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34
우리나라 간장외과 발전 선도
국내 최초 의료보험조합 설립
장기려
국내 최초 간(肝) 대량 절제수술 성공 및 수술방법 개발
인술, 봉사, 박애, 무소유를 실천한 사회봉사자
학력
1932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1940 일본 나고야제국대학 의학박사
경력
1940 ~ 1945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 과장
1945 ~ 1946평양도립병원 원장
1947 ~ 1979 평양의대, 서울대, 부산대 등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1951 ~ 1976 복음병원 초대 원장
1968 ~ 1989 청십자의료보험조합 대표이사
포상
1961 대한의학협회 학술상
1979 라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
1991 제1회 호암상
1996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6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우리나라의 의료복지혜택이 선진국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아픈 곳이 있다면 부담 없이 병원에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1989년 의료보험제도가 전 국민적으로 확대되기 전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있습니다.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의사였고 자신의 급여를 모두 환자 치료를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며 평생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친 ‘한국의 슈바이처!’
한국 간장외과의 개척자이며, 의료시스템의 설계자인 장기려 박사입니다.
장기려 박사! 어릴 때부터 의사를 꿈꾸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 출생인 장기려 박사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졸업 후 경성의전 외과학교실에서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 교수의 지도를 받아
외과학에 입문하게 됩니다.
장기려 박사는 백인제 교수로부터 당시 위험한 병으로 꼽히던 충수염을 연구과제로 받았고,
1936년까지 4년 간 약 270건의 실험을 진행한 결과,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 세균학적 연구로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당시 10명도 되지 않던 조선인 의학박사 중 한 명이였던 장기려 박사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의과대학 교수와 같이 성공이 보장된 길을 갈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백인제 교수는 장기려 박사에게 학교에 남아 같이 연구하자고 제안했으나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보내고 싶었던 그는 교수직과 대형병원을 단호히 거절하고,
가난한 환자들이 많은 평양의 기홀병원으로 갔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 발발…
그해 12월 평양, 당시 국군 야전병원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던 장기려 박사는 전쟁이 계속되자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로 합니다.
양친과 부인, 자녀까지 열 명의 가족이 함께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여 가족과 따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때 폭격 속 수많은 피난민들 사이에서 둘째 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과 떨어지게 됩니다.
장기려 박사에게는 급히 차로 이동하는 중에 스치듯 본 모습이 가족들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는 마음은 장기려 박사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게 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부산으로 피난을 온 장기려 박사는 1951년 10월,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위해 부산에 있는 교회의 창고를 빌려 ‘복음진료소’란 이름으로 무료진료를 시작합니다.
나무판자를 수술대로 삼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뛰어난 의사가 있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고
장기려 박사의 따뜻한 미소와 환자를 대하는 성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이후 UN에서 지원해 준 대형 천막 세 개를 각각 진료실, 수술실, 입원실로 꾸민 ‘천막병원’에서
장기려 박사는 무려 6년 동안 매일 100여 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부산시민들이 전쟁 내내 무료로 진료해준 장기려 박사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신뢰를 담아 모금을 하였고 1956년 10월 마침내 천막을 걷고 새 건물을 세워 현대식 대형병원인 지금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을
신축하게 됩니다.
장기려 박사는 이에 감사하며 지역사회와 소외계층, 장애인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더욱 헌신하게 됩니다. 그는 복음병원 개설을 시작으로 청십자사회복지회, 장애인재활협회 등 각종 복지단체를 세워
의료복지사업, 장학 사업, 탁아소 운영 등을 추진했습니다.
취약 계층이 건전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우며 몸소 사랑을 실천한 장기려 박사는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며 많은 존경을 받게 됩니다.
장기려 박사는 인술만큼이나 의학자로서의 업적도 뛰어났습니다.
그는 대학원 졸업 후 한국인에게 발병률이 매우 높은 간암으로 연구 범위를 넓혔고
1943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간암 절제 수술에 성공했습니다.
그가 진행한 ‘간내 혈관 및 담관계의 형태학적연구’, ‘간 절제수술 절제단의 처치법’, ‘간경변증시 간 절제의 한계 및 간의 급성 실조시 대상의 방법’ 등의 연구는 한국의 의학을 발전시켰으며 간장외과학을 국내에
정립하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1959년 간우협절제수술(간 대량 절제수술)을 우리나라 최초로 성공했습니다. 당시 열악한 수술기구와 진단기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술에 성공했다는 것이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 1979년에는 20년간 한국에서 실시된 189건의 간 대량 절제 수술 사례를 수집 및 분석하여
간암의 부위에 따라 수술법을 달리하는 방법을 개발합니다.
장 박사의 간에 대한 연구와 수술은 우리나라 간장외과 및 외과학의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여러 의과대학의 외과학 교수로 재직하며 의료인재양성에도 힘쓴 교육자입니다.
현재 대한간학회의 전신인 ‘한국간연구회’ 창립에도 기여하였으며, 1974년 한국 간연구회 초대 회장직을 맡아 간 연구 분야의 학문적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학문적 업적을 바탕으로 1960년 보건의 날 공로상과
1961년 대한의학협회 학술상(대통령)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가 간 대량 절제술에 성공한 10월 20일은 “간의 날”로 지정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으며,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될 정도로 대한민국 의학계에 공헌한 바가 큽니다.
장기려 박사는 의료활동을 넘어 사람들에게 필요한 제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가난한 환자를 구제하기 위해 1968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창설하였는데, 이는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이자 현행 의료보험제도의 효시로 그의 탁월한 업적 중
하나입니다.
이후 1975년에는 의료보험조합 직영의 청십자병원을 개설하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깊은 신앙심을 기반으로 65년간 인술을 베풀며 봉사, 박애, 무소유 실천했습니다.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자신의 월급으로 수술을 해주었고, 그마저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밤에 몰래
환자를 탈출시키기도 했다는 일화는 그의 박애주의적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장기려 박사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반신이 마비되었을 때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의촌을 직접 찾아가 진료를 해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타인을 위해 봉사하였습니다.
장 박사는 생전 ‘한국의 슈바이처’, ‘행려병자의 아버지’,
‘성스러운 산(聖山)’ 등으로 불리며,
아시아의 노벨상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해
제1회 호암상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상했습니다.
평생 자기 집 한 채 가지지 않고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던 그는
1995년 12월 추운 겨울날 새벽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기려 박사가 남긴 간장외과 연구의 탁월한 업적과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푼 박애주의의 실천정신은
타계한 지 20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으며,
후세의 수많은 논문과 저서들이 그의 학문적 업적과
의료윤리, 사상과 신앙, 이타적 삶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환자가 돈이 없어서 의사를 보지 못하고 죽으면 그거 불상타 나는 그런 사람을 위해서 의사가 되겠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장기려 박사의 업적을 기리고자 그를 2018년 16인의 과학기술유공자 중
한 명으로 지정하였습니다.
간장외과학을 개척한 위대한 의사이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진심으로 봉사와 인애를 실천한
사람인 장기려 박사의 고귀한 삶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앞으로도 그 뜻을
이어 가게 될 것입니다.
그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삶을 우리는 기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