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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원문보기 글쓴이: 등대지기
이상적 교회상-2
주님의 교회
- 릭 조이너
지난주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세대의 마지막에는 전에 없었던 시련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시간은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 이들에게 무척 영광스러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 나라에 그 삶의 기초를 둔 사람들은 어떤 고난이 온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고통의 시간은 이 땅에 주님의 나라를 탄생시키는 해산의 고통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탄생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서 말한 예루살렘 위에 있는 것’ 혹은 영적 예루살렘은 바로 교회를 말합니다. 이 세상이 겪게 될 큰 변혁을 통과한 교회는 이 땅에 임하실 주님 나라의 예표로서 다양한 모습으로 생명과 권능의 세대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주님의 주된 관심사는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상주의 혹은 계시
계시를 강력하게 대적하는 것 중에 인간의 이상주의가 있습니다. 교회의 정체성이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해 여러가지 이상적인 생각들이 많이 있지만, 진실된 교회 생활로 가는 길은 희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고 성화되어가는 크리스천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단지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서 자신이나 변화받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예배, 기도, 교육, 설교나 기타 모든 사역이 타인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님 역시 우리를 돕는 보혜사시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사는 사람들 역시 항상 남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 시작은 바로 교회에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심지어 크리스천들도 이시대 교회가 지루하고 경직된 조직이라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언제나처럼 지금도 역시 이 지구상에서 가장 활발하며 생기 있고, 흥미로우며 능력 있는 존재입니다. 주님의 교회 전체를 봤을 때 말입니다. 이 같은 교회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처럼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회 전체를 생각하면, 이 땅에 그 어떤 것도 교회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교회만큼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여러가지 좋은 일을 한 조직도 단체도 없습니다. 물론 크리스천 개인과 마찬가지로 교회 내에 문제도 있고 실수도 있었지만, 역사적인 관점을 가지고 교회 전체를 통찰해보면 교회의 탁월성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훌륭한 교회라고 할지라도 원래의 부르심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부르심을 온전히 이루어 가기 시작한다면, 교회는 분명 가장 경이로운 존재로 사회 전역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정치가나 고위공무원에 당선돼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의 능력으로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내용은 이사야서에 아주 분명하게 나와있습니다.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이사야 60:1~5)
열방이 교회로 나아오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오도록 이끌 무엇인가가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지역 교회에 소속돼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열방을 교회로 이끌 수 있을까요? 세계 곳곳에서 이미 여러 교회들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나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유럽과 북미 대부분의 교회에는 이러한 변화를 이끌만한 커다란 움직임이나 힘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여러분의 지역 교회에서 왜 이러한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지 궁금하십니까? 그 이유는 주님이 바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은 여러분 개인 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주의 백성들이 자기 상처와 좌절에서 일어나 주님 부르신 모습에 합당한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로 결단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중에 온전하게 성숙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다면, 온전하지 못한 교회에도 조금은 관대해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영원히 참으시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시대는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그 몸 된 교회에 들어와 최종 목표를 향해 가도록 하시는 때입니다. 빠른 시간 내에 그 부르신 바에까지 자라지 못한다면, 앞으로 올 고난 중에서는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자신이나 가정이 속할 만한 교회가 없는 곳에 계시다면, 그 지역을 떠나십시오. 주님의 나라를 먼저 구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에 속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삼게 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직업이나 경력, 지리적인 이유 또는 그 어떤 이유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주님의 나라를 먼저 구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더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지 않는다면, 설사 모든 것을 다 가진다고 할지라도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놓치는 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는 머지 않아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모든 개교회와 공동체가 겪게 될 여러 문제와 갈등은 그 구성원들이 진정한 교회로 자라기 위해 필요한 연단과도 같습니다. 한 지역에서 가장 생기있고 활발하며 능력있는 공동체가 교회라고 단언할 수 있는 곳이 지금 상황에서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교회는 분명히 있으며, 또 그 숫자는 점점 증가해서, 여러분이 세계 어디를 가시든 주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지혜롭고 능력있는 증인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진심으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시대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기 원하신다면, 주님의 몸 안에 거해야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지역사회에 적합한 교회가 없다면, 다른 여건이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그곳을 떠나 ‘먼저 그 나라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님 나라 안에서 우리 자리를 먼저 찾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여러 차례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자그만 애벌레에서 시작해 땅을 기기 시작할 것이며, 결국에는 그 부르심에 합당한 아름다운 모습의 나비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성숙해질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면서 그 변화의 과정을 함께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 모습은 변화된 그 교회에 적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 누릴 수 있는 깊은 교제의 기쁨 뿐만 아니라 압력이나 좌절, 실망과 지루함 같은 것도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숙한 크리스찬으로서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주님 나라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간을 겪지 않으면 우리 영적 성장은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지식이나 개인적인 헌신의 정도는 높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교회 생활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역동성을 갖춰야만 우리는 성령의 열매들을 맺기까지 자랄 수 있으며, 영적인 권위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요한복음 15장 1~7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의 몸인 교회를 건너뛰고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 바로 연결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안에 거할 때만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주시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훈련받고 겸손해진 사람들은 자기 욕심대로 잘못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건강한 교회를 떠나서도 주님의 뜻 가운데 거하는 크리스천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임무와 은혜로 홀로 있는 분들은 무척 드문 경우입니다. 제 생각에 이런 이유로 교회에 속하지 않았노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의 99%는 오히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삶에 열매 없는 신앙생활이 그 증거입니다. 위에 내용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열매 맺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잘라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나무를 떠나서는 결코 열매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나무에 붙어있는 모든 가지와 생동감 있는 참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가장 생명력 있고 흥미진진하며, 위엄있고, 능력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모든 크리스찬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자기 자리를 잡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아주 어렵고 고된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차대한 일이 쉽게 빨리빨리 진행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금 곧 주님의 몸에서 여러분의 자리를 찾으십시오.
앞으로 몇주간은 주님의 나라가 어떻게 교회에 임하고 또 역사하실지 살펴볼 것입니다. 한분도 빠지지 않고 이 주제를 나눌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를 겸손히 낮추고 지체의 한 부분으로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크리스천 본연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주님의 몸에 속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공동체로 함께 연합해 다가올 세대를 준비하는 다리를 건설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많은 교회가 더 이상 생동감이 넘치는 생명력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교회가 자신들의 필요와 별 관계가 없다고 성도들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속한다고 해도 별로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는 교회 안에서 실망하거나 상처를 입은 경험 때문에, 다시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잘 맞는 교회가 가까이에 없다고 느끼게 되는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크리스찬들이 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인에게 맞지 않는 곳에 살게 되는 이유는 거주지라는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기 보다는 다른 조건들을 보고 결정 내렸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 살지 결정할 때 최우선 순위를 두고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 나라에 잘 거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고, 이러한 조건은 현대 시대 교회로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외 모든 것을 돌보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지 않을 찌라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그 백성들을 가능한 많이 축복하시겠지만, 우리 삶이 그분의 최선이자 최고인 목표에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먼저 살 지역을 잘 결정하는 것이 성공적인 교회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시도했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기대했던 것과 그 실상이 너무 다르다고 느낍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가지 이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성숙한 크리스찬이 거의 없는 것처럼 이 지구상의 어떤 교회도 이상적인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계속 성숙하고 성장할 것이며, 그 부르심을 향해 발전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동감 있고 건강한 지역교회가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 하나는 비전입니다. 이것은 각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생물학자들은 심지어 성장이 끝나면 그때부터 죽어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크리스찬과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했고, 그분의 사역을 감당치 못하고 있다면, 이 말은 곧 교회공동체가 자라가야 할 영역이 남아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교회나 크리스찬들은 계속해서 성숙해 가기 보다는 현재의 수준에 안주해서 더 이상 성장을 멈추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일에만 전심을 쏟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차지도 덥지도 않아 주님께 책망 받는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은 그런 자를 뱉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시록 3:16절을 보세요)
모든 교회와 조직에서 리더쉽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시작하실 때 먼저 교회의 미래 지도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주님이 하늘나라로 가시지 않고 이곳에서 교회를 직접 다스리셨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예수께서 하늘로 가시고,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우리를 위해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리더쉽은 바로 성령 하나님의 리더쉽입니다. 가장 훌륭한 교회의 지도자는 바로 성령 하나님을 가장 잘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영적 리더쉽이 성숙하기 원한다면, 바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순종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교회사 전체를 볼 때, 교회는 너무 오랫동안 성령 하나님의 리더쉽을 인정해드리지 않았습니다.
겨우 1500년경 이후에나 교회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조금씩 조금씩 회복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 백년 동안 이루어진 것이 그전 400년 동안의 변화보다 더 큽니다. 바로 개혁(Reformation)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개혁(Reformation)을 통해 교회가 다시 형성(re-formation)되었습니다. 이같이 교회 개혁에 가속도가 붙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교회가 성령 세례를 인정하면서부터입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백여 년 전부터 시작된 이 교회 개혁의 진행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까지 자라기 위해서는 지난 오백 년간 이룬 것보다 더 많이 성숙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천 년의 세월이 필요해 보이는 일이라도 주님은 하루에 다 이룰 수 있는 분입니다. 이제 교회 개혁에 남은 모든 일은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산통이 더 심해지고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것처럼, 거대한 교회 개혁의 움직임도 점점 빨라질 것입니다. 무척 흥미진진하겠지만 그 마지막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처리속도가 빨라질수록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따라서 더 고된 일이 부과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리스마틱 교회나 오순절 교회 정도만 교회 개혁의 최첨단에 서있는 듯하고, 그 외 교회들은 마치 정지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부 오래된 교회들은 정말 성장이 멈춰있거나 심지어 교회 발전에 장애물이 되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엄청난 변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정교회와 고교회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또한 많은 카리스마틱 교회와 오순절 교회, 각 교파와 신앙운동들이 그 성장을 멈춘 채 과거의 열매를 따먹는데 만족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A.D.1세기에 가장 효과적으로 사역했던 사도 중 하나인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14절에 위와 같은 태도를 향해 너무나도 분명한 글을 남겼습니다. 그 인생의 마지막에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이 어찌 보면 놀랍기도 합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또는 교제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잘 생각해보세요. 인생의 마지막에 와서, 그것도 교회 역사상 가장 신실했던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한 바울이 지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앞을 향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겠다고 합니다.
바울이 평생에 이룬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앞을 향했다면,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건강하고 성숙한 크리스찬의 신앙생활, 교회, 신앙운동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겸손함과 배우려는 열린 마음, 영적인 갈급함과 같은 자세를 유지하면 우리는 더욱 주님만을 따르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천국에서 주님께 칭찬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구요? 우리가 이 같은 자세를 견지한다면, 우리는 멈추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성장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는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했던 자세, 즉 주님 안에서 계속 성숙해 가기 위해 필요한 크리스찬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가장 능력 있고 신실한 사역자 중 하나였던 바울 스스로가 그 생의 마지막에서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얼마나 더 정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장 큰 은사는 성도들로 하여금 온전히 주님만을 추구하게 하는 ‘주를 향한 갈급함’입니다.
배고픈 사람만이 음식을 먹고, 목마른 사람만이 물을 마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과 믿는 모든 지체들에게 가장 필수적인 기본 기도제목입니다. 그 주림과 목마름으로 우리는 계속 주님을 찾게 됩니다.
소멸하는 불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어떻게 그분을 위한 불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우리를 십자가의 길에서 끌어내려는 이 세상의 유한한 일과 고민에 속아서 거기에 주저앉아버린다면, 우리는 주님의 불로써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새것과 옛것, 잘 갖추어진 것에 대한 우리 태도를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봅시다.
마태복음 13장 52절에서 주님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집에서 새것과 옛것을 함께 내오고 계십니다. 주님의 나라를 있는 그대로 보고 싶다면, 이 두 가지에 대한 비전을 모두 갖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나라에는 새로운 가죽부대가 필요한 새 포도주도 있으며, 동시에 오래 익은 훌륭한 포도주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성대한 잔치에서 이 포도주를 베푸실 것이라고 이사야서 25장 6절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크리스찬을 살펴 보시는 주님의 시각은 교회라는 하나의 큰 그림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각각의 모임들과 같이, 교회 안에는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의 다양성과 개인차는 교회에 매우 필요합니다.
옛것과 새것이 모두 필요하며, 예언자와 교사, 목사와 사도, 전도자적 교회와 그런 움직임 모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불완전한 비전을 가지고 제한된 시선에 갇혀 있으면, 이런 차이들이 서로 갈등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주님의 몸은 지구상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살아있고, 번창하며 창조적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온전한 비전을 갖는 것은 주님의 몸 전체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교회의 일부인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몸과 그에 속한 지체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이해하면서 관계를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몸 전체와 우리 자신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많은 곳에서 두가지(two visions) 비전이 있는 곳에 분열(di-vision)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 일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짧은 소견에 갇혀있다면 주님의 몸으로부터 분리되기는 너무나도 쉽습니다. 무리 속에서 함께 먹고 생활하지 않는 양들이 점점 약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리된 교회나 성도들, 그리고 심지어 교단도 점점 병약해지고 결국 그리스도 몸과의 교제를 상실한 채 죽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9절~30절 말씀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몸을 제대로 분변치 못하면, 자기 죄를 먹고 마시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한’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몸된 교회가 성숙하지 못한 채 약해지고, 질병, 죽음에 이르는 중요 이유입니다. 영적 모임에 참석하면서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는 착각에 빠져, 정작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참된 교제는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제(Communion)란 공동의(Common)의 연합(Union)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주님과, 그리고 그분의 몸 된 교회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에 제대로 속하지 못한 채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 잘 연결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몸을 잘 분변해야 합니다.
과거의 실망이나 상처, 또는 ‘교회는 어때야 한다’는 이상주의와 같은 잘못된 편견으로 색안경을 끼고서 교회를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심각한 문제나 이단에 빠졌던 교회나 신앙운동들은 대개 전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사단은 주님의 어린양을 잡아먹기 위해서 늑대처럼 달려듭니다.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있는 잡기 쉬운 먹이를 공격합니다. 크리스찬이라면 혼자 신앙 생활하는 것보다는, 지겨운 교회일지라도 차라리 그 안에 속해 있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합니다.
영적인 고립주의 성향을 갖고 있는 크리스찬들은 사실상 위험에 처해있으며, 머지 않아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영적 영향력을 끼치려고 합니다. 특별히 젊은 크리스찬들에게 영향을 행사하면서 자기들의 태도에 문제가 없다는 안도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행동은 스스로에게 커다란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교회나 단체에 이 같은 고립주의적 영성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그 성향을 고칠 수 없다면, ‘아마도’ 그 모임을 떠나서 건강한 교제가 살아있는 새로운 교회를 찾아가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마도’ 라고 말한 이유는, 성령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만이 모든 원칙을 뛰어 넘어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여러분을 그런 상황에 더 머물게 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그 모임을 자유케 하실 수도 있으며, 아니면, 최소한 씨앗이라도 뿌려서 다른 이들이 와서 물을 뿌리고 자라도록 할 터전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선한 목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길 잃은 자들도 너무 사랑하십니다.
오히려 그렇게 잘못된 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으시면서 그들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 가운데서 주님께서 일하신다고 해서 그분이 그 사역을 인정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면, 우리 사역에 무언가 열매가 좀 있었고,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해주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주님의 일하심은 그 정반대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삐뚤어져 나간 양을 끌어다가 무리에 들여놓기 위해 애쓰고 계실 수도 있는 것 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행하시는 주님의 일반적인 생활과 활동, 그리고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를 양무리로 이끌기 위해 보이시는 관심을 구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먼저 과연 양무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그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상적인 교회 생활에 대한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특징들이 몇가지 있습니다.
앞으로 몇주간 동안 그 특징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온전한 성도로 모든 일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가 속한 모임과 신앙 운동들이 온전한 교회로 자랄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마태복음 5장 28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이 말씀이 ‘종교의 영(Religious Spirit)’을 유발하는 완벽주의와 이상주의의 뿌리가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혹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올바르게 적용해 온전하신 우리 주님께만 붙어있는다면, 결단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말한 대로, 우리는 이상주의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상주의는 인본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온전한 성도의 삶과 교회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비전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나 교회를 평가해, 그 함량에 미달한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비전을 이용해 우리는 더 주님께 나아가고 바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서로를 독려해야 합니다.
잠언 4장 18절에서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직 제 길에 서있다면, 우리 매일의 삶은 점점 더 밝아질 것이며, 우리는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그 길에 제대로 서있는지는 빛이 밝아지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길은 점점 더 분명해져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리의 행동에 더욱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이 담대함은 교만이나 무례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만이 더욱 필요하다고 고백하는 겸손이 더해갑니다. 이 같은 성숙한 겸손이 위대한 사도바울의 간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도들에 비해 열등하지 않다고 주장하던 바울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뒤에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서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 뒤, 에베소서 3장 8절에서는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서신서 중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고백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함이 자라가는 진정한 영적 성숙을 통해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배움의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지체 안의 다른 이들에게 배울 마음이 항상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된 지체들과의 침목과 교제가 더 풍성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역시 진정한 영적 성장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몸된 교회를 작은 부분이 아닌 전체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지난 몇 주 동안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 생활에 필요한 두가지 요소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새것과 옛것- 즉 전통적인 교회와 이 시대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신앙운동- 모두에 대한 열린 자세입니다. 하나의 교회가 어린이와 청년, 그리고 장년층을 위한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면서, 또 교회 안에서 각 계층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면, 바로 그 교회의 열린 마음을 보여주는 열매일 것입니다.
두번째 필요한 요소로는 개교회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몸 전체와 맺는 건강한 교제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 특징은 교회가 건강한 영적성숙을 지속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번 주에는 교회나 신앙 운동이 정체하지 않고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요구되는 또 다른 특징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세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주님은 다수의 대중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 70인을 훈련시켜서 파송하셨고, 이후에 가장 친밀하게 교제하셨던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삶을 나누셨습니다. 건강한 교회라면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3단계로 세분한 사역을 해야 합니다.
요즈음, 서구의 많은 교회들은 ‘구도자 중심’의 성향이 있습니다. 이 교회의 초점은 초신자나 아직 신앙이 없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런 구도자 중심의 교회들이 양적인 면에서 확실한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동시에 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신앙면에서 미성숙한 성도들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예배의 깊이나 성경적인 제자도 면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도자 교회에 이런 부분이 정말로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교회들은 자기 위치에서 성공적으로 지역 공동체를 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다 깊이 있는 가르침과 사역을 위한 준비, 그리고 보다 영적인 예배를 위해서는 이런 구도자 중심의 교회를 떠나 보다 헌신된 다른 교회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부 옳은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구도자 중심 교회에서도 매우 견고하며 깊이 있고 철저한 제자의 삶을 사시는 분들도 많이 만나보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주님이 우리를 보내신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우리 신앙이 견고하게 자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경우, 깊이 있는 진정한 영적 성숙을 돕기에, 구도자 중심 교회가 약간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구도자 중심교회와 달리, 깊이 있는 영성과 신앙훈련에 집중하고 있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초신자들에게 위협적이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이런 교회에는 가장 헌신되고 깊이 있는 성도들이 모인다고 주장하는데, 단지 외침이 아니라 실제 그런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런 교회를 찾아 가고, 그 속에서 놀라운 경험 통해 얻는 신앙 성숙의 정도는, 단순한 지식전달이나 가르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준을 뛰어 넘습니다.
위에 설명한 두가지 유형이 가장 기본적인 교회 스타일일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반화가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건강한 교회라면, 위의 두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공동체입니다. 두 속성을 모두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정말로 건강한 교회라면 반드시 갖춰야 하는 필수요소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좀더 다루도록 하겠고, 여기서는 교회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은 주님이 머무시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존재 목적 단 한가지에 초점을 맞춘 교회라면, 그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사람들을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일까요? 사람의 의도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만드신 교회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주님께서 직접 지으신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한 온전하신 주님의 사역을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고, 주일날 예배에서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매일의 삶에서 그 심령을 만질 수 있지 않을까요?
진정한 교회생활이라고 하면 주 7일, 하루 24시간을 모두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단지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어떤 형태의 건물에서도 모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어디서 만나는지에 따라 교회를 규정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실제 잠재력을 무참히 격하시켜버리는 일입니다.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사람이 만들어낸 프로그램과는 비교 할 수 없는 광대한 것입니다. 건물이나 프로그램은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정체성을 이런 건물이나 프로그램 안에 제한할 수 없습니다. 만약 교회가 그 형태에 제한된다면, 주님께서 명하신 교회의 능력 있는 삶은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가 되려면, 교회는 성도들의 매일의 삶 속에서 살아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주님께서 거하실 구체적인 장소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막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성막은 이스라엘 캠프 가운데서 항상 볼 수 있고, 다가갈 수 있으며, 또한 이동이 가능한 형태였습니다.
이 성막이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거처는 주님의 임재를 중심에 두고 둘러 있었습니다. 옆의 다른 길에 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우리 삶의 부속품이 아닙니다.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과 같이 주님께서 거하셨던 성경 속의 성소는 세 곳에서 시작합니다. 성막이나 성전은 대중을 위한 야외 마당과 제사장이 주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가는 성소, 그리고 대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 즉 주님이 실재 임재하시는 곳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임재하시는 공간이 청사진 처럼 주어졌기에, 교회가 지속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세단계의 사역을 모두 감당해야 합니다.
구도자 중심의 교회는, 성도들이 그 안에서 성숙한 신앙의 길로 자라가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면, 깊이가 얕고 체질이 허약한 교회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나가는 일에만 전심을 쏟는 헌신된 신앙인들만 모이는 교회가 된다면, 자기 우물 안에 갇혀 교만해지고, 결국 교회에 주님을 모시기보다는 오히려 몰아내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깊은 영성을 가지셨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오히려 영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그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 적은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영혼들을 어둠 속에서 빛으로 인도해내야 할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큰 취약점 중 하나는 교회가 목회자나 설교자 한 명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보다 위대하고 탁월한 리더이자 설교가이셨던 주님께서 사역하셨을 때 조차, 그 제자들이 사역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제자들을 부르셔서 먼저 훈련시키시고, 그 이후에 대중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그분의 제자라면 주님의 방법을 배우고 따를 것입니다. 바로 단지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비시켜서 스스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파송해야 합니다.
이 같은 사역의 모습은 예루살렘의 12사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최초의 리더로 보였지만, 사람들은 12명의 사도를 그 리더쉽으로 인정했고, 12명 모두 실제로 리더쉽에 참여하였습니다. 리더쉽은 곧 12명에서 늘어나 사도와 장로그룹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사도 세웠습니다. 그 집사 중 최소 두 명은 매우 영향력 있는 사역을 했습니다. 심지어 스데반의 사역은 그 시대 사도에 필적할만한 것으로 보입니다. 핍박이 시작되고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졌을 때, 모든 믿는 자들 역시 다른 지역으로 가서 아주 효과적으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교회와 신앙운동의 참된 능력은 우리 눈에 보이는 사역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 개개인의 강건함으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가 무엇인지 주님께 여쭤봤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하나는, 마태복음 24장 19절에 나온 것처럼‘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 사람들을 미성숙하게 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런 교회는 아주 빠른 속도로 무너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이 리더쉽들은 반드시 에베소서 4장의 명령과 같이 성도들을 구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몇 해 전, 주님께서 예언적 환상을 통해,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목자와 사역자을 더 이상 참지 않으시고, 이제 그 위치에서 내리실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신약 시대 사역은 단지 일을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성도들이 각자 일하도록 구비시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직면한 중요한 이슈들 중에서 이제 겨우 몇 가지만을 나누었습니다. 이런 주제들은 반드시 다루어야합니다.
이 지구 상에서 천국을 보이지 않고서 그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부르심입니다.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가장 강력한 교회에서 키워낸 가장 강력한 크리스찬 세대가 이제 나타날 것입니다.
주후 1세기에 등장했던 가장 영향력있는 교회들은 사도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사도들을 탄생시켰으며, 이 세상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선교사적 사도들을 일으켰습니다. 복음을 전하던 성도들이 세운 안디옥 교회가 바로 그 예입니다.
이 작은 교회가 전세계를 위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작은 교회 하나를 들어서 이 세상 가운데 어떻게 놀랍게 역사하실 수 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주로 예루살렘에 머물러있었던 초기 열두사도와는 다르게, 안디옥 교회에서 길러낸 사도들은 최우선 목표를 선교지에 두고 교회 밖으로 나갔습니다.
안디옥의 선교적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열두사도들은 그저 불신자들이 교회로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입니다.
이시대 일하시는 주님의 목적 최일선에 머무르기 원한다면, 이런 패턴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주로 전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사역을 일으키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만약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과 같았다면, 그들은 아마도 안디옥 교회에서 생긴 새로운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교회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대 사도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훨씬 성숙하고 지혜로웠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안디옥에서 발전한 그 방식에 마음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재빨리 받아들이고, 안디옥 교회를 돕기 위해 사역자들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열두사도와 장로들은 안디옥 교회의 사역이 예루살렘 교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사역을 통해 얻어진 또 다른 종류의 열매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안디옥 교회의 새로운 사역을 일으킨 사람들이 바로 예루살렘 사도들이 길러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사역은 어쩌면 즉흥적이고 예루살렘교회가 조정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건강한 영적 성숙을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이와 같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영적 성숙이 바로 초대교회의 가장 강력한 능력을 길러낸 전략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이 능력은 한 교회가 씨앗을 뿌리고, 또 다른 교회가 뒤따르며 물을 주고, 이를 통해 교회안에 연합된 놀라운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벌이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수정시켜서 열매 맺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회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순회 사역자들은 여러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한 교회의 좋은 점들을 배우고 또 다른 교회에 그 장점을 전파합니다.
이런 전략은 1700년대 초기 모라비안 형제들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어서 존 휘슬러나 조지 휫필드 등을 통해 계속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종교개혁 이후 엄청난 영적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
이러한 전략은 20세기 후반 이후 오순절 교회와 카리스마틱 교회가 잘 적용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많은 사역들이 일어났고, 역사상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현대에도 이러한 사도들이 계십니다. 순회사역자 들 중에 얼스킨 홀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1년에 300일 이상을 계속 여행하면서 작은 교회나 가정 모임을 방문하는 얼스킨은 한곳에서 이틀 이상 머무르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에 놀라운 생명력과 비전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는 얼스킨과 여행을 하면서 가까이 관찰할 기회가 몇번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지도자였으며, 동시에 매우 훌륭한 학생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든 항상 배울 점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방문하는 교회에 그 장점을 전수하였습니다. 이분이 노트를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현재 사역하고 있는 교회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진부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는 항상 신선한 만나와 같았으며, 흥미롭고 참신했습니다. 또한 항상 예수님께 포인트를 두고 있었습니다.
얼스킨의 사역에는 아주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마다 그는 항상 훈련받는 제자를 여행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존 햄릭과 같이 그와 동행했던 제자들 역시 방문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존은 아마도 우리 모닝스타 사역 초기에 그 누구보다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MFM리트릿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모닝스타에서 카운셀러와 멘토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일어난 모닝스타의 여러 사역과 선교 사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사도 중에 밥 와이너란 분이 있습니다.
이분 역시 한 곳에서 며칠씩만 머무르면서 새로운 생명과 비전을 주님의 몸된 교회 전체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밥은 마라나타 캠퍼스 사역단체를 세워서, 많은 크리스찬과 리더를 양육하였고, 이들을 통해 여러 신앙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주님께서 마라나타 사역을 흩으시고 밥의 사역을 단순하게 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1년간 안식년을 보냈습니다.
안식년 후에는 매우 강력한 교회나 신앙운동을 직접 일으키거나 혹은 교회들에게 방향을 제시하여 계속 성장하도록 지원하였습니다. 밥의 사역기관은 기본적으로 돕는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처럼 조그만 조직이 그렇게 많은 일들을 감당하는 사례를 본적이 없습니다. 물론 밥에게 넘치는 에너지가 있지만, 이 사역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얼스킨이나 존, 밥과 같은 많은 사도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 꼭 필요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다른 무리와 섞이지 않고 한 무리에서만 교배를 한다면, 그 양떼는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
교회나 신앙운동도 마찬가지로 다른 교회나 신앙운동과 교류하지 않고 그 안에서만 세대를 거듭하다 보면, 점점 약해지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과 소유욕이 강한 리더가 이끄는 조직은 반드시 점점 약화되고 결국에는 사라지거나 조직이 와해될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예입니다.
영적인 이스라엘의 청사진 혹은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에서, 교회, 즉 모든 성도는 1년에 세차례씩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자리를 통해 사람들간에 많은 교류가 일어났습니다. 다른 종족에서 온 모든 사람들이 공통의 국가적인 비전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동일하게 지난 수십년간 다양한 교회가 컨퍼런스 등을 통해 서로 교류해왔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들이 배우고 더 강력해졌으며, 주님의 몸에 대한 전체 비전을 많은 성도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습니다.
가장 건강한 크리스찬을 배출하는 가장 건강한 교회는 항상 개교회나 신앙모임의 비전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강화해 나가면서 동시에 주님의 몸 전체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비전을 갖고 또 발전시켜나갈 것입니다.
여행의 자유와 인터넷을 통한 정보와 생각의 무한한 교류 덕분에, 소유욕이 강하거나 두려움이 쌓인 목사님이나 교회 지도자가 성도들을 자기 울타리 안에 고립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교류가 없는 교회는 점점 말라가게 될 것이고, 반대로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만큼 성숙한 자들은 더욱 자라가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람직한 교회 모습입니다.
이번 주에는 건강한 교회 생활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나누고 싶어하시는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교회가 그 부르심에 따라 이 세상 가운데 강력하게 드러나지 못하면 전혀 열매 없는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교회 비전 없이 왕국비전을 갖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왕국에 대한 비전 없이 교회에 대한 비전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복음의 정수를 놓치고 있는 것임을 기억하세요.
교회의 참된 힘은 목사님이나 설교가의 탁월성이 아니라 성도들의 강건함에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심각한 취약점 중 하나는 바로 성도들이 구비되지 못하였고, 에베소서 4장 말씀에 나온 여러 사역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성취하면 가장 강력한 교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4장 11~16절 말씀은 교회 사역의 참된 목적과 그 결실에 대해 가장 간결하고 정확하게 명시한 구절입니다.
먼저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의 사역이 사람이 아니라 프로그램 세우는데 관심이 분산되기 쉽다는 것은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사역이 초대교회의 그것과 같이 되려면, 사역을 감당할 사람을 먼저 구비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과 같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1. 일치된 신앙
2.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
3. 성숙
4.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름
그 뒤에 아래와 같이 성숙하고 강력한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 더 이상 어리거나 미성숙하지 않고,
2. 풍랑에 휩쓸리지 않으며,
3.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4. 교활한 자들의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며,
6. 범사에 그리스도와 같이 자라가고,
7.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8.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9.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게 됩니다.
온갖 계획과 전략,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일에 우리 자신과 성도들의 온 힘을 쏟아 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교회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주님의 몸을 세워가는 여러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과연 실제적으로 성도들을 구비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먼저, 사람을 구비시키는 것은 전체 과정의 네번째 단계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이 말은 앞에 세 단계는 이미 잘 완성되었다는 것이고, 마지막 한 단계만 완성하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각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Mobilizing 동원
2. Teaching 교육
3. Training 훈련
4. Equipping 구비
5. Deploying 배치
많은 교회들이 아직 1단계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성도 교육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실제 훈련 단계로 넘어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교육과 훈련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만약 항공기조정사 교관이라면, 저는 훈련생들이 실제 비행기를 타고 훈련 받기 전에 강의를 통해 비행 중에 할 일을 충분히 숙지시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사역자로 세우기 전에 충분히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교육 후에는 반드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교회의 진정한 리더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참된 지도자라면 주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교육 후에는 반드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이유입니다.
주님은 가르치신 바를 제자들에게 항상 몸소 보이셨습니다.
교육과 훈련을 마치면 이제 구비시킬 단계입니다. 비행기 조정 훈련생들은 이제 겨우 배운 지식을 제 앞에서 검증한 정도입니다.
모의비행을 통해 실제 비행기 조정 능력을 확인하고 나서야 단독으로 비행기를 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전체 비행 훈련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 정도만 해도 아주 훌륭하고 칭찬받을만한 수준에 이른 것이지만, 능숙한 파일럿이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이 ‘단독 비행’은 누가복음 10장에서 주님께서 그 제자들을 보내셔서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게 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매우 고무되었을 것이고, 또 기쁨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행하신 일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됩니까? 하지만 실제 그분의 일에 쓰임을 받을 때 느끼는 감격은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훨씬 더 큰 기쁨일 것입니다.
놀라운 주님의 기적을 계속 일으키는 사역자는 많은 이들을 격려하고, 또 많은 이들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헌신했을 때 얻는 격려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무게나 갈급함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국에는 스스로 헌신하여 주님의 일에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또 한가지 생각해볼 것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두었을 때 엉망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리-지도자들의 두려움입니다. 성도들이 실수할 것이라는 우리의 두려움 때문에 그들의 사역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모범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실수투성이인 베드로에게 많은 권세를 위임하지 않으셨습니까?
세계적인 음악가 한분이 제게 말해주기를, 라이브 앨범이 실제인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실수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실수를 통해 연주에 생명이 더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교회나 사역이 어떤 실수도 범하지 않는다면, 그 안에 아무 생명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위대한 믿음은 실수한다 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믿음일 것입니다.
잠언 24장 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의인도 넘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아니 의인도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를 반복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인은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교회 리더로서, 성도들이 아직 사역을 하기에는 미숙하고 불안정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70인을 보내셔서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게 하셨던 누가복음 10장 말씀을 다시 잘 생각해보세요.
이 제자들이 주님께 와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달라고 부탁한 것은 오히려 그 뒤인 11장에 나타납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서 엄청난 사역을 하라고 명하셨고, 제자들은 그 일을 성공적으로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기도조차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가장 성공적이었던 최고의 사역자십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따라 사역하면 예수님과 같이 성공적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사역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에 하나는 가장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그 제자가 되게 하셨고, 제자들이 기도를 배우기도 전에 사역을 맡기셨으며, 스스로의 경험과 실패를 통해 역사상 가장 강력한 복음의 용사들로 이들을 빚어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시대의 교회가 주님께서 하셨던 방법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세운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도 이 세상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