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일시 : 2010년 8월 21일 02시 - 21시
산행 구간 : 남산 상서장 들머리에서 날머리인 선덕여왕릉까지
산행 거리 : 51.3km
총소요시간 : 19시간
평균이동속도 : 시간당 2.7km(후미 기준)
산 행 자 : J3 클럽 전국 식구
주요구간별 산행시간
교동 상서장(02시) - 금오산(03시 04분 ) - 마석산(06시 44분 ) - 원고개(09시 23분 ) - 가나안목장(11시 30분 ) - 토함산(13시 10분 ) - 명활산성(19시 01분 ) - 선덕여왕릉(21시)
산 행 도
경주 천년의 향기 산행 개통일이다.
천년고도 경주의 남산지구와 마석산, 토함산, 명활산성, 낭산의 선덕여왕릉까지 51.3km의 거리를 가진 의미있는 산행이다.
옛 신라인들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진 천향길을 걸으며, 나와 그들이 무엇이 다를 까 생각해 본다.
바람과 같은 삶.
그들이 천년 전에 불었던 바람이라면, 나는 이제야 부는 바람이 아니겠는가?
삶에 집착할 것이 무엇이냐..
그저 물처럼 바람처럼..
세월의 바람은 오늘도 불고, 내일이면 나 대신 우리 아이들이,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이 호흡하며 부대낄 공간이 아니겠는가..
물같고 바람같은 인생살이에서 내 무엇을 잡고 남은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오늘 산행 들머리인 상서장
고운 최치원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
오늘 20명의 전사들이 경주 천년의 향기를 맡기 위해 산행을 시작합니다.
첫 표지판
남산성 표지판
다양한 갈림길이 있군요.
J3의 보석 오드리델뻔님.
ㅎ 그런데 오드리가 누군가요?
큰 소나무 분재를 보는 것 같습니다.
1시간여를 올라오니 금오산입니다.
밤시간이라 주변을 둘러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군요.
그렇지만 하루중에 산행을 끝낼려면 포기되어지는 부분도 있어야 겠죠.
이 작은 남산에 골도 많고, 능선도 많네요.
다음엔 대낮에 와서 이곳 저곳 둘러보고 싶습니다.
산행이 아닌 유적탐방 순례라도 함 다녀야 겠어요.
유적을 옳게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움도 참 크네요.
이영재
여기에도 무슨 사연이 있을 것도 같은데..
옛 봉화대를 지나 첨으로 금줄을 넘습니다.
죄송합니다..(꾸~벅)
마석산 가는 길에 새 아침이 열립니다.
신라시대 사람이나 지금 우리나, 이때의 심정만큼은 같지 않을까요?
희망, 시작, 설레임....
경주 남산의 근육질
남산도 암산이군요.
오가리재
마석산 가는 길에 새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방장님이 오가리재로 명명하셨다는군요.
무슨 뜻인가 물어보니, 사람들이 오고 가리라~~ ㅎ
좌측 그림은 우리가 가는 마석산입니다. 우측 그림은 지나 온 고위봉과 금오산
마석산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길중에 이곳 마석산에서부터 토함산까지가 호미지맥길이랍니다.
마석산 내려오는 길에 이런 거대한 바위가 있고, 그 밑에는 묘가 있습니다.
무슨 이름이 있을 법한 돌인데, 없다면 무슨 이름이 좋을까요?
여근석?
제내마을의 육의당
조선시대 양반가의 개인별장이랍니다.
낚시를 좋아하셨는 모양입니다.
앞에 큰 저수지가 있군요.
제내지
고기가 꽤 많을 것 같은데...
청소비로 하루 3000원씩 받는다는군요.
순지마을에 막걸리 판다는 정보에 속아, 여기에서 1시간 30분을 소비합니다.
끝내 막걸리 포기하고 순지마을 뒷편 산으로 호미지맥길을 이어 갑니다.
공동묘지 지역이군요.
원고개
원고개에는 휴게소가 있네요.
7호 국도변이라 지나 다니는 통행객이 많은 가 봅니다.
여기에서 동해지부의 매화님, 이주상 총무님.. 그리고 울산지부장이신 산이님의 따뜻한 반김속에 맛있는 휴식시간을 갖습니다.
고맙습니다.
날이 너무 더워서..ㅠ
경주의 이날 온도가 37도라네요. 허~걱
괘릉동 마을회관
벌써 벼가 고개를 숙입니다.
날알이 찰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저는 어느 정도 숙이고 살아가고 있는건지...
괘릉동 마을을 지나 산속으로 진입합니다.
덥다~
317봉을 지나니 가나안 목장입니다.
여기서부터 석굴암까지의 4km는 아스팔트길이랍니다.
지열과 복사열, 바람한점 없는 후덥지근한 날씨라, 포장길을 걷는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아~ 덥다~
그래도 석굴암에 도착하니 2차 지원팀이 우리를 반겨줍니다.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이번 산행이 많이 힘들어지지 않았을까요?
식수를 보충하고, 맛난 것 든든히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토함산 정상부
가을 억새종주를 생각케합니다.
날은 더워도, 계절은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 같습니다.
토함산(745m)
여기에서 단체사진을 찍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에 여길 한번 온 것도 같은데..
가까운 대구에 살아도 모든 것이 생소한 경주 산길입니다.
편안한 소나무 길.
시부거리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보불로 삼거리
여기에서 골프장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그러다가 골프장 고개를 지나며 좌측으로 90도 턴합니다.
혼자서는 가라고해도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산길은 그런데로 편안하고 좋은 데, 더위와의 전쟁입니다.
소정고개
저희들이 걱정이 되어 지원팀이 가지를 못하고, 이렇게 또 마중을 나왔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경주 쓰레기 매립장 진입로 공사중
경주시 폐기물 처리장
아무래도 냄새가 좀 납니다.
이곳 냄새보다 더 심한게 저희들 땀냄새일 것 같네요.
완전 땀으로 목욕을 합니다.
아~ 덥다~
명활산성이라는데...
그저 밋밋한 야산에 산성내는 공동묘지 수준입니다.
성벽의 흔적만 조금 남았습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명활산에 있는 삼국시대 석축산성.
사적 제47호. 둘레 약 6,000m.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405년(실성왕 4) 4월 왜병이 명활산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축성된 것이 분명하다. 축성방식도 신라 초기에 행해졌던 것처럼 다듬지 않은 돌을 썼다. 431년(눌지왕 15) 왜병이 이 성을 포위, 공격한 일이 있는 기록으로 보아 축성의 목적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수도 방어의 구실뿐만 아니라 임금의 거성(居城)으로 쓰던 곳이기도 했다. 473년(자비왕 16) 7월에 성을 개수하여 475년 정월에 왕이 이 성으로 옮긴 뒤 488년(소지왕 10)까지 사용했다. 당시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554년(진흥왕 15)에 다시 돌로 쌓아 둘레가 1,906보였으며, 593년(진평왕 15)에 개축하여 3,000보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성은 대부분 허물어져 몇 군데에서만 자연석으로 쌓은 옛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진평왕 때 개축한 부분으로 추측된다. 647년(선덕여왕 16)에는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이 이 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했다가 김유신에게 패한 사건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주변에 나성의 기능을 가진 석축성 가운데 가장 먼저 축조된 명활산성은 선도산성(仙桃山城)·남산성·북형산성(北兄山城)과 함께 왜구로부터 수도를 방어하는 데 큰 몫을 했다.
명활산성 내려오며 보는 경주시내 야경
이렇게 또 하루가 저뭅니다.
밝은 시간에 진평왕릉과 선덕여왕릉을 볼 수 있을거라 생각을 했는데..
날도 너무 덥고, 등로도 없는 산길이라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특히 가시가 달린 덩쿨나무가 많네요. 피부에 닿이면 어김없이 상처가 생깁니다.
진평왕릉
명활산성을 내려와 보문들에 내려오니 주위가 깜깜합니다. 유적지를 보아도 마음이 무덤덤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을 전혀 찍지를 않았군요. 여기서부터 선덕여왕릉까지는 다른 분의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재위 579∼632)의 무덤이다. 경주 시가지 동쪽 보문들의 평지 가운데에 있다. 동쪽으로는 명활산(明活山), 서쪽으로는 낭산(狼山)을 대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보문사지(普門寺址)가 있다. 진평왕(眞平王)은 본명이 백정(白淨)이고, 진흥왕(眞興王)의 태자 동윤(太子 銅輪)의 아들이며, 왕비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독자적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중앙 행정부서를 설치하였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길어 54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침공에 대항하는 한편 지명(智明)·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이 수(隋)·진(陳) 등에 왕래하였고, 수가 망한 이후에는 당(唐)과 교류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즉 이때를 기점으로 삼국전쟁 시기에 당과 연합할 수 있는 계기를 확고히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불교진흥을 위해 힘썼으며, 수도 방위대책의 일환으로 591년에 남산성(南山城), 593년에 명활산성(明活山城)을 축조 하였다. 높이 7.9m, 지름 36.4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규모로 보아 왕릉급 무덤임이 분명하며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32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다.
황복사지 3층석탑(국보 37호)
보문들을 지나 낭산 들머리를 찿아 이동중에, 좌측에 이러한 석탑이 있네요. 사진을 찍었는데 별로라 다른 분의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진평왕릉에서 이곳으로 이동중에 사방의 들과 엄청 큰 수로의 물줄기를 보면서도, 깜깜한 밤이라 보문들의 크기가 짐작이 되지 않았는데...
아주 큰 들이군요.
낭산의 동북쪽에 국보 제37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구황리 삼층석탑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으나 흔히 황복사지 삼층석탑이라 부른다.
신라왕실의 원찰로 지어진 황복사-창건년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의상대사가 출가한 절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선덕여왕대 이전부터 있었던 절이지 싶다. 석탑은 효소왕대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양식적으로 신라석탑의 시원인 감은사탑에서 절정인 석가탑으로 가는 중간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라 27대 선덕 여왕릉(다른 이의 사진으로 대체)
경주시 낭산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
신라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건립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선덕여왕릉 주차장 옆에 서 있는 표지판
이 주차장에서 우리를 끝까지 기다려 주신 지원팀과 감격의 만남을 가집니다.
그리고 서로서로 수고했다고, 서로를 격려합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37도 폭염속에서 가만히 서 있기도 힘이 들텐데, 장장 19시간에 걸친 산행을 하시다니...ㅎ 의지의 한국인이십니다.
이 주차장에 오면 상수도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밤이라 그런지 아무것도 찿을 수가 없습니다.
내몸에서 나는 땀냄새를 맡기도 곤욕이군요. ㅎ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이 길을 처음부터 계획하고 답사하신 방장님과 답사에 참여하신 회원님들, 끝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회원님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 즐산안산하시고, 9월 정기산행지인 수도가야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