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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묵상
로마서 9장은 예정론자들이 자신들의 거짓교리를 지지하는 근거 구절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이다. 여기서도 우리가 늘 이단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살펴본다면 그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문맥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문맥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로마서 9장은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것이다. 대상이 분명히 존재한다. 결코 교회를 위한 근본적인 교리를 끌어내야할 구절이 아니다.
2.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교회 이렇게 셋을 구분하고 계시며, 성경은 각각 다른 대상에 관한 내용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유의하여야 한다.
3. 로마서 9장의 전체 내용은 "왜 이스라엘이 실족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들을 향한 "일방적인 선택하심"과 "버리심"이 이방인과 대조하면서 잘 기술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하나님 입장에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으나 하나님은 이를 도리어 선으로 바꾸신다. 곧 이스라엘의 실족이 이방인의 세우심으로 승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손길에 바울이 가슴 깊이 찬송하고 있다.
자, 여기서 왠 예정론 교리가 끼어드는가?
문맥에 상관없이 자신들이 이미 설정한 이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성경 구절을
찾아다니는 사냥개와 같은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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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11-13을 봅시다.
"아직 자식들이 나지도 아니하였고 또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을 때에 택하심을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르시는 그분에 의해서 있게 하시려고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고 하셨으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 함과 같으니라."
예정론자들은 올커니, 이 구절이야말로 "창세전 선택"을 지지하는 가장 훌륭한 구절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분명,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구절이다. 그런데 그 선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섬김"에 있다.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라고 되어있지 않는가? 형 에서는 불택자이고 동생 야곱은 택자로 대비하라는 근거를 대라! 여기서, 선택의 목적은 구원에 있는것이 아니라 섬김에 있다. 야곱의 혈통에 따라 메시야 라인이 형성될 것을 예정하신 것이다.
또하나,
"야곱"과 "에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을 대표를 한 집합명사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예정론자들이 이 구절에 개개인이 받아야할 개인적 구원교리를 적용하는 것은 크게 잘못한 것이다.
하물며, "에서는 미워하였고.."에서 이 구절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미리 작정된 "버린 자들(불택자)"를 미워했다는 근거 구절로 적용하는데....
하나님께서 누구를 "미워하였다."라고 말할 때, 조심해야 한다.
에서라고 하는 한 개인을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미워하셔서 에서 대신 야곱을 택한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에서를 미워하신 것"은 에서의 후손이 이후에 하나님을 대적한 죄의 결과로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은 1400년 동안 그들의 후손이 저지른 죄를 살피신 후 그를 국가적 의미에서 미워하셨다. 지금 로마서에서 인용된 것은 말라기 1:1-3이다. 이미 이 때 "에서"는 "에서의 후손"을 의미한다.
에돔이 대표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다. 그들의 죄의 결과였다. 야곱과 에서에 관련한 예언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창세기에서 이뤄졌다. 거기서는 에서를 미워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즉, 창 25:23에서는 미워한다는 예언은 없고 단지 형이 아우를 섬긴다는 내용만 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미워할 사람, 사랑할 사람을 정하셨다"고 함부로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마라.
하나님은 아무 까닭없이 그들의 자유의지에 무관하게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사랑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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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구절을 보자.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 즉, 무조건적 선택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하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요, 달리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니라."(롬 9:16)
예정론자들은 이 구절을 "사람은 전적 타락의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할 능력이 없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즉, 내가 예수 믿고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다. 다 때가 되어야 믿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막을 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제시된 복음에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마음의 계기를 찾아 미루다가 지옥에 떨어졌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음의 모순되는 수많은 구절들은 어찌해야 되는가?
* 만약 교리의 본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한다면..(롬 6:17)
* 너희는 생명을 얻으려고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 (요 5:40)
*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없이 마시게 할지어다. (계 22:17)
여기 분명히 말씀하지 않는가,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와서 마시라고...
그렇다면 로마서 9장 16절은 그런 뜻이 아닌 것임을 즉각 깨닫고 그 의미를 더 찾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고집불통들아! 자네들로 인해 지옥에 떨어진 무수한 영혼들을 어떻게 책임지려는가?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또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7,18)
이 말씀이 과연, "파라오와 에서는 영원 전부터 주권적으로 미움을 받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는가? “내가 너를 세움은 바로 이 때문이니 곧 내 능력을 네 안에 보여서 내 이름이 온 땅에 걸쳐 선포되게 하려 함이니라.”(출 9:15) 이는 곧, 출애굽의 위대한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이 간섭하셨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언제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는가? 영원전부터? 아니면 그가 마음을 완악하게 한 이후부터? 성경을 차분히 살펴보자.
파라오는 먼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다. (출 8:15,32, 9:34) 하나님은 파라오가 마음을 완악하게 한 이후 그것을 강화시키신 것 뿐이다.
위대한 왕중의 왕께서 말씀하시면 겸손히 그 말씀의 뜻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혹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해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어찌 모든 악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려 하는가?
하나님의 주권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삼키는 그런 모순을 만들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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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차 언급하는데,
로마서 9장은 결코 개개인이 구원받는 문제에 적용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로마서 9,10,11장은 전체적인 문맥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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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로마서 9장, 이글이 현재 믿음을 가진 성도들(교회)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고 단지 혈통(8절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했습니다)의 이스라엘민족을 위하여 쓰여진 것이라면, 왜 쓰여진 것입니까? 다른 모든 곳의 '아브라함의 자녀'라든가 '언약의 백성'이라는 언급들도 모두 문맥그대로 '이스라엘민족'이지 교회가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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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는 복음의 핵심 교리임은 잘 아실 것입니다.
1장,2장,3장은 각각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가 죄인임을 증거하니다.
3장,4장,5장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진수가 기록됩니다.
6장,7징,8장은 믿는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가 기록됩니다.
특히 8장에서 성령님의 인도로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삶이 전개되고
아울러 복된 소망이 기록됩니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 교리로 8장을 마감하면서
사실상 복음의 핵심이 모두 증거된 셈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예, 성도들의 삶에 관한 진리가 되겠지요.
그런데 그 진리는 로마서 12장부터 증거되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9-11장은 로마서 전체 흐름에서 삽입장입니다.
물론 두부짜르듯 100% 복음이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10장에 보시면 영접하는 진리가 소개됩니다.
그러나 문맥에 따르면 이 세 삽입장에는 구약 백성에 관한
귀중한 경륜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쉽게,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야를 못박았으니 그들을 위한 모든 언약은 끝나고 그것이 교회로 이전되었다고 결론을 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인 오류임을 강조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왜 삽입되었을까요?
거듭난 성도가 그 다음에 알아야 할 진리는 하나님과 문자적 이스라엘의 관계입니다.
구약을 통해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약속한 그 수많은 구체적인 약속들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주목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더라도 구약의 선자자를 통해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회복은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예정론자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이스라엘에게 역사하시는 특별한 선택원리들과 섭리하심을 교회에 적용한 것입니다.
예, 물론 이스라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동일한 방법으로 교회에 역사하실 수도 있지요. 그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하니까요
그러나 아닐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왜 고려하지 않는지요? 그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하는데 말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문자적 이스라엘에 대한 운명이 기록된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100% 성취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문자적 이스라엘이라야 성취될 (아직 성취되지 않은) 구약의 언약들이 수백가지가 있습니다. 시편, 대선지서, 특히 소선지서를 진지하게 읽어보십시오. 그 모든 언약들을 과연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교회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정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장로교회에서 일년 설교 중 소선지서를 본문으로 채택하는 설교가 왜 그렇게 드믄지, 그러나, 아브라함과 야곱에 대한 설교가 왜 그토록 차고 넘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만약 성경 전체가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균형잡힌 본문 선택이라 보시는지요?
2.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찾이하고 있음은 명백하지만 100%가 아닙니다. 홍수 이전 사람도 있고, 율법 이전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 이전과 이후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발상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듭났다고 보십니까? 거듭났다는 것과 구원받은 것이 똑같은 뜻일까요? 이런 세부적이나 중요한 개념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구속사적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재고하셔야 합니다.
3. 신약교회가 반드시 알아야 진리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약교회는 예수님의 정혼한 처녀입니다. 그가 다시 오시면 혼인식을 치루게 될, 준비된 순결한 처녀입니다. 하나님과 문자적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여 꿰뚫고 있어야 하는 것이 정혼한 순결한 처녀인 교회가 반드시 알아야 할 신랑 예수님 고유의 관심사 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에 인본주의 사상이 침투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관심이 "인간 구원"에 촛점을 맞췄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참으로 잘도 왜곡시킵니다. 예수님의 재림 사건은 전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위한 사건입니다. 이 땅에서 수모받고 멸시받은 모든 치욕을 한꺼번에 응징하고 영광을 회복하는 위대한 날입니다. "주의 날"입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이 "주의 날"을 기록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인본주의에 물든 성경 학자들은 이 중요한 키워드를 대수롭지 않게 교회가 예배하는 "주일" 정도로만 봐 넘기더군요.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신랑되시는 예수께서 그분의 영광과 명예에 걸린 문제가 이스라엘의 회복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약교회는 어부지리로 하나님의 경륜의 다른 한 쪽을 얻은 위치입니다. 다른 한 쪽이 완성되어야 하나님께서 비로소 만유의 주가 되시며 영원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 때, 신약교회 성도들이 재림을 마땅히 기다리고, 이기적인 자신의 유익을 넘어서 신랑 예수의 입장에 서서 "그것이 무엇인가 살펴봐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9장,10장 11장은 12장이하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보다 먼저 나온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보다 더 우선 하는 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성경공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났으며
베냐민 지파라."(롬 11:1)
로마서 11장 1절의 말씀을 좌우에 날 선 검으로 상처받지 않으면
고질병은 결코 치료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된 누룩이 경건과 탁월한 천재성을 도구로 교회에 침투하여
1500년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여야 합니다.
다시 한번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신약교회와 상관도 없는
문자적 이스라엘에 대하여 기록케 하셨는가?
저의 답은 이것입니다. 문자적 이스라엘에 관한 경륜은
신약교회가 반드시 알아야 될 진리이며, 이것은 재림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재림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면 초림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당시 바리새인 그룹과 동일한 취급을 당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옛날의 실수가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재림에 대한 지식에 집착하여 초림에 대한 예언을 놓쳤습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초림에 대한 지식에 집착하여(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는 관점) 재림에 대한 예언을 놓칠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교훈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Q2. 덕분에 9장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만,
저는 이스라엘 민족 즉 '이삭으로 부터 난자'와 '어린자', '야곱'이라는 언급에 대해 저는 물론이고 가정과 공동체와 교회가 다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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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포함된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자문하시고 성경에서 반드시 근거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그 지식은 참된 진리입니다. 그러나 신학자의 의견이 최종착역인 근거라면 주저없이 버리셔야 합니다. 대충은 통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 성경의 확고한 기반을 찾으십시오. 거기서 확신과 능력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구약 모두를 나와 가정과 교회 및 이 땅의 모든 성도에
대한 말씀으로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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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구약 모두가 신약교회만을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은 어거스틴에게서 비롯된 신학자의 의견일 뿐입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 교리와 교훈을 구분하셔야 합니다. 교리는 진리의 기둥입니다. 교훈은 인테리어와 같습니다.
구약의 교리와 신약의 교리가 다르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성경 전체를 우리는 교훈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리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해없으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8일 만에 할례를 하는 것은 구약 성도의 교리였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Q3. 문맥상으로도 이것이 옳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13절까지의 내용과 나머지 내용과의 관계입니다. 13절까지의 내용은 바울이 자신의 민족이 어떠한 민족임을 전제하고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특정한 혈통을 선택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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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성경 이해를 탓하는게 아니라, 전체 문맥을 다르게 볼 때 얼마나 빗나가는지 확인하는 좋은 예가 됩니다. 앞서 기록한 이유로 제가 파악한 문맥으로 다시 살표봅시다. 님의 표현을 빌리겠습니다. 양해하십시오. 명료한 비교를 위해서입니다.
"13절까지의 내용은 바울이 자신의 민족이 어떠한 민족임을 (전제하고가 아니라) 명백히 밝힙니다. (그럼에도가 아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정한 혈통을 선책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Q5. 14절 이후의 말씀은 이것을 일반론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중의 성도 양자 모두에게 동일한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아무도 '그 뜻을 대적할'(19)수 없는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선택의 대상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14~18절 말씀입니다. 19절부터는 이 원리를 침해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전 성도에게의 적용을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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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부터 24절까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비를 말씀하지요?
저는 여기서 교리의 일관성을 얻기 위해서 님과 달리 문자적 이스라엘이라는 문맥을 놓지 않고 그 전제 아래 보고 있는 것입니다.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적용하는 관점에서 보지만 지금은 교리를 추적하는 것이니까요..)
님이 누차 말씀하신대로 간단하게 요약해 봅시다.
14절과 24절은 "자비"가 소 주제입니다.
"자비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이 대조되고 있습니다.(꼭 확인하시길 부탁..)
자비의 그릇은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진노의 그릇은 이방인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드는데..이것을 기록한 이유가 뭔가?
사도 바울은 첫째, 민족주의자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하여
매우 안타까워 합니다. 당시 상황은, 본래 자비의 그릇(자비를 주시기로 예정하여 예비된 그릇)에 복음이라는 실제적인 자비가 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데 실제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 인하여 "진노의 그릇"에 해당하는 이방인이 자비를 받은 셈입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시면 베드로가 왜 고넬료 가정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대하여 그토록 당황하며 또한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왜 그토록 청문회에서나 하듯이 소상하게 설득해야만 하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자비가 이방인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은 경천동지할 대 사건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로마서 9장을 보십시오.
22절에 진노의 그릇을 인내하셔서 24절에 이방인을 부르셨는데, 23절에 이는 자비의 그릇에게 "그 영광의 풍요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즉 복음에의 초청을 이방인까지 포함시킨 것은, 이스라엘에게 자비의 끝없는 넓이를 알리려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파라오에 집착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14-24절의 문맥은 분명 22-24절 결론에서 드러납니다.
Q5. 백성이라는 언급이 원문표기를 알 수는 없으나 한글 성경으로만 보아도
후반부에 혼재되어 있는데 이 언급은 전반적으로 특정 이스라엘만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 25절의 경우에는 '백성'이라는 칭호조차
혈통이 그 선택을 의미하지 않음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
로마서 8장은 성도 한 사람의 인격을 다루고 있습니다. 복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이니까요..로마서 9장은 삽입장입니다. 경륜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거듭난 성도들에게 거룩한 역사의식을 주시기 위해 역사 공부를 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집단적인 개념입니다.
이방인 역시 집단적인 개념입니다. 만약 9장이 8장과 같은 문맥이라면 즉, 한 사람 개개인을 다루는 문맥이라면 모순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개개인을 다룰 때는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차별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성경에 "백성"이라고 했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통념대로 백성으로 이해하십시오.
25-29절은 이스라엘의 눈먼 상태와 이방인들을 향한 자비가 더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이방인의 자비는 미리 예언된 사실이라는 것이 언급됩니다. 이스라엘의 눈먼 상태(즉, 바울 당시 상황)도 예언되었음을 상기하는군요. 29절은 씨를 남겨두었다고 하는군요. 예!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Q6. 특히 27절의 경우에는 특정한 이스라엘을 언급하려고 '이스라엘에 관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27절에 인용한 말씀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말씀이라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하
셨다.라는 의도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후반부는 전반부와 문맥이 이미 거리가 있으며 대원리 14~18절에 의해 나누어졌는데 이 부분은 전반적으로 특정 이스라엘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27절의 '이스라엘' 언급은 더욱 그러한 문맥상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27절의 '남은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을 인용하려는 의도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라는 말씀을 언급하신 바울의 심중을
전반적으로 살펴보시면 이것이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으로 들으라고
한 것이 아님을 더더욱 알 수 있습니다.
==>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극명하게 대조되며 계속해서 경륜을 다루고 있으니
그 끈을 쉽게 놓치 마십시오. 11장까지 지속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는 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롬 11:25)
Q7. 전반적으로 하나님 주어의 동사들중 '칭하다(7) 여기다(8) 택하다(11)
(긍휼히,불쌍히) 여기다(15) 말미암다(16) ... 부르다(25) 남기다(29)'
등이 유사한 흐름을 갖고 있으며 이를 '택하다'로 대체해도 될 법합니다.
==> 동의!
Q8. 결국 이 '택하심'의 대상이 전반부의 이스라엘민족에게만 머무르는게 아닙니다.
==>
결국? 이 본문은 이렇게 요약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가졌음에도 이중에서 하나님께서 따로 택하셨다.(~13)
이 택하심은 다른 것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서다.(~18)
이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다.(~29)
오직 믿음으로 인한 의를 좇으라.(~33)"
==>
예정론을 전제로 하면 그렇게도 되겠습니다. 즉 님이 만약 예정론을 전혀 배우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요약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9장을 가지고 예정론을 정립했는데, 어떻게 그것이 예정론의 근거가 됩니까? 순환논리 아닙니까?
예정론이라는 전제 없이
문맥과 성경에 기록된 언어 자체의 일차적인 의미를 존중한 상태에서
로마서 9장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1. 바울의 근심은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1)
2. 이스라엘의 일곱가지 특권은 존귀이며 아무나 취할 수 없는 특권(2)
3. 이스라엘이라도 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님. 약속이 살아 있어야 참된 이스라엘. 이후에 논의될 경륜에 해당될 부류들.(육신적인 그리스도인과 영적인 그리스도인을 나누듯이/ 육신적인 이스라엘과 영적인 이스라엘)(3-13)
4.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자비를 베푸심. 예언도 있음(14-29)
5.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의 풍성함을 나타내려 하심(23)
6. 소돔과 고모라같은 상황의 이스라엘을 아주 버린 것이 아니라. 남은자, 혹은 씨를 남겨두셨다. 소망을 잃지 말자.(1항에 바울의 근심에 대한 소망의 이유)(27,29)
7. 마지막 9장의 결론,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 1-6항에 이르는 엄청난 변화가 결국 "믿음"때문이라고 합니다.
* "의를 따르지 아니하던 이방인들이 의에 이르렀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라."
* 예, 이스라엘의 실족의 원인도 밝히는군요. 철저히 자기 민족의 특권과 눈먼상태와 실족의 원인이 분석되었습니다. 실로 민족을 사랑한 가슴 뜨거운 바울입니다.
Q9. 저는 특별히 마지막 30~33절을 읽으면서 바울이 이렇게 권고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 성도들아 너희가 더욱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믿음에 의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언약이 있었어도 거기에 의지하다 선택받지 않은 이스라엘의
꼴이 되리라"
===>
"그러나 의의 법을 따르던 이스라엘은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느냐?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 의를 구하지 아니하고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처럼 구하였기 때문이라. 그들이 그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에 넘어진 것이라."
예 ! 이것이 9장의 결론입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자신의 동족의 실족은 원인은,
자기 의를 고집한 것이군요.
예정론과 정반대의 결론입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올바로 반응했더라면 하나님의 자비가 지속되었을텐데...
14~18 절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면서 로마서 9장을 다시보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도무지 본문이 너무 명쾌하여서 주석조차 볼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말 하늘아래 같은 믿음을 소유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다름을 확인했지요?
문제는 저는 신학자의 도움없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즉, 문맥을 유지하려는 일관성을 말입니다. 그것뿐입니다.
문맥이라 하면 넓이와 범위가 있는데, 근접문맥으로 해결되는 것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문맥을 좁게 보는 것과 넓게 보는 차이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구원의 교리는 더욱 그렇습니다.
로마서에 한하여만 봐도, 저는 로마서 전체를 보고 말씀드린 것이고
님께서는 로마서 9장 전반부만 보고 말씀하는 것이고..
결국, 큰 문맥을 보시고 잘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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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예정론에 대하여 총정리한 글을 읽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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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은 거대한 신학체계이다. 따라서 성경의 큰 흐름 뿐만 아니라 근접 문맥으로도 분석해야만 한다. 지면관계상 님의 질의에 대하여 큰 흐름 관점에서 답변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로마서 9장 자체의 근접문맥만을 가지고도 예정론의 부주의한 성경해석을 지적할 수 있다.
큰 문맥을 떠나서 로마서 9:11-13 자체에 기록된 내용만을 살펴 봅시다.
"아직 자식들이 나지도 아니하였고 또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을 때에 택하심을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르시는 그분에 의해서 있게 하시려고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고 하셨으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는 인용문은
창세기 25장의 야곱의 유언 속에 나타난 예언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게 나타난 예언의 말씀이다.
야곱과 에서가 이미 태중에 잉태되어 출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창세 전에 결정사항이라는 어떤 근거도 없다.
물론 그렇게 유추 해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근거를 찾는 중인고로 그런 유추는 배제되어야 한다.
근거구절이 명백하지 않고 유추된 것이라면 그것은 곧 순환논법의 모순에 빠진다는 결론이다. 저는 예정론자에게 구원에 있어서 창세전부터 예정된 사실의 명백한 근거구절을 대보라는 것이다. 없다면 모두 순환논법의 결과물일 뿐이다.
모래(철학) 위에 쌓은 교리이다.
2. 선택의 목적은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에 있다.
선택의 목적은 "구원"에 있지않고 "섬김"에 있다.
여기서도 역시 구원을 다루고 있는 핵심 근거구절과는 거리가 있다.
적어도 구원에 관한 교리적 근거를 거론하려면 요한복음 3:16절이라야 한다.
"누구든지 ...믿는자는 멸망하지 않고....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게 할 목적으로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회사 사장이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고유의 권한으로 직책을 맡기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구원과 영벌의 문제는 책임의 문제요 법적인 문제이다.
구원은 잘잘못과 관련하는 것이며
섬김은 일을 성사시키는 데 관련하고 있다.
잘잘못에 관한 구원에 있어서 일방적인 결정이 있었다면
이는 하나님을 악하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도바울은 상기 구절에서 다시 말라기 1:2,3절을 인용한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
이 인용구에서 분명히 해야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여기서 야곱과 에서는 개인이 아니라 민족을 의미한다.
야곱과 에서는 말라기가 그런 예언을 하기 1300년전에 존재하던 인물이다.
말라기 선지자가 개인인 야곱과 개인인 에서를 두고 예언하였겠는가?
이스라엘을 의미하고 에돔을 의미한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는가?
개인의 구원교리에 관한 예정론의 근거 구절로서도 거리가 있다.
2. 사랑과 미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택자는 사랑하고 불택자는 미워하였다는 근거로 이 인용문을 거론한다. 그러나 그것은 넌센스이다.
하나님께서는 까닭없이 미워하고 까닭없이 사랑하신다고 증거한 적이
성경에 단 한군데도 안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왜 에서를 미워하셨나?
(세심하게 성경을 살펴보면, 리브가 태중에 있을 때의 예언, 창 25장은
에서를 미워하였다는 말씀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라기의 예언은 1300년 이후이다.)
더 정확하게는 왜 에서의 후손인 에돔을 미워하셨나?
적어도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에돔이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마땅히 도와야할 형제의 나라 위치에서 얼마나 어렵게 했는지 잘 알 것이다.
그 결과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미워하였고..."라고 예언한 것이다.
"...미워하였고.."는 추가된 사항이다.
또 그 다음 구절을 보자
"그러므로 원하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요, 달리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니라."(롬 9:16)
여기서 알아야할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인류는 모두 아담 안에서 죄인이다.
2. 100% 지옥에 가도 하나님 영광에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3. 그렇기 때문에 그 중에서 일방적인 선택(어떤 목적에서 이든지...)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일 뿐이다.
4. 하나님에 의해 더 악화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확신하라.
16절은 하나님의 선택의 동기를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공로나 능력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이 왜 선택받은 백성인가?
굳이 따진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미미하고 약하고
고집스런 민족, 문제가 많은 민족을 일부러 택하셨다고
볼수 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도 가난한 자를 부르심은 부유한자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무식한 자를 부르심은 지혜자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 하신다.
곧 이스라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약한 민족을 들어 선택하심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목적이 있다.
이러한 선하신 의도를 예정론으로 왜곡시켜서는 안된다.
또 다음 구절을 보자.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또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7,18)
예정론자들은 파라오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악인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완악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파라오는 10가지 재앙으로도 돌이키지 않고 점점 악해졌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돌아서야한다. 누구라도 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생길 때,
그를 구원시키려면(그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중단하는 것이 옳다.
그 사람의 감정이 최고조로 업되었을 때, 계속해서 성경에 있는 말씀으로 단오하게 나간다면 그는 분노가 폭발할 것이다.
지금 파라오가 겪는 상황이 그와 같다. 그 때 상황은 단순히 파라오 개인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애굽에서 부지런하고 유능한 소수민족을 강제로 뽑아내야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여기서는 비단 파라오가 아닌 어떤 왕이라도 파라오 처럼 분노를 발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파라오 개인의 신앙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람이 완악하게 되고 악질이 되는 것은 굳이 하나님이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의 보호망을 풀기만 하면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인간들은 한 없이 타락해 간다.
자, 하나님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목적으로
당시 가장 교만하고 유능하다고 믿는 천하의 파라오 왕을
완악하게 하실 권한이 없겠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파라오 개인에 대한 자비를 거두시기만 하면 된다.
전에 언급했듯이 자비를 거두신다고 하나님께서 불의하신 것이 아니다.
이미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로 태어났지 않는가?
이 말씀에서 그야말로 문자적으로 따지고 든다면
예정론자들이나 여호와 증인들이나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자신들이 유리한 교리를 위해서 문맥을 무시한 문자주의 해석 말이다..
그러한 무리한 해석이 하나님이 악의 근원이시라는 오명이 쒸어진다면 중단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언제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는가?
영원전부터?
아니면 그가 마음을 완악하게 한 이후부터?
성경을 차분히 살펴보자.
파라오는 먼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다. (출 8:15,32, 9:34)
하나님은 파라오가 마음을 완악하게 한 이후 자비를 거두신 것 뿐이다.
여기서 자비라 함은 그런 상황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그럴 수 없지 않는가?
18절을 보자,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또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인간은 모두 똑같다. 죄인이며 영원한 쓰레기장에 들어가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존재임을 명심하라.
그 제로 인간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18절의 의미는 살아난다.
이스라엘은 제로 인간에서 자비를 얻었다.
파라오는 제로인간에서 그대로 되었다. 즉,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위치에서 그대로 있었다.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은
본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성을 잠시 이용하신 것 뿐이다.
21절을 보자.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롬 9:21)
여기서도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구원과는 관계없다. 쓸 그릇이다. 섬김에 목적이 있다.
2.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같은 진흙덩이라 하셨다.
제로 인간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예정론은 자신이 참으로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하는 독이다.
3. 지금까지의 문맥은 결코 개인의 구원이 아니다.
* 이스라엘은 자비의 그릇
* 이방인은 진노의 그릇
*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된다.
* 누차 이야기 하지만, 모든 인류는 진노의 그릇이다.
* 여기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시작되어야 한다.
*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비는 일방적일 수밖에 없고 값없는 은혜일 수밖없다.
* 예정론자들은 값없는 은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무리하지 마라. 성경에 없는 이론으로 무리하면 결국 자신을 해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다.
문맥을 놓지 말고 계속 보라!
22-24절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나타내시고 또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을 심히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시며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된 자비의 그릇들에게 그의 영광의 풍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면 어찌하겠느냐? 곧 우리에게니 그가 우리를 부르셨으되 유대인들 중에서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셨느니라."(롬 9:22-24)
분명히 해야 할 사실들
1. 예정론자들은 13절과 17절에만 집중하고 그담부터 문맥을 놓아버린다.
그렇게 하지 마라. 계속 문맥을 보라. 13절과 17절의 무리한 논거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의 답이 그 다음에 나온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에 대한 답이 뒤에 나온다.
2. 로마서 전체의 주제가 이방인의 구원이다.
진노의 그릇은 파라오처럼 악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러나 오래 참으심으로 이방인에게 자비가 임했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한번 자세히 읽어 보시라. 바로 이 말씀을 하시려고
야곱과 에서와 파라오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이방인에게 자비를 열어주시는 이유는 두가지,
1.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 온 천하에 나타낼 때가 되었고
2. 오해하기 십상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풍성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함
이방인의 구원 !
이는 이스라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실인데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심중에 담고 계신 것이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예언을 해 놓으셨다. 이스라엘은 미처 이를 몰랐다. 오히려 그들은 교만해져서 믿음으로 하지 않고(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행위를 자랑했다. 그래서 실족하게 된 것이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느냐?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 의를 구하지 아니하고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처럼 구하였기 때문이라."(롬 9:32)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하나님의 경륜이 마감된 것이다.
결코 예정론이 설 자리가 없음을 분명히 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