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이다. 달이 가득 차 있다. 풍성하고 아름다운 밀리더스. 부와 풍년을 기원하는 자들의 자애로운 어머니 보름의 밀리더스.
하지만 지금 저 하늘 중앙에서 한 마리 늑대의 눈빛처럼 흉흉한 기운을 발하는 저것이 정말 부와 풍요의 약속, 황금의 달 밀리더스란 말인가. 아니다. 그럴리 없다. 저렇게… 저렇게 은빛으로 시리게 빛나는 달이 그 보름이 되면 떠오르는 가득 찬 밀리더즈일리 없다. 안그런가? 저것은 그저 미친 달일 뿐이다.
젠장할……
왜 난 이런곳까지 몰려온 것일까. 난 그저 그들의 도구에 불과했었나. 서로 잔을 기울이며 세상 끝까지 다할 것이라고 맹세했던 우리들의 우정이라는 것은 고작해야 이런 것이었던가. 불타오르는 가슴. 차갑게 얼어붙은 바람이 싸늘히 식은 어깨를 스쳐지나간다. 미쳤어. 모두 미친거야. 그래.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내 절친한 친우들이 내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겠어? 악마에라도 홀린 걸까? 그래. 분명해.
[그럴까? 아니야.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널 이용한 것 뿐이야. 그걸 아직 모르겠니?]
웃기지마, 개자식. 난 내 친구들을 믿는다구!
[…….]
하늘은 어둡다. 하지만, 오히려 검지는 않다. 그저 어두울 뿐 깨끗치 못한, 잿빛 구름이 하늘을 매우고 그 가운데서 빛나는 저 미친 달이 내 마음을 도려낸다. 가슴이 아프다. 살이 뜯어졌나? 그건 아니다. 피가 흐르나? 그것도 아니다. 우정이 와인의 얇은 잔처럼 산산조각나 깨어졌던 것으로도 모자라 사랑이 내게서 등을 돌렸다. 아아아!
[……밉지?]
그대여, 그대는 왜 그렇게 매몰차게 나를 외면했죠? 왜 그렇게 날 경멸스럽게 바라봤죠? 왜 내게 그 천사같은 미소를 보여주지 않고 비웃음이라는 굴욕적인 웃음만을 주었죠? 왜? 왜? 나라는 존재가 과연 그대에게 무엇이기에?
사실 그대가 내게서 등돌릴때는 아무렇지도, 놀랍게도 정말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습니다. 다만 들어보자면 허탈했달까요? 하지만 오늘, 아무렇지도 않은 그대의 목소리를 무심코 들었을 때, 나는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제 가슴은 공허하게 울려버렸고, 제가 할 수 있었던, 또 행했던 일은 고작해야 주저앉아 우는 것 뿐이었습니다.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힘줄을 모두 끊어버린 죄인처럼 저는 그렇게 그대를 바라보며, 그대를 회상하며--그대의 미소를, 그대의 실망을, 그대의 분노를, 그대의 안락함을, 그대의, 그대의 모든 것을!--그렇게 주저앉아 몹시도 추하게 하염없이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아… 그대여, 그대는 왜 내게서 등돌렸나요!
왜… 그대는 나를 떠났나요…
[밉지? 완전히 다 쓸어버리고 싶지? 않그래?]
아냐! 미운게 아냐! 단지 궁금할 뿐이라고! 내가 나의--영원할!--연인을 미워한다고?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단 말이다!
밀리더스는 점점 더 커져만 간다. 그에 반비례하듯 내 몸은 점점 더 위축되어 간다! 빌어먹을! 뱀의 눈을 재수도 없게 응시해버린 불쌍한 쥐의 심정을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난 고개를 흔든다. 바람이 줄어들고 있다. 빌어먹을 세상 같으니. 날 무시해? 모두들 날 무시하고 있어. 위에서 누군가 날 짓누르는 거야. 내가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지 못하게 누군가 내 몸에 실을 매달아서 날 조종하는 거지. 분명해.
[벗어나고 싶지?]
어릴적부터 그랬어. 언제나 예정되어진 삶만을 살아왔지. 내 의사! 내 의견이라니! 그딴건 내 삶에 전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어! 알아? 내 말이 무슨말인지 지금 알기나 해?! 모든 것이 조종당하고 또 조종당하는 인간의 마음을 그 어두운 곳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네가 알기나 하냐구!
[알아. 알고 있어. 난 네 마음속에 있잖아.]
그래. 그럴지도 몰라. 내가 생각하고 있는게 너의 정체가 맞다면 너는 알겠지. 하지만 알뿐, 이해하지는 못해! 분명해! …아냐… 이젠 다 포기야. 너따위, 너 따위가 거는 말도 너따위 녀석이 내 속에 있는 것도 이젠 상관 없어.
[내 정체를 알아? 그러고서도 상관이 없어?]
없어. 이미 난 잃었어. 우정은 깨지고 사랑은 등돌리고 세상은 무시해. 제길, 이 딴 삶, 어떻게 되어가든 내가 상관이나 할 것 같아? 웃기지도 않는군. 유머였다면 빵점이야. 유머의 첫째 조건은 그 어떤 누가 뭐라고 해도 웃기기라고. 그런데 웃기기는커녕……
허탈하기만 하잖아.
[왜그래? 아직 그가 남았잖아. 높고 빛나고 찬란하고 냉혹하고 자애로우신 절대자께 간구해.]
절대자? 그 고귀하다 못해 썩어빠진 신말인가? 꺼져버려! 엿이나 먹으라지!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군. 하지만 웃기지 마. 절대자에게 간구를? 지금 이런 일을 내게 던져준 그 망할 자식이 누군데! 이딴 운명을 예비한 저주받을 자가 과연 누구인데! 넌 알기나 해? 절대자, 창조자란 이름으로 인간의 운명을 가지고 노는 그 이름을 알기나 하는거야? 빌어먹…제기랄!
[그래?]
그래! 알겠지? 난 전부에게 버림받았고 모두에게 버림받았어! 내게는 없다고! 우정도! 사랑도! 사회도! 세상도! 그 잘나빠진 신조차도! 알고 있어? 정말 알고나 있는거야! 네가 정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래, 맞어. 다 알고 있어. 불상한 녀석. 버림받은 녀석. 어때? 나랑 약속하나 할까?]
시리디 시린 달빛. 은빛으로 푸른 흉흉한 빛. 회색 잿빛으로 불길하게 피어올라 하늘을 덮고, 아니, 하늘을 인간의 불온한 시선으로부터 감싸고 있는 구름을 뚫어버리고는 네 말이 들려왔어.
약속이라구? 흥! 난 널 알고 있어! 왜? 내 영혼이라고 가지고 싶나? 그 대가로 넌 내 소원을, 내 욕망을 채워주고 말이지? 잡소리 뿐이군. 그건 약속이 아냐! 계약이라구! 계약 몰라? 약속은 깨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약하지만 계약은 맹약. 그 효력은 망자만이 넘나드는 강조차도 뛰어넘지. 안그래? 그건 계약이야. 그것도 세상을 모두 증오할 때 맺을 수 있는 계약.
[아, 그렇구나. 계약이라구? 음. 알았어. 계약이구나. 약속이 아니었네. 헤헤… 응응, 또 그것도 맞어. 모든 걸, 모든 걸 등오해야지 할 수 있는… 아니지아니지, 계약이랬으니까. 맺을 수 있는 거 맞어. 많이 아네?]
흥! 이미 코흘리게 시절에 너에 대한 얘긴 용사들 얘기보다도 더 많이 들으면서 자란 나야! 그정도도 모를꺼 같아?
[자아… 그럼 다 안다니까 편하겠네. 자, 어때? 내가 받을건 너의 수명 뒤에 남을 너의 영혼.]
바람이 다시 세차게 불어온다. 내 육신과 영혼을 날려버릴 것만 같은 충실한 강풍. 난 눈을 감는다. 제기랄. 춥다. 몸이 떨리잖아.
[네가 받을 건--내 힘이 개입되서 할 수 있는--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야. 힘이라구. 다만, 네가 모든걸 증오할 때라서야 맺을 수 있지만 말야. 헤헤헤헤…]
웃지마, 새꺄. 바람이 더 세게 불잖아. 너무 추워서 몸이 다 떨린다구. 추워. 웃지마… 그렇게 재수없게 웃지 말란말얏!
[하하, 자, 좀 물을게. 넌 높고 빛나고 찬란하고 냉혹하며 자비로우신 절대자를, 증오하니?]
너무 긴 호칭. 쓸데 없는 일이야. 이렇게 짧게 대답한다는 게 정말 죄스러워. 미안할 정도야.
증오해.
[넌 널 무시하고 조종하는 세상을 증오하니?]
아직도 세상은 내게 묶은 실을 끊지 않았어. 난 인형이 아니고, 난 노예가 아니고, 난 죄인이 아냐.
증오해.
[넌 너에게서 등돌린 사랑을 증오하니? 넌 널 배신한 우정을 증오하니?]
아니! 그들의 잘못이 아냐. 절대자의 잘못일 뿐. 난 그들을 절대 증오치 않아!! 무슨 죄가 있다고? 다만 신의 농간에 놀아난 것 뿐인데?
[넌 네게서 등돌린 사랑을 증오하니? 넌 널 배신한 우정을 증오하니?]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잖아! 젠장! 내가 그럴 것 같아? 내가 신의 잘못마저 남에게 떠넘기는 맹추나 멍청이 같아 보이는거야? 그런 거냐구웃!!
바람이 멎어간다…… 어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