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함기석
그림자가 계속 뒤를 따라온다
내가 일생을 똑바로 걸어가서
배고픈 무덤에 잘 들어가는지
검안하라고 빛이 보낸 검시관
----{애지 }, 2023 년 겨울호에서
비의 뒷모습
한현수
밀양에 갔어요 비 오는 날이었어요 비구름에 도시의 둘레가 지워지고 있었어요 호텔 유리창으로 좁혀진 도시의 안쪽 풍경이 들어왔어요 우린 비긋길 기다렸다가 모감주나무가 서있는 강변을 걸었어요 밀양강은 아리랑 선율처럼 흐르고 쉼표 같은 해바라기가 강물에 빗물을 떨구고 있었어요 우린 시장에서 토렴한 아리랑 국밥을 먹고 도시 바깥으로 마실갔어요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라 아직 도시로 배달되지 않은 꽃구름을 만났어요 구름을 묘사하려면 서둘러야만 한다는 쉼보르스카의 말이 떠올랐어요 하늘정원이란 팻말 뒤로 숨어있는 풍경의 깊이를 상상하며 서있었어요 갑자기 머릿결 흩날리는 여자가 바람을 읽고 있는 나무 같았어요 산에서 내려와 얼음계곡이 만들었다는 사과를 먹으며 우린 입에서 사과 깨지는 소리를 주고 받았어요 천문대에서 구름이 걷히길 기다렸어요 마침내 우주망원경으로 불타오르는 태양을 보았어요 흑점은 여자의 뒷목에 박힌 점만큼 예뻤어요 안내자는 새무룩한 날씨에 우리가 운이 있다고 했어요 우린 지구보다도 큰 흑점이 누구의 뒷모습일까 생각했어요
----한현수 시집 {사과꽃이 온다 }에서
부서져 버린
황인찬
어떻게 끝내야 할까 ,
그런 고민 속에서 이 시는 시작된다
문이 열리는 것이 좋을까 , 영영 닫혀 있는 편이 좋을까 , 아니면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없었다는 결말은 어떨까
......그런 생각 속에 있을 때 ,
“우리 이야기 좀 하자”
맞은 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목소리가 들려오면 이야기라는 것이 시작되겠지
어떤 목소리는 이야기와 무관하게 아름답고 , 어떤 현실은 이야기와 무관하게 침혹하고 , 그런데도 이야기를 하자는 사람이 있구나
이야기라는 것은 또 대체 무엇일까
창밖은 어둡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다
창에는 창밖을 내려다보는 내가 반사되고 , 여길 좀 보라는 목소리가 있고 , 또 이제 그만 끝내자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 그런 일이 이어진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어떻게 끝내야 할까 ,
영원한 폭우 속에 갇혀버린 채로 끝난다면 어떨까 , 문을 열고 나가니 전혀 다른 골목에 도착한다면 , 어쩌면 영원히 계속되는 이야기로 이야기를 끝낼 수도 있겠지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다
이렇게 끝내면 정말 끝나버릴 것만 같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이렇게 이 시를 끝내기로 했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네게 말을 건네며
-황인찬 시집『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