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불갑사 천왕문」은 창건년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모악산불갑사기(母岳山佛甲寺記, 1725) 기록을 통해 1725년(영조 1)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1876년(고종 13) 고창 소요산 연기사 터에 있던 사천왕상을 불갑사로 옮겨 봉안하면서 현 위치에서 10여m 뒤쪽으로 옮겼으나, 2009년 발굴조사를 거쳐 원래의 위치로 이건 하였으며, 여러 차례 보수 및 이건(移建)에도 불구하고 건립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구조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 5량가,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양 협칸에는 우물마루를 두고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대량(大梁)은 2개의 부재를 이어 사용한 합보로 이음부는 꺽쇠로 보강하고 하부에는 심주(心柱)를 세워 받쳤는데, 다른 사문(寺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 기법으로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
포작은 2출목 3익공 형식으로 주심첨차는 사절하였으며, 출목첨차는 연화를 조각하였다. 초제공과 2제공은 앙서형이며, 3제공은 운공형이다. 살미 내부는 초제공의 경우 아래를 향해 활짝 핀 연화를 조각하였고, 2제공은 위로 형하고 있는 연봉을 조각하였는데 17세기 이후 서남해안지역 사찰 건물의 건축적 특성으로 나타나는 장식화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어,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높다.(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사찰 입구 천왕문에 봉안된 사천왕상은 수미산 중턱에 살며 동서남북 네 곳에서 불법 및 불국토를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이다. 사천왕은 동(지국천왕), 서(광목천왕), 남(증장천왕), 북(다문천왕) 네 방위에서 맡은 바를 수행하는데 각기 보검(寶劍), 보당(寶幢)과 보탑(寶塔), 용과 여의주, 비파 등 지물을 들고 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일정하다. 부릅뜬 눈, 크게 벌어진 입 등 두려움을 주는 얼굴 모습, 갑옷을 입고 있는 신체, 발밑에는 악귀 등의 생령을 밟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영광 불갑사 목조사천왕상은 원래 전북특별자치도 무장 소요산 연기사에 있던 것으로 연기사가 폐사됨에 따라 불갑사의 설두선사(雪竇禪師, 1824∼1889)가 1876년 이안한 것으로 전한다.* 일반적으로 사천왕상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사찰의 재건과정에서 제작된 것으로 불교의 부흥이라는 범불교적 역사적 소명을 담아 조성하였다는 점에서 불교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데, 불갑사 사천왕상은 시기적으로 17세기 후반에 해당하므로 무장현 지역(현 부안)의 사부대중의 염원을 담아 제작한 역사적 의미와 사회적 이력을 간직하고 있다.
* 연기사 폐사 당시 전라관찰사가 자신의 부친 장성부사의 명당자리를 얻기 위해 관군을 동원하여 연기사를 불태우고 저항하는 승려들을 가마솥 끓는 물에 던져 죽였다. 천왕문은 멀리 떨어져 있어 화재를 피했고 사천왕상도 남게 되었다.
영광 불갑사 목조사천왕상은 약 4m가 넘는 대형상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은행나무로 만들었는데 여러 편의 나무 조각을 접목하여 조성하였다. 동시에 머리카락이나 세부장식, 양감이 필요한 부분은 흙으로 제작하여 정교함을 보이는 등 사천왕상 조성이 소조상에서 목조상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이며, 17세기 전반 중량감 있는 당당한 체격을 갖춘 사천왕에 비해 몸집이 정제되어 균형 잡힌 장신형으로 조형감각이 변모된 점과 좁고 높은 화형 보관을 쓰고 있는 점은 17세기 후반 조각 경향을 반영된 것이다. 17세기 후반 우수한 조각적・예술적 양식을 갖고 있으며 원형의 손상과 큰 변형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영광 불갑사 목조사천왕상은 조성과 관련된 기록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시기 편년은 어렵다. 하지만 이미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사천왕상 복장전적 중 『묘법연화경』 권1(1670년 전라도 태인 운주사 간행)을 통해 하한연대는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존상에 납입된 복장전적은 종교적, 역사적 상징물로 존상과 함께 종합적으로 일괄 보존・관리될 때 더욱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미 보물로 지정된 ‘영광 불갑사 불복장 전적’ 중 사천왕상에서 나온 복장전적을 사천왕상과 함께 보물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사천왕상의 색깔, 형상, 보관의 조각 등이 모두 달라서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또한, 언뜻 보면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사천왕들이 자세히 뜯어보면 좀 어리숙하고 어찌보며 귀엽게도 보이는 건 순진함을 숨기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정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