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사회생활을 하면서 거의 40여 년 만에 만나는 '여름 放學(방학)'이다. 도반(道伴)들이 休暇(휴가)가 아닌 放學이라는 이름을 붙여 두 주 동안 쉬기로 했다. 문득 왜 학교에서 여름과 겨울에 쉬는 기간을 ‘배움을 놓아버리다, 학문을 벗어나다’는 뜻의 ‘放學’이라고 했을까에 의문이 들었다.
먼저 ‘放’과 연관된 단어들을 떠올려보았다. ‘放牧(방목)’ ‘釋放(석방)’ ‘解放(해방)’ 등에서 볼 수 있듯이 ‘放’에는 갇혀 있거나 얽매여 있던 곳에 ‘풀려나다, 벗어나다’는 뜻이 있고, ‘放恣(방자)’ '방종(放縱)' '放任(방임)' ‘追放(추방)’ ‘成湯放桀于南巢(성탕걸우남소, 성탕이 걸을 남소로 추방하다 - 『商書』 仲虺之誥편)’ ‘大放王命(대방왕명, 크게 왕명을 버리다 - 『周書』 康誥편)’ ‘放於利(방어리, 이끗을 좇다 - 『論語』 里仁편)’ ‘放辟(방벽, 방탕하고 아첨함 - 『孟子』 滕文公上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멋대로 하다, 쫓아내다, 버리다, 좇다’ 등의 뜻이 있다. ‘放’의 글자를 보면, ‘方(네모, 떼배, 향하다, 方正하다)’에 攵(攴, 칠 복)을 더한 글자로, 앞서 예시한 여러 뜻을 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放’의 위와 같은 뜻을 두루 아우르고 있는 내용이 맹자가 말한 ‘放心’이다.
孟子曰仁은 人心也요 義는 人路也니라 舍其路而不由하며 放其心而不知求하나니 哀哉라 人이 有鷄犬이 放則知求之하되 有放心而不知求하나니 學問之道는 無他라 求其放心而已矣니라(인은 사람의 마음이오, 의는 사람의 길이니라. 그 길을 놔두고 따르지 아니하며,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 찾을 줄을 알지 못하나니, 슬프도다! 사람들은 닭과 개가 나가면 찾을 줄을 아는데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을 알지 못하나니, 학문의 길은 다른 데에 없음이라.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을 따름이니라. - 『맹자』 告子上편 제11장)
맹 선생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달아난 마음, 멋대로인 마음’인 ‘放心’을 다잡기 위해 學問의 道가 나왔는데, ‘放學’이라는 말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放心’을 부추기는 말인 듯하다. 현존하는 문헌을 놓고 볼 때 일찍이 순임금 시절부터 학교제도를 둔 황하문명권의 儒學經典에는 ‘放學’이라는 말이 없다. 더욱이 황하문명권에서 배운다는 뜻의 ‘學’은 유학경전을 관통하는 人倫之道의 바탕인 孝弟(효제, 효도와 공경)를 중심으로 仁義禮智인 四德의 실천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배움을 놓아 버리다’는 ‘放學’이란 말이 과연 알맞은 단어일까를 생각해본다.
한자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의 경우 放學이라는 단어보다는 休暇(휴가)의 개념으로, 여름방학은 暑假(서가)와 夏休み, 겨울방학은 寒假(한가)와 冬休み를 주로 쓰고 있다. 계절의 어려움으로 인해 그사이에 잠시 쉰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放學’이라는 말을 썼을까? 아직 고려시대의 문헌을 검토하지는 못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조선왕조실록』에 放學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곳은 태종 16년 3월 9일의 기사이다. “이명덕이 또 아뢰기를, 의식이 족한 뒤에야 예의를 다스리니, 각 군의 향학의 생도들은 식량을 가져오기가 매우 어려우니 잠깐 방학하고, 교수관으로 하여금 수령들과 함께 굶주린 백성들을 살펴서 구휼하도록 하소서(李明德이 又啓衣食足而後에야 治禮義하니 各郡鄕學生徒 齎糧甚難하니 姑且放學하고 令敎授官同守令이 察饑民而賑濟라하니 皆從之라)” 했는데, 식량이 부족해 향교의 학생들이 가져올 식량이 없어 放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세종 25년 6월 17일의 기사에는 “종학(왕실종친으로 8세 이상의 교육기관)에 나아가 배우는 종친 가운데 소학과 사서 가운데 한 가지에만 매달린 자는 나이 만 40이면 방학시키고, 소학과 사서 가운데 두 가지 경서와 소미통감에 통한 자는 연한에 구애없이 방학시키되, 그 방학한 자는 매년 1월마다 한 번씩 회강하는데 세 차례나 불통한 자는 정해진 격례에 의거하여 벌을 주고, 그중 학업을 부지런히 하지 아니하여 소학과 사서 가운데 하나라도 통하지 못한 자는 만 50세가 되면 방학을 시키되 50세 이상의 사람은 회강하지 말도록 하라(赴宗學宗親內通小學四書一繼者 年滿四十則放學하고 通小學四書二經少微通鑑者 不拘年限放學하되 其放學者 每年每一月一度會講하되 三不通者는 依已成格例擬罰하고 其中不勤學業하여 不通小學四書一經者 待滿五十歲放學하되 五十歲以上人은 毋令會講하라)”고 했다. 곧 세종은 나이가 4, 50이 되도록 제대로 된 일도 하지 않고 집안의 재산 덕분에 놀고먹으면서 공부한답시고 宗學에 얼씬거리는 자들을 단속했는데, 이야말로 학문의 효과가 없기 때문에 그야말로 '배움[학문]을 그만 두게 한다' '학교를 그만두게 한다, 학교에서 쫓아낸다' 는 ‘放學’의 뜻이다.
세종 26년(甲子) 8월 24일의 기사에는 “ 올해는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흉년을 구제할 생각을 아니할 수 없나이다. 평양을 제외한 그 나머지 각 고을의 향교는 을축년 가을까지 방학을 하되 그중 취학하기를 원하는 자는 학장으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소서!(今年農事不稔하여 救荒不可不慮니이다 除平壤外其餘各官鄕校는 限乙丑年秋放學하되 其中自願赴學者는 令學長敎訓하소서)”한데서 알 수 있듯이 災難으로 인해 장기간 休校함을 放學이라 했다.
고종 23년(1886년) 8월 1일 기사에는 서양식 교육제도를 받아들여 세운 관립학교인 ‘育英公院(육영공원)’을 설립하고 그 운영 방안을 담은 조선왕조 내무부의 방침이 실려 있는데, 이곳에는 짧은 기간을 뜻하는 ‘放暇[休假]’와 조금 긴 기간을 뜻하는 ‘放學’의 두 단어가 쓰이고 있다. “하나는 東方의 房宿(방수)와 北方의 虛宿(허수)와 西方의 昴宿(묘수)와 南方의 星宿(성수)인 日曜星(일요성)이 해를 만나면, (그 만나는시점이 저물 때나 새벽에 해당되므로) 하루 전 오후부터 당일까지 휴가이고[斷想(단상)②참조], 또 명절(정월 보름 전과 한식, 추석 전후 각 하루)에 휴가를 주고, 또 성절(2/8 황태자 탄신일 千秋慶節, 7/25 高宗황제탄신일인 萬壽聖節, 9/25 明成皇后 탄신일, 12/6 大王大妃 神貞王后 탄신일)을 만나면 휴가를 주어 경삿날임을 보이고, 별도로 서양력의 휴일(곧 양력으로 미국의 기념일인 1/1 새해, 2/22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탄생일, 7/4 독립기념일, 11/20 추수감사절?)에 휴가를 준다. 또 섣달 말(12/25일부터 30일까지)과 무더위(초복부터 말복까지)에 방학한다( 一은 每値房虛昴星日이면 則自前一日下午以至當日에 放暇하고 又於名節(正月望前及寒食, 秋夕前後各一日)에 放暇하고又値聖節(二月八日, 七月二十五日, 九月二十五日, 十二月初六日)에 放暇示慶하고 另依西法暇日 卽西曆一月一日, 二月二十二日, 七月四日, 十一月二十日)에 放休하고 又値臘底(自十二月二十五日, 至三十日)와 及盛暑(自初伏至未伏)에 放學하니라)”고 했다.
이상을 대략 살펴볼 때 아무래도 조선왕조에서부터 지금까지 무심코 쓰고 있는 ‘放學’이란 단어는 맹자가 말한 ‘學問之道’와는 거리가 먼 ‘有放心而不知求’가 아닐까 한다. 放學 중에 일어나는 청소년들의 脫線行爲(탈선행위)들이 이를 傍證(방증)한다. 아무렴 우리 道伴들은 放學이든 放暇든 放休든 ‘求其放心而已矣’의 休暇(휴가)를 보내면서 ‘아름답고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再充電(재충전)의 시간을 즐기리라고 본다.
#방학(放學) #휴가((休暇) #방가(放暇) #방휴(放休) #방심(放心) #재충전 #育英公院 #육영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