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지(金尙智)
자는 사겸(四兼)
경상도사(慶尙都事), 정7품(正七品) 관직
전라북도 남원에서 울산으로 이거
본인(本人) :
고려 공민왕(恭愍王) 13년 갑진년(甲辰年) 출생(出生)
갑진(甲辰) 1364년 9월 16일 생
을사(乙巳) 1425년 2월 8일 졸
묘 : 울산 웅촌면 검단산(熊村面 檢丹山) 계좌(癸坐)
배(配) :
파평윤씨(坡平尹氏) 참의공(參議公) 녀(女)
을사(乙巳) 1365년10월 11일 生
을사(乙巳) 1425년 9월 7일 忌
묘 : 동원(同原)
▶도사 (都事)
고려시대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종7품 관직.
정원은 2인이었다. 문종 때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서성이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병합되어 첨의부(僉議府)로 되면서 다른 상서성 관속들과 함께 혁파되었다. 1298년 충선왕에 의해 첨의부의 관직으로 잠시 둔 적이 있으나 곧 혁파되었다.
1331년(충혜왕 1)에는 삼사(三司) 안에 두었다.
1356년(공민왕 5) 삼사가 폐지되고 대신 상서성이 부활됨에 따라 상서성의 관직으로 환원되었다. 1362년 다시 상서성이 삼사로 대치되자 삼사에 소속되었으며, 아울러 정7품 관직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충선왕 때는 수령관(首領官)으로서 경력(經歷)과 함께 설치되었다가 곧 혁파된 적이 있다. 이 때 정원은 2인이었고, 품질(品秩)은 알 수 없다.
또한 고려 말기에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삼군도총제부(三軍都總制府)·절제사(節制使) 기구 등에도 두었다. 즉, 1390년(공양왕 2) 도평의사사에 경력사(經歷司)가 더 설치되면서 5·6품, 정원 1인의 문반 관직으로 설치되었으며, 삼군도총제부에는 1391년 역시 5·6품, 정원 1인의 관직으로 두었다. 절제사 기구에 있어서는 1389년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도절제사로 바뀌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두었다가, 1392년에 혁파되고 녹사(錄事)로 대치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종5품 관직으로 중앙의 충훈부(忠勳府)·의빈부(儀賓府)·충익부(忠翊府)·의금부(義禁府)·개성부에 두어 서무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또한 외관으로서 경력과 함께 수령관으로 통칭되면서 관찰사(觀察使)를 보좌하였다.
세종 때 경력이 혁파됨으로써 아감사(亞監司)라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서반의 종5품 관직으로 중추부(中樞府)에 1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에 4인을 각각 두었다.
▶참의(參議)
조선시대 육조의 정3품 관직.
정원은 이·호·예·병·형·공조에 각 1인씩 총 6인이다. 각 조의 차차석 관원으로 참판과 함께 판서를 보좌하는 좌이관(佐貳官)이었다. 지금의 차관보에 해당한다. 그러나 단순한 보좌관이 아니라 각 조의 3당상(三堂上) 중 1인으로서 판서와 거의 대등한 발언권을 행사하였다.
이는 각 조의 중요사무가 3당상의 합의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관례화되어 있었으므로 참판이나 참의가 반대하면 판서가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정4품직이었던 육부의 시랑(侍郎) 2인 중의 하나에 해당하고, 1392년 조선왕조 개창 직후에 개칭된 의장 2인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것으로, 1405년(태종 5) 1월 관제개정 때 비로소 좌·우참의 2인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1434년(세종 16) 무신들을 위하여 첨지중추부사 4인을 증치하면서 육조의 참의 각 1인이 감원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종래의 참의·정랑·좌랑 등의 직을 폐지하고 각 부서에 참의 10∼15인씩을 두게 되었으나 이름만 같을 뿐 그 성격과 기능은 달랐다.
대표적인 청요직으로서 6승지 및 삼사(三司)의 장관과 함께 가장 명망 있는 인물들이 임명되었고, 또 여기에 임명되면 그 출세가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김상지(金尙智) 선조님
울산에 세거하는 남원김씨 일족의 시조(始祖)로 모시는 선조님이시다.
제가 남원김씨 문중의 일에 대해서 문외한인지라...
남원김씨의 시조되시는 김사지(金四知) 선조님과는 어떠한 관계가 되시는지?
관련 역사기록이 없기에 답답한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 문중의 어르신 중 한 분이 나타나셔서, 이를 해결해 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