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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1-11절
그 당한 일을 다 아시고
요한복음 13장에서 16장까지가 예수님의 고별강화이고,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기도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16장 마지막절인 33절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씀으로 마치십니다. 주께서 가르치신바 모든 말씀이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도록 한다는 것이고, 그런 평안 가운데서도 세상 삶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환난이 있을 것이지만 거기서 패할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은 결코 패배의 자리가 아니라 승리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승리가 보장된 자리라고 해서 기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더욱 기도하시기까지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또한 자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나아가 자신의 제자들인 사도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될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신 겁니다. 위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아래로는 자기 백성의 보전과 거룩한 삶을 위하여 기도하셨던 겁니다. 승리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보장하는 결과로 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 과정 속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 주시는 확신도 가져야 하지만, 그런 확신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은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의 부족함을, 우리의 없음을 채우시는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연약하지 않다, 부족하지 않다, 없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뭔가 되는 줄 아는 자로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교만함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죄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신 분이요, 순종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을 위해서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육신을 취하신 이상 육신의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도 기도해야만 하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 자체가 사실은 교만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고별강화와 특별히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난 뒤 18장에서 잡히시는 것을 기록하는데, 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라고 되어 있지만 ‘말씀’이라는 단어 자체는 없습니다. 단지 ‘이것들’로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것들을 하셨다는 것은 가깝게는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로 볼 수 있지만, 좀 더 넓게 예수님의 고별강화와 기도 전체로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말 성경이 ‘이 말씀을 하시고’라고 할 때 예수님의 기도까지를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의 기도이지만 기도조차 가르침의 형태로 있다는 점에서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를 ‘이것들’ 혹은 우리말 번역처럼 ‘이 말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요한복음에는 성만찬에 대한 기록과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가 전혀 기록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만찬에 대한 것이나,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즉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는 기도는 둘 다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두 개의 내용을 전혀 다루지 않는데, 이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분명 중요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다룰 수 있는 내용이지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기보다는 기록하지 않는 부분을 좀 더 다루려고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의 내용을 보면 공관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도 있지만 대부분 기록되지 않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의 의도는 세 복음서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 가운데서 기록할 가치가 있는 사건을 수록하는데 있었다. 저희 교단 김성수 교수님 책도 참고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인즉 요한이 공관복음서에서 다룬 내용을 생략하거나 공관복음에서 언급하지 않은 내용을 기록한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그 의도를 헤아린다면 공관복음서들이 이미 충분히 다룬 내용 중 어떤 것은 또다시 중복 기술하는 대신 생략하기도 하고 반대로 공관복음서가 다루지 못하고 생략한 중요한 내용들을 기록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복음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난 뒤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셨는데, 그 곳에는 동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산에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 2절입니다.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가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직후라고 할 때 고별강화를 마치고 난 뒤 겟세마네라는 동산에 들어가시고, 거기서 기도하시고 난 뒤 잡히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경우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생략하는 대신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동산으로 들어가셨다고 말씀하시는 곳은 겟세마네라는 동산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22:39)라고 말함으로 그곳이 감람산 근방에 위치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곳에서 가끔 모이셨습니다. 그곳에서 가르치기도 하셨고, 또한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끔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으로 간 것은, 그것도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자원하여 가신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특히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다에 의해 팔리기 위해 그곳으로 가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에서도 나오지만 예수님은 종종 내 때가 아직 되지 이르지 않았다,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에 따라 예수님을 잡으러 왔지만 바로 눈 앞에 있는데도 잡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어야 할 때가 온 것이고, 죽으시기 위해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제자들과 자주 모이던 곳, 예수님을 배신하는 가룟 유다조차 아는 곳으로 가셨던 겁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결코 억지로 당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표현을 가지고 오면 순종이 없었더라면 우리를 위한 속죄가 얻어질 수 없기 때문에 자발적 순종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에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아닙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따라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고통은 단지 육신적인 차원에서의 고통이 아닙니다. 영혼의 고통입니다. 실체를 따라서는 성부와 성자가 분리할 수 없는 그런 관계이지만,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것과 같은 그런 고통을 맛보아야 했기 때문에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외치셨던 말이 무엇입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입니다.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입니다(마27:46). 육체의 고통과 함께 영혼의 고통까지 당하셨던 것입니다.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은 칼케돈 신조(451)가 고백하는 것처럼 분리도 분할도 혼합도 전이도 없지만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하시는 고난 가운데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 53장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사53:11)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발적인 순종, 다시 말해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시되 그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신다는 것이 이런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동산으로 가셨을 때 오늘 본문 3절은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계약을 맺는 내용까지 기록하지만, 이런 내용은 요한복음에서는 생략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나갔다가 이제 다시금 등장하지만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와 함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때 무기를 가지고 왔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적인 모습으로 왔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더불어 주목할 것은 유다가 군대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왔다고 증거 합니다. 가장 앞장 선 자가 누구냐? 가룟 유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가르침을 받은 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가장 앞장 서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는 말씀과 방불합니다. 또한 “...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12:25)는 말씀도 하셨는데, 이런 점에서 가룟 유다의 배신은 적어도 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부터의 배신으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4절은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라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하자면 ‘전지’에 해당됩니다. 어떤 것이든 모르는 것이 없는, 다 아시는 그런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실 때는 ‘전지’보다 ‘의지’가 앞섭니다.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시는 것에 따라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것이고, 그때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지예정을 주장했던 알미니안주의는 이단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 그 당한 일을 다 아신다는 것은 단지 지금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뜻, 그것도 영원 전부터 정하신 바에 관한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비롯하여 군대와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의 아랫사람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잡혀 십자가에 죽는구나!”라는 것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작정의 실행으로서의 섭리,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리고 그 일에 대한 결과들까지 다 꿰뚫어 보고 계신 겁니다. 잡히시기에 앞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할 때 아버지의 뜻을 몰라서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때도 다 알고 계셨지만, 그만큼 십자가 고난은 고통스럽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는 분으로 계시다는 겁니다. 당연히 자신의 죽음도 아시고, 죽음 이후 부활도 아시고, 부활 이후 승천도 아시고, 승천 이후 성령의 특별한 강림의 역사로 사도들이 복음을 힘 있게 전하게 될 것도 아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원 전부터 택하신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구원에 이르게 될 것도 아시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실 것이고, 양과 염소를 나누듯 참된 신자와 불신자를 나누어 한 부류는 영생으로, 한 부류는 영벌로 결과 되는 것까지 아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것도 아시는 겁니다. 바로 이런 분으로서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5절과 6절에 보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다른 것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고, 저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자 내가 너희가 찾는 나사렛 예수라고 밝히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가?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마디 말씀이 어떠한 위력이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비록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셨지만 인성을 취하셨다고 해서 신성으로부터 분리된 성자이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성을 취하신 이후로는 신성과 인성은 분리도 분할도 혼합도 전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도 공생애 기간 많이 행하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면 못하시는 게 없습니다. 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들을 한 마디만 하시면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여기서 말씀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함으로서 구별된 뒤 위격이 있다는 것을 알리면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함으로써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지은 것 중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정확하게 창세기 1장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모든 것을 창조하시되 질서를 따라 그의 말씀으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말씀의 권위가 지금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평소 나타나지 않은 것은 권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권위 앞에 쓰러지지 않도록 하셔서 나타내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한마디 말씀으로 자신의 말의 권위가 얼마나 큰지를 나타내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군대가 오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아랫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온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잡혀가실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해 당시 세상의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 몰려온다고 해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다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는 그런 분으로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 심판주로서의 말씀은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 그의 심판에 대한 모든 말씀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죄인을 향한 심판의 말씀도 반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택자를 향한 의롭다 하심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모든 의를 이루어 우리에게 거저 주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를 나눌 때 그들의 행위에 따라 영생과 영벌을 주시는 것처럼 말씀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선한 일을 하지 않으면 영벌을 주는 것처럼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는 선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없이 우리의 선행 자체로 영생을 생각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없이는 의롭다 하심도, 선행도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됩니다. 물론 지금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악인이 큰 소리를 치면 삽니다. 외적으로 물질이 많은 사람이, 또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큰 소리를 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아니라 주의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주의 말씀만이 유일한 권위를 가지는 말씀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여기 있는 겁니다.
이런 권위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잡혀가시는 것으로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신 것이고, 또한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데 성부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힘과 능력이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은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요, 아버지의 뜻이 자신의 뜻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라고 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7절과 8절을 보시면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그들 모두가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들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물러가야 합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경험했기 때문에 순종의 자세로, 경배의 자세로 다시금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도망가지 않고 있고, 순종의 자세로 엎드리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무감각하다는 것이고, 그만큼 그 마음이 강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어야 할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바로 저들의 무감각, 강퍅함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위해 가시는 이런 과정 속에서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셔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말씀 앞에서 엎드러집니다. 그 말씀의 권위가 얼마나 큰지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경험했다고 해서 순종의 자세를 가진다거나 도망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엎드러진 자들의 마음까지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도망가고 싶지만 주위를 살피면서 눈치 본다고 도망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만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대하여 작정하시고, 작정하신 그대로 실행하십니다. 거기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없습니다. 때문에 이런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좋지 못한 일이든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특히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 때 우리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있는가를 묻습니다. 물을 때 원망하듯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셨다면 적어도 이 사실 한 가지만은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러합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택하신 모든 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모든 자들의 죄 사함과 구원, 영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의 길로 보내고 계신 것이고, 그 사실을 알기에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 가룟 유다가 필요하고, 가룟 유다가 끌고 온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아랫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이 있는 겁니다.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죽어야 할 그 길로 가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일도 하시는데, 자신과 함께 있던 열 한명의 제자들을 보내주도록 말씀합니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잡혀 가시는 형태로 있기 때문에 저들에게 부탁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 한 마디로 자신의 권위를,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보호하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는 이리들의 위협을 보시고 그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미리 공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양 떼들을 보호하시는 것은 결코 힘겹게 보호하시는 게 아닙니다. 물론 사도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경고합니다(벧전5:8). 그래서 근신하라, 깨어 있으라는 권면과 함께 너희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대적하라는 말씀도 합니다(벧전5:9). 그러나 이러한 말씀보다 앞서는 게 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즉 주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말씀 아래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이상 누구도 빼앗아 갈 자가 없습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빼앗아 갈 수 있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근신하라고 하는가? 왜 깨어 있으라고 하는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넘어진다는 것은 적어도 택자에게는 완전히 넘어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완전히 넘어지는 경우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져서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근신하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서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돌보이시는 이상 그분으로부터 빼앗아 갈 수 있는 피조물은 어디에도 없지만, 지상의 교회가 전투하는 교회인 만큼 나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까지가 고별강화입니다. 그 말씀 맨 마지막에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17장에서 기도하십니다. 이것이 근신입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승리가 보장되어 있지만, 승리하기까지 나태하지 않고 깨어 늘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로 요구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말씀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켜 보호하시는 역사 없이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보전하심이 없이는 우리 스스로가 구원을 이룰 수 있는 힘은 전적으로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손길로 말미암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9절의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하나님의 보전 가운데 있는 것은 우리의 남다름이 아닙니다. 만약 구원을 우리 손에 맡기신다면 백이면 백 구원의 자리에서 이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근원으로 올라가자면 영원 전에 작정하신 바가 실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잃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리는 일이 있게 되는데, 10절입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우리는 종종 베드로의 성급함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특히 베드로는 주를 위한다는 마음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한다는 마음 자체가 칭찬 받을 일로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6장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비록 그 고백이 하나님을 출처로 하지만 그렇게 고백한 것에 대하여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어야 할 것을 알리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그 일이 주님께 미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합니다. 스승이 죽는다고 할 때 베드로의 이런 자세는 분명 주를 위한 자세입니다. 세상적인 의미에서는 칭찬 받을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꾸짖었습니다. ‘사탄아’라고 하시면서 꾸짖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자세는 정확하게 이때와 같습니다. 주를 향한 열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 주를 향한 진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자세는 진리 가운데 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열심은 있지만 진리의 지식을 따른 열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하고서 행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진리에 합당한 열심이어야 합니다. 주의 뜻을 아는 자로서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의 뜻을 모르면서도 무조건 열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진리의 지식 없는 열심은 오히려 주를 대적하는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칼빈은 여기에 더하여 설령 베드로의 열심에서 비난할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불쾌하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원한 치욕을 받지 않는 것은 베드로 덕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착각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이 마치 하나님께 보탬이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미 보이신 것처럼 예수님은 베드로 없이, 오직 그의 말씀만으로 저들 모두를 무릎 꿇리셨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비교하자면 칼이 아닙니다. 그의 말씀입니다. 무기가 아닙니다. 오로지 그의 말씀입니다. 즉 우리의 힘과 능력은 우리의 재력, 우리의 외적 무기, 이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입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그분의 말씀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주의 뜻과 그의 말씀에 합당한 자리로만 가도록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칼을 빼 든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여섯 번째 계명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지만, 지금 베드로의 이 행동은 율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또한 개인이 어떤 공적 권세에 대하여 반기를 들 수 있는가? 율법은 그것도 금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태복음의 경우는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만큼 개인적인 복수는 정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알리시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자신이 가고자 하는 그 길은 아버지께서 뜻하신 것이라고 알리십니다. 그 뜻을 어떤 모양이로든 막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주를 위한 열심으로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주께서 뜻하신 길이 평탄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뜻하신 길이 십자가 길일 수도 있습니다. 시편 90편에서 인생의 연수를 70에서 80이라고 할 때 그 세월이 수고와 고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평탄하기를 바라지만 많은 부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러하고, 물질 혹은 질병도 우리에게는 어려움입니다. 그럼 왜 이런 어려움이 있는가? 성경의 답은 늘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라. 하나님만이 소망이요, 하나님만이 우리의 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지 자체도 죄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예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죽음만 말씀하셨는가? 부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다른 모든 제자들에게는 그런 말씀이 마음 가운데 새겨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실수합니다. 그래서 과격한 행동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지라도 주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그 길을 가십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고난의 잔을 마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가야 할 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길을 걸어가야지, 결코 자기 뜻대로 가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허락하신 그 길에는 십자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난의 길, 어려움의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평탄하기만 하면 좋겠지만 늘 그렇게 있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러한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은 그것조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인내로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걸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거기에 복됨이 있고, 거기에 열매의 풍성함이 있게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