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동화
판타지 동화
대신 꿈 꿔 드립니다
박경선
꽃 대문 아래
내가 내년에 좋은 학군을 배정받아야 한다면서 엄마는 촌뜨기 나를 이모 집에 맡겼다. 그래서 올 때마다 두고 먹을 반찬들을 잔뜩 만들어 왔다. 외할머니는 이번에도 이모 눈치를 살피며 아직도 아기 소식이 없냐고 물었다. 엄마가 외할머니 팔을 흔들며 ‘쉿’ 하며 눈치를 주자, 이모가 알아서 자리를 떴다.
“3년이 지났는데, 우리가 태몽을 대신 꾸어줄 수도 없고….”
외할머니의 말은 내가 들어도 이모의 상처를 건드리는 말이다. 2년 전에 배속의 아기를 잃었을 때, 외할머니는 잃어버린 사과 이야기를 했다. 다리 건너편 냇가에 빨간 사과가 둥둥 떠다녀서 건지러 갔더니 벌써 떠내려 가 버렸더라고 했다. 엄마는 튼실한 고구마가 보여서 바구니에 캐 담아 이모한테 집에 갖다 두라고 하다가 꿈이 깨버렸다고 했다. ‘무슨 태몽에 사과가 나오고 고구마가 나오지?’ 나는 그때 3학년이라서 그저 신기하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내년에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매일 밥 해주는 이모한테 신세를 지고 보니 나라도 대신 태몽을 꿔주고 싶었다. 엄마랑 외할머니가 시골로 내려가자, 나는 얼른 네이버 사이트에 들어가 질문을 올렸다. ‘태몽은 누가 꿔줄 수 있나요?’ 엄마들이 올려둔 답이 재미있었다.
‘통통이 엄마입니다. 시어머님하고 형님이 꾸셨데요ㅋ.’
‘똘똘이 맘: 남편이랑 제가 꿨어요.’
‘쮸쮸 보리네: 전 친구가 꿔줬어요.’
‘친구’라는 말에 내가 손뼉을 쳤다. 이모와 나는 20년 차이지만 특별히 친하니까 자격이 충분하다. 아기가 태어나면 우유도 먹여주고, 등도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까르륵까르륵’ 웃도록 딸랑이도 흔들어 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코끝이 싸하게 좋다. 이 사실을 말하려고 이모를 찾았다. 이모는 베란다에서 양쪽에 놓인 부겐베리아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서로 엇걸려 자라서 아치 대문 같다. 저 꽃 대문 아래, 이모의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온다면?
2. 내 친구 랑이!
나는 라떼(치와와 강아지) 산책 당번이다. 이모 집에 얹혀 살면서 내가 자처한 일이다. 오늘도 라떼를 데리고 강변을 따라 산책을 나갔다. 공원에 도착하자 햇살 쏟아지는 벤치에 앉았다. 이때쯤, 저 건너 파란 대문 집 할머니도 벤치에 나와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는데 요즘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니께 드릴 안부 편지를 써서 가져왔다. 공원에서 사귄 랑이(고양이)가 다가왔다. 내가 가져오는 미니 소시지 맛이 좋아서가 아니다. 우리 사이의 끈끈한 우정이 좋아서다.
“안녕? 저 집 할머니, 오늘도 햇볕 쬐러 여기 안 나오셨니?”
“야옹(그래)!”
나는 양이 말을 대충 알아듣지만, 양이는 내 말을 다 알아듣고 대답한다. 그런데 양이가 라떼를 보더니 털을 곤두세우고 콧등을 찡그렸다. ‘처음 보는 사이처럼 왜 그래?’ 살펴보니 오늘 라떼는 파란 대문 집 할머니가 주신 사랑이(강아지) 옷을 입고 나왔다. 사랑이 몸이 커져서 라떼에게 맞겠다며 주신 옷인데 양이는 사랑이에게 꼬리가 밟혔던 기억 때문에 사랑이로 착각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나 보다.
“잘 봐. ‘사랑’이 옷만 빌려 입었어. 라떼잖아,”
양이에게 라떼의 얼굴을 들이밀어 보이자 그제야 양이가 꼬리를 내렸다. 양이가 미니 소시지를 먹는 동안, 나는 할머니께 써온 편지를 펼쳐놓으며 설명했다.
“할머니가 편찮으신가 봐. 사랑이도 안 보이고 해서 위문편지를 써왔어. 너는 발바닥 도장으로 판화를 그려서 저번에 사랑이 꼬리 밟은 것 사과해. 어때?”
양이도 좋다며 한쪽 발바닥을 들어 보였다. 이모 서랍에서 챙겨온 잉크 스탬프 물감을 양이 발바닥에 묻혀서, 내가 쓴 편지 빈 곳에 예쁘게 찍었다. 공룡 발자국처럼 가치가 있으려나? 우리는 편지를 들고 할머니네 우체통으로 갔다. 내 편지를 넘겨받은 양이가 파란 우체통에 머리를 밀어 넣더니 ‘통’하고 떨어뜨렸다. ‘수고했어. 고마워!’ 양이와 헤어져 오며 생각했다, 우리 편지가 할머니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면 좋겠지?
3. 솜뭉치 푸들
‘하루 한 가지씩 좋은 일 하기’ 내가 정한 숙제를 끝내고, 라떼랑 기분 좋게 돌아오는 길이었다. 차도를 건너는 강아지를 보았다. ‘주인도 없이, 위험할 텐데?’ 생각하는 순간에 자동차가 달려와 강아지를 스치고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번호판을 볼 생각도 못 했는데, 강아지는 절뚝거리며 피를 흘렸다. ‘어쩌지?’ 강아지랑 눈이 마주치자,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죽으면 안 돼.’ 나는 우선, 강아지의 목줄을 찾아 잡았다. ‘동물병원에 가야겠어. 잠깐만!’ 떠오르는 얼굴은 이모뿐이었다. 아주 위급한 목소리를 내며 불쌍한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었다.
“저번에도 강아지 데려와서 애를 먹이더니. 또야? 거기가 어디야?”
이모가 식식거리며 달려올 동안 살펴보니 곱슬곱슬하게 말려있던 털이 보였다. ‘솜뭉치야!’ 하고 부르고 싶도록 귀여웠다. 목줄도 있는 걸 보면 주인이 있을 텐데, 왜 혼자 차도를 건넜을까? 혹시 유기견? 이모가 와서 푸들이라며 솜뭉치를 안고 동물병원에 데려갔다, 수의사 선생님은 다리 쪽 사진을 찍고, 나는 손전화기로 푸들의 얼굴을 집중으로 찍었다. 치료를 부탁하고 돌아온 이모는 이번에는 주인 찾아주는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라면서 일터로 가버렸다.
“털이 곱슬곱슬한 푸들 강아지 주인을 찾습니다. 목줄이 달린, 길 잃은 하얀 솜뭉치 강아지예요. 주인님, 빨리 연락 주세요. 010-1004-8899”
이모 등 넘어서 한 공부가 도움이 될 줄이야. 전번에 올렸던 인터넷 사이트의 애견 동호회 카페, 동물보호센터 등을 찾아 들어가 끙끙거리며 사진과 글을 겨우 올렸다. 저번에, 길 잃은 강아지는 그나마 가까운 동네 개라서 사흘 만에 주인을 찾아주었다. 이모가 근무하는 유치원 뒷마당에 메어 두었는데, 먹이 시중, 산책 시중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가끔 유치원 꼬맹이들이 뒷마당으로 들어와서 같이 놀곤 했는데, 그중에 눈썰미 있는 꼬맹이가 강아지 주인을 알고 가르쳐 주어서 쉽게 찾았다. 주인아줌마는 강아지를 데려가면서 강아지 생일날 우리를 초대하겠다는 인사도 하고 갔다. 이번에도 그렇게 주인이 찾아온다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안 되면? 시골집에 내려 보내야 하나? ‘아휴 골치야!’, 어쨌든 이모가 시킨 숙제는 했으니 이모에게 전화했다. 인터넷에 다 올렸고,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달라고, 이번에는 엄마가 나를 이모 집에서 쫓아낼 거라고 걱정하면서.
“쫓아내면 집 나가야지. 별 수 있겠어?”
깜짝 놀랐다. 이모가 나를 이렇게까지 미워할 줄은…. 이모 아기가 태어나면 내가 잘 봐줄 건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흠흠! 나는 눈물을 훔치면서 집을 나왔다. 쫓겨 나가기 전에 내 발로 걸어 나왔다. 솜뭉치도 이런 구박이 싫어서 집을 나와 헤매었을까?
4. 저녁노을 빛
강변도로를 따라 걸었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공기는 슬프게 가라앉고, 저녁노을 빛이 더 슬퍼 보였다. 내 슬픔은 어디서 오는 걸까? 불쌍한 강아지들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이모는 또 솜뭉치의 치료비를 갚기 위해 이번 달 생활비를 줄여야 할 것이다. 헤리 포터는 ‘헤맨다고 모두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고 했지만, 내가 수의사 꿈을 이루고 이모의 은혜를 갚는다고 해도 내 멋대로 헤매 다니며 강아지들을 데려온 일들은 이모에게 죄를 짓는 일이었다. 나는 강변 둑을 내려가 외톨이로 웅크리고 있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보듬어 두 손에 꼬옥 안아주며 속삭였다. ‘서예언! 혼자 잘난 체하려니까 힘들지? 이제, 주위 사람들 형편도 돌아보며 살아라.’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별수 없는 아이였다. 이모네 집으로 돌아와 벨을 눌렀다. 남의 집에 처음 찾아온 손님처럼 어색했다. 문이 열리자, 이모의 눈치를 살폈다.
“어디 갔다 오는 거니. 어서 밥 먹어!”
“이모, 나 때문에 힘들지? 앞으로는 사고 안 칠게. 미안해!”
하면서 이모를 안아주었다. 이모도 말없이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마치 엄마가 나를 토닥여주는 것처럼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이모, 이모 아기 태어나면 내가 잘 토닥여줄 거야.”
“그래? 언제?”
마침, 퇴근해 온 이모부가 현관에 들어서자 나는 얼른 인사를 하고 대답을 피해 쪽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아기가 태어날 그날이 언제일까?’
5 무지개다리 건너 세상
어느 날, 책을 읽다가 무지개가 둥둥 떠다니는 나라로 초대를 받았다. 세상을 떠난 반려동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어 사랑이가 왜 여기서 살지?’ 나는 반가워서 다가가는데 사랑이가 초대했단다.
“그래서 공원에서 안 보였구나. 할머니가 네 옷을 라떼에게 선물했는데….”
“알아, 그때 우리는 여행 떠날 준비 중이었어. 라떼에게 선물한 옷은 라떼가 오래 살 거라고 믿어서 준 거야.”
“그럼, 양이와 내가 쓴 편지도 못 봤겠네.”
“봤어. 여기서는 저쪽 세상 것이 다 보여. 할머니는 네가 할머니 건강을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 했고, 나는 양이 발바닥이 네 개 찍혀 있어서 사과를 받아주기로 했어. 멍멍 하하!”
한참 웃다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럼, 너랑 할머니가 다시 그 공원에 오지 못한다는 말이야?”
“할머니는 임사 체험이라는 걸 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어. 나는 누가 아기 태몽을 꾸면 아기를 원하는 사람의 뱃속에 아기 씨앗으로 들어갈 수 있어.”
“아, 내가 여기 초대되어 온 이유를 알겠어. 우리 이모가 태몽이 없어서 아기를 기다리고 있 거든. 너가 우리 이모 뱃속에 아기 씨앗으로 올래? 우리 이모는 애견가야. 길 잃은 강아지들을 많이 도와줬어.”
“나도 좋지. 그렇게 사랑 많은 이모의 아기가 된다면….”
우리는 서로 얼싸안았다. ‘앗싸! 이것이 내가 이모 대신 꿔주는 태몽일까?
6. 사랑으로
꿈에서 깨자 이모를 찾았다. 이모는 베란다에서 양쪽에 놓인 부겐베리아 화분에 물을 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사랑으로’ 라는 이모의 애창곡이었다.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이모, 오랜만에 그 노랠 다 부르네. 분명 무슨 좋은 일이 있지?”
“쉿!”
이모는 비밀을 지키라는 신호를 하며 내 귀에 속삭였다. 마치 귓속말 놀이를 즐기는 듯 무척 행복해 보였다.
“뭐야. 의사 선생님이 그랬다고. 아기가 생겼단 말이지?”
나도 이내 즐거워졌다. 그리고 ‘으음~ 그럼 내 꿈이 역시….’ 하는 말이 나오고 말았다. 그래서 꿈 이야기를 해버렸다.
“그럼, 예언이가 태몽을 대신 뀠단 말이지? 고마워. 눈물 나도록!”
그때 나는 헤리 포터가 ‘헤맨다고 모두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고 한 말의 뜻을 제대로 알았다. 이모를 괴롭히며 헤매다 보니 이렇게 좋은 결과도 찾아오는 것이었다. 부겐베리아가 아치 대문을 만들고 서 있는 까닭도 알 것 같았다. 그 사이로 미지의 왕자님이 실눈웃음을 살살 흘리며 자박자박 걸어오고 있었다.
2025년 3월 3일 3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