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1,1-11; 에페 1,17-23; 마태 28,16-20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오르심을 기념합니다. 여기서 하늘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늘은 '어떤 장소나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양식을 가리킨다'고 교리서는 말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94항) 즉 예수님은 더 이상 2천 년 전처럼 GPS로 포착될 수 있는 어느 한 지점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늘은 우리를 초월하는 영역, 우리보다 앞서 하늘나라로 가신 분들이 계신 영역, 지상과 비교되는 천상을 가리킵니다. 오늘 감사송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로서…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으며… 하늘과 땅의 주님이 되셨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감사송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데요,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떠나셨다 해서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한 몸인 우리 또한 이제 하늘에 속하고 하늘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제대 꽃꽂이가 이 점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 마음도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하늘의 또 다른 의미에 대해 나누어 보겠습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계신 곳이 하늘입니다... 그럼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여러 군데에서 하느님을 찾다가 마지막에는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완덕의 길, 28장)
데레사 성녀께서는 450년 전에 이 놀라운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우리가 하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오늘 독서와 복음의 신비스런 의미가 더 깊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1독서에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시고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셨는데 어찌하여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또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왜 "교회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예수님 승천 후에 사도들은 어째서 ‘예수님 보고 싶다’, ‘예수님 그립다’는 말을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자신들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것은 성령의 은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은 하늘입니다.
스위스 신학자셨던 모리스 젱델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승천 이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통해서만 눈에 보일 수 있게 되셨습니다. 육화가 우리를 통해서 연장된다는 것은 가장 놀랍고 멋있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의 모든 신비입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는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입니다. … 그들이 유일하게 여러분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입니다. … 바로 그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며, 그것이 우리 손 안에 주님을 맡기시는 무한히 관대한 부르심입니다.”(모리스 젱델, 나날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 168-169)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가두 선교를 하고 계신데요, 은구비 공원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선교하고 있는 우리 단원들에게서 보고 있습니다. 우리 이웃들은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성모님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셨다면, 이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통해 세상에 당신 모습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엄청난 부르심이라고 모리스 젱델 신부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하늘의 세 번째 의미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늘은 초월적 영역을 의미하고 둘째, 하늘은 우리 자신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셋째, 하늘은 다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듯 다른 사람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하늘이듯, 다른 사람은 우리에게 하늘입니다.
내 가족이 나에게 하늘이고 본당 식구들이 나에게 하늘입니다. 제게는 여러분이 하늘이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우리에게는 하늘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인해 ‘임마누엘’ -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시작하여 오늘 봉독된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복음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에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른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가 사순특강을 하면서 진실한 기도와 입술 봉사 즉 립 써비스를 비교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우리 아버지’를 입술로만 바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부분을 어떻게 바치고 있는지, 되뇌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성전에 계시듯이, 의인들의 마음에 계시다는 의미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알아듣는 것은 올바른 이해입니다. 이와 동시에,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부르는 그분께서 자신들 안에 오시기를 열망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794항, ‘그 안에’를 문맥상 ‘자신들 안에’로 바꾸어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