시하려는 내용이 창세기 3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곧 사탄과의 긴장 관계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잡다’라는 단어로 통해 용은 무력함을 드러내는 데, 용의 이러한 무력함은 다음 단계인 ‘결박하다’(ἔδησεν)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용은 잡혀 결박당할 정도로 천사에 의해 압도당합니다.
다음 단계로 그 용을 무저갱에 던져서 잠그게(ἔκλεισεν) 됩니다. 여기에서 결박하는 도구로 바로 ‘큰 쇠사슬’이 사용됩니다. ‘큰 쇠사슬’로 결박했다는 것은 사탄의 결박이 매우 완벽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인봉하고 잠그는 작업은 이 사탄에 대한 통제가 완벽하게 이루어졌음 더욱 확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일천년 동안 지속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 문제는 20:1~3의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상징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용’ 혹은 ‘옛 뱀’이라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용과 옛 뱀은 곧 상징적 이미지로 사용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저자 요한은 상징적 이미지로 사용된 ‘용’ 혹은 ‘옛 뱀’을 ‘사탄’ 혹은 ‘마귀’라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환상 중에 본 것은 ‘사탄이나 마귀’가 아니라 ‘용’입니다. 그리고 그 상징적 이미지를 마귀요 사탄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에 의하면, 이 본문은 본질적으로 상징성을 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표현들도 역시 동일하게 상징적 표현을 사용한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중반 절에서 이러한 용이 큰 쇠사슬로 결박당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결박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사탄은 언제 결박당한다고 했을까요?
여기에서 ‘결박하다’(ἔδησεν〉δέομαι)라는 동사는 막3:27(마12:29 ; 눅10:17~19 ; 요12:31~33)의 ‘결박하다’라는 동사의 용례와 병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이 단어의 용례의 도움을 얻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특별히 막3:27 (마12:29 ; 눅10:17~19) 의 내용을 관찰해 보고자 합니다.
막3:27절,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δήση〉δέομαι)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δήση〉δέομαι)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위의 마가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제압함으로써 사탄과 그의 영역을 결박하셨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사탄의 결박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사에 의해 용이 잡혀 결박당하고 무저갱에 갇히게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 사건에 의해 그 기력이 파괴된 사탄의 정체를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설명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정체는 계12:7~12에서 미가엘 천사와 전쟁에서 패하여 하늘로부터 쫓겨난 용의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계12:9에서도 계20:2의 경우와 동일하게 이 용을 옛 뱀, 곧 마귀라고 하고 사탄이라고 하는 자라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계12:9과 계20:1~3에서 용의 정체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병행되는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병행적 관계는 계12:17과 계20:7~10과의 관계에서 다시 한 번 확증이 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천사가 용을 무저갱에 가두어 놓은 것은 구약적 배경으로 사24:21~22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24:21~2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같이 모음을 입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위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악한 영들(‘높은 군대’)과 땅의 악한 무리(‘땅의 왕들’)를 깊은 옥에 갇혔다가 심판을 받고 최후의 형벌을 받은 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통치할 것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정복하시는 방법으로 ‘옥에 가두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계20:3에서 ‘무저갱에 가두다’라는 행동으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24:21~22에서 대적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계20:1~3에서 용 ` 옛 뱀, 곧 사탄 ` 마귀에게 적용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논증을 통해 용이 무저갱에 갇혀 있는 천년의 기간은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초림에서 시작되며, 그 마지막이 재림의 때라고 볼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예수님의 일련의 사역(공생애 ` 죽음 ` 부활 ` 승천)을 통해 결박당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이 무저갱에 갇혀 있다는 것은 사탄의 완전한 멸망을 의미하지 않고 임시적 의미(마치 구치소에 갇혀 있지만 마지막 심판 때까지 계속 활동하는 것처럼)를 가지기 때문에 이 사탄의 활동은 재림의 때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은 멸망으로 들어가기 위해 천년이 찼을 때, 곧 재림의 때에 무저갱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저갱은 용이 갇혀 있는 임시 감옥인 것입니다. 용이 영원히 형벌을 받아야 할 장소는 바로 두 짐승이 던져진 바 있는 유황불이 타는 불 못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용에 의해 상징되는 사탄이 초림과 재림 사이에 무저갱에 갇혀 있다면, 그 사탄이 지금 활동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고후4:3~4 ; 엡2:2,6:11~12과 딤후2:26 그리고 벧전5:8과 같은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입니다.
엡2:2절을 보면,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6:11~12도 보면,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벧전5:8에서도,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위의 말씀들에 의하면 마귀 사탄은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게 활동하는 적대적 세력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과 마귀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위의 요한계시록 본문(1~3절)에서 사탄의 결박은 사탄의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도 의식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탄의 권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압당했다는 측면을 강조하여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활동은 지속됩니다. 이것은 계12:7~9에서 용이 ‘미가엘’과의 전쟁에서 하늘로부터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자를 핍박하는 모습(계12:11, 17)을 통해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곧 사탄은 현재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철저히 결박당했지만 동시에 재림 때까지 왕성하게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20:1~3절에서 ‘사탄의 결박’을 이해할 때 이러한 사탄의 이중적 성격을 잘 적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사탄이 결박당해 있는 사실을 통해 철저하게 패배한 측면을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 의하면 사탄이 무저갱에 갇히게 된 것은 천년 동안 ‘만국’(τὰ ἔθνη=the nations)을 다시는 미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만국’은 그냥 ‘나라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리고 ‘다시는’(ἔτι)이라는 단어는 무엇인가 계속되던 행동이 멈추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곧, 사탄은 나라들을 미혹해 왔는데 이제 다시는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곧 천사는 용을 천년동안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무저갱에 가두어 두었다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천년의 기간이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 사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 사이 동안에 용은 무저갱에 있어 만국을 미혹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사탄의 미혹은 초림과 재림 사이 동안에 만국을 향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계12:9의 경우에는 사탄을 ‘천하를 미혹하는 자’(ὁ πλανων τὴν οἰκουμένην), 계13:14에서는 짐승이 ‘땅에 사는 자들을 미혹한다’(πλανα τοὺς κατοικουντας ἐπὶ της γης), 계18:23에서는 바벨론이 ‘모든 나라들을 미혹하였다’(ἐπλανήθησαν πάντα τὰ ἔθνη), 계19:20에서는 둘째 짐승이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을 미혹하였다’(ἐπάνησεν τοὺς λαβόντας τὸ χάραγμα του θηρίου)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의 경우들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탄과 함께 하는 악의 세력들의 미혹에 대한 활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은 위의 계20:3의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말씀과는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요? 이미 미혹하지 못하도록 무저갱에 가두어 두었는데 그 사탄이 미혹하게 하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니 이상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지요.
조금 전에도 이러한 비슷한 경우의 문제를 언급한 바 있지만, 추가하여 덧붙이면 이것은 두 가지 방향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사탄은 이중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중적 성격은 계12장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계12장에서 사탄은 하늘로 쫓겨 나 하늘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합니다(12:7~12). 그의 머리가 상하게 되었으며 성도들의 발 아래 짓 밝히게 됩니다(롬16:20). 그 이전까지 사탄은 온 천하를 미혹케 하는 자였으나(12:9)하늘로부터 쫓겨난 후에는 온 천하, 특별히 교회 공동체를 미혹하는 그의 사역에 지대한 제한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를 핍박하고 공격하는 시도를 계속합니다(12:13~17). 바로 이것이 용의 중요한 이중적 성격입니다.
이러한 패턴을 계20:1~3의 용에 대한 묘사에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곧, 용이 여전히 만국을 미혹하는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사탄의 활동이 효과적인 결과를 이루지 못하도록 그 능력을 제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만국을 미혹하게 하는 사탄의 사역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실패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용의 활동이 완전히 중지하게 될 때가 오는데, 그 때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의 때입니다. 다음에 이어서 공부할 계20:7~9이 바로 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만국을 미혹하게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7~10절의 말씀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천년이 다 찬 후에 무저갱에서 나와 만국,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교회공동체와 싸움을 합니다(20:8).
여기에서 ‘미혹하다’라는 동사가 사용되는데, 이 동사는 종말적 전쟁을 치르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행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격의 미혹은 적어도 용이 무저갱에 있는 천년의 기간 동안에는 할 수 없었는데, 이제 천년이 다 차고 재림의 때가 되자 마지막으로 교회공동체를 멸절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에 대해서는 다음의 7~10절을 공부할 때 자세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고, 이제 끝으로 20:3절의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는 내용이 소개되는데, 이 내용은 ‘그 후’(μετὰ ταυτα)라는 문구에 의해 천년이 다 찬 후의 상황을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반드시’(δει)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있다는 것은 신적 계획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고, 사탄의 결박과 놓임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잠깐’(μικρὸν χρόνον) 동안 놓임을 받는다는 것은 미혹하는 사탄의 활동 기간이 매우 짧게 주어질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내용 역시 계20:7~10에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합니다.
첫댓글 감사..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이해하기도 벅찬데;
목사 님은 이를 해석하고 분석하고 이해 시키려 원고를 작성하시는데...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어요~~
충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근간을 이해하는데 많은 힘이 됩니다.
감사 합니다.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고, 댓글로 위로와 힘을 주시는 분이 계시니 큰 위로가 됩니다. 애쓴 보람이랄까요?
감사합니다. 샬롬!
말씀.(강해 /90) 수고하심 .....
감사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