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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9-14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인명진 목사
오늘 아침에 교회를 오다보니까 교회 옥상에 빨간 덩굴장미가 담을 넘어서 살포시 해맑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 장미도 아름답지만 여러분도 아름답습니다. 우리 한번 마주보며 인사해 보겠습니다. “당신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한 번 더 해보겠습니다. “당신은 복됩니다. 당신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님에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데 가운데 여러분 안에 희망을 채우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면 저는 이 시대를 결핍의 시대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국민소득 2만불의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외로운 사람들,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평균적으로 40 명이 외로움으로 사랑의 결핍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뢰가 없어지고 용기가 없어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았을 때의 소명감은 점점 사라지고, 함께 삶을 나누는 부부간에도 결혼할 때 함께 나누었던 뜨거운 열정과 사랑하는 마음도 점점 사라지고 없어지고 맙니다. 그동안 믿었던 사람들도 하루아침 등을 돌리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사랑이 고갈된 결핍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결핍의 시대에 어디에서 용기를 얻고 어디에서 희망을 보십니까? 어떻게 믿음을 회복시키십니까? 그런데 이러한 현대인들의 고독과 결핍은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었나 봅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갈멜산 상의 엘리야는 하나님의 역사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를 대결하여서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의 거짓 선지자를 단칼에 베고 승승장구하는 엘리야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19장에서 갈멜산 꼭대기에서 로뎀나무 아래로 추락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 속에서 엘리야가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 불안과 고립과 결핍에서 해방되고 자유함을 얻게 되는 영적 진리를 네 가지 측면에서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영혼의 호흡을 잘 해야 합니다. 숨을 잘 쉬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애쓰고 수고하셨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C S 루이스라는 사람은 현대인을 추적당하는 추적자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인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계속 달려가야 하고 결과물 성과물을 내야 합니다. 목표를 위하여 계속 올라가야 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그렇게 달려가면서 숨을 언제 쉬어보셨습니까? 언제 호흡해보셨습니까? 혹시 날숨만 쉰 것은 아닙니까?
87세가 된 연로한 성악가가 있습니다. 그분은 일 년에 서너 번 발표회를 할 만큼 노래를 잘 하십니다. 그래서 기자들과 후학들이 “어떻게 그렇게 연로한데도 노래를 잘 하십니까? 어떻게 몸 관리를 하십니까?”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딱 세 마디로 정의했다고 합니다. “호흡을 잘 하십시오.” 다시 말해 숨을 잘 쉬라는 것입니다. 숨 쉬는 것 호흡하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내 뱉기만 하면 안 되고 들이쉬는 들숨을 잘 쉬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들이쉬셨습니까? 내뱉기만 하여서 거의 탈진상태에 있는 분은 없습니까?
엘리야 선지자는 이세벨에 속한 850명의 선지자를 한번에 죽였습니다. 당시 엘리야는 의기충천했을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해내었다고 뿌듯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의기소침해지고 소심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숨을 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하는 행동, 자기가 하는 모습 속에서 승승장구하는 결과에 너무 만족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십니까? 여러분의 배우자와 가족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영적인 호흡을 하십니까? 여러분의 본질이 되는 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쉬셨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얼마나 숨을 쉬어 주셨습니까? 목회를 하면서 임종을 앞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분들 중에 기업을 좀 더 성장시켜야 할 텐데, 공장을 더 잘 성장시켜야 할 텐데 하고 말하는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그분들의 공통점은 시간이 있었다면 아내에게 잘해줄 것을,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것을, 아이들과 좀 더 좋은 관계를 맺고 좀 더 좋은 기업으로 만들 것을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고깃덩어리 육체의 호흡이 멈추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육체의 허상이 아니라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숨 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도의 사람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숨을 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9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이세벨이 보낸 사신의 말을 듣고 움직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울타리에 머물고 있던 엘리야가 하나님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엘리야의 모습을 봅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도망치는 엘리야의 모습을 봅니다. 로뎀나무 아래로 내려와 숨는 엘리야의 모습을 봅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가정에서 어떻게 영적인 호흡을 하고 있습니까? 기도하는 시간 호흡하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많이 가져야 합니다. 들이쉬는 숨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온전한 공급의 힘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푸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숨을 쉬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지금까지 허덕허덕 정상을 향하여 달려 가다가 지쳐있는 여러분에게 다가오셔서 “얘야 네가 어찌 하여 여기 있느냐?” 묻고 계십니다.
두 번째는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혹시 여러분 자신은 아니십니까? 하나님을 섬기면서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하지만 여러분이 계획하고 경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저의 삶도 되돌아보면 어느 한 순간 한 순간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 가운데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십니다. 지쳐버린 엘리야를 부드럽게 만져주시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 불평하는 선지자의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만져주심이 엘리야를 소생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회복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어루만져주시고 먹이시며 그의 말씀을 들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지쳐 짜증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셔서 어루만져주시고 먹이시고 우리의 아픈 부분과 어려움과 힘든 부분을 들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지금까지 이끌어오셨던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학창시절 책상에 붙여놓았던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제부터는 당당하게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우선순위 일번에 두시고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삶을 당당하게 떳떳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인생의 주인이 돈이나 권력이나 사람이라고 하면 그것에 따라 삶이 변화되고 비굴하게 됩니다. 동아줄 때문에 성공한 사람은 동아줄 때문에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 많이 보았습니다. 매일 자고 나면 신문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이름이 실립니다. 기독교인이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금융시세 무너지고 권력이 무너지고 정치가 변한다고 해도 설사 내 마음이 변한다고 해도 내 사랑하는 사람이 배신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진정한 용기가 있는 사람은 먼저 와야 할 것을 먼저 놓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선순위가 없이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다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예스하고 노 할 줄 모릅니다. 아니오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말씀 안에서 당당하게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삶에 제일 먼저 와야 할 것을 앞에 놓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교육학자가 초등학생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책상 위에 큰 비커를 놓아두고 거기에 큰돌과 조약돌, 모래를 두고 이 세 가지 물질을 다 집어넣으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모래를 넣고 조약돌을 넣고 큰 돌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다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두세 명의 아이들은 그 비커에 큰 돌을 넣고 조약돌을 넣고 모래를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비커에 딱 맞게 세 가지 물질이 다 들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 가장 먼저 와야 할 것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변하는 것, 항상 왔다갔다 하는 것을 먼저 넣지 마시고 삶속에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먼저 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비겁해져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얘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묻고 계십니다.
세 번째 영적인 진리는 동료의식 공동체 의식입니다.
오늘 본문 19장 14절에 보면 의외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가 오직 나만 남았다고 실망하여 불평하고 있습니다. 고립감 외로움 결핍을 말하지만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바댜 선지자가 엘리야를 도와 줄 사람이 100명이 있다고 했으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이 7000명이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기가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딱 한 가지만 쳐다봅니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택한 모습으로 상황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선택적 추론이라고 합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만 선택하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다가서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제 어느 사설을 보니까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는 ale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미국 교회를 향한, 미국 사회의 현상을 요약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절망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천당으로 가는 끝자락입니다. 한 발자국만 더 가면 천당입니다. 교회는 천당 가기 전에 기다리는 대합실 같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천당가는 티켓을 끊어놓고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갈 날을 기다리는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옆의 앉은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십시오. 그러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새벽 한 시에 기도 부탁하고 싶을 때 아무 거리낌 없이 전화해서 기도부탁하면 들어주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새벽 한 시에 전화 걸면 안 받아줄 것이라는 의심이 들거나 아니면 쓸데없이 전화한다고 화를 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 새벽 한시에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이 서너 명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답답하고 어렵고 힘들어 할 때 전화하면 들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루에 40명 이상이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심정이 엘리야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오직 나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주는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은 ‘자살’이 아니라 ‘살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동료의식 공동체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아픔이 있는 사람 힘들어 하는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어야 합니다.
둘째 말을 잘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잘 들어주지도 못하고 잘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교우들이 어떤 고통이 있는지 어떤 아픔이 있는지 잘 듣고 그 느낌을 잘 받아서 이야기하고 대화해야 합니다.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가 어려운 사람에게 희망의 씨앗을 전해줄 수 있는 생명의 말이 될 수 있습니다. 혹은 여러분의 한 마디가 어려움과 위기 속에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비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의식 동료의식은 잘 듣고 말하기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교회 공동체가 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기러기는 날아갈 때 혼자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V자 편대를 이루어서 날아간다고 합니다. 혼자 날아가면 100 에너지를 써야 하는데 같이 날아가면 상승기류 에어 포켓이 생겨서 50의 에너지만 사용해도 잘 날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혼자 날아가느라 힘드십니까?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갈릴리공동체 교회가 있습니다.
옆에 앉은 사람이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새벽 한시에 전화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공동체의식을 가지십시오. 잘못 추론하여 엘리야같이 되지 마시고 여러분 옆에 계신 분들과 함께 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덜렁 던져진 존재라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고립된 존재라고 힘들어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얘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마지막 영적인 진리는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지금 로뎀나무 아래에서 호렙산으로 나오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15-16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좌절하고 하나님께 목숨을 빼앗아가라고 의기소침한 엘리야는 이 말씀으로 새로운 힘과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지금 하시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어떤 일이든 그 일에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십시오.
혹시 질질 끌려가는 일이라면 새로운 일을 찾으십시오. 새로운 희망과 비전과 소명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가가서 부르십니다. 여러분에게 다가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일을 향해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를 사랑한 것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한 시간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어찌하여 네가 여기 있느냐 어찌 하여 그곳에 계속 머물려고 하느냐 일어나, 일어나 새로운 일을 향하여 나가라.” 이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