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마음을 모읍니다♱
[찬 송] 44장(지난 이레 동안에)
[공동체 고백] 사도신경
[성시 교독] 교독문 104번(종교개혁주일)
[찬 송] 269장(그 참혹한 십자가에)
[말씀읽기] ‘요한계시록 1장 1절 ~ 3절’
[특 송] ‘혀니엄마아빠’
[강 론]
“나는 안다(계1:1-3)”
오늘 설교제목의 주어(“나”)는 삼위하나님이십니다. 삼위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10,29 참사 1주기를 맞으며 다시,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월호의 진실도, 10,29참사의 진실도 다 아십니다. 마침내 그 진실은 드러날 것이고, 우리 자녀들은 더 안전한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평생 혹은 십 수 년을 해 왔습니다. 목회자로서 여러분에게 과도한 희생을 강요하지는 않았나하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최선의 목양을 위해 애썼음을 조심스럽게 밝혀둡니다, 그렇다고 제가 신실한 종이었다고 자고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현존하는 예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왜, 교회가 필요할까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의 끝’이 다가오고 있고, 인류의 여정도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마지막 때가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립니다(계1:7, 22:20). 교회는 이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기다리는 교회는 ‘멈춤’상태에서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라 가는 사람들이죠(“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 계14:4). 따라서 예수께서 그러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곳은 어디든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오셨고, 그 나라를 선포하며 사셨으며, 이 때문에 희생되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존재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고난 속에서도 받은바 사명을 다 하셨듯이, 교회도 어떤 시련이 찾아온다하더라도 맡겨진 사명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 종국에는 승리하셨던 예수님처럼 교회공동체도 당장은 실패하는 듯 보이고, 때로는 좌절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승리할 것을 믿으며 말이죠.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었을 때 기록했다고 합니다. 2,3장은 소아시아 7교회에 보낸 편지로 되어 있고, 4장부터는 요한이 환상으로 본 미래에 있을 일을 예언적 필체로 기록합니다. 2,3장은 편지 형태를 띠고는 있지만 설교입니다. 7교회의 “7”은, 일주일이 7일로 꽉 차 있듯이 “7”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를 뜻합니다. 상징이죠. 따라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우리 복음교회에 보내는 편지이고, 설교라고 저는 읽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우리의 상황은 너무나 흡사합니다. 교회가 제국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고 있고, 기다리던 주(主)의 재림은 늦춰지고 있는 현실 말입니다. 그때처럼 지금도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의해 교회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직간접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자행되는 박해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예수님의 재림은 계속 늦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박해 받은 초기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쓰여 진 계시록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되리라 믿습니다.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예수그리스도는 그 사실을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증언하게 하십니다. 계시록의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1-3). 마찬가지로 평생을 통해 성경을 읽고 숙고하고 있는 저는 여러분의 목사로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동시에 그리스도의 증언을 오늘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십니까? 그 말씀을 강론하는 시간에 집중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삶에서 노력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복된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직접 하셨던 설교가 기억나는군요. 8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이고…….(마5:3-12)
부지런히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늘 강론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때가 가까웠습니다(3). 어떤 때일까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 마치는 때, 종말의 때,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이 때는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게 임할 것입니다. 7절을 보시죠, “구름 따고”오시는 예수님의 표상처럼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람들도 알아 볼 수 있도록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도래(파루시아)할 것입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주님께서는 “내가 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수고와 인내를, 또 우리가 참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며 게으르지 아니하였음을 아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2:2-3절, 에베소교회). 우리가 얼마나 큰 환란을 당했었는지, 우리가 당했던 궁핍도(9절, 서머나교회).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사는지도 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13절, 버가모교회). 버가모교회가 있었던 ‘버가모’는 황제 숭배가 적극적으로 시작된 곳이라고 합니다. “사단이 사는 곳”, “사단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묘사된 버가모에서 ‘안디바’라는 성도가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목도하고도 믿음을 굳게 붙들었던 버가모교회의 교우들을 안다고 말씀해 주셨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내가 안다’고 말씀해 주시기를 고대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어딥니까? ‘버가모’같습니다. 사단의 권좌가 있는 곳, 사단이 사는 곳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바알과 맘몬이 판치는 세상(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희생자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굳게 붙잡고 계신 여러분을 ‘내가 안다’고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사업(일), 사랑, 믿음, 섬김, 인내를 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19절, 두아리라교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었던 말씀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3:8, 빌라델비아교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했느냐는 것(큰 성과)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작은 능력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그 모습 그대로 충성스러운 종으로 살아간다면, 작은 것이라도 조금씩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마지막 때에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3:10)”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크고 엄청난 일을 하려고 하지 마시고, 작은 일이라도 힘닿는 대로 충성하며 사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2:23). ‘내가 안다’는 주님의 말씀이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경고도 됩니다.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 회개하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3:1-3, 사데교회).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의 재림을 도둑을 맞듯이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면 다가오는 마지막 때를, 가까운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3:15, 라오디게아교회).”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표상을 봅니다.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19하-20).” 문밖에서, 우리의 마음과 삶에 들어오기 위해 노크하시며 서 계시는 주님을 봅시다. 얼마나 인격적이십니까? 창조주, 역사의 주관자, 심판주로서 어울리지 않는 겸손함입니다(윌리엄 홀만 헌트의 ‘세상의 빛’이라는 성화 참고).
말씀마치겠습니다. 요한의 권면처럼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때가 가까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이 마치는 때, 종말의 때,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때 말입니다. “... 그러하리라 아멘(7)”,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노크하시는 주님께 문을 열어 드립시다(3:19-20). 깨어, 회개합시다. 완벽한 사람이나 교회는 없습니다. 회개함으로 늘 새로워지는 사람과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돌아보지 않음으로 사망으로 나아가는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깨어서 회개함으로 나날이 새로워지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가 간직한 소중한 것(생명과 영생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등)을, 그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주님은 곧 오십니다(3:11).
처음이요 끝(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1:4,8,18)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1:5). 그분께서 당신의 오른 손을 내밀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1:17).
[찬 송] 458장(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공동체 기도] 주기도(찬송가 63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