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만이 중보자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만이 제사장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위탁받은 중보 사역자입니다. 작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히 세례를 주고, 귀신을 쫓아내고, 위하여 중보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주님만이 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라는 성경구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 구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라는 말씀과 같은 의도인 것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기독교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얼토당토 않은 논리인 것입니다.
항상, 어휘 해석을 조심해야 합니다.
중보(mediation)는 "~를 위한 어떤 행위"를 말하며, 도고(intercession)는 "~를 위한 간청"을 뜻합니다.
즉, 중보는 기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입니다. 그러나 도고는 간청이나 기도라는 구체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두 단어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도고(intercession)는 중보를 위한 기도(prayer for mediation) 또는 기도를 통한 중보(mediation by prayer)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보는 예수님만이 하는 것이며, 도고는 인간이 하는 것이라고 구분 지으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도고(=중보기도, intercession)는 예수님도, 성령님도 하십니다. 다음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사 53:12) Therefore I will give him a portion among the great, and he will divide the spoils with the strong, because he poured out his life unto death, and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For he bore the sin of many, and made intercession for the transgressors.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도고)하였느니라 하시니라.(여기에서는 도고의 주체가 메시야로 예표된 주의 종 입니다.)
(롬 8:26)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도고)하시느니라. (여기에서는 도고의 주체가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지칭한 단어는 "중보"가 아니라 "중보자"(Mediator)입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처럼 중보자가 될 수는 없지만 "중보의 삶"을 살라고 위탁 받았습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감히 주님의 제자를 삼고, 양육하고, 세례 주고,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냅니다. 이러한 사역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닙니다. 내 속에 계시는 주님의 영-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능력과 권세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the Mediator, 신자= a mediator입니다. 이것은 the Priest 와 a priest, the Shepherd 와 a shepherd, the Son 과 a son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중보기도와 도고를 다르게 보려는 것과 중보기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틀린 개념이라는 주장은 중보기도 운동을 약화시키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입니다.
최근에 튀는 판결로 이목을 받는 판사들을 조심해야 하듯이, 우리는 튀는 주장도 조심해야 합니다.
Midwest University 백성식 목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