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죽고 나 살기’가 아닌 `너도 살고 나도 살자’”
백양사 방장 추대된, 80~90년대 민주화운동 불교계 대부 지선 스님 인터뷰
지선스님(68)은 80~90년대 민주화운동의 불교계 대부였다. 광주 무등산 증심로길의 문빈정사는 그가 자리를 잡은 1981년부터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었다. 문익환·리영희·김근태·고은 등 민주화운동의 전설적 인물들이 그와 머리를 맞대고 아픔과 희망을 나눈 곳이다. 20년 전 세상을 뜬, 동갑내기 김남주 시인의 결혼식에 그가 주례를 서준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출가했던 천년고찰 백양사(전남 장성) 방장에 추대됐다. 방장은 총림의 정신적 지주다. 총림이란 강원,선원,율원,염불원 등을 모두 갖춘 곳으로 조계종에서 송광사,통도사,해인사,수덕사,범어사,동화사,쌍계사 등 8개 밖에 없는 대찰이다. ‘재야 인사’만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의외다.
추대식(20일)이 열리기 전인 지난 16일 광주 무등산 증심사길에 있는 문빈정사로 그를 찾아갔다. 그는 20년 전 혈기 왕성한 모습이 아니었다. 당시 78킬로였던 몸무게가 지금은 57킬로그램 밖에 안나가니, 우연히 길에서 만나면 못 알아볼 수도 있다. 그러고보니 세월이 많이 갔다. 그가 재야에서 활동한지도 어언 20년이 훨씬 넘었다.
경내 조그만 토담집에 단순소박하기 그지 없는 방도 군살이라곤 보이지않는다. “이 먼 곳까지 뭐하러 왔다냐”는 질책 아닌 질책 속엔 차 운전도, 스마트폰도, 카메라 조작도 못하는 옛날 촌 스님의 천연이 선연해 오히려 놀랍다.
“조실과 방장은 살활검(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선방에서 정진하는 수십명 개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 그 정도 안목도 없는 이가 조실·방장을 하면 그 절은 망한다. 남이 뜯기는 모기 하나 막아줄 힘이 없으니 모기장 구실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방장을 한다는 말인가.”
백양사는 그의 스승으로 성철 스님과 함께 대표적인 선지식으로 꼽히는 조계종 전종정 서옹스님(1912~2003)의 바통을 이은 지종 스님 (1922~2012)이 열반에 든 뒤 ‘지종 스님 열반에 즈음해 터진 백양사 도박 사건’ 등의 여파로 파란고해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방장도 추대되지못했다. 백양사 문중에서 추대 움직임이 일자 그는 “자기 문중에 사람이 없으면 다른 문중에서라도 좋은 분을 모시는 게 우리의 아름다운 옛 전통이라면서 밖에서 훌륭한 스님을 모셔오라”고 했고 문중 스님들은 그에게 “어떻게 산중(절)이 비었는데, 개인 생각만 앞세우느냐”고 실갱이를 벌이다 또 6개월이 흘렀다. 곡절 많은 그의 삶 만큼이나 순탄치않은 추대였다.
그가 백양사에 출가할 때까지만도, 그런 곡절은 꿈 너머 일이었다. 그는 자기 집 사랑채에 모여 새끼를 꼬는 어른들에게 구성진 타령조로 이야기책을 읽어주던 산골 소년이었다. 그는 15살에 두친구와 함께 가출해 백양사에 들렀다가 한 동자승이 외는 타령조의 염불이 가슴에 콕 박혀 거기서 살기로 작정했다. 전국에서 가장 가난한 절로 꼽혔던 백양사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에게 쌀 한되를 받아 먹여주고 재워주고 도시락까지 싸주는 밥장사로 연명해가는 절이었다. 함께 온 친구들은 며칠 몇달을 못견디고 떠났지만, 그는 매일 수백명씩 밥을 해대야하는 모진 노역을 견뎌냈다. 새벽예불과 참선 뒤 아침 짓고, 강원서 공부하고 점심밥 짓고, 나무하고 빨래하고 저녁짓느라 번뇌할 틈이 없는 삶이었다. 그 틈틈이 수학여행 온 학생들에게 절 해설사가 되어 설명해줬다. 달덩이같은 그의 모습을 본 여학생들의 편지가 한보따리씩 온다고 우체부가 투덜거리곤 했다. 그런 편지를 감추고 한통도 보여주지않던 은사스님은 절 생활 3년이 지나도 학교를 보내주지않았다. 그렇게 여자가 따르니 밖에 나가면 당장 퇴속할게 틀림없다는 거였다.
주위의 도움으로 백양사에서 운영한 정광고를 나와 서울에 올라가 성북동 청련암에서 동국대 이사장인 기산 임석진 스님을 시봉하며 경기대 국문과를 다녔다. 창동쓰레기장에서 하루 100원씩 받고 코피를 쏟으며 쓰레기분류작업을 하고, 전철비 5원을 아끼려 서대문까지 달려다니면서도, 기산 스님으로부터 능엄경 법화경 화엄경의 요체를 들으며 불법의 맛을 들이던 때였다. 군대에 갔다 병으로 중도 제대한 뒤론 백양사에서 일찍부터 교무, 총무 소임을 맏아야했다. 그가 천년고찰인 영광 불갑사 주지를 맡은게 불과 26살 때였다. 칡넝쿨이 온 전각을 뒤엎을 만큼 방치돼 폐사가 되기 직전인 1972년 불갑사를 맡은 그는 산골 사찰에 연실보타원이란, 요즈음의 대안학교를 만들어 극빈자와 장애인들을 교육시켰다. 그는 산골 아이들을 위해 이 일을 했지만 정부에선 그를 새마을운동의 최우수 인물로 온갖 상을 주고 치사를 했다.
그가 제주교구 본사인 관음사 주지로 간게 30살 때였다. 최연소 교구장이었다. 절 외에 세상을 몰랐던 그가 최초로 절 밖의 세력과 맞닥뜨린 곳이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전국의 사찰을 유린한 ‘10·27법란’으로 보안사로 끌려가 주지직을 사임한 뒤 문빈정사에 왔다. 그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등산객들이 사찰문을 발로 차곤했다. 저명 승려들이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초청법회를 연데 분노한 시민들이었다. “불교계 전체의 뜻이 아니다”고 겨우 달래보내면 다음날엔 다른 등산객이 오줌을 갈기고 가기도 했다. 그들의 울분을 달래면서 그는 중생들의 아픔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생 출가자였다. 6·10항쟁때 공동의장을 맡았다가 내란음모죄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죽는 것은 괜찮은데, 원없이 참선을 못해보고 죽는 것만이 아쉬웠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운동시간이니 나오라는 교도관의 종용도 무시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을 했다. 너무도 절박한 시간의 집중 때문이었을까. 아침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저녁이 되곤 했다. 감옥이야말로 진정한 선방이었다. 다시 1989년 조선대학생 이철규씨 변사사건 때 의문사진상규명위원장을 맡았다가 6개월간 광주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할 때도 ‘얼마나 좋은 수행처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앉아 화두를 들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둥둥 떠다니고, 아름다운 색들이 천변만화를 일으키고,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베이징 시내가 보이는 등 경전 속에서만 봤던 ‘경계’ 인 ‘식광’(識光)이 발동하곤 했다.
백양사 주지로서, 방장인 서옹 스님을 모시고 ‘참사람운동’을 전개한 그는 1999년 총무원장 선거에 나섰다가 석패했다. 설상가상 위암에 걸려 수술까지 받았다. 안거(3개월 집중 참선 수행)는 무리라는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백양사 선방 운문선원으로 들어갔다. 암수술 직후임에도 불굴의 정진력을 보이자 “지독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 뒤 첫 암수술이 잘못돼 재수술을 받았지만, 그는 16년간 단 한차례의 안거도 빠지지않고 정진해왔다. 마치 재야의 그는 전생사였던 양 정신하는 사이 켜켜히 쌓인 앞산이 한순에 무너져 내리며 경계가 트였다. 그는 운문선원의 선원장격인 유나로서 백양사에서 서옹 스님의 선기가 끊이지 않게 했다. 그러나 그가 세간을 등진 것은 아니다.
“세간이 없다면 불세간의 종교와 수행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종교와 수행도 중생을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진도 세월호 사고 현장에 달려가 위로한 것도, 추대식 전 사망자를 위한 천도재를 지낸 것도 자비와 수행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는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선승의 법담을 건넨다.
“운동도 농사짓듯 해라. 뭐든 속히 뭔가를 얻어내려는 조급함과 성과주의, 소영웅주의가 일을 망친다. 증오심과 원한으로 하는 운동은 반드시 실패한다. 운동은 너죽고 나살자는 게 아니고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것이다. 미워하고 죽이는 것은 불교에도 어긋난다. 상대방을 각성시켜 함께 살자는 것이다. 깨어있으면 급진보도 수구도 되지않고 합리적인 보수 합리적 진보가 되는 것이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