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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족, 회개, 용서의 삶 / 눅 17:1-4
여러분, 행복하세요? 그럼 행복한 삶을 살고 싶으세요? 누군가 행복의 일곱 가지 원리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첫째 : 부드러운 미소 (happy look) 행복은 웃는 얼굴에 찾아옵니다. 미소는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둘째 : 대화는 칭찬으로(happy talk) 행복은 칭찬하는 입술을 타고 옵니다. 칭찬은 받는 사람뿐 아니라 자신을 행복의 세계로 인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셋째 : 명랑한 언어 (happy call) 행복은 명랑한 언어에 묻어옵니다. 명랑한 언어는 주위에 행복을 전염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넷째 : 성실한 직무 (happy work) 행복은 일터에 찾아옵니다. 성실하게 자기 일을 감당할 때 행복이 찾아옵니다. 다섯째 : 즐거운 노래 (happy song) 행복은 노래할 때 들어옵니다. 마음에 노래가 있을 때 행복이 문을 열고 살포시 들어옵니다. 여섯째 : 아이디어 기록 (happy note) 행복은 기록할 때 오래갑니다. 행복했던 순간을 기록해두는 게 좋습니다. 행복도 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 감사 (happy mind) 행복은 감사의 다른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의 공통점은 그 중심에 감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왔든지 불행을 떨쳐버리고, 불행의 요소를 던져버리고, 불행의 조건들을 깨뜨려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의 얼굴에 항상 미소가 있기를 바랍니다. 대화에는 항상 칭찬이 섞이고, 꼭 명랑한 언어를 사용하기 바랍니다. 일터에서 직무를 성실하게 감당하고 일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행복 노트를 만들어 행복했던 추억들을 빼곡하게 기록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마음을 감사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1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복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실족할 때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스스로 실족을 당할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을 실족시킬 때도 있단 말입니다. 스스로 실족을 당한 것도 문제고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혹시 실족을 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전혀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닌데, 혼자 오해하여 마음 아파하고, 그 사람을 죽도록 미워해 본 적이 없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마 한 두번 정도는 실족의 경험이 있을 겁니다. 나중에 오해가 풀려 다시 예전의 좋은 관계를 회복했을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서로 서먹서먹한 관계로 힘들었던 경험도 있을 겁니다. 아니 그 때의 일로 지금까지도 그 사람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분도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에게는 치유가 필요합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폐쇄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의 문을 닫고 사는 사람입니다. 문을 닫고 좀체 열어주지 않습니다. 위로를 하러 찾아온 사람에게서 또 상처를 받습니다. 오해의 오해를 하여 아예 오해의 성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 성에 스스로 갇혀 지냅니다. 그곳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곳 생활에 너무나 힘들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즐기기도 합니다. 스스로 삭이다 안되면 속이 상하여 병을 얻게 됩니다. 물론 자기도 자기를 오픈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게 안됩니다. 마음뿐입니다. 그래서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켜버립니다. 그런 분들은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내적인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자아의 건강없이 육체의 건강없습니다. 자아가 건강해야 정신이 건강하고, 더 나아가 영이 건강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기본기가 탄탄하고 개방형 성격을 가진 사람은, 특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아도 치유받을 수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합니다. 내적 치유의 기본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인정하기 싫은 자아, 수치스러운 자아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다음 단계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저히 꺼내놓기 부끄러운 자아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 역시 거쳐야 합니다. 대개는 이 과정에서 치유를 경험합니다. 맺혀있던 응어리들이 풀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모든 문제가 자기에게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 단계는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스스로 실족을 당한 경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실족하게 한 경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실족을 당해서도 안되겠지만, 실족시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먼저 믿은 우리의 책임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를 쉬고 있는 자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이 시간 자신을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로 인해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없는가?’ ‘나 때문에 예수 믿다가 낙심한 사람은 없는가?’ ‘나를 보고 예수 믿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없는가?’ 우리 모두에게 설사 법적인 책임은 없다고 해도, 도의적인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그들에게 대해 직접적인 원인제공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도의적인 책임까지 회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직접적인 책임이나 법적인 책임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그렇다고 도의적인 책임을 전혀 무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말씀의 검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2절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경고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좀 더 정확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 공동번역성서를 참조하겠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연자 맷돌은 손 맷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한 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돌릴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로 소나 말이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맷돌을 목에다 달고 바다에 빠뜨린다고 했으니까 약간 과장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에 그런 풍속이 없기도 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에 따르면 고대 로마나 그리스, 수리아 등지에서는 실제로 그런 사형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주 극악한 범죄로서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해친 자들에게 그렇게 가했다고 합니다. 시체도 못 찾도록 하기 위해서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아 깊은 바다에 빠뜨려 버린 겁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이 그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실제로 그렇게 하란 말입니까? 아니면 단순히 겁주는 말로 해본 소리입니까? 실제로 그렇게 하란 뜻은 아닐 것 같고, 그렇다고 단순히 겁주는 말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그 만큼 남을 실족하게 하는 것을 주님이 싫어하신다는 뜻일 겁니다.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 점은 예수님도 인정하시지 않았습니까? 원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 말이 상대를 실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목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는데, 그 행동이 상대를 실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을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사실상 그건 불가능합니다. 미국의 링컨에게도 적대세력이 많았고, 인도의 간디에게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도 그런 사람이 많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실족의 대상으로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2절 앞부분에 보면 그 대상이 나옵니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이 작은 자가 누구냐를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작은 자”의 원어 ‘미크론 투톤’을 문자적으로 보면 ‘어린 아이들’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18:6절의 문맥에서는 작은 자가 어린 아이들을 가리키는 게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그렇지요? 그러나 본문의 상황은 같지 않습니다. 주위에 어린아이들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어린아이들을 직접 지칭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특히 이 작은 자입니다. 본문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니까? 예수님의 12제자를 가리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예수님 곁에는 12제자 말고 일반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12제자에 들지 못한 제자라면 이제 막 믿음의 문턱에 들어선 초신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9-13절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바울의 고백처럼 비록 작은 자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이기 때문에 실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입니다. 우리는 작은 자에게 자칫 소홀히 대할 수 있습니다. 작은 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신경을 덜 쓰기 쉽습니다. 한 마디의 말이라도 조심없이 할 수 있습니다. 무시하는 투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거칠게 대할 수 있고 예의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작은 자가 그리스도 밖에서는 실족당하는 게 당연합니다. 힘없고 빽없고 돈없는 사람이 무시당하고 차이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울타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는 겁니다. 이런 현상이 교회 안에 있음을 보고 야고보는 직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2:1-4절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고 예수님의 말씀이 특별히 작은 자라고 우대하란 말이 아닙니다. 작은 자를 특별 대우하란 뜻이 아닙니다. 교회를 작은 자들의 천국으로 만들고, 큰 자들은 교회에서 몰아내란 의미가 아닙니다. 작은 자에게는 실족하면 안되고, 큰 자들에게는 실족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자들이 교회 밖에서 실족 당하며 사는데 교회 안에 들어와서까지 실족당하면 되겠느냐는 겁니다. 주님은 작은 자들을 무시하지 않는 교회, 작은 자들도 소중하게 대하는 교회를 원하신 겁니다. 작은 자들이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회, 작은 자들이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이루라는 겁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소망합니다. 3절상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예수님은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말씀으로 받는 제자들에게 먼저 자신을 살필 것을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먼저는 자기를 돌아보라는 겁니다. 나도 죄 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재판정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용서받아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다윗이 범죄했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불의한 부자의 비유를 들 때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아주 화를 냈습니다. “그런 놈은 당장 죽여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사실은 왕을 빗대어서 한 말인데 말입니다. 우리도 ‘어떤 사람이 이런 죄를 범했다더라’ 하는 말을 듣고 비난하고 정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죄 지은 형제를 보며 자신을 살피고 스스로 조심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만 살피면 됩니까? 아니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혹 어떤 이들은 “용서하라”는 말씀만 나오면 귀를 닫아버립니다. 못 들은 척하고 넘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아세요. 용서는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힘들어도 맞닥뜨려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용서에 대한 잘못된 통념들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첫째,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잊어버리는 것이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란 과거에 매이지 않고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용서한 뒤에도 과거의 상처를 다시 떠올릴 수 있으나, 그 아픔까지 되살아나진 않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지워버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또 지워서도 안됩니다. 용서는 기억을 치유하는 것이지, 기억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훗날 과거의 상처는 우리를 위한 선물이 될 것이며, 성숙을 향한 디딤돌로 작용할 것입니다. 둘째, 용서는 묵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범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 죄의 심각성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수동적인 관용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없다면, 용서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범죄자의 도덕적 가치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가 저지른 죄의 비도덕성도 함께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용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 누구도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면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정이 있었다고 해서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정들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는 우리에게 달린 문제이고, 거기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따릅니다. 넷째, 용서는 화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진 관계의 회복, 곧 화해에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한다고, 반드시 깨진 관계가 회복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선 두 사람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득을 얻는 사람이 한 쪽만일 수 있습니다. 그 한 쪽이 누굽니까? 용서받은 사람이 아니라 용서를 한 사람입니다. 일단 화해의 손길을 내밀 때 분노에서 내가 해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용서는 수월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며 희생을 요구합니다. 용서는 힘과 용기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용서를 약자가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데이빗 옥스버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노를 제어하는 데는 분노에 굴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인격의 힘과 용기가 요구된다.” 용서는 분명 힘겨운 작업입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 사실은 훨씬 더 힘든 일입니다. 마음에 품은 증오심은 점점 자라서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사귐까지 오염시키고 맙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증오할 때 거꾸로 증오가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여섯째, 용서는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일시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용서는 과정입니다. 용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용서는 한 번의 발 디딤이 아니라 계속적인 발걸음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할 때는 신속히, 완전하게, 그리고 반복해서 용서하라.” 반복해서 용서하라는 말에서 용서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도 용서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습니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이 세상에 용서가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용서받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내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내가 먼저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둘째,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손해보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우리 안에 쓴 뿌리가 되어, 삶을 황폐시키고 영적인 성장에 걸림돌이 됩니다. 용서는 죄지은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려고 버티면 버틸수록 자신의 삶만 망가져갑니다. 셋째, 우리도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몸이 되었습니다. 용서받은 우리에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너는 용서하라”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우리가 용서를 받지 않았다면 몰라도 용서를 받은 이상 우리는 반드시 그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넷째,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을 하나님이 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수가 아닌 용서를 선택해야 합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복수하기로 마음먹은 자는 무덤을 두 개나 파는 격이다.” 복수 하겠다는 사람은 하나님을 제쳐두고 자신이 심판자가 되겠다고 교만을 부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용서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3절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용서는 나의 인격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내 인품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덧입을 때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께 용서받은 체험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용서받은 체험이 용서하는 밑거름이 된단 말입니다. 둘째는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것입니다. 본문 3절과 4절 끝부분을 각각 보세요.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회개란 뉘우침으로, 원점으로 돌아옴을 의미합니다. 죄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범하고 있는 자를 용서하면, 그건 죄를 묵인하는 것이요, 죄를 장려하는 셈이 됩니다. “회개하거든”이란 말씀에서 회개의 대상이 누구냐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에게 회개해야 하느냐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는 걸 말합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 돌아온 표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실 이것만 확실하면 그 다음은 해결됩니다. 다음은 당사자에게 회개해야 합니다. 4절 말씀을 잘 보세요. “네게 죄를 짓고, 네게 돌아와”입니다. 그럼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는 어떻게 합니까? 불쌍히 여기고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회개할 때까지 마음 문을 열고 기다려야 합니다. 어느 때라도 회개만 하면 즉시 용서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셋째는 무제한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4절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하루 일곱 번이라도”입니다. 마태복음 18:22절하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하루에 일곱 번이든, 며칠 걸려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든, 무제한으로 용서할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용서를 제한할 권리가 없습니다. 용서의 횟수에 대해 몇 번까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1200년대 초엽 유럽은 전쟁의 기운으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나라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모슬렘에 대한 미움의 설교를 전파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모슬렘을 죽여야 한다.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모슬렘을 몰살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모슬렘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미움으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십자군이 조직되고 파병하기 시작하여 결국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젊은 수도사가 탄식하며 이런 유명한 예언을 합니다. “이 십자군 전쟁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미움과 적개심이 동기가 된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미움과 증오에 혈안이 되어 떠나는 그들을 보며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그는 또 다른 십자군을 조직했는데 그것이 바로 “평화의 십자군”입니다. 평화의 십자군도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들은 가슴에 총칼대신 성경을 들고 나갔습니다. 적군을 품에 안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 평화의 십자군의 지도자가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는데 그 기도가 바로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입니다. 원래 이 기도는 누가 지은 것인지 모르는 무명의 기도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George Hurbert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자기가 건너할 다리를 자기 스스로 끊어 버리는 것이다.” 조지 맥도널드는 용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려는 것은 살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쁠지 모른다. 왜냐하면 살인은 순간적인 마음의 충동일 수 있지만 용서하지 않으려는 것은 냉정하고 고의적인 마음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않는 것이 자살하는 것과 다를 바 없고, 살인죄보다 크다는 그들의 말에 여러분은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오지에서 식구들과 함께 원주민을 선교하는 한 선교사는 이 마을에 파인애플을 들여오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깊은 정글 속에서는 싱싱한 과일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선교사는 한 원주민에게 품삯을 주고 파인애플 묘목을 심게 했습니다. 그후 3년이 지나고 마침내 파인애플 열매는 맛있게 익게 되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선교사 식구는 파인애플 밭으로 향했지만, 파인애플 밭에는 파인애플이 없었습니다. 이미 다른 누군가가 파인애플을 전부 따갔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선교사는 원주민들이 파인애플을 전부 따갔다는 생각에 자신이 무료로 운영했던 병원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병을 치료할 수 없어 선교사에게 병원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했고, 더 이상 두고 볼 수만 없었던 선교사는 병원 문을 열었습니다. 후에 선교사는 결국 파인애플을 도둑질한 원주민이 누군지 알아냈습니다. 바로 자신의 파인애플을 심었던 원주민입니다. 그 원주민은 자신이 파인애플을 심었으므로, 그 파인애플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이 마을의 원칙입니다. 선교사는 그 원주민에게 파인애플을 심어주는 대신 품삯을 주었으므로 그 밭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설명했지만, 원주민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어 선교사는 그 밭을 전부 그 원주민에게 주고, 새로운 밭에 파인애플을 심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선교사는 다시 원주민들을 찾아가 원하는 것은 모두 줄 테니 자신의 파인애플 묘목을 밭에 심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이 파인애플을 심는다면 그 파인애플은 자신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선교사는 자신이 갖고 있던 멋진 칼을 줄 테니 파인애플은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원주민들을 설득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이에 응했고, 다시 3년이 지나 파인애플 열매는 맛있게 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인애플은 여전히 없어졌습니다. 원주민들이 모두 따간 것입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선교사는 자신이 그 마을에서 운영했던 상점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이에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선교사와 함께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해서 그들이 원래 살았던 깊은 정글로 모두 들어가 버렸습니다. 원주민들이 모두 떠난 텅 빈 마을에 홀로 남게 된 선교사는 어쩔 수 없어, 다시 상점의 문을 열 테니 마을로 돌아와 달라고 원주민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원주민들은 여전히 파인애플을 가져갔습니다. 선교사는 여러 방법으로 원주민들이 파인애플을 가져가는 것을 막아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렀고, 마침내 선교사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손해 볼 것은 없어. 아무래도 나는 먹지 못할 파인애플이니 하나님께 그 파인애플 밭을 드리자.” 하나님께 파인애플 밭을 드리고 결심한 선교사는 원주민들이 파인애플을 가져가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젠 자신의 파인애플이 아니라 하나님의 파인애플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원주민들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로부터 그 밭이 하나님의 것임을 들은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파인애플을 훔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원주민들은 파인애플을 훔치지 않았고, 맛있게 익은 파인애플을 수확한 선교사는 파인애플을 원주민들과 나눠 먹으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선교사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어떤 것인지 깨달은 것입니다. ‘파인애플 스토리’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체하지 못할 분노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참을 수 없어 언성을 높이며 그에게 사과를 요구합니다. 세상의 시각에선 너무도 합리적인 행동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행동을 곰곰히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나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변화됐을 때 그들도 변했습니다” 책 ‘파인애플 스토리’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상대방 보다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짧은 이야기지만, 분노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나의 삶을 맡기는 것에 관한 이야기 ‘파인애플 스토리’는 네덜란드령 뉴기니아에서 7년에 걸쳐 일어났던 실화를 담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까? 행복한 삶의 원리로 사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실족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다. 혹 실족 당했다면 그것을 오래 묻어두어 상처로 발전하지 않게 하시고 이미 상처로 자리 잡았다면 가능한 빨리 치유받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실족을 시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상대를 용서하십시다.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큰 죄는 없습니다. 회개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받지 않아도 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아울러 그리스도께 용서를 받은 자로서 용서에 빚진 자들입니다. 용서는 사는 길입니다. 상대가 사는 길이요 동시에 내가 사는 길임을 알아, 용서하고 사랑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어 실족하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가슴에 용서를 품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러다보면 어느새 용서의 길 끝에 서서 모두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나 자신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의 명령따라 모두를 용서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와 같이 너희도 할지니라 / 눅 17:5-10
중국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만리장성입니다. 그 성의 높이가 9m이고 너비가 5m이며 길이가 무려 3,000km가 넘는 그야말로 세계 최대의 축조성이자 건축물입니다. 만리장성을 찾은 사람은 누구나 이같은 건축물의 위용 앞에서 감탄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만리장성은 원래 북방 유목민족의 잦은 침입을 막아낼 목적으로 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을 축조하고 난 후에 유목민족의 침입은 오히려 더 잦아졌고 난리를 더 자주 겪게 되었다고 합니다. 북방 유목민족은 높이가 9m가 넘는 성을 뛰어 넘을 수도 없었고 너비가 5m가 넘는 성을 부술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3,000km가 넘는 성을 돌아온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북방 유목민족들이 중국을 쉽게 침략할 수 있었을까요? 그건 성문지기들의 부패 때문입니다. 뇌물을 받은 문지기들은 유목민족들이 침입할 때마다 성문을 활짝 열어주어 중국을 맘껏 유린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엔 각 도시마다 크고 아름다운 교회당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습니다. 전주만 해도 최근 몇 년 새에 몇 십억에서 백억 이상의 공사비를 들여 교회와 선교관을 지었고 지금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 속에서 크게 환영받고 있지 못하고, 그리스도인 역시 특별히 인정받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따가운 비난을 받지 않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왜 그런지 여러분은 아시죠? 교회 속의 한 사람 때문입니다. 그건 교회 대형화하고 상관없습니다. 어쩌면 조직화하고도 무관합니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교회 키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 성장과 성숙에까지 신경쓸만한 시간이나 여력이 없었습니다. 요즘 의식이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교인을 잘 늘리는 목사는 유능하다고 쳐주고 한 사람의 신앙 성장과 성숙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사는 크게 인정해 주지 않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문지기 한 사람의 부패로 인해 그 엄청난 만리장성이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며 거울삼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의 신앙 성장과 성숙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은 제자들의 요청으로 시작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나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 겸손히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국의 한 보험회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영국 남성들은 운전을 하다가 길을 잃어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는답니다. 영국 남자 10명 중의 1명은 목적지를 안 가면 안 갔지 끝까지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1년에 평균 444km를 헛 주행 한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전주까지 왕복거리를 헛고생 하는 셈입니다. 반면에 여성 운전자는 길을 모를 경우 3/4이 즉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 답니다. 아마 이런 특징이 신앙생활에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의 믿음이 남자들의 믿음보다 더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5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탁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오랜만에 제자들을 사도라고 지칭했습니다. “사도”란 말의 원어 ‘아포스톨로스’는 ‘보내심을 받은 자, 파송된 자’란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예수님의 12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자기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제자로 훈련하셨습니다. 나중에 그를 파송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로 부르실 때 파송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5:10절하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누가복음 5장 앞부분에 베드로가 제자로 부름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훈련을 받은 후에 반드시 사역을 위해서 파송받아야 합니다. 최고의 훈련은 실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역을 하면서 실족을 당하기기도 했고 실족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용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과한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하루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니 자기네들 믿음 갖고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사도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더 큰 믿음이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더해달라는 요구에 책망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이 “용서하라”고 하면 “예”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주님이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너는 용서하라” 하면 “아멘”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거기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고 사족을 다는 것은 필요없습니다. 그것은 군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할 수 없다고 이유 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냥 말씀에 순종하면 될 일을 제자들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명령하실 때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능력밖의 것을 부탁하시는 무모하신 분이 아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보지도 않고 먼저 이유부터 대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말씀을 받을 때 순종하는 쪽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순종하기 어려운 이유를 먼저 생각해내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것도 첫째, 둘째, 셋째, 누가 들어도 수긍할 수 있는 변명거리를 기막히게 생각해냅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기면 자신이 그 일에 적임자가 아님을 얼마나 논리적으로 말해오는지 모릅니다.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을 듣고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잘 보세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전에도 한번 겨자씨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했었습니다. 누가복음 13:18-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아주 작은 겨자씨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 놓고 보면 극히 미세하여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씨라도 땅에 뿌려지고, 나무로 자라게 되면 가지에 새가 앉을 정도가 됩니다. 본문에서는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나 겨자씨가 뜻하는 바는 사실상 같습니다. 아주 작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겨자씨에는 작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작다는 이유만으로 겨자씨를 예로 든 것이 아닙니다. 먼지는 겨자씨보다 더 작습니다. 그런데도 먼지 같은 무생물을 예로 들지 않으신 것은 생명체로서 겨자씨를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무리 믿음이 작아도 그게 참 믿음이라면 역사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사실 믿음은 일차적으로 진짜냐, 가짜냐가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큰 믿음, 작은 믿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얼마나 커야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할 때 그대로 되겠습니까? 팔레스틴의 뽕나무는 매우 크고 뿌리가 튼튼하게 박혀 있습니다. 큰 것은 높이가 10-15m에 이르고, 가지 넓이가 직경 40m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누가 기도했을 때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면, 정말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다들 인정해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비록 작아 보이는 믿음일지라도 ‘살아있는 믿음’이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십니다. 그럼 우리에게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 믿음이 겨자씨보다 더 작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 믿음이 죽어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 믿음이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혹시 여러분의 믿음이 어찌 보면 겨자씨보다 작은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죽은 믿음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하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우리가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나 우리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에 받지 못합니다. 약 4:2하-3절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기 때문이라.” 주님은 엡 3:20절에서 바울의 고백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기적인 욕심으로 기도할 때 응답해주시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문제는 순수하지 않는 동기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헌신이 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산다고 하면서 자기 입장에서, 자기 편하게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말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세 사람이 하나님께 자기 소유를 얼마나 바치는 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먼저 땅에 줄을 긋고 제가 가진 돈을 쏟습니다. 그리고 줄 오른편에 떨어진 돈은 하나님께 바치고 왼편에 떨어지면 제 주머니에 집어넣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땅에 작은 원을 그린 후에 모든 돈을 쏟습니다. 그리고 원안으로 떨어진 돈만 제가 갖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드립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지막 한 사람이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께 바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저의 돈 전부를 하늘로 드립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다른 두 사람은 마지막 사람의 헌신과 결단에 감탄했습니다. 그러자 마지막 사람이 덧붙였습니다. “저는 제 돈 모두를 하늘 높이 던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공중에 머무는 돈은 하나님 것이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제 돈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믿음을 지키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생활속에, 신앙속에, 말 속에, 행동속에 이런 신앙자세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 같지만, 결국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에 치중하고, 하나님께 많이 드리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우리들의 믿음을, 직분을, 섬김을 이용하고 활용하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십시오.
미국의 명문 대학 중에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템플 대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학은 그 지역 교회인 템플 교회에서 창립한 대학입니다. 원래 템플 교회는 작은 교회로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시설이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늘 북적거리지만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학교 어린이 중에서 불치병에 걸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병약하여 교회에 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얼마 후 이 소녀는 불치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소녀의 베개에서 짧은 편지와 동전 57센트가 나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목사님, 더 넓은 교회를 짓도록 제가 모은 헌금입니다. 넓은 교실을 지어 주세요.” 목사는 소녀의 편지를 장례식에서 소개하였으며 이 이야기는 기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교회 교인들은 이 소녀의 고귀한 믿음을 통해, 육신의 떡보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위하여 열심히 헌신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큰 교회당뿐만 아니 명문대학인 템플대학을 창립하게 되었고,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이라는 세계적인 병원도 함께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한 소녀의 겨자씨와 같은 헌신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할 때, 오늘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기도를 할 때,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7-9절 ‘너희 중에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예수님은 한 종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믿음 타령하지 말고, 자기 일에 성실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종은 자기 위치에서 한번도 흐트러짐이 없이 성실하게 주인을 섬깁니다. 주인의 명령이라면 자기 몸도 돌보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밖에 나가서도 충성하고, 집안에 들어와서도 충성하고, 주인이 볼 때도 충성하고, 주인이 보지 않을 때도 충성했습니다. 잠시 쉴 틈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주인에게, 이렇다할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맡겨진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주인의 밭을 갈고 양을 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와도 일은 계속 됩니다.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주인이 식사를 다 할 때까지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이 정도 안팎으로 충성하는 종이라면, 주인이 무척 신임하고 귀히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도 종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저 할 일을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지도자이자 사상가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때 학비가 넉넉지 않아서, 어느 미국인 가정의 집안 청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집안 청소를 얼마나 깨끗이 했던지 주인이 집안을 살펴볼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과연 그가 어떤 청년이기에 그 적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성의껏 일하는가가 궁금했습니다. 한 번은 안창호 청년을 불러서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왔나요?” “예, 저는 태평양 건너 작은 나라 코리아에서 왔습니다.” “공부하느라 시간이 부족할 텐데 청소는 적당히 해도 되요. 나는 다만 유학생이라는 말을 듣고 다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해서 일을 맡긴 것뿐인데.” “아닙니다. 저로서는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 한 사람 때문에 우리 조국이 욕을 먹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 후로도 주인은 안창호를 유심히 지켜보았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주인이 감동해서 그를 불러다가 학비에 해당되는 돈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You are a nice gentleman. 당신,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먼저 용서할 때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작은 것이지만 이웃과 나눌 때 불신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자기가 진 것에 대해 깨끗이 승복할 때 승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성실할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옆사람에서 해보세요.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믿음 타령하지 마세요. 순종하세요. 실력 핑계대지 마세요. 높이 평가받았으면 감사하세요. 주위 환경 탓하지 마세요. 그때 진짜 실력을 발휘하세요. 그래서 먼저는 주님께 그리고 교회 식구들에게 더 나아가 이웃들에게까지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는 말을 다 듣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10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큰 믿음으로 거만하게 구는 것보다 작은 믿음으로 겸손하게 사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주인이 명한 것을 다 행한 후에 그 종이 스스로 하는 말이 뭡니까? “무익한 종이라.” 그 종이 정말 무익해서 그렇게 말한 겁니까? 아닙니다. 그는 주인의 가정과 사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유익한 존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에 이런 사람이 어떤 회사나 조직에서 일한다면 그 회사는 크게 발전하고, 그 조직은 크게 활성화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 하는 것은 겸손한 자세를 나타냅니다. 스스로를 낮추어서 하는 말입니다. 10절을 다시 보세요.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그런데 10절을 잘 보시면 종이 주인에게 그렇게 했다고 ‘세상에 그런 종이 어디 있느냐’며 종을 칭찬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는 데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던 율법사에게 한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들려주시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눅 10:37절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와 같이 너희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사실 똑같은 구조로 된 명령 아닙니까? 이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세요.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예수님이 어떤 이론을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적용이 없는 실천이 없는 이론적인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실천하셨습니다. 말씀을 받는 이들에게 바라는 것도 들은 말씀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받는 것이 좋습니다. 말씀받기를 즐겨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사모함으로 받아들여야 그에게 복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받은 말씀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주신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이란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세요? 무조건 살리는 말씀이란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살고 말씀에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뜻입니다. 신 30:19절중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되고 복이 되지만,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사망이 되고 저주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여러분에게 생명의 말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입으로 망치는 사람 있습니다. 가만있으면 남들이 다 알아주는데, 그걸 참지 못해서 애써 한 일을 그만 그르치고 맙니다. 그보다 더한 사람이 있습니다. 일도 다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 공치사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공치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힘들어합니다. 일을 겨우 마치기는 하지만 기쁨도 잃고 사람도 잃어버렸습니다. 전에 질렸다며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기쁨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처음엔 힘들지만 서로 부딪히며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이꼴저꼴 보기 싫으니까 그저 예배만 드리겠다는 생각은 버리셔야 합니다. 살아봤자 좋은 꼴 보기 힘드니까 자살하겠다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마음에 맞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나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나의 약점을 보완해 줄 사람으로, 하나님이 특별히 붙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여주신 사람을 내 맘에 안든다고 비판하고 정죄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맡기신 일 중에서는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명심하세요. 함께 해야 할 일을 자기 혼자서 하다가 지쳐서 탈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주님도 기뻐하실 일이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해야 할 말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우리가 어떨 때 자신을 가리켜 무익한 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자신의 부족을 절실하게 알 때입니다. 자기의 모자람을 깊이 느낄 때입니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알고 자기 지식의 짧음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 주제 파악을 했을 때입니다. 주제 파악을 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제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데 더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국어를 배웠으면 자기 주제 파악할 줄을 알아야 하고, 산수를 배웠으면 자기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하고, 지리를 배웠으면 자기 위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 앞에서 자기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어떨 때 자신을 가리켜 무익한 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 때입니다. 자기가 한 일에 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깊이 인식할 때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큰일을 했어도, 아무 것도 자랑할 수 없는 무익한 종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역자에게 있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갔던 리빙스턴이 그의 생애 말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 아프리카에 가서 일한 것을 두고 희생했다느니, 수고하고 애썼다느니 말들 하는데, 나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 나는 다만 주님으로부터 받은, 도저히 되갚을 수 없는 빚을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서 힘썼을 뿐이다. 그것이 무슨 희생이란 말인가? 나는 결코 희생한 적이 없다.” 우리는 교회 봉사하면서 ‘서운해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서운해 병’에 한번 걸리면 봉사하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의욕적으로 시작하지만 끝에 가서는 흐지부지해지고 맙니다. 처음에는 신앙의 경주를 잘 하다가 마지막 무렵 언덕에 이르러 대부분 탈락하고 맙니다. 그 언덕을 넘어서기만 하면 정말 멋진 봉사자가 되고, 하나님이 귀신 쓰시는 일꾼이 되는데, 그 언덕 아래서 그만 주저앉아 버리곤 합니다. 그 언덕은 일명 ‘알아달라’ 언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서운해 병’에 걸려 혼자 고생해본 적이 없습니까? ‘서운해 병’에 걸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줘본 적이 없습니까? ‘알아달라’는 언덕을 넘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해본 적이 없습니까? ‘알아달라’는 언덕 아래 지금도 주저앉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언제까지 ‘서운해 병’으로 고생하시렵니까? 언제까지 ‘ㅍ’으로 고생시키시렵니까? ‘알아달라’는 언덕이 그리도 높습니까? 그런 언덕 정도는 가뿐하게 넘어야지요? “서운하게 해드려 너무 죄송해요”라고 할 때 “언제요” 하고 웃을 수 있어야하지 않겠어요? “정말 몰랐어요”라고 사과해 올 때 “무슨 그런 일을 가지고 그러세요”라며 미소 지을 수 있어야겠지요? 또 제자들이 해야 할 말로 제시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요?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당신은 어떻게 그걸 용서할 수 있느냐”고 물어올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 뿐이다”고 대답해야 한다는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일년 12달, 52주를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주일성수를 할 수 있느냐”고 물어올 때 “교인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한 것 뿐이다”고 대답해야 한다는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수입의 십분의 일을 떼어서 바칠 수 있느냐”고 물어올 때 “신앙인으로서 기본적으로 할 일을 한 것 뿐이다”고 대답해야 한다는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남들보다 몇 시간이나 일찍 나와 봉사를 할 수 있느냐”고 물어올 때 “먼저 믿은 자로서 꼭 할 일을 한 것 뿐이다”고 대답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외의 말은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을 가지고 생색내고, 마땅히 할 일을 한 걸 가지고 티내고, 기본적으로 할 일을 한 걸 가지고 표낼 때가 있습니다. 아시죠? 그건 예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께 명령받은 것을 다 행했어도,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또 교회로부터 받은 직분을 잘 감당했어도, 우리가 교회 앞에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겸손한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걸 예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기뻐하신다면 무조건 하고 주께서 싫어하신다면 무조건 관두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믿음은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겸손은 우리 삶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잘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힘 있게 자라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믿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겸손한 자세로 남은 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오직 겸손한 태도로 여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로,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는 사역자로 우뚝 서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며 사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기를 원하지만, 연약하고 부족하여 쓰러지고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말씀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신 것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깨닫고 결단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겨자씨 만한 믿음일지라도 이를 통해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눅 17:11-19
옛날 어느 마을에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우산 장사를 했고 작은 아들은 소금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매일 두 아들 걱정하면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날씨가 좋은 날은 우산 장사하는 큰 아들을 걱정하고, 비가 오는 날은 소금 장사하는 작은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매일 걱정으로 아까운 세월을 다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 할머니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 할머니의 문제가 환경에 있습니까? 할머니 자신에게 있습니까? 일차적으로 할머니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할머니가 걱정을 털고 웃을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생각을 이렇게 바꾸면 됩니다. 날씨가 좋은 날은 소금 장사를 하는 둘째 아들을 생각하면서 “야, 오늘은 소금이 잘 팔리겠구나” 하고 생각만 바꾸면 됩니다. 반대로 비가 올 때는 우산 장사를 하는 큰 아들을 생각하면서 “야, 오늘은 우산이 잘 팔리겠구나” 하고 역시 생각만 바꾸면 됩니다. 2019년 마지막 주일을 맞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감사하며 사십니까? 불평하며 사십니까? 감사하면서 한 해를 살아오셨습니까? 원망하면서 살아오셨습니까? 환경은 그대로입니다.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감사의 환경으로 바뀌면 좋겠지만 어디 환경이 쉽게 바뀝니까? 환경이 바뀔 때까지 감사하는 것을 미룬다면, 그 때까지 여러분은 불행하게 살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생각이 바뀌면 환경을 보는 눈이 바뀝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환경도 바뀝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꼭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도 불평하는 사람들과 환경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환경을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환경을 감사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환경은 보는 시각에 따라 감사의 환경으로 보일 수도 있고, 불평의 환경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주일예배 때 마다 날씨에 대해 이렇게 감사기도를 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좋은 날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입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길은 온통 빙판이 되어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악천후의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겨우 모인 20여명의 교우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오늘 예배 때도 목사님이 날씨에 대해 감사기도를 하실까?” 당연히 그 날도 목사님은 날씨에 대해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같은 나쁜 날씨의 주일을 1년에 겨우 한 두번만 주심을 감사합니다.”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온천이 솟았고, 그 옆에서는 얼음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올라 동네 여인들은 빨랫감을 가지고 와서 온천에서는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는 빨래를 헹구어 집으로 가져가곤 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광객이 안내하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참 좋겠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네요?” 그러자 안내원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이 마을 사람들은 불평이 더 많습니다.” “아니, 왜요?”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는 것까지는 좋은데, 왜 빨래 비누는 나오지 않느냐고 합니다.” 두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감사하는 사람은 항상 감사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항상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할 제목을 찾고, 불평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불평거리를 찾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행복하고, 어떤 사람이 불행하다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감사하는 사람치고 불행한 사람을 보지 못했고, 불평하는 사람치고 행복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보셨어요? 감사와 행복은 정비례합니다. 불평과 행복은 반비례합니다. 감사지수를 높이면 행복지수는 자연스럽게 올라갑니다. 불평지수를 높이면 행복지수는 자연스럽게 내려갑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행복하게 살기를 정말 원하신다면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의 시각을 갖기 바랍니다. 감사지수를 최고점으로 끌어올리시기 바랍니다. 잃어버린 감사의 마음을 속히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감사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2019년 마지막 주일을 맞은 성도 여러분, 그동안 우리가 감사를 잊고 살아오지 않았나를 한 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그동안 상실했던 감사를, 잊고 있었던 감사를 다시 회복하는 계기로 삼아야겠습니다. 불평을 극소화하고, 감사를 극대화하는 전환점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금 살피고 있는 본문은 익히 잘 아는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열 사람의 나병환자가 있었습니다. 아홉 사람은 유대 사람이고,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격리되어서 마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그 근처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께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에게 자기들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열 명 모두의 병이 깨끗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열 명의 행동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뒤는 아홉 사람과 한 사람이 갈라졌습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돌이켰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께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최고의 경의를 표하면서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열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드리는 것을 보면서 놀라셨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린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감사에 대한 중요한 교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감사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하는 일이 쉬울 것 같습니까, 어려울 것 같습니까? 감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감사한 사람은 열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감사한 사람과 감사하지 못한 사람의 비율이 1:9였습니다. 그만큼 감사는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점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감사가 없으면, 내가 아직도 타락한 성품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사실 몹쓸 나병에서 나음을 입은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아홉 사람은 타락한 성품에 짓눌려서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큰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나병보다 더 몹쓸 병인 죄라는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겨지지 않는 죄짐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인 사망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것으로 끝났습니까? 아니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를 천국의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까? 땅에서 누리는 복도 약속하셨습니다. 먼저 안전한 삶을 보장하셨습니다. 이사야 43:1-2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은 안전한 삶을 보장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욕심이 충만해서 그렇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목자가 되셔서 안전한 삶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또한 이 땅에서 풍성한 삶을 약속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0:10절하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따르기만 하면, 풍성한 꼴을 얻고 더 넘치도록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사하지 않는다면, 나병에서 고침받고 감사하지 않았던 아홉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나병에서 고침받고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인보다 더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홉 사람보다 천 배나 만 배나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떤 시각장애인이 자신의 소원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내가 눈을 뜬다면, 나는 제일 먼저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맘만 먹으면 자기 얼굴을 몇 번씩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만 내면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아내의 얼굴을, 자식들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개만 들면 언제라도 높고 푸른 하늘을 맘껏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서 감사해 보셨습니까? 자고 있는 자녀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감사해 보셨습니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감사해 보셨습니까? 맑고 파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 보셨습니까? 새벽 하늘에 보석처럼 빛나는 별빛을 맞으며, 새벽기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너무 감사를 잊고서 살아갑니다.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많은 축복 중에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그 한 가지만 해도 감사의 조건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남의 물건을 주웠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주인을 찾아 돌려주거나, 아니면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이 가져버리면, ‘유실물 횡령죄’에 해당되어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와 반대로 누군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주인에게 돌려주었을 경우, 만약 그 주인이 제대로 감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법은 반드시 감사를 표시하도록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유실물법 제4조는 “유실물의 주인은 습득자에게 물건 금액의 100분의 5 이상 100분의 20 이하의 범위에서 보상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 습득자가 주인의 보상이나 감사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소송을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법에 따르면,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됩니다. 참 재미있는 세상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감사를 법으로, 또 감사의 범위까지 법으로 정한단 말입니까? 그런데요. 이 법은 성도인 저와 여러분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시사해 줍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처음부터 내 것인 것, 나의 재료를 가지고 내가 설계해서 내가 만든 것이 과연 몇 개나 될까요? 우선 나 자신부터 내 것이 아니고, 내 인생도, 또 내가 가진 모든 것도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 남의 것, 아니 우리 주님의 것이지요. 곧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의 것으로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주인이신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루를 살면서, 그 하루를 허락하신 주님께, 또 그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다 마련해 놓으신 주님께, 과연 몇 번이나 감사하면서 살아오셨습니까? 혹시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았습니까? 혹시 감사하기는커녕 불평불만이 더 많지는 않았습니까? 실수로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돌려주는 사람에게 5%에서 많게는 20%까지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 법적인 규정이라면,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우리가 원 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고민은 ‘감사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만큼 감사할 것인가?’여야 합니다. 5%의 감사? 20%의 감사? 이런 고민을 해야 맞다는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로 하든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작은 것부터 감사할 때,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과정을 거쳤을 때, 결정적인 감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감사에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작은 일부터 감사해보시기 바랍니다. 일상에서 감사거리를 찾아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보다 풍성해질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왜 감사해야 합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사를 원하시니까, 당연히 자녀된 우리는 아버지께 감사해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나란히 담을 하고 이웃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사람이 만나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식사를 대접했던지 밥을 먹기 전에 한 가지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게 어떻겠소?” 그랬더니 불신자가 한 마디 했습니다. “믿고 안 믿고야 당신 자유지만, 예수 믿는 것을 나한테까지 강요하지 마시오!”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인은 혼자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불신자에게 넌지시 말했습니다. “사실은 우리 집에도 당신과 똑같이 생각하는 놈이 하나 있지.” 그 불신자는 내심 반가웠습니다. 그놈이란 다름 아닌 대학에 다니는 그 집 아들 녀석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물었습니다. “그 집에도 제법 똑똑한 친구가 한 명 있구먼. 누구인가? 대학 다니는 자네 아들인가?” 그리스도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닐세, 우리 아들은 나보다 신앙이 더 좋다네. 내가 아까 말한 놈이란 우리 집에서 기르고 있는 돼지를 말한 걸세." 하나님은 돼지에게는 감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된 우리들에게는 감사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나병환자 열 명이 다 나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병은 불치병입니다. 한 번 걸렸다하면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병에 걸린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는데, 그건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입니다. 잠시 격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버림받는 것입니다. 정부로부터 어떤 보조를 받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의 면회가 허락되는 것도 아니고, 저주받은 운명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정말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이지, 삶에 대한 애착은 눈꼽 만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란 사람을 만나 나병이 거짓말처럼 나아버렸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제사장에게 가고 있는데,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일이 생겨났습니다. 천형으로 불리는 나병이 깨끗하게 고쳐진 것입니다. 이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 사례를 해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자기들에게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은 단 한 사람뿐입니다.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 유대인들에게 천대받고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놀라움의 표현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적어도 예수님은 두 가지 면에서 놀라셨을 것입니다. 먼저는, 마땅히 돌아와야 할 유대인들이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께 감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열 사람이 다 예수님을 놀라게 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놀라게 한 내용은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부정적인 면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긍정적인 면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우리 역시 유대인들처럼 부정적인 면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할 수도 있고, 사마리아인처럼 긍정적인인 면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감사할 줄 안다면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실지 모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때 여러분은 그 아홉에 속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그 한 사람에 속할 자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를 원하십니다. 감사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감사를 표현하길 바라십니다. 바울을 통해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면서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감사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이제는 아시겠지요? 우리가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억지로라도 우리의 감사를 받으실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었을 때 아들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기다리던 아들입니까? 75세에 아들 약속을 받고 25년 만에 아들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감사한 흔적이 없습니다. 이삭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마음은 ‘아홉은 어디 있느냐’며 허탈해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같았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창 22: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마 아브라함은 그 때서야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못했던 자신을 크게 뉘우쳤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이삭을 감사의 제물로 바치려고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의 감사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감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맙시다. 감사에는 남보다 앞섭서 합시다. 감사에는 남보다 후하게 합시다. 셋째, 사실은 우리를 위해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를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구요? 하나님께서 욕심이 많으셔서 자기 몫을 챙겨가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감사하면 우리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 그 자체가 복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감사해도 넉넉하게 하지 못합니다. 감사의 시늉만 냅니다. 감사의 시늉만 내도 아홉 사람보다야 나을지 몰라도 그게 복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빼앗긴다고 생각하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감사는 자발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억지로는 할 수 없습니다. 기쁨이 빠진 감사는 참된 감사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감사에 부담이 따르기도 합니다. 부담없는 감사는 어쩌면 감사가 아닐지 모릅니다. 그건 적선에 불과하겠죠. 그러면 본의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거지취급하는 셈이 되고 말죠.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의 이름을 높여주십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의 영예를 보존해주셨습니다. 분문 말씀은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읽혀졌습니다. 그 때마다 사마리아 사람은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사람은 불명예를 입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높이신 겁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귀감을 보여주신 겁니다. 여러분의 영예가 보존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하나님께 높임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리는 감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크게 영광 받으실 수 있을 정도로 감사도 크게 하시기 바랍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했더니 예수님이 그에게 구원을 선물로 사례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돌아와 감사하고 너무나 귀한 것을 얻습니다. 그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너무나 값진 구원의 선물을 그냥 얻었습니다. 그 어떤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얻을 수 있었고, 신령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께 사례를 받고 싶지 않으세요? 예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어떤 것도 아끼시지 않는 분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아끼시지 않았던 분이 그 어떤 것을 아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당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셨습니다. 로마서 8: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감동되시면 막 주십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감사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어느 날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맞은편에는 한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그 부인은 계속해서 주변환경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좌석이 불편하고, 시트가 지저분하고, 청소도 제대로 안 되어 있고, 승무원도 불친절하다는 등 불평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때 부인의 불평을 듣고 있던 남편이 필 박사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들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저는 변호사이고, 제 아내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필 박사는 그렇게 불평을 하는 사람이 무엇을 제조하는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실례지만 부인께서는 어떤 것을 제조하십니까?” 그러자 남편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아내는 불평을 만들어내는 제조업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제조업에 종사하십니까? 불평제조업입니까? 감사제조업입니까? 물론 감사를 제조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불평제조는 너무나 쉽지만 감사제조는 무척 힘듭니다. 제조에 있어서 환경이 너무나 중요한데, 우리가 처한 모든 환경이 감사할 수 있는 환경만은 아닙니다. 불평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더 많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감사하지 않으면 스스로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감사해야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아브라함처럼 감사하지 않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감사하는 자의 이름을 높여주시기 위해서, 감사하는 자의 영예를 보존해 주시기 위해서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선물을 주시고, 하늘의 기쁨과 신령한 행복을 안겨주시기 위해서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바라기는 작은 것부터 감사하는 감사체질이 되시기 바랍니다. 생각이 감사로 가득차고, 입술에 감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감사거리를 찾아내는 눈과, 감사하기 위해서 돌아오는 발과, 감사를 사례로 표현할 줄 아는 손을 갖기 바랍니다.
2019년 마지막 주일을 통해서 감사의 마음이 넘쳐나고, 행복한 은혜로 풍성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감사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감사를 다음으로 미루지 말게 하옵소서. 내가 고침 받은 때문에 감사하고, 우리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감사하고,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오늘 믿음의 눈을 새롭게 떠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오늘의 감사가 하루만의 감사로 그치지 말고, 일생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 눅 17:20-37
60여 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던 노부부가 85세에 교통사고로 같이 죽고 말았습니다. 죽기 전 그들은 할머니의 권유로 건강식을 하며 10년 동안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채소, 보양 식, 절제 등. 그들이 함께 죽어 천국의 문에 다다르자 베드로가 맞이하며, 멋진 주방과 거품 목욕탕이 있는 커다란 저택으로 안내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곳이 당신들이 살 곳이라고 하자, 노인이 가격은 얼마냐고 물었고 베드로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무료라오. 여기는 천국이오.” 다음날 그들은 멋진 골프 코스에 가서 골프를 즐겼습니다. 노부부에게는 매일 골프를 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고, 그 골프장은 매주 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골프장의 모습을 본 따 바뀌었습니다. 노인이 그린피는 얼마냐고 묻자 베드로가 답했습니다. “여긴 천국이라고 했지 않소. 무료로 칠 수 있소.” 그 다음날 멋진 뷔페에 간 그들은 세상에서 볼 수 없던 산해진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노인이 다시 값을 묻자 베드로가 약간 화가 나서 대답했습니다. “아직도 이해를 못하오? 여긴 천국이고 공짜란 말이오!” 약간 움찔했던 노인이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그럼 저지방 저칼로리 음식이 있는 곳은 어디죠?” 베드로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설명했다. “당신이 먹고 싶은 것은 아무거나 다 먹을 수가 있어요. 그렇게 먹더라도 당신이 아프거나 살이 찐다거나 병들어 죽는 일은 없을 거요. 여긴 천국이니까 말이오.” 그 말을 듣자 노인은 쓰고 있던 모자를 집어 던지고, 소리를 버럭 지르며 발로 밟아댔습니다. 베드로와 할머니가 그를 진정시키고 자리에 앉혔습니다. 분에 못 이겨 씩씩대던 노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이 할망구야! 이게 다 당신 탓이란 말이야! 세상에서 당신이 그 맛없는 채소나, 건강식품이나, 미숫가루나 이런 것을 먹을 생각을 안 했더라면, 벌써 10년 전에 이곳에 왔을 거라구. 이 좋은 천국이 무엇이 모자라서, 세상에서 그렇게 오래 살려고 별짓을 다 했냐구.” 영감님이 천국에 가보더니 그렇게 자기 아내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때의 문제입니다. 때를 아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알맞은 때에 승부수를 던지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때 중에는 ‘그 때’가 있습니다. ‘그 때’란 지나가버린 때를 말합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때를 말합니다. ‘그 때’를 자주 들먹이면 들먹일수록 행복과 멀어집니다. ‘그 때’는 그 때일 뿐입니다. ‘이 때’가 중요합니다. ‘이 때’는 지금을 말합니다. 현재를 말합니다. 이 때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때 실패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 때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습니다. 이 때를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이 때를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 때를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에게는 또 다른 때가 있습니다. 그 때와 이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때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에 알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 때를 잘 살아온 것은 중요합니다. 이 때를 지혜롭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맞춰 사는 것이 그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무 때나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차매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가 차매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대속의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한 마디로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무 때나 죽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이르기 전에는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을 피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 곧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이르니 도망가실 수 있었음에도 자진하여 붙잡히셨습니다. 다윗은 사무엘로부터 일찍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사울왕은 두 차례의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실수를 통해 폐위를 선고받았습니다. 무엇보다 민심이 이미 다윗에게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가 몇 번이나 있었지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참았습니다. 때가 차매 왕으로 자연스럽게 옹립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알고 하나님의 때에 맞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20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궁금한 점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의 궁금증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는 겁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은 믿었습니다. 어느 때에 임할지가 궁금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나 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이었나 봅니다. 누구한테 물어봐도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던 그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때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정확한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느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주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사실을 믿는 것 자체를 두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때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없게 임한다고 하심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실 목적입니다.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인들은 하나님나라를 가시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지상에 눈에 보이게 정치적으로 임하는 하나님나라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기만 하면 자신들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샬롬을 누리게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의 관점에서 보신 겁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며, 하나님의 실질적인 통치가 이루어진다면, 어디나 할 것 없이 하나님나라로 보신 겁니다. 장소의 개념을 뛰어넘으신 겁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세요. 21절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여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너희 안에"란 말은 언뜻 ‘너희 마음 속에’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러나 학자들 중에는 너희 안에를 사람의 마음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일리가 있다고 보는 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대상이, 예수를 믿고 복음에 순종하는 제자들이 아니라, 마음에 악이 가득한 바리새인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데오도레즈안 같은 학자는 "너희 안에"를 ‘너의 주위’나 ‘너희 환경 속에’라고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 속’으로 이해를 하든, ‘제자들 속’으로 이해를 하든 예수님이 내재적인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신 것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하나님나라가 아닌,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믿는 자 속에 성령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혼자 지내도록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마 28:20절하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내시어 우리 안에 내주하게 하심으로 이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고, 우리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신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비록 보지는 못했어도 우리 안에 하나님나라가 임한 줄 믿습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때 갈팡질팡해서는 안됩니다.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내 심령에 성령님이 계시고, 내 안에 말씀이 있다면 절대로 흔들리지 마세요.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도래한 하나님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심으로, 그분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의 심령에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아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중간기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미’ 쪽으로 치우쳐도 안되고, ‘아직’ 쪽으로 치우쳐도 안됩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를 누리며 살되,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나라를 즐길 줄 알아야 하고, 진지한 삶의 자세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즐기는 쪽에만 관심을 가지면 세속화되기 쉽고, 진지한 삶에만 관심을 가지면 삶의 기쁨이 없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미’와 ‘아직’의 적절한 조화, ‘이미’와 ‘아직’의 절묘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22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예수님께 하나님나라의 때를 물어보았던 바리새인들은 돌아갔습니다. 깨닫고 간 것인지 말이 통하지 않아서 간 것인지는 몰라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이르리니’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있었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때를 물어올 때는 대답해 주시지 않더니 제자들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때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어 잠깐 물어보러 온 사람과 늘 함께하는 제자들과 똑같이 대하신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중에게도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도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제자들과 보내셨습니다. 소수의 제자들을 양육하고 훈련하여 사역자로 세우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가르침은 제자들만 모아놓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의 첫 번째 조건으로 든 게 뭐예요? 마가복음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지식이 있느냐 얼마나 배웠느냐, 가진 게 얼마나 되느냐를 따지지 않고 함께 있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먼저 자기와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함께 있으며 예수님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배우고 인격을 본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실시하신 제자훈련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된 교회와 함께 해야 합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인격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저 교회만 왔다갔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쉬울 때만 예수님 찾으면 바리새인처럼 취급받을 수 있습니다. 응답없는 기도, 외면당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때가 이르게 됩니다. 그 때는 인자의 날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제자들은 그 날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죽기 전에 재림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자의 날과 관련하여 흔들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23-25절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혹 스스로를 그리스도라고 하며, 미혹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때 동요되지 말라는 겁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 때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오신다는 말입니다. 이 편에 있는 사람이나 저편에 있는 사람이 거의 동시에 번개를 볼 수 있듯이, 주님의 재림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더구나 인자의 때를 논하기에는 이른 게, 아직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때보다 앞서가지 말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급하게 돌리지 않습니다. 한 개인의 삶의 프로그램도 하나님의 때에 맞춰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십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때를 분간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6-27절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였으며’ 인자의 때를 두 가지 실례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노아의 때와 롯의 때입니다. 먼저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노아의 때를 평범하게 묘사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일상적인 일입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 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될 일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멸망의 이유라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푸는 열쇠는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에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은 기간은 한두 해가 아닙니다. 1-2년이 아닙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을 때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왜 경고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노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밖에 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그 자체가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정신 팔려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 무관심한 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듣는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홍수가 내리기 일주일 전까지도 말씀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7: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노아는 이 말씀을 듣고 달려 나갔을 겁니다. 홍수로 인해 멸망할 것을 생각하면 앉아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루 종일 전했으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제 6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눈을 뜨자 말자 다시 전하러 갔습니다. 온 종일 전했으나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비가 내리기 전날까지 그렇게 했을 겁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홍수로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무관심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시대입니다. 오직 먹고 마시고 즐기는 쾌락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에 마음 빼앗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무관심한 쾌락, 하나님을 부정하는 가정,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꼭 인위적인 심판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파괴되고 결국은 깨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는 자의 최후를 알고 있기에 떨릴 뿐입니다. 28-30절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둘째로 롯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노아 때와 비슷합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었습니다. 역시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을 짓는 것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들에 정신이 팔려있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특별한 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19:5절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그들을 상관하리라”는 말은 동성연애를 하겠다는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특히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폭력이 난무한 도시였습니다. 도덕도 없고 윤리도 실종된 도시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이혼율이 급증하고 가정이 급속도로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외도하는 것을 로맨스쯤으로 여기는 풍조입니다. 자신이 동성연애자인 것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동성간의 결혼이 합법화된 나라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성전환수술을 통해서 남자가 여자로, 여자가 남자로 둔갑하는 일도 있습니다. 스와핑이라고 해서 부부를 맞교환하여 섹스를 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갈지 모릅니다. 얼마나 더 타락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머리에 머물러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31-32절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예수님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롯의 처는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멸망한 사람의 대표적인 모형입니다. 롯의 아내는 의로운 자의 아내였습니다. 경건한 자의 아내였습니다. 롯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을 몰랐으나, 믿는 남편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남편이 소돔 사람들의 더러운 행실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을 겁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졌을 겁니다. 이게 얼마나 큰 복입니까? 예수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복입니다.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이 엄청난 복입니다.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불교신자가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당의 딸로 태어나 대를 이어 무당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라는 찬양을 듣고 배우는 것은 너무너무 큰 복입니다. 말이 통할 때부터 기도하도록 훈련받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지 모릅니다. 모태신앙인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부모 잘 만난 겁니다. 여러분, 신앙 있는 아내 만난 것을 커다란 복으로 생각하세요.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입니다. 신앙을 가진 남편과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세요. 고맙게 여기세요. 불신 남편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롯의 아내는 너무나 행복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행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또 그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녀의 남편인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함께 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헤어지기 전까지 모든 것에 동행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났으나, 자기가 생생하게 보고 느꼈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롯은 자연스럽게 자기 아내에게 이 사실을 간증형식으로 들려주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롯의 아내는 비극적인 생의 결말을 맺습니다. 바로 소금 기둥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녀가 멸망하게 된 원인을 보면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그녀가 멸망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성경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거짓말입니까? 간음입니까? 동성연애였습니까? 살인이었습니까? 도둑질입니까? 아닙니다. 단지 뒤를 돌아본 것 때문입니다. 창세기 19:26절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그럼 왜 뒤를 돌아본 것이 문제가 됩니까?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9:17절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 하는 문제를 축복의 문제로, 상급의 문제로 보는 시각은 위험합니다. 순종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롯의 아내가 일부러 돌아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말씀을 생각하고도 ‘좀 돌아보면 어때’ 하고 의도적으로 돌아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긴 들었으나 마음에 새겨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말씀에 붙들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중심에서 비껴나 있고, 보화가 중심에 서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보통 때는 교인입니다. 주일날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는 교인이기를 거부합니다. 평일날은 입과는 달리 행위로는 그리스도인임을 부인합니다. 세상에서 덜 빠져나온 그리스도인 한 발은 그리스도께, 다른 한 발은 세상에 걸치고 있는 양다리 그리스도인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되돌아갈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31절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그 날 어떤 일이 있어도 뒤로 돌이켜서는 안된다고 엄히 경고하십니다. 뒤를 돌아보아 멸망한 롯의 처를 기억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끊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길 원하는 자들에게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눅 9:23절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는 겁니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뿌리를 자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접붙임을 받으라는 겁니다. 세상의 품에서 빠져나와 예수님의 품에 안기라는 겁니다. 세상 자랑하는 것을 관두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는 겁니다. 세상의 화려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복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라는 겁니다. 롯의 아내는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창세기 19:16절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천사의 손을 잡고도 얼마든지 뒤를 돌아볼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으면, 천하없는 설교자가 말씀을 전해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을 아예 모르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들을 만큼 들어, 알 만큼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게 위험합니다. 마음의 돌이킴 없이 알고 있는 교리적인 지식이 그들을 구원해주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세상에서 완전히 등 돌렸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온전히 돌이켰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접고 말씀을 받아들이세요. 33-35절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2절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면, 제자로 살되 오직 예수님만을 푯대로 삼고, 좌로나 우로나 조금도 치우치지 말며,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제자로 살되 34절에는 밤에도, 35절에는 낮에도 깨어있으라는 겁니다. 언제 주의 재림이 임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날 버려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제자로서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라는 겁니다. 37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제자들의 반응은 실망스럽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시간을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장소를 묻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다 치고, 제자들이 그런 질문을 하니 참 딱할 노릇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나라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23절을 다시 보세요.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예수님이 제자들의 질문을 듣고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좋으신 예수님은 ‘지금까지 설명했는데 뭘 들었냐’며 혼내시지 않고 한 마디 짤막한 말씀을 하십니다.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글쎄요. 제자들이 이 말씀을 알아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부분적인 장소, 곧 특정한 장소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주검이 있는 장소, 곧 부패와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나, 예수님의 재림과 그에 따른 심판이 임할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제자들도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쉽게 풀어 설명해주셨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깨달을 때 그 말씀이 복이 됩니다. 말씀이 깨달아질 때 순종하기 위해 손발이 움직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깨달음의 영으로 역사하시어, 말씀을 들을 때마다 깨달아지고, 깨달은 말씀이 순종으로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때에 맞게 사는 것이 복입니다. 때에 맞게 살기 위해서는 때를 알아야 합니다. 때를 알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1월은 새로 시작하는 달입니다. 날씨가 예전에 비해 푸근합니다. 이 계절은 기도하기와 말씀읽기에 딱 좋은 때입니다. 우리 앞에 언젠가는 찾아올 주의 재림을 잘 맞이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말씀과 기도로 항상 깨어 있는 성도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했습니다. 인자의 날,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노아 시대 사람들이나 롯 시대 사람들처럼, 세상만 바라보고 육신의 일만 하다가 부끄럽게 되는 사람이 갈보리교회 성도들 중에는 한 사람도 없게 하옵보소서.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이 있고, 인자의 날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