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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창세기 49:1-7 “ 야곱의 예언 “(1)
지난주는 야곱의 유언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야곱의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갈 것인지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열두 아들의 예언은 단지 야곱의 가족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떻게 역사 속에 펼쳐지는가를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차원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중심으로 본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단지 나의 성공출세를 위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의 집 밑에 세 들어 사는 총각이 자기 누나는 교회 나간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와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원하는 이유가 자신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영업 관리직이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성경 교회 이런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관심을 가지는 경우도 있구나 하여 성경을 한 권 주고서 읽어 보라고 하였습니다만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런 관심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보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마지막으로 예언하는 내용을 보면 그 아들들의 평소의 행실을 가지고 장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과율적인 면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모습을 인과율적으로만 보기 보다는 하나님이 이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통하여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나쁜 짓을 하여 벌을 받고 요셉은 착한 일을 하여 복을 받았다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되어 버리면 성경에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너무 좁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을 상주시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악인이 오히려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다루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너무 권선징악적 차원에서 성경을 보면 의인의 고난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지난주 수요일 이사야 53장에서 고난 받는 메시야의 예언을 보았을 때 왜 그가 고난을 받는다고 사람들이 생각한 것입니까? 그 고난 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죄인을 위한 대속적 고난인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자면 노아의 세 아들 중 저주를 받은 자와 축복을 받은 자가 나누어지는데 저주를 받은 자는 함이고 축복을 받은 자는 셈과 야벳입니다. 그 이유는 아비의 허물을 가리워 주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과율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알리시는 계시를 보는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적용을 하자면 남의 허물을 잘 가리워주자 라고 적용을 하는 것은 너무 좁은 적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외에도 얼마든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구원은 허물이 가리움을 받는 것이구나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도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행함대로 갚으신다면,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시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구원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야곱의 예언은 단지 개인의 유언이 아니라 앞으로 이스라엘에 나타날 하나님의 일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된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내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는 것이 목표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는 것, 그리하여 아들을 닮는 것이 신앙의 목표라고 금요 구역공부 때 하셨지요?
그러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가기를 원하면서 보도록 합니다. 창세기 49:1절에 보시면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이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들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미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삭이 야곱을 에서인줄 알고 축복을 하였다가 나중에 에서가 돌아와서 축복을 해달라고 빌어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을 통한 이 아들들의 장래란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것이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하여 축복하고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르우벤의 내용입니다. 장자로서 굉장한 능력을 가진 자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능력과 영예와 권능이 탁월하였지만 그러나 그 아비의 침상에 올라간 것으로 인하여 탁월치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르우벤이 자기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한 사건을 두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장자로서 그 능력이 뛰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못 사용하여 오히려 장자권이 요셉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5-7절입니다. 시므온과 레위입니다. 이들의 모의에 참예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들은 세겜에서 자기의 누이동생 디나가 강간을 당한 사건에 대하여 지나친 복수를 하였습니다. 세겜의 추장의 아들이 그냥 장난삼아 한 것이 아니라 정말 연애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그러니 어떤 대가를 요구하더라도 다 응할 테니 결혼을 허락하려 달라고 하였을 때 할례를 받으라고 해 놓고서는 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가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 사건에서는 기록이 되지 않았는데 오늘 말씀에서 보면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냥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라 소들까지 그 힘줄을 끊어버리는 분노와 혈기가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와 혈기는 자신들의 자존심에 관한 분노와 혈기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분노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저주를 받아서 이스라엘 가운데 흩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의 역사를 보면 시므온은 유다 지파 중에 부속되거나 북쪽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민수기에서도 가장 적은 족속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예언대로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도 시므온과 함께 흩어지리라고 하였는데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의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시므온과는 달리 레위 지파는 제사장으로서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다같이 흩어지리라고 하였는데 레위지파는 제사장의 직분으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까? 출애굽기 32:25-29절입니다. “봉독” 금송아지 사건 때 이들을 진멸할 자를 모세가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금송아지를 섬기는 진 이문에서 저문까지의 사람을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레위 지파가 칼을 차고 나가서 그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도륙하였는데 삼천 명 가량이나 죽었습니다. 이것을 모세가 보고서 오늘날 너희가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2여전도회 헌신예배때 이 말씀을 정목사님이 하셨지요? 헌신은 하나님에 대한 질투입니다.
비느하스가 음행하는 이스라엘의 남자 시므리와 미디안 여인 고스비를 창으로 찔러 죽인 것을 여호와의 질투로 질투하여 백성이 진멸되지 않았다고 비느하스를 축복하면서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허락합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가 세겜에서 자신들의 자존심에 대한 지나친 분노와 혈기가 흩어짐의 저주를 받았지만 그러나 금송아지 사건에서 여호와께 헌신하여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의 저주와 모세의 축복이 함께 성취되는 것이 레위 지파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일에 있어서는 얼마나 무덤덤합니까? 교회와 성도가 주님의 이름 때문에 욕을 얻어먹는 것이라면 성도의 고난으로 복일 수 있지만, 그러나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성도 아닌 행동으로 욕을 얻어먹으면 누구에게 욕이 돌아가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무리입니다. 땅의 것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의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에 대하여 전혀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신문에 오르내리는 교회의 소식들이 대형교회의 부자 세습문제를 다루고 이것을 반대한다는 시민단체의 항의가 따르고, 대형 교회의 재산이 자신의 아들의 회사로 수백억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싣고 있는 잡지들을 그 교회가 많이 사들여야 다른 곳으로 덜 팔린다고 생각하였는지 그 잡지를 무더기로 사들이기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잡지는 좋게 기사화 하지 않을까요? 이렇던 저렇던 간에 오늘날에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요즈음 기름값이 올랐다고 하니 러브호텔의 네온사인과 교회의 십자가의 네온사인을 끄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납니까? 이제는 분노가 아니라 그저 체념입니까?
그런데 만약에 자신의 명예에,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가 갔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만히 있겠습니까? 시므온과 레위처럼 끓어오르는 분노와 혈기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겠습니까? 직접 죽이지는 못하여도 이를 갈면서 미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살인입니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받고 있는 일에 참으로 분노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가리워지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분노가 일어납니까? 교회가 주님의 피흘리신 공로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인위적인 경영방법이 동원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프로그램에 분노가 일어나십니까?
오늘 새벽에 여호수아 22장에서 어떤 사건이 있습니까?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는 두지 파 반이 커다란 돌단을 쌓습니다. 요단 서편의 아홉 지파 반이 이 소식을 듣고 현장을 보러옵니다. 만약 이방신을 섬기는 단이라면 이들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단을 쌓은 것은 우리가 이스라엘중의 기업이 있음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적용이 된다면 교회 오지마라는 것이 가장 큰 걱정과 염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 이제 교회 오지 말라는 것이 가장 큰 치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지파 반이 단을 쌓으면서 ‘우리도 이스라엘입니다’ 하는 증거를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서 나가라 그러면 ‘안됩니다. 살려 주세요’ 그럼니까? 여기 없으면 교회 없나? 차 보내라 그러면 가줄께, 이런 건방진 일들이 무엇 때문에 나온 것입니까? 교회 나와서도 조금만 기분 나쁘면 여기 아니면 교회 없나 그러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따르는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자존심을 채워주는가 아닌가가 되어 버린 이런 현실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모두 자기 자신에게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시므온과 레위를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동시에 우리가 바로 시므온과 레위처럼 자기의 이름에 목숨을 걸고 있음을 지적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저주가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저주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 것은 레위지파의 헌신이었습니다. 이들의 헌신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진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비느하스사건 때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민수기 25:1-13절입니다. “봉독”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 음행한 자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누가 나섭니까? 레위지파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질투를 대신하였기에 그 진노를 돌이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때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 것이 바로 비느하스의 질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의 제사장의 직분이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범죄를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이것을 레위지파가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하여야 피하여 지는지를 그들의 지파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 지파가 금송아지 사건에서 헌신하여 형제들을 죽인 사건과 비느하스가 그 음행하는 자를 죽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 것입니다.
구약에서 레위 지파의 역할이란 하나님의 진노를 제사를 통하여 돌이키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신이 빠져버리면 제사란 또다시 우상숭배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어려운 부분이 대두됩니다. 그러면 레위 지파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나와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레위지파의 제사장이 영원하지 못한 것을 히브리서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봅니다. 히브리서 7:1-10절을 봅니다. “봉독” 레위 지파가 아직 나기도 전에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을 때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보다 멜기세덱이 높은 자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 지파의 후손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짐승의 피도 아니요, 죽어버리면 대제사장이 바뀌는 그런 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히브리서 8장, 9장, 10장에 계속 이어집니다. 이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보시면 어떻게 행하시는 것입니까? 질투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그 질투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다른 사람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받으심으로 자기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이란 야곱의 이 유언 속에서 단지 레위지파가 자신의 분노와 혈기가 넘쳐서 흩어짐을 저주로 받는 것만 야곱의 유언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레위지파의 모습을 보면 야곱의 이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모세의 예언대로 - 물론 이러한 예언이 모세 자신의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예언입니다 -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들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는 계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일에 분노하시면 어떤 일에 그 분노를 돌이키시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가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명예와 자기의 자존심에 대하여 질투를 하고 있기에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에서 헌신자가 나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자기의 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라면 나의 이름에 대하여 자존심 상하는 일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는 것이 죄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유언을 읽으면서 우리가 받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봅니다.
66. 창세기 49:8-28 “ 야곱의 예언 “(2)
지난주에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의 예언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명예에 대한 분노와 혈기로 인하여 저주를 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함으로 그 저주가 오히려 축복이 됨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축복과 저주란 어떻게 보면 됩니까? 자기의 이름에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 자기의 이름에 모든 가치를 두는 것, 이것이 저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축복이란 무엇입니까? 나의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에 기뻐하는 자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만물의 찌기같이 여김을 받아도 그리스도가 증거됨을 인하여 항상 기뻐한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 받을 우리 인생에 주어진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복을 받은 자의 당연한 자세가 아닙니까?
제가 은혜만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행함을 강조하지 않는가 하는 분이 계십니다만 그러나 어떤 집사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하면서 전부 다를 바치라는 것이고, 주일성수 아니라 하면서 모든 날을 주일로 지키라는 것이라고 합디다. 그러니 주일성수 십일조 하라는 것 보다 더 무섭다는 말을 합디다. 그러니 제가 행함을 강조 안한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큰지를 우리의 어줍잖은 열심으로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은혜를 제대로 알아 가면,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주신 분이 감동하심으로 정말 자원하는 심령으로 기쁨과 감사로 자신의 목숨까지를 바쳐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그렇다 할지라도 그저 종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하는 것이 은혜받은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줍쟎은 행함으로 감히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을 통하여서도 주님의 복음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이 왜 복음인지를 먼저 보고서 오늘 말씀을 봅니다.
갈라디아서 3:8-14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이 복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이미 율법과 선지자에 의하여 즉 구약에 의하여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복음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고 또다시 행함으로 돌아가는 것은 갈라디아서 3:10절로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야곱의 예언을 지난주에 보았고 오늘은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예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편의상 유다를 제일 나중으로 돌리고 나머지 아들들부터 보고자 합니다.
13절입니다. 스불론인데 그 지경이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대는 해변에서 시돈까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갈릴리와 지중해 사이의 땅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파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나눌 때 제비뽑아 나눕니다. 그런데 스불론이 야곱이 말한 경계를 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다 더 가까이 아셀지파가 위치하지만 스불론도 그 지경에 이르러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성경이 오랜 세월 여러 사람에 의하여 예언되고 기록된 것이 통일된 중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의 통일성이라고 합니다. 14-15절입니다. 잇사갈인데 그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들이 차지한 땅이 역시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어깨로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긴다는 것은 그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는 것도 되고 또 그들의 생필품을 구하기 위하여 그 자유를 매매하는 것으로도 봅니다.
16-18절입니다. 단인데 두 가지입니다. 그 백성을 심한하리라 하여 단 지파에서 삼손이 나온 것을 말하고 하나는 단은 뱀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말굽을 물어 그 타자를 떨어지게 하는도다 라는 것을 단 지파의 폭력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사기 18장에 단지파의 내용이 나오고 미가 집안의 우상과 레위 소년을 탈취하여 가서 자기들의 우상과 제사장을 삼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 단 지파에는 이 신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또 교부들 중에는 이 단 지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7장에서 이스라엘 지파의 명단에 단 지파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는 아직 명확하게 드러난 주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 중에서 특이한 것은 18절입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는 내용입니다. 단 지파와 같은 악당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달라는 그런 내용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메시야에 대한 간구로 봅니다.
19절입니다. 갓지파인데 군대의 반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라는 내용처럼 다윗시대에 용기를 발한 적이 있습니다(대상12:8-15). 20절입니다. 아셀지파인데 기름진 땅이라고 합니다. 이 예언처럼 솔로몬시대 때 이 땅의 곡식으로 히람왕에게 양식을 공급하였습니다. 21절입니다. 납달리지파인데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식을 발한다고 하는 것은 전쟁의 승리를 말하는 것으로 납달리 지파가 가나안왕 야빈을 이긴 것입니다(삿 4-5장)
22-26절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희생과 형제를 섬김과 야곱을 봉양함으로 장자의 지위를 얻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형제들 보다 두 몫의 기업을 받아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가 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의 정확한 번역은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목자의 계신 곳에서부터’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왕성함과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축복을 누구의 이름으로 하는가를 25절과 26절에서 보면 네 아비의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언약의 하나님을 말할 때 언제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우시는데 지금 야곱은 오히려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네 아비의 축복이 네 부여조의 축복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잘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야곱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항한 자입니까?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싸운 야곱입니다. 그러한 야곱을 하나님이 얼마나 열심히 언약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으면 이렇게 표현하겠습니까? 야곱이 고집을 부릴수록 고난은 심하였습니다. 그러한 고집과 고난 속에서 아브라함보다 이삭보다 더 많이 하나님께 매를 맞으며 연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곱이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보면서 누구에게서 힘을 얻습니까? 야곱입니다. 아브라함도 높아 보이고 이삭도 순종의 사람으로 보이지만 야곱 정도는 우리도 상대할만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열심히 더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자신의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야곱의 이런 고백처럼 할 수 있습니까?
27절입니다. 베냐민지파입니다. 물어뜯는 이리처럼 호전적인 지파입니다. 베냐민지파의 이러한 모습이 사사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파들에 대한 야곱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예언되고 성취되어 지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예언에 야곱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임을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죽으나 언약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이 언약대로 온 세상이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에 들어가고, 사사시대, 왕정시대, 포로시대, 포로귀환을 하면서 그 역사의 초점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유다지파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예언의 성취가 어떻게 유다지파로 연결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미 살펴본 대로 유다가 베냐민의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담보하겠다고 나선 사건을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담아내는 것이 바로 유다가 메시야의 모형론적인 역할입니다. 형제를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파에 대하여 어떤 예언이 주어지고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8-12절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이 찬송의 뜻입니다. 그러니 이 이름을 언약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며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서 절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요셉이 어릴 때 꾼 꿈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형제들이 그 앞에 절하는 꿈을 꾸었지요? 결국에는 요셉에게 형제들이 절을 하였지만 그러나 그 일이 있기까지는 요셉이 얼마나 많은 고난과 희생을 당하는지를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러면 요셉에게서 메시야가 나와야 하지 않는가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요셉은 그의 역할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유다에게서 형제들이 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의 희생을 보이시면서 형제들이 절하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다가 자신을 담보로 베냐민을 살리고자한 그 모습이 메시야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누가 애매히 고난을 받는가를 유심히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지파에서 사자가 나오고 홀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로가 오시기까지 그 홀이 미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홀이란 왕위를 말합니다. 왕의 지팡이인데 이 홀이 실로가 오기까지라고 합니다. 이 실로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 메시야로 봅니다. 그러니 메시야가 올 때까지 홀이 유다지파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21:26-27절을 봅니다. “봉독” 유다 지파도 결국 왕이 끊어집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입니까?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무엇을 준다는 것입니까?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기라고 하였으니 왕의 면류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 지파로 오시지만 육으로는 유다 지파요 영으로는 유다 지파와 단절된 하늘로부터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요셉도 아니요 레위 지파도 아니요 왕도 아니요 제사장도 아니요 이스라엘 국가도 아니요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실로가 오시기 까지 유다가 홀을 이어가기는 하지만 그 홀을 그대로 이어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완전한 왕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왕입니까? 9절에 보시면 사자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 수사자, 암사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자란 짐승의 왕입니다. 라이온 킹입니다. 이러한 사자 즉 왕으로서의 유다의 모습을 두 곳에서 보고자 합니다. 민수기 24:9,17. 발락왕이 발람 선지자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하지만 저주가 통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축복이 나오는데 그 축복의 내용 중에 9절에서 이스라엘을 사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홀과 별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사자가 되고 홀과 별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때의 일이 아니고 가까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래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60편 7절에서 유다는 나의 홀이라고 합니다. 유다 지파에서 홀이라는 것은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시편이니 자신의 왕됨이란 바로 하나님이 언약을 따라 주신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특히 사무엘하 7장에 나단의 신탁에 의하면 하나님이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서에서 본 것처럼 다윗의 왕위가 끊어집니다. 그러나 누가 오시기까지입니까? 마땅한 자가 오시기까지입니다. 그리하여 오신 영원하신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왕이 사자로서 오시는데 어떤 사자인지 계시록을 봅니다. 계시록 5:1-10절을 봅니다. “봉독” 요한이 웁니다. 왜 웁니까?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인봉된 책이 있는데 이것을 하늘위에나 땅위에나 능히 펴거나 읽을 자가 없어서 웁니다. 그런데 장로중의 하나가 울지 말라고 하면서 유대지파의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자란 메신저가 아니라 라이온입니다. 창세기 49:9절의 라이온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가지나 열매가 아니라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윗의 뿌리로부터 나온 하나의 열매입니다. 그러니 다윗이나 아브라함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윗이 자신을 주라고 하였고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사자 즉 왕인데 어떤 왕입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6절입니다.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입니다. 왕으로 오신 분이 어떤 모습입니까? 일찍 죽임당하신, 희생하신 어린 양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그 책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책이란 열려질 때 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이 쏟아지면서 온세상에 심판을 행하시는 심판주가 다윗의 뿌리가 되시며, 유다지파의 사자로 오시되 어떤 모습으로 오십니까?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임 당하신 어린양 그분을 왕으로,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예수 믿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제 모든 하나님의 인봉된 계시를 손수 집행하시는 분이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 양임을 잊지 마시고 우리의 마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늘 향하시기를 바랍니다.
67. 창세기 49:8-12 “ 유다 “
강아지는 짖어도 열차는 달린다는 말이 있지요? 경부선 열차가 달리는데 옆에서 강아지가 아무리 짖어 된다고 하여도 열차는 아무런 상관없이 달리는 것입니다. 요즈음 도울의 강의로 인하여 기독교계가 KBS에 항의를 하고 여러 사람이 설교중에 그의 잘못을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강아지는 짖어도 열차는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믿는 것입니다. 누가 믿으라고 하여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사이기에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절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누가 이 말씀을 믿습니까? 누가 변호한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가 이 말씀을 비판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말씀도 아닌 것입니다. 수천 년을 성경을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문서비평이 일어났을 때는 성경이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역사비평 문서비평을 통하여 성경을 해체시킨다고 하여도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제갈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1:1절의 말씀을 믿을진데 믿기지 않는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몇 구절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11: 36절입니다. “봉독” 에베소서 1:10절입니다. “봉독” 베드로후서 3:10-13절입니다. “봉독”
요한계시록 21:1-2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우리가 믿던 믿지 않던 상관없이 이 말씀대로 되어질 뿐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취하여 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운동력이 있는 것이며, 비가 와서 땅을 적시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내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 입에서 나온 말씀은 헛되이 돌아가지 아니하고 말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돌아가는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이 이렇게 되면 내가 어떻게 될까를 두려워하지 마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되는가를 관심을 가지는 것이 성도의 당연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이러한 관심이 본능적으로 싫은지를 우리가 말씀을 배워 가면 갈수록 더욱 절감을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앙클리닉을 공부하면서 배운 것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우리가 평소에 생각한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가 많았는가를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오늘은 야곱의 예언이 단지 한 늙은이의 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유언중에서 유다의 부분을 확인하고자 그리하여 세상이 어떻게 말씀대로 되어지는 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8:9절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이 태어날 때에 찬송이라는 뜻으로 지어졌습니다. 유다는 레아의 네 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고 레아에게 사랑을 주지 않자 하나님이 레아를 긍휼이 여기심으로 자녀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총이 없는 레아에게 네 명의 아들까지 주시니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라고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이 이름의 뜻대로 유다가 형제들의 찬송이 되며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서 절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누구에게서 그대로 성취가 됩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이 처음에는 형제들의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이 건방진 놈이 하는 대접을 받습니다만 이미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형제들의 찬송이 되었으며 그리고 다윗시대때에 가장 많은 적을 정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이 왕에게 절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이 예언되고 성취가 되는 것이 요셉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서 그것으로 형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형들이 요셉에게 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유다가 요셉처럼 희생의 뜻을 담고 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베냐민을 대신하여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신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희생당하는 자가 살려내는 방식이 언약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요셉이 그리하였고 다윗도 처음에 희생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당하는 자들을 사람들은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사야 53:3절에 보시면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메시야로 오신 분이 고난 받는 종으로 멸시받는 모습으로 비참한 모습으로 오셨기에 희생자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 것입니다. 마치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한 것처럼 다윗의 형들이 다윗을 건방진 놈으로 본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기름부음 받은 자를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가 예수님을 귀하에 여기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모습으로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만 주님의 백성들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면 세상의 볼만한 것들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아마 우리 중에 대다수가 탈락이 될 것입니다. 빽도 없고 돈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없는 것만 있는 자들이라면 어디에 감히 줄이라도 설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는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미련한 모습으로 감추어져 있기에 찾는 사람이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인기있는 곳으로 만들려고 하니 이것이 교회의 타락을 가져오는 지름길이 됩니다. 그렇게 하든 아니 하든 하나님의 일은 막히는 적이 없습니다만 우리의 시각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9절을 봅니다. 유다는 사자라고 합니다. 사자 새끼, 수사자, 암사자라고 합니다. 10절입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홀이란 왕의 지팡이입니다. 이것이 실로가 오시기까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자라는 것과 홀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봅니다. 민수기 24:9,17절입니다. “봉독” 발락왕이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으나 저주할려고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축복의 말이 나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의 입에서 하나님의 신의 강권적인 역사로 나온 말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사자 같고 홀이 나온다는 내용입니다. 사자와 홀이 이스라엘 전체로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홀이 한 지파에서 나오는 것임을 볼 때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다지파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진을 치고 행진할 때 동편 가운데가 유다 지파입니다. 성막 사면으로 세 지파씩 진을 치고 행진할 때도 그렇게 하는데 유다 지파가 앞장을 섭니다. 그리고 사사기 1장에서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가나안을 치러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로 먼저 올라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60:7절에서 유다는 나의 홀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한 지파를 거론하여 나의 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홀, 왕위가 다윗에게 영원한 왕위로 세워진다는 것이 사무엘하 7장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왕위가 영원하리라 하면서도 바벨론 포로시에 왕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21:26-27절을 봅니다. “봉독” 관을 벗기고 면류관을 제하라고 합니다. 언제까지?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를 때까지랍니다. 이 말씀을 실로가 오시기까지의 예언으로 봅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의 말씀을 메시야 구절의 성취로 보는 것이 이 구절입니다. 사자니 홀이라는 부분은 다른 곳에서도 나오지만 실로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에 여기서의 마땅히 얻을 자가 오시기까지를 실로의 변형된 단어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메시야적인 내용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유다의 왕위가 벗겨지나 그러나 언제까지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제 영원한 왕위를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홀, 왕의 지팡이에 대하여 봅니다. 히브리서 1:8절입니다. 시편 45;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시편 45:6절은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이 말씀의 성취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아들에 관하여는”이라고 추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구약의 성경의 예언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로 보는 것입니다. 아들에 관하여 영영한 보좌와 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영한 보좌와 그 홀을 가지신 분이 바로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자입니다. 요한계시록 5:1-10절을 봅니다. “봉독” 요한이 웁니다. 왜 웁니까?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인봉된 책이 있는데 이것을 하늘위에나 땅위에나 능히 펴거나 읽을 자가 없어서 웁니다. 그런데 장로중의 하나가 울지 말라고 하면서 유대지파의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자란 메신저가 아니라 라이온입니다. 창세기 49:9절의 라이온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가지나 열매가 아니라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윗의 뿌리로부터 나온 하나의 열매입니다. 그러니 다윗이나 아브라함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윗이 자신을 주라고 하였고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사자 즉 왕인데 어떤 왕입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6절입니다.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입니다. 왕으로 오신 분이 어떤 모습입니까? 일찍 죽임당하신 희생하신 어린 양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그 책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책이란 열려질 때 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이 쏟아지면서 온세상에 심판을 행하시는 심판주가 다윗의 뿌리가 되시며, 유다지파의 사자로 오시되 어떤 모습입니까?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임 당하신 어린양 그분을 왕으로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예수 믿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제 모든 하나님의 인봉된 계시를 손수 집행하시는 분이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즉 다윗의 뿌리 사자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앞으로 심판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창세기 49:11-12절을 봅니다. 나귀를 포도나무에 메며 옷을 포도주에 빤다고 합니다. 아니 옷을 포도주에 빨면 어떻게 됩니까? 붉게 물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윗이 가나안 지경을 정복하고 나서 그 땅의 소산물의 풍요로움으로 주석가들이 보고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포도주로 눈이 붉겠고 우유로 이가 희리라고 하는 내용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풍요로와도 그렇지 어떻게 포도주로 옷을 빱니까? 아마 포도를 따서 수확하여 발로 밟아서 즙을 짜니 옷이 붉어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 떨칠 수 없는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유다지파에서 홀이 나오고 사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일찍 죽임 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앞으로 재림하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계시록 14:17-10절을 봅니다. “봉독” 천사가 예리한 낫을 들고서 익은 포도를 거두어서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밟는데 말을 타고 밟았는지 그 틀이 밟히니 피가 말굴레까지 닿았습니다. 포도즙이 아니라 피가 된 것입니다. 계시록 19:11-16절을 봅니다. “봉독” 피뿌린 옷을 입었고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사가 거두어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지면 이 백마타신 분이 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너무 무시무시한 장면 같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심판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심판을 정말 알고 있다면,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노아가 배를 만들고 있는 곳은 산위입니다. 그러나 산 아래에서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기 바쁜 것입니다. 누가 노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 그보다 더 높이 물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신 분을 기억이나 하겠습니까? 노아를 미친놈 보듯이 한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사느니 죽느니 괴롭느니 슬프느니 하는 것들에 초연해지지 않습니까? 사랑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는 일들이 우스운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세로 살면 됩니까?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는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복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입은 대로 은혜와 긍휼이 나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더욱 주님의 도우심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주님은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