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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7
위기가 기회임을 아십니까? / 임현수 목사
위기는 위험과 기회라는 두 단어의 결합입니다. 위기는 위험한 것 만은 아닙니다. 위기를 잘 극복하면 위기는 또 다른 기회 일 수 있습니다. 요즘은 경제적인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경기라는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불경기 때 오히려 잘되는 기업도 있습니다. 예컨데 몇년 전 사스(SARS)가 온 세상을 휩쓸었을 때 사스 덕분에 돈을 많이 번 기업이 있습니다. 항균제품 회사들입니다… 어떤 기업은 많이 번 정도가 아니라 매출액이 300배로 뛰었고 지금도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전세계 병원마다 들어가고 나올 때 마다 손씻어야 하는데 그 수요가 엄청나기 때문 입니다.
성경에 보면 진퇴양난(進退兩難) 절대절명(絶對絶命)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위기를 맞게 된 경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의 군대에 쫓기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섰던 경우도 그렇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사자굴과 풀무물에 던지움을 받던 경우도 그렇고, 이스라엘민족이 한 순간에 멸절 당할 뻔 했던 절대절명의 위기를 겪던 순간에 죽으면 죽으리라고 외치던 에스더의 위기도 그렇고, 암몬 모압 연합군에게 포위를 당해 몰살의 위기를 당했던 히스기야 군대의 위기, 블레셋 용장 골리앗의 위협을 받던 다윗의 위기, 사도들의 죽음의 위기, 살기 등등한 사람들에게 쫓기는 바울의 위기, 선지자들의 위기등…성경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위기의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들 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라는 말도 나온 것 같습니다.
얼른 보면 위기는 단순히 어렵고 힘든 상황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위기 상황이라도 대응하는 태도에 따라서 그 결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어떤 사람은 파도에 휩쓸려 죽는데, 어떤 사람은 파도를 타고 설핑을 즐깁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돌에 걸려 넘어지는데, 어떤 사람은 돌을 딛고 올라섭니다. 그러니까 같은 돌이라도 디딤돌이 될 수도 있고, 거침돌이 될 수도 있다는 말 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위기 상황 가운데 어떤 사람은 절망하고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위기를 잘 극복하고 오히려 발전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중시해야 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좋은 환경 조건보다 좋은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환경 조건이라는 것은 항상 유동적입니다. 이 세상 사람 치고 늘 좋은 환경 조건에서만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시시각각 어려운 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걱정, 근심, 고통과 환난이 닥쳐옵니다. 단지 그 종류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주께서도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의 잔인무도(殘忍無道)한 시험을 앞에 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어려운 상황 가운데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것은 ‘본능적 반응’입니다. 마치 조건 반사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상황이 좋으면 헤헤대다가 상황이 나빠지면 금세 인상을 찡그리는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결코 행복할 수도 없고, 인생을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 단계 올라가서 ‘신앙적 반응’을 보일 수 있어야 됩니다. 이를테면 걱정과 근심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감사하며 극복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적 태도를 갖추기만 한다면 혹시 우리에게 눈앞이 캄캄한 위기가 닥쳐온다 할지라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태도를 갖추지 못한 채 낙심하고 패배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갑자기 생기면 (아이구 이걸 어쩌나) (아이구 죽겠다)하는데 이런 반응은 옆에 있는 사람도 힘들게 하는 소극적인 반응 입니다. 담대하십시오.
다행히 오늘 본문에는 위기 상황 가운데서 신앙적 반응으로 승리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히스기야 입니다.
위기를 극복하여 인생역전을 이룬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위기를 기회로 삼은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끝없어 보이는 위기를 믿음으로 극복한 요셉의 역전의 드라마, 바로와의 대결에서 결국 승리한 모세의 역전의 드라마, 모함에 걸리고 함정에 빠졌던 다니엘의 대역전의 드라마, 이스라엘 민족을 몰살시키려 했던 하만의 음모를 역전 시킨 드라마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 에스더의 등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그들은 위기를 위기로 끝내지 아니하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인생역전을 이루었던 사람들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바꾼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히스기야입니다. 그는 우상을 숭배하던 악한 아하스 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악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놀라운 일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세운 산당들을 제거하고 우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리는 등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계명들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케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야훼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멀지 않아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제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신변을 잘 정리하여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잘 대비하라고 하십니다. 유다의 역대 왕들보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백성을 잘 다스리고 있던 히스기야였지만, 갑자기 예기치 않은 질병에 걸려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히스기야와 같이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서 어려움을 당한다든지, 잘 진행되던 사업이 어느 날 갑자기 부도를 맞는다든지, 잘 다니던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해고통지를 받는다든지, 운전을 잘 하고 가는데 갑자기 뒤따라오던 차에 받혀서 병원신세를 당한다든지 등등, 때때로 예기치 않는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그러한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인생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히스기야를 통해서 세 가지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위기 앞에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죽을병에 걸린 것을 알았을 때, 그의 나이는 39세로 한창 열정적으로 일해야 할 때였습니다. 또 25세에 왕위에 올랐으니까 39세라면 그가 왕위에 오른 지 겨우 14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당시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랍사게 장군과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남 유대마저 삼키려고 예루살렘을 향해 침략해왔습니다. 순식간에 산헤립은 유대의 44개 성읍을 점령한데 이어 애굽과 유대간의 통로인 라기스 요새도 점령하였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앗수르 군대에 완전히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유다왕국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국가적으로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이제 인생을 정리하라. 네가 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히스기야 개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입니다.
성경에는 히스기야가 왜 죽을병에 걸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히스기야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죽을병에 걸린 히스기야가 아무리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억울해한다 할지라도, 그 병은 고쳐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위기를 만났을 때, 아무리 호들갑을 떤다고 해도 그 위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 앞에서 처량하게 눈물 흘린다고 그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는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그 위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40년 전 자전거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을 때 있었던, 한 재미있는 에피소드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골학교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실에서 공부하던 한 아이가 우연히 그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신기한지 넋을 잃고 쳐다 쳐다보았습니다. 선생님이 몇 번이나 부르는데도 듣지 못할 정도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다가가서 꿀밤을 주자, 그제 서야 그 아이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습니다. 선생님은 공부시간에 딴 짓을 한 벌로, 그 아이에게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자전거 타는 흉내를 내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는 책상에 올라가서 계속 자전거 타는 흉내를 냈습니다. 그런데 한참 보니까 그 아이가 페달을 돌리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야단을 쳤습니다.“너, 페달을 돌리지 않고 왜 가만히 있는 거냐?”그 때 그 학생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선생님, 지금 내려가는 중인데요.”
저는 이 말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려갈 때 페달을 돌리면 더 늦어지기 때문입니다. 내려갈 때에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 인생살이가 내리막길로 향할 때, 발버둥을 치다보면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내 힘으로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 꼬일 수 있습니다.
삶의 위기 만나면 애착 가지지 말고 삶의 무게를 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 일행이 유라굴라 광풍을 만났을 때 사는 길은 배의 짐 모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풍랑 주시는 것도 버릴 것 버리라고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배 버리고 예수님 따랐으며 야고보와 요한도 그의 아버지와 배를 버리고 예수님 따랐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긋지긋하게 만듬으로서 애굽생활 버리고 떠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도 위기의 순간 할 일은 버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며 얽매이기 쉬운 죄와 짐 모두 끊어 버리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위기를 만나면 발버둥을 치는 대신,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께서 그 위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위기는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위기를 만났다면, 위기 가운데에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위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원망부터 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그 위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한계에 부딪힌 그 순간은 하나님이 나를 버린 순간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위기를 만난 때는 하나님이 나를 포기한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깨닫게 하시는 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원망하지 마십시오.
둘째로 위기를 만나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네가 죽고 더 이상 살지 못하리라‘는 말을 들은 히스기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다같이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본문 2절의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야훼께 기도하여 가로되라는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그는 자기 병을 고쳐줄 의사를 찾거나,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책회의를 한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가족 앞에서 통곡하지도 않았습니다. 위기를 만난 히스기야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는 기도하는 것이 그가 사는 비결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런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밥(Bob)이라는 사람이 철길을 산책하다가 철로 받침목 주위에 있는 조그마한 구멍에 다리가 끼게 되었습니다. 발을 빼려고 했지만, 빠지지 않았습니다.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발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기차가 오는 것이 보입니다.
‘큰일 났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그를 구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할 수 없다. 기도하자’ 그리고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만약 발을 빼주신다면 그 동안 내가 술을 많이 먹었는데, 이제부터는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발은 빠지지 않습니다.
또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발을 빼주신다면 술을 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욕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도 빠지지 않습니다. 다시 낑낑대다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만약에 발을 빼주신다면 술을 끊고 욕도 안 할 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재산 모두를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습니다.” 이 기도가 끝나자마자, 그렇게 빠지지 않던 그의 발이 쑥 빠졌습니다. 그래서 사고 없이 기차가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안도의 숨을 쉬면서 밥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좌우간 감사합니다. 내 힘으로 빠져나오긴 했지만.”
무슨 말입니까?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음에도 자기 힘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여러분들의 힘으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나을 때가 됐으니까 낫게 된 거지. 무슨 하나님이 고쳐주셨다고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던 영주권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민 변호사 잘 선택했기 때문에 영주권을 받은 거지. 무슨 하나님이 영주권을 주셨다고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날 참 운이 좋았지… 그게 아닙니다.
주위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속으로는 내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든지,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겠다고 찬양은 하지만, 속으로는 내 능력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히스기야는 달랐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요, 히스기야가 그냥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벽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여기 '벽을 향했다'는 것은 세상의 방법이나 수단을 다 포기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믿음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신앙적 결단입니다. 또한 3절 하반절의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라는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그는 그냥 조용히 침묵하며 묵상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눈물로 기도하되 그냥 눈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심히 통곡을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눈물의 기도를 보시고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다같이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야훼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야훼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였다 하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를 보셨고 통곡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그가 죽을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되어 3일 만에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고,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와 간절한 기도에 약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눈물과 기도와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태리의 한 예배당에 대낮부터 한 부인이 들어오더니, 교회 안에 앉아 막 흐느끼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너무 크게 흐느끼면서 울고 있는 그 모습을 그 교회의 감독이 지나가다가 보았습니다. 그 감독은 울고 있는 부인의 어깨를 치면서 “부인, 무슨 일이 있었나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제 아들이 이단에 빠졌습니다. 죄악에 빠졌어요.” 그 감독은 이 어머니의 어깨를 두들기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부인,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와 감독 암브로시우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말씀을 드린 것처럼, 어거스틴은 결혼도 하기 전인 18세에 사생아를 낳는 등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30세 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가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해서, 후세에 ‘성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되 특별히 우리의 눈물의 기도를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통곡하며 드리는 기도소리를 귀담아 들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위기에 처했습니까? 도저히 여러분들의 힘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위기에 빠졌습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잊지 않고 꼭 응답해 주십니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던 마리아 옆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교회를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게 빌더니…. 그 기도가 즉각적으로 응답되는 것을 사도행전 12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하늘이 열리기도 하고, 하늘이 닫히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식 바랍니다. 왕상18:42-44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3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보십시오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었습니다. 엎드렸습니다. 일곱번까지 다시가라고 할 정도로 간절했습니다.
그러므로 위기 앞에서 고민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히스기야처럼 우리의 눈물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 간절히 눈물로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위기를 만나면 거짓정보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위기일수록 거짓정보에 현혹되기 쉽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위기를 벗어나는 사람의 특징은 바른 목소리 듣는 사람입니다. 위기일수록 어디에서 들어야 할 지를 압니다. 하나님 음성만이 위기에서의 답입니다.
위기 만났을 때 성급하게 결론짓지 말고 신약성서 1독 정도 한 후 결정하십시오. 아니면 설교 10편 정도 들은 후 결정하십시오. 어던 사람은 설교 테잎 300개 듣고 믿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 안에 답이 있을 것입니다. 결혼이나 새로운 사업진출 등 인생에서의 정말 중요한 결정 앞두고 충분히 기도하십시오. 가령 특별새벽기도를 통한 충분한 기도후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보셨고 통곡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히스기야가 죽을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되어 3일 만에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고,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시겠고, 더 나아가 앗수르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히스기야가 죽을병으로부터 나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이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한 후 하나님께 간절하게 눈물로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죽을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다고 설교를 합니다. 틀린 설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6절까지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의 병이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뿐입니다. 히스기야가 어떻게 했을 때 그의 죽을병이 나았습니까? 7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7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상처에 놓으니 나으니라.“
이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그리고서 이사야는 무화과를 가져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왕의 시종들이 그것을 으깨 가지고 왕의 종기에 붙이자, 그 상처가 나았다.” 여러분, 어떻게 했더니 히스기야가 죽을병으로부터 나음을 입었습니까? 왕의 시종들이 이사야의 지시대로 무화과를 으깨어 왕의 상처에 붙이자, 왕이 깨끗하게 낫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선지자 이사야의 지시에 순종했더니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을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홍수‘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때,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말없이 순종했습니다. 결국 그와 그의 일곱 식구들은 물속에 빠져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전혀 가망이 보이지 않는 일을 하라고 하시지는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순종하는 자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세계 민족 위에 뛰어난 인물이 되는 축복이 있고,
둘째로 자녀의 축복이 있고,
셋째로 환경적인 축복이 있고,
넷째로 장소를 초월한 축복이 있고,
다섯째로 보호의 축복이 있고,
여섯째로 창고의 축복이 있고,
일곱째로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임하는 축복이 있고,
여덟째로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주시는 축복이 있고,
아홉째로 많은 민족에게 꾸어주는 축복이 있고,
열째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축복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순종은 축복의 문을 열 수 있는 Master Key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종하면 치유의 문이 열리는 줄로 믿습니다. 순종하면 기적의 문이 열리는 줄로 믿습니다. 순종하면 자녀가 잘 되는 줄로 믿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미래가 보장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위기를 만날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처럼 최선을 다해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경험과 상식과 이성과 맞지 않는 말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