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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와 양
본문<요10:1~10>
<1-2절>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위의 구절을 보면 ‘우리’에 양이 있는데 우리에 들어가는 자가 둘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자와 문이 아닌 담이나 울타리로 넘어가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성경은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말하고,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목자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10장의 시작이 절도요 강도라고 일컫는 사람과 목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9장을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0장에서 말하는 목자와 양의 이야기가 9장에 있었던 내용에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9장에서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예수님이 고치신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계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9장 마지막 구절인 39절 이하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는 말씀으로 드러납니다. 즉 스스로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본다고 하는 것은 율법주의를 두고 한 말입니다. 즉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이야말로 ㅎ님께 인정받고 구원받은 자라고 자부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의 죄악 됨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후에 절도요 강도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절도요 강도로 불려지는 사람들은 스스로 본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목자와 구분이 되고 있는데 목자와 다른 점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이해할 것은 예수님은 왜 절도와 강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시느냐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목자가 문으로 들어가서 자기 양을 따로 불러냅니다. 이것은 우리에 있는 양이라고 해서 다 목자의 양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우리에는 목자의 양이 따로 있는데 목자가 양을 부를 때 그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이 목자를 따라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자의 양만이 목자를 따라 나온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육적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면적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이라는 말입니다. 이들만이 ㅎ님이 택하신 언약백성들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이해해 보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신앙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즉 율법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문은 오직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 의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율법을 주셔서 이스라엘을 율법 안에 있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악함을 깨닫고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율법에 주어진 진정한 문은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느 새로운 용어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나 우리에 있는 양, 그리고 목자, 여기에 대비되는 절도와 강도에 대한 용어,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른 데로 넘어 간다는 것에 대해 이해가 필요 합니다.
여기서 ‘우리’란, 율법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에 들어가 있는 양이란 하나님이 주신 율법 안에 있는 이스라엘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그럴 때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이 율법에 세워 놓으신 율법의 본 의도인 죄를 깨닫는데 방점을 두지 않고, 자기의 율법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 것을 다른 문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통로입니다. 갈3장에서 말씀하듯이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율법으로 자신의 악함을 발견케 되면 예수께 나아가 오직 IX를 믿음으로 온전케 되라는 것이 ㅎ님이 정하신 구원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경을 실로암으로 보내실 때도 눈에 진흙을 발라서 씻을 것이 있는 자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인 생명의 말씀이 역사되어질 때 비로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어 실로암으로 비유된 IX께 나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된다는 이치를 설명하는 스토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것은 바로 바리새인들의 소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에서 자신의 악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힘쓰는 사람의 의에 매달리기 때문에 ㅎ님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데로 넘어가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두고 절도요 강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절도는 훔치는 자요, 강도는 빼앗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훔치고 빼앗은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율법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구원이란 우리의 공로와 의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와 공로로만 되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행함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를 훔치고 빼앗은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절도요 강도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바리새인들처럼 믿음에 있어서 행함을 중요시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믿음은 행함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시각은 믿음에 행함을 더해야 온전한 구원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행함을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은 같은 것입니다. 즉 행함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증거물일 뿐이지 결코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나 도구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함이 있는 것을 마치 더 나은 믿음, 혹은 더 좋은 신앙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적인 사고방식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를 가로채는 절도요 강도의 행위라는 것 역시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노라‘는 말씀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이란 주님이 행하신 것을 믿는 것이지 인간의 행함과 열심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의를 세우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세우기 위해서 부름 받은 ㅎ님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참된 본분은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은 말처럼, 이론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즉 자신이 ㅎ님이 바라시는 선과 의를 행할 수 없다는 자기부인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각자의 때가 차서 성령이 오셔야 자신이 죄로 죽은 자임을 알고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ㅎ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어떠한가를 철저히 인식할 때, 그리고 날마다 그 믿음에서 멀어지지 않고 살아갈 때 그가 바로 그리스도를 만난 성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5절>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우리 안에 양들이 있는데 목자가 가서 자기 양을 불러낸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양치는 풍습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공동의 ‘양 우리’를 운영합니다. 늑대나 들개 등의 야생 짐승으로부터 양을 보호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만들고 공동으로 보초를 서면서 양 우리를 운영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각자의 양을 목자가 부르면 자기 양은 자기 주인의 음성을 듣고 따라 나선답니다. 그리고 목자를 따라 초원으로 나가서 꼴(풀)을 배불리 먹이고 저녁에는 다시 공동 양 우리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지요.
3절에서는 목자가 양의 우리에 들어갔을 때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도리어 도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습니다. 자기 양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각각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으로 조성된 유대교에서 12제자를 불러 내셨습니다. 물론 가룟유다는 가라지로 사용하시기 위해 일부러 불러낸 것이지만, 전체의 율법 우리에서 제자들을 불러 내셨습니다. 요1:41을 보면 안드레가 자기 형제 베드로를 데리고 주님께 왔을 때 주님께서 그를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신상에 대해 훤히 아시고 계셨고 미래의 사명도 알고 계십니다.
3절을 보면 문지기가 목자를 위하여 양 우리의 문을 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문지기’란 성령을 지칭합니다. 성경은 복음의 문을 여시는 분이 성령임을 증거 합니다.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라 부를 수 없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셔야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이고 들려지는 복음에 반응하여 주님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에게 보내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백성의 죄사함이라는 놀라운 일을 성취 하셨기에,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오실 수 있게 된 것이고, 그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IX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구원은 성령께서 다 행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행16장(5~10절)을 보면 바울이 복음 선교를 아시아 쪽으로 방향을 잡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허락지 아니하시고 서쪽으로 돌려놓습니다. 이스라엘 서쪽방향은 지금의 지역으로 보면 터키나 그리스 지역입니다. 그래서 세워진 교회들이 마게도냐 지역의 빌립보 교회, 에베소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고린도 교회 등입니다. 이런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이 정착되게 하기 위해서 바울이 3차에 걸쳐 선교여행을 한 것이지요. 누가 한 것이라구요? 실제는 다 ㅎ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다른 말로 성령행전이라고도 말합니다. 바울이나 사도들은 그저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바울이 빌립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성령께서 자주장사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한지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너무 놀랍지 않나요? 복음이 들려질 때 사람의 마음이 열려져서 ‘아멘’으로 영접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의지나 결단으로 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조정하시는 성령의 간섭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빌립보 지역에 최초의 교회가 루디아 자매의 집에 세워지게 된 것이지요.
이같이 주님은 자기 양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양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창세전에 아버지의 택함을 받은 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들인가를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이란 정체성 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죄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이 죄인의 부르심에 반응을 보인자들이 주님의 양들입니다(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XI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셨도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
찬송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라는 가사에 이것이 정확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자비하신 보좌 앞에 꿇어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하니 믿음 주소서,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이 가사에서 말하고 있듯이 죄인을 부르시는 목자의 음성에 반응을 보이는 자들이 목자의 양들입니다. 이것이 양과 목자의 관계입니다. 죄인과 그리스도의 관계입니다.
롬8:30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미리 아신 자란 바로 창세전에 택하신 자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각자의 삶 가운데서 살다가 자신의 죄로 인해 번민하고 괴로워할 때에 복음이 들려지면 그 복음에 이끌리어 IX를 믿게 되는 과정을 부르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복음에 의한 부르심에 응하고 복음을 영접함으로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아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ㅎ님이 택하신 자는 지옥가고 싶어도 못갑니다(누가 ㅎ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리요?)
이렇게 복음이 들려질 때 마음의 귀가 솔깃해서 영접하는 것을 4절에서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다른 목자의 음성을 들으면 이들이 도적이고 강도라는 것을 직감하고 즉시 그들에게서 도망치는 것입니다. ㅎ님은 자신의 택한 자녀들에게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허락하십니다. 복음을 분별할 수 있는 귀를 주셔서 바른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목자를 따르게 하십니다.
고전1장 21절을 보면, ㅎ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하시면서 이것이 ㅎ님의 지혜라고 합니다. ㅎ님의 지혜는 사람이 볼 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전도를 짧은 시간에 효과 있게 많은 사람을 얻으려면 큰 기적 한 방이면 끝나지 않겠습니까? 굳이 예수 믿으라는 말이 필요 없겠지요. 기적 앞에서는 믿지 말라고 해도 믿겠다고 몰려들 겁니다. 그런데 ㅎ님은 모든 걸 집어치우고 오직 미련한 전도의 방식으로 하신 답니다. 여기에 숨겨진 비밀이 있습니다.
즉 순수하게 십자가 복음만을 전하면 택한 자는 믿을 것이고, 택하지 않은 자는 안 믿을 거라는 ㅎ님의 섭리가 작동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서운 말씀이지요. 어떠한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도입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ㅎ님의 간섭으로 하신다는 의중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말씀=복음)이 들려질 때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여서 도망칠 것이고,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ㅎ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행13장을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어떤 이들은 반갑게 영접합니다. 그런 자들을 향해 바울은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복음을 듣고 거부하는 자들은‘ 영생 얻기에 합당치 않게 행하는 자들’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이처럼 전도는 사람의 설득으로 되는 게 아니라, ㅎ님의 창세전 택하여진 자들에게만 반응하게끔 ㅎ님이 사람의 마음에 복음의 GPS를 심어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십억이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복음을 믿는 것은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마13장 천국 비유에서처럼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기에 모든 세간을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를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천국과 영생을 소유했는데, 더 이상 무엇에 배고품을 느끼겠습니까? 항상 배부르고 만족하고 행복해서 그저 웃음만 터질 수밖에 없는 정말 복 중의 복을 받은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주님의 행하심만을 바라보고 마음의 쉼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 것을 요구하며 말씀대로 살 것을 요구하는 자들의 음성은 목자의 음성이 아닙니다(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의로 삼지 말라는 말).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는 것은 목자의 음성이 아니기에 그들에게서 도망쳐야 합니다. 이것이 들을 귀가 허락된 주님의 양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오직 주님의 음성에만 반응하는 고집불통들입니다.
<6-8절>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양과 목자의 비유를 바리새인들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의 양치는 관습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 ‘양 우리’에서 목자가 각자의 양을 불러낸다는 것을 못 알아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로 비유하신 선민인 이스라엘이 다 구원받는 게 아니라 그 중에서 별도의 양만 구원받는다는 말을 수긍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신들이 율법을 받은 위대한 민족으로 자부하고 있었기에 모두가 다 구원은 떼놓은 당상으로 여겨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일부만 구원을 받는다니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지요.
그래서 다시 부연 설명을 해 주십니다. 7-8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문인 나를 통하지 않고 양의 우리에 들어간 자들은 모두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양들을 이끌고 양들에게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절도요 강도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의 바리새인들은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화주의자들, 십일조, 주일성수, 헌금 강요..)
<9-10절>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자신을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양이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의 꼴인 생명을 얻는 길은 문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길 하나입니다.
(시118:19-20절) 보면 “19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20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의의 문을 열라고 말합니다. 의의 문을 구하는 자들이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말합니다.
즉 의의 문인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불의한 죄인임을 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가 그 의의 문으로 오신 생명의 주라는 것을 알고 예수를 자기 목자로 삼은 자들이 주님의 양입니다. 이들은 의의 문을 들어가며 나오며 약속된 꼴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 약속되어 있는 꼴이란 다름 아닌 구원이며 ㅎ님과의 화평입니다.
우리는 ㅎ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죄가 ㅎ님과 우리를 갈라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ㅎ님과 화목하기 위해 죄를 어떻게 해결해 보고자 하지만 우리에겐 죄를 다스릴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우리를 붙잡아 ㅎ님의 원수로 만들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목자로 등장하신 것입니다.
<벧전2:24-25절> 보면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내가 어떤 선한 행위를 한다고 그것이 하나님께 의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무엇을 해도 ㅎ님의 눈에는 악일뿐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더럽고 가증한 것들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실존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친히 저주의 십자가에서 ㅎ님의 심판을 우리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 대신 징계를 당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해 살아난 자들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양들은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고 죽은 예수가 의의 문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의 죄 문제를 단번에 영원히 해결하신 분임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자신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으로 삼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기쁨은 더 이상 이 세상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들의 기쁨은 예수께서 이루신 ㅎ님과의 화평입니다(히10:9~14, 주의 십자가로 거룩함을 얻었고 영원히 온전케 하심: 성도의 신분)
(롬5:1-2절) 보면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입니다. 주님의 양은 예수가 의의 문이라는 것을 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언제든 나아갈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제 자신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만을 듣는 자들입니다.
행함을 주장하는 다른 이들의 음성은 거짓됨을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도망쳐서 생명싸개 되시는 IX안에서 평강과 자유함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더 이상 나의 행함에 가치를 두지 않고 망극하신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음성만 듣고 그 분만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양과 목자의 관계이고, 죄인과 죄인의 구세주 IX의 관계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영이 된 자들입니다. 다시는 떼어낼 수 없습니다. 한 운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롭게 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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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