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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9일 저녁 인천공항을 떠나서 다음 날 깊은 밤 쿤밍에 도착하여, 한스게스트하우스의 픽업차량으로 숙소에 도착하여 여행 제 1일을 맞았다. 대규모 단지(江東小康城) 내 저층아파트의 1층에 자리 잡은 한스네는 조용하고 아담한 느낌을 주었다. 손님은 장기투숙자 한 사람 뿐으로 우리는 자유롭게 맘에 든 침상을 차지하여 일단 한 숨 자야했다.
제1일: 중국 적응을 위한 시내나들이로 먼저 민족촌을 가 보기로 했다. 민족촌은 전에도 보았지만 사실 휴식공간이지 볼거리가 많은 그런 곳은 아니었다. 그 안에서도 각 민족의 색다른 쇼를 보려면 여간만 바삐 쫓아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없던 몽골족 게르가 두개 더 늘어난 것 같았는데, 그 중 한 곳에서는 그들 특유의 차를 팔고 있었다.
민족촌 입구
바이족(白族)촌 입구에서 귀여운 아가씨들이 술을 팔고 있어서 한 잔 주문했더니 간단한 권주가와 함께 춤을 추면서 잔을 건네는 것이 재미있었다.
민족촌
장족촌에서는 한 청년이 나와 구경꾼 십여 명 앞에서 샹그릴라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신나게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저 장족인 것처럼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 지금 티벳 장족들이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황이어서 그들이 사는 시장성과 사천성 내 티벳 인접지역은 대규모로 파견된 군인들이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으며, 외국인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했다.
대석림 입구
제2일: 우리는 민족촌에서 받은 여행사의 모객쪽지를 보고 신청하여 석림 관광을 떠나는 데, 처음 최고가가 120원이던 것이 한국인이라고 하니 140원으로 불어났다. 입장료가 140원인 것을 감안하면, 점심까지 얻어먹으면서 매우 저렴한 여행을 하는 편이지만 약속이 틀린 것에 불쾌감을 누를 수 없었다. 아무튼 싼 값으로 구경하는 대신, 구경시간도 두 시간 정도로 짧아지고 오고가는 길에 7-8곳의 상점을 들러야 하는 참으로 불편하고 짜증스러운 여행을 해야 했다. 석림을 여행사 산객모집에 의한 상품으로 구경하려거든 절대로 값을 깍지 말 것이며, 외국인 티를 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당초 한스네가 생각해 준다며 120원에서 100원으로 깎아 계약했던 것인데, 그 후유증이 두고두고 뒤따랐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정기버스를 타고 가서 입장료 제대로 내고 5시간 이상 머물며 소석림까지 돌아보는 것이다.
대석림 중앙부분
석림은 비가 오는 날씨였는데도 입구에서부터 구경하는 인파가 넘쳐흘렀다. 석회석이 깔린 탐방로도 매우 미끄러워 조심해야 했다. 가운데 전망대는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로 꽉 차 있고, 저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고 아우성이었다. 한국 단체관광객도 여러 팀 만날 수 있었다.
석림을 다녀와서 버스터미널에 들러 다리(下關)로 가는 로칼버스 표를 구입한 후 저녁까지 먹고 한스네로 들어갔는데, 내일 나가면서 끊으면 된다던 한스가 버스표를 사러 나갔다는 것이다. 전화하여 수수료를 물고 다시 환불토록 조치해야 했다. 우리를 돕는다고 그런 수고를 자처했기 때문에 차량비와 활불수수료는 우리가 물기로 했다.
소석림 빠져 나오면서
내 친구가 햇반과 라면 그리고 여러 가지 반찬 등 먹을 것과 커다란 코펠까지 새로 사서 큰 가방에 담아와 우리는 식비를 많이 아낄 수 있었는데, 한 여자회원이 그 고마움을 좀 거슬리는 말투로 표현하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한동안 슬픈 기분으로 여행해야 했다.
제3일: 우리는 9시 반 버스로 다리가 있는 샤관(下關)으로 떠났다. 떠나면서 다리의 넘버3에 전화하여 방을 예악했는데, 상해에서 날아 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두 여자분이 있다는 것이며, 그들이 남조풍정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차편에 우리를 픽업하여 같이 갈 수 있도록 부탁하였더니, 시간이 맞지 않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남조풍정도는 비용이 턱없이 비쌀 뿐만 아니라, 단지 술 먹고 노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고있어서 갈 생각이 없었지만, 일행 중 한 여성이 가고 싶어 했고, 우리와 합류하게 될 여자분 두 명이 그 곳에 간다고 해서 그들과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함께 할까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는다고 거절해서 천만 다행이다 싶었다.
남조풍정도 입구의 여신상
그런데 막상 넘버3에 도착하니 종업원이 남조풍정도 가는 경비로 250원(50,000원)이나 선납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안 간다고 했더니 사장한테 전화를 연결시켜 주었는데, 사장은 우리 일행 식사준비까지 다 해 두었으며, 다른 일행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꼭 가야 한다고 우겨대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따라 간 남조풍정도는 역시 술판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크게 바가지 쓴 씁쓸한 기분으로 며칠을 보내야 했다.
얼하이호의 여인상, 멀리 먹구름속은 다리의 창산
제4일: 우리는 그들의 소형버스를 타고 다리 구거리(舊城/꾸청)로 돌아가는 길에 천연염색마을에서 내려 그 중 한 집에 들어가 그 과정을 자세히 지켜 볼 수 있었다. 두 노파가 앉아서 넓은 천을 앞에 두고 무늬를 만들기 위해 일일이 홀치기와 묶기를 거듭하고 있었으며, 한 쪽에는 작은 염료통이 놓여있었는데, 그 규모로 보아 그 집안에 전시한 그 많은 제품을 그들이 직접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집에서는 자기들이 전통방식으로 만들었다고 고집하면서 시중가 보다 3-4배 높은 값을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양사람들을 포함 대부분 사지 않았는데, 나와 친구는 선물용으로 앞치마 하나에 50원씩 주고 샀다. 돌아와서 집사람에게 주니 기대 이상 좋아했다.
다음에는 창산 트래킹을 했는데, 입구에서 기다린 인력거 아저씨가 데려다 주면서 리프팅 이용권(보험료 포함 35원)까지 파는 것이었다. 다시 입장료(30원)를 내고 리프트로 올라가서 내리니, 처음부터 끝까지 우둘투둘한 돌로 포장된 길이어서 걷기에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볼 것도 없으면서 힘든 돌바닥 길을 13km 이상을 걸어야 했다. 중간에 용안굴이니 풍안굴이 있다고 표지판이 있어서 혹시나 하여 가 보았는데,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누가 무슨 이유로 중국여행관련 카페와 홈페이지에 창산 트래킹을 좋게 소개하여 놓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 속은 것었다. 그러나 칠용계곡 입구 간이식당에서 먹은 점심은 싸면서도 맛이 매우 좋았다. 내려 올 때는 케이블카를 탔는데 다시 50원짜리 표를 사야 했다.
창산 트래킹 코스에서
어제 맡긴 짐을 넘버3에서 찾아 바로 옆에 있는 중국인 호텔에 그 보다 더 좋고 싼 방을 얻어(2인용 스텐다드 룸 하나에 40원)짐을 풀고, 주인에게 부탁하여 다음 날 아침 떠나는 리지앙 행 고속 버스표를 사 두었다. 내일은 상해에서 온 두 여자분과 다른 남자 한 사람이 합류하게 되어 7명 팀이 되는 것이다.
제5일: 아침 픽업 나온 파오처를 타고 버스 타는 곳에 가니 벌써 온 서양인들과 중국인들이 40여명 기다리고 있었다. 9시쯤 버스는 남은 자리 하나도 없이 떠났는데, 차창 밖으로는 아직 노란 꽃이 피어있는 유채 밭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얼하이 호수도 멀리 보였다.
리지앙 舊城 입구
리지앙에 도착하여 버스터미널 가까운 곳의 작은 호텔에 들고 싶었으나, 일행 중 한 분이 인터넷에 좋게 소개된 객잔이라고 하여 그 곳을 찾아갔는데, 택시에 내려서도 5-600미터나 좁은 골목으로 돌고 돌아 더 들어가야 했으며, 방도 값(80원)에 비하여 좋아 보이지 않았고 구청(舊城)거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는 다시 구청성거리로 나와 그 보다 훨씬 좋은 방을 75원에 얻어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개고생하며 짐을 옮겨야 했다.
밖에 나와 거리를 살피니 여전히 골목마다 여행자들로 꽉 차 있었다. 중국에서 관광인파가 가장 붐비는 곳 중의 하나가 리지앙일 것이다. 외국인들도 가끔 보이지만 대부분 중국인들이다. 중국 경기도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곳에 와서 보니 틀린 말 같인 것 같다. 석림이나 리지앙에서 무리지어 다니는 단체관광객이 3년 전에 비하여 5-6배 이상 늘었기 때문이다. 리지앙 구청은 그냥 사람구경하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작은 골목에는 연탄불을 피워 놓고 먹을거리를 팔고있어서 독한 연탄냄세를 맡고다녀야 한다.
舊城 입구에 있었던, 조선족교포가 한국에서 8년동안 번 돈으로 개업하였다는 용수산 식당은 없어져버렸다. 그 앞 흑룡담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큰 식당에서, 입구에 나열한 식재료를 보고 각자 취향에 맞는 것을 선택 주문하여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생각 보다 비쌌다.
구성입구 광장의 인파들
식사 후 흑룡담으로 들어 가려했는데, 입장료(85원)가 비싸다고 다들 기피하는 것이었다. 그 뒤쪽으로 길이 있어서 친구와 함께 들어갔더니 그 곳에서는 여인들이 호객행위를 하면서 자기들을 따라가면 35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에 일행들과 함께 들어가기로 하고 오늘은 돌아섰다.
구성광장에서 민속춤을 추는 나시족여인들
제6일: 우리는 아침 버스를 타고 호도협의 입구 치어터우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오스트리아 여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짐을 맡기고(짐 1개에 5위엔) 간단한 식사와 차를 마셨다. 3년 전에 왔었다고 했더니 진짜인지 몰라도 기억한다고 하면서 반가워했다. 호도협 하이패스 입장료도 전에 비하여 두 배가 오른 50원이었다.
호도협 초입의 진사강- 저 아래길은 찻길
10시 40분 쯤 그 곳을 출발하여 트래킹을 시작했는데, 두 시간쯤 지나 닿은 나시페밀리 게스트하우에서 점심을 먹었다. 먼저 온 손님으로 빈자리가 없었는데 음식이 준비되는 한 시간 여 동안 쉴 수 있어서 식당 한켠에 놓인 pc에서 e-메일을 확인하였더니 집사람한테서 온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서랍정리를 하다가 그 동안 잃어버린 줄 알았던 15돈짜리 금목걸이를 찾았다는 것이다. 찾은 김에 그 전에 잃어버렸던 다이아 반지도.......
호도협 트래킹 중 바라 보이는 옥룡설산
날씨가 흐려서 옥룡의 아름다운 모습은 즐길 수 없었지만 저 아래 힘차게 그리고 빠르게 내 닫는 물소리는 듣기 좋았다. 강 가운데 섬처럼 모래밭이 형성되어있는 모습이 아름다워 여러 컷의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힘을 다하여 28밴드 굽이굽이 비탈길을 올라서야 했다. 필요 없다고 거듭 말해도 말을 끌고 내 뒤를 따르던 여인이 마침내 우리일행 중 한 손님을 맞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 곳 고갯길에 들어서면 한 두 사람 말을 타게 된다는 경험법칙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호도협 정상에는 현지인이 가판을 벌여 놓고 음료수와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호도협 정상에서
다시 한 시간 여 동안 내리막길로 산등성이를 돌고 돌아서니 저 건너에 차마객잔이 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객잔에 도착하여 보니 마당과 처마 밑 식당까지 서양 사람이 주축이 된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다행히 치어터우를 출발하면서 방을 예약하여 두었기에 우리는 가장 좋은 방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 집 안주인도 전에 왔었던 나를 기억하여 주며 반가워했는데, 3년 전 아내와 함께 왔을 때처럼 닭백숙을 시켜서 함께 먹고, 남은 국물에 다시 쌀을 넣고 끓여 아침까지 해결하였다. 그러고도 밥값은 100원이란다. 7명의 두 끼 밥값치고는 너무 싼 것이다. 처음 왔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옥룡설산위의 아름다운 별들을 보기위해, 침상에 거꾸로 누워 밤을 지새우던 그 방에 들었으나,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헛일이 되고 말았다.(방값은 2인침실 1개에 40위엔)
차마객잔의 메뉴판
제7일: 아침이 되자 빗줄기가 더 굵어지는 것 같아 우리는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하고 그 집 차를 빌려 하산하기로 했다(1인 당 40위엔). 하프웨이 게스트하우스 쪽으로 해서 따주-리지앙으로 돌아 갈 일행 4명과 해어져 우리는 다시 치어터우로 돌아왔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이제 막 확장한 듯한 산 길이 여간만 가파른 것이 아니어서 매우 위험했다. 아니나 다를까 호도협을 차로 관통하는 로우패스는 산사태로 끊어져 있었고, 다른 끝인 티나나 해도원 게스트하우스로 가려면 내려왔던 차마객잔 쪽으로 올라가다가 그 쪽으로 새로 난 길을 돌고 돌아가야 했다.
오는 길에 우렁찬 소리와 함께 빠르게 흘러가는 호도협 계곡 진사강의 물살을 보기위해 여러 번 쉬어야 했다. 치어터우에 다시 와 카페에서 짐을 찾아 짊어지고 버스 정류소로 왔으나 샹그릴라 가는 버스는 다 만원이었다. 우리는 파오처를 하나 180원에 빌려 타고 샹그릴라에 도착하였다.
호도협 하이패스에서 내려다 보이는 진사강 -산사태로 강줄기가 막히기 직전.
상그릴라 광장쪽에서 본 구산공원의 마니차-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함
전쟁기념관 쪽에서 바라 본 구산공원과 절-입장료는 없었음
리지앙(麗江)과 다리(大里)가 그랬지만 샹그릴라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리지앙 쪽에서 들어오는 길은 넓고 깨끗하게 단장되어있었으며, 도로 주변에 아름다운 모습의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버스 터미널도 현대식으로 지어져 있었으며, 2층 화장실은 호텔과 같은 수준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우리는 리지앙 숙소에 두고 온 돈 주머니를 찾기 위해 그 곳으로 돌아 가 다음 날 오게 되는 한 일행을 기다리기 위해 터미널 부근의 호텔에 방을 얻으려고 하였더니, 처음 방값까지 180원으로 할인하여 보여 주었던 종업원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로 채크 인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패스포트를 보여주었으나 자기들처럼 신분증이 있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기가 찼다. 중국 니네들은 아직도 한 참 멀었구나......
상그릴라 거리
우리는 호텔 건너편 초대소라는 간판이 있는 객잔의 싼 방(2인실이 40원)을 얻어 짐을 풀고 하룻밤을 보냈는데, 오히려 더 편하고 좋았다. 그 집 거실에서 라면도 끓여 먹고 주인과 정담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발 3200-3300미터 쯤에 위치한 샹그릴라는 공기가 맑고 신선해서 노후의 삶을 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이다. 인건비도 싸기 때문에 누가 근사한 노인 병원을 하나 지어서 한국의 치매환자나 중풍환자를 저렴한 비용으로 유치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중풍환자는 맛사지를 열심히 잘 해 주면 좋아진다고 하니 훌륭한 사업이 될 것이다.
제8일: 우리는 그 곳 구성(舊城)의 좋은 방(2인실 80원)을 얻어 짐을 옮기고 다시 합류한 일행과 함께 택시를 빌려(20원) 송찬림사 구경을 갔다. 입구엔 대규모 위락시설 건설을 알리는 홍보간판이 서있고 한 쪽에서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입장료(50원)를 내고 한참 달려 언덕을 돌아서니 그 곳에 라싸의 포탈라 궁을 조금 닮은 것 같은 절과 마을이 보였는데 가히 운남성 최대의 불교사찰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입구에서부터 각종 상행위가 판치고 있고 사찰로 통하는 계단 길 옆 마을 골목은 초라하고 지저분했다. 1674년에 강희황제로부터 그 이름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350년 이상 된, 흙과 돌로 지어진 건물이다. 각 건물에는 각기 다른 모습의 불상들이 안치되어있는데, 저마다 엄청나게 크고 치장도 화려했다. 부처님은 자기만 저렇게 호사를 누리면 되는 것일까? 아니, 인간들의 용서할 수 없는 어리석음 때문에 욕을 먹고 있겠지......
송찬림사와 주변 주택
송찬림사 불상 중의 하나
차를 돌려 샹그릴라 초원으로 가 보았는데, 말과 소들의 천국이었던 3년 전의 드넓은 초원은 사라지고, 여기저기 건물 잔해가 버려져 있는 가운데 무질서하고 볼 품 사나운 건물들이 들어 서 있었다. 두 세 곳에서 손님을 말에 태워 초원을 돌아보는 상품(15분여에 65원)을 팔고 있었는데, 초원에 움푹 페인 곳이 많아 그 것도 재미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손님을 데리고 간 택시기사가 얼마를 얻어먹는지 모르지만, 갔다가는 확실하게 실망할 그런 곳이었다.
상그릴라 초원 케이블카 승강장입구의 돌무더기 불탑
우리는 숙소에 돌아 가 밀린 빨래를 해서 햇볕 따가운 옥상의 빨래 줄에 널어 말렸다. 그리고 나는 다음 날 가게 될 미지의 여행지, 그들이 인간과 신이 공존하는 지구의 마지막 천당이라고까지 자랑하는 상그릴라 대협곡 관광 상품을 문의하기 위해 객잔 앞에 있는 파라거종(巴拉格綜)생태여유개발유한책임공사라는 긴 이름의 사무실에 들렀다. 1박 2일에 아직 미개방구간이라고 하는 파라빌리지까지 오르는 조건으로, 정가는 1인당 306원을 호텔비 20원 할인받아 286원씩 내기로 하고 다음 날 아침 9시에 출발하기로 약속하였다.
상그릴라 광장 무도회에서 사진찍기를 청한 홍콩아가씨와
오후 남은 시간에 세계에서 가장 큰 마니차가 세워진 구산공원을 둘러보고 내려와 구성 광장에서 야크고기 꼬치구이를 먹은 다음, 두 시간여 동안 벌어지는 장족들의 군중무용을 감상할 수 있었다. 역시 전에 비하여 참여 인원도 줄고, 가운데 나와 지도하는 리더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제9일: 약속한 시간 보다 일찍 여행사에 도착하였더니 우리들을 태우고 갈 차도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손님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망스러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떠났다. 약 3시간 쯤 달려서 더친 가는 공로에서 벗어나면서부터 협곡이 시작되었는데, 아직도 진입로 공사가 한 창이었다. 입구 조금 지나서 우렁찬 물소리를 내고 떨어지는 폭포가 있었는데 작은 수력발전소였다.
상그릴라 대협곡 초입
상그릴라 대협곡의 호텔
다시 15km쯤 더 들어가니 협곡의 좀 넓은 지대에 호텔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날 묵는 손님은 우리뿐으로 본관의 좋은 방들은 다 비어있었다. 우리는 별관의 화장실도 딸리지 않는 싼 방(1인 당 60원)에 짐을 풀었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그들의 프로그램에 따라 셔틀버스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서 첫 번째 관람지에 내리니 진짜 놀라울 정도로 깊고 가파른 협곡이 나타났는데 이름이 棕櫚峽이다. 저쪽과 이쪽 벼랑 간 폭이 3-10미터 쯤 되며 벼랑 높이는 1000m쯤 되어 보이는 매우 좁은 협곡으로, 한 쪽 벼랑에 철제 사다리 계단길을 만들어서 쉽게 오르고 내릴 수 있었다. 벼랑의 기울기는 최하 90도이며 어떤 곳은 100도가 넘었다. 약 2km 정도 오르니 더 이상 갈 수 없게 막아 두었다. 다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상그릴라 대협곡안의 종려협곡-암벽 비탈에 철심을 박아 길을 만든 것이 특징
다시 셔틀버스로 6km쯤 더 들어가니 이 풍경구의 자랑이고 중심인 샹그릴라大峽谷이 나왔는데, 내가 본 어느 계곡 보다 아름다운, 참으로 놀라운 경관이었다. 역시 최하 90도의 벼랑이 20-50m 폭을 유지하면서 맞서있으며, 숲도 우거져 있고 계곡 바닥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역시 한쪽 벼랑에 철제 빔으로 구조물을 설치하고 나무판자를 깔아 탐방로를 만들어 놓았는데, 끝까지 거의 수평이어서 힘도 들지 않았다. 끝에는 리프팅 손님을 기다리는 보트들이 있었는데 어떤 이들은 돌아 올 때 이를 이용(120원)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신들이 조용히 살았을 것 같은 깊고 아름다운 계곡이었다. 협곡 사이 물이 흐르는 바닥에서 산꼭대기까지의 높이는 3-4000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상그릴라 대협곡- 뒤돌아서서 본 모습
그날 저녁이 되자 그 곳 직원 30여명이 광장에 나와 우리 네 사람을 위한 민속춤판을 벌였는데, 나름대로 흥겨운 모습을 연출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조회시간에 보니 그 곳 호텔과 식당 경비 등 근무인원이 약 40명쯤 되었다. 조회를 군대식으로 하는데, 구보를 하는 등 체력을 다지는 시간으로도 활용하고 있었
다.
상그릴라 대협곡-전진하는 방향
상그릴라 대협곡(더 들어가서 뒤돌아 본 모습)
제10일: 아침을 먹고 우리는 사전에 50원씩 더 내고 예약하여 둔, 그들이 인간천당이라고 극찬하는 파라빌리지로 떠나는데, 책임자가 워드로 프린트한 두 장의 종이를 내 놓더니 각각 이름 쓰고 지장을 찍으란다. 들여다보니 그 곳은 아직 미개방 구간이고 도로가 공사 중이어서 매우 위험한 바, 다녀오는 동안 일어나는 사고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우리책임이라는 내용이었다. 두려운 마음으로 지장을 찍었는데, 그 책임자도 서명하고 지장을 찍은 다음 한 장은 우리에게 주는 것이었다.
마을 뒷쪽- 저 멀리 자연이 만든 신비한 불탑(티벳불교의 상징)산이 보임, 저쪽 계곡을 더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안내인이 극구 말려서 다음 기회로 미루고 돌아서야 했음.
마을 우측- 5000미터 이상의 설산으로 둘러싸여 있음
어제 왔던 대협곡 입구를 조금 지나자 길은 산비탈을 돌고 돌아 계속 높은 곳으로 이어졌다. 공사 중인 위험천만한 도로는 백번도 더 지그재그하면서 산꼭대기 마을까지 이어졌는데 한 구비 돌 때 마다 심장이 두 근 반, 세 근 반,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다 왔겠지 하는데, 차는 다시 기어오르고 길은 저 하늘 끝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진정한 하늘 아래 첫 마을이었다. 우선 한 눈에 들어오는 경관으로도 바로 선경이었다. 그들 홍보물 소개처럼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것 같이 보이는 별천지였다.
마을 좌측
설산 꼭대기에 빙 둘러싸여 있는 마을에는 토담으로 지은 2-3층집이 15여 채 있었는데 비어있어서 벽이 무너지거나 지붕이 주저앉은 집도 있었고, 사람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복숭아꽃이 만발한 골목을 한 참 기웃거렸더니 한 집에서 판자로 된 창문을 열고 여인이 내다보는 것이었다. 들어가도 좋으냐고 했더니 좋다고 하여 가서 보니, 아래층은 컴컴한 짐승우리이고 2층에 주방을 겸한 거실이 있었으며, 3층은 곡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각층으로 통하는 길은 나무 사다리로 되어있었다. 야크버터를 숙성시킬 때 나는 퀴퀴한 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났지만 곧 적응이 되었다. 나무 판자로 된 작은 창문 하나 뿐인 방은 어두컴컴했다.
파라빌리지 가옥의 2층 거실 겸 주방-주인여자가 수유차를 만들고 있음
어두운 거실에는 철제 화로에 장작불을 피워 놓고 물을 끓이고 있었는데, 주인여자는 우리일행을 대접하기 위한 요리를 하느라 바빠지기 시작했다. 대통에 버터를 넣고 펌프질을 해서 수유차를 만들고, 밀가루를 반죽하여 빵을 구워냈다. 삶은 계란도 내 놓았는데, 우리들은 진짜 토종닭의 유정란이라고 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주인도 우리가 잘 먹자 즐거워하며 작년에 따서 보관해 두었던 못생긴 사과까지 내 놓으며 권하는 것이었다. 가족에 대하여 물어보니 남편은 아들과 함께 길 공사에 나가 있고 딸은 우리가 묵었던 호텔에서 일한다고 했다.
우리는 중국 돈 100원과 함께 점심도시락으로 가져간 컵라면까지 사례로 주고 나와서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참으로 이해되지 않은 점이 많았다.
이 마을은 1300여 년 전부터 존재하였다고 하는데, 불과 5-6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까지 오는 길이라고는 오직 가파른 벼랑을 꼬불꼬불 기어오르는 지극히 위험한 산길뿐이었을 것인바, 어찌하여 그 먼 옛날 이 높은 곳까지 와서 마을을 이루고 정착했으며, 오늘까지 문명생활을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중국정부는 어찌하여 인간천당이라고 소개하면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마구 파 헤쳐 가며 이 마을까지 어려운 공사로 길을 내고 있다는 말인가?
신비스러운 모습을 더 이상 지키기 어렵게 된 파라거종의 주변 모습
차라리 높고 깊숙한 이 산 속에 그냥 신비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체 살아가도록 보존하였더라면 그들 말대로 인간천당으로 오래오래 남을 것 아닌가 말이다. 이제 길이 완성되고 관광객에게 개방되면, 그들의 오랜 전통과 정신적이고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삶의 의미는 가려지거나 묻혀져 버린 체, 그냥 미개하고 초라한 모습의, 호기심에 찾아 온 문명인의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 아닌가?
파라빌리지 모습-지붕은 나무를 쪼개 겹겹이 엮어올렸음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니, 마을은 햇볕을 오래 받는 양지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마을 뒤편 언덕에는 물이 솟는 셈도 있고 이를 다시 마을 공동우물터까지 연결시켜 두었으며, 마을을 둘러싼 설산 사이로 조금 트인 한 쪽으로는 멀리 불탑처럼 생긴 산이 보였다. 마을 앞에도 하얀 불탑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오래전부터 티벳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불탑처럼 생긴 산이 다 보이는 곳까지 깊이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그 쪽의 신비스러움은 상상으로 남겨둔 체 돌아서야 했다. 오면서 보니 밭에는 검은 돼지가족이 봄풀을 뜯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골목에는 어느 새 소들도 나와 거닐고 있었다.
내려오면서 우리가 정말 무서운 길을 올라왔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저 아래까지는 수천 길 낭떠러지인데 높이로 보아 4500미터 쯤 올라 온 것 같았다. 눈높이에 건너편 설산이 보이고 있으니 이곳도 그 만큼 높을 것 아닌가? 길을 내고 있는 벼랑의 토질은 바다나 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갈과 모래가 엉켜진 퇴적층이어서 쉽게 부서지고 흘러내렸다. 도로를 완성하더라도 이를 유지하려면 여간만 힘들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탈길을 다 내려와서야 깊은 숨을 몰아쉬며 휴-.
호텔을 떠나는 우리를 못내 아쉬워하는 가이드아가씨
호텔에 돌아 와서는 오늘 중 샹그릴라로 가기위해 점심도 거른체 곧장 짐을 챙겨 그들이 제공하는 차편으로 공로까지 나왔다. 삼거리에서 내려 10여 분 기다리니 다행히 빈 지프차 하나가 와서 흥정을 했는데, 1인당 40원에 메이리설산이 바라보이는 페어라이스(飛來寺) 까지 모셔다 주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차주와 고객의 만남은 서로 간 행운이었으며, 이 날 부터 3박 4일 동안 우리는 그의 형제들과 참으로 즐겁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막 형제들과 더친-메이리설산 위붕지구 중심의 여행사(藏巴拉靑年旅社)를 창업한 신참 사장이었던 것이다.
더친 가는 길에 보이는 산을 돌아가는 강줄기
더친 가는 길의 백마설산 전망대(해발 5000미터 고지)
제 10일 밤: 페어라이스(飛來寺)마을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메이리설산을 마주보는 언덕에, 메이리설산 만큼이나 보기 좋은 하얀 불탑이 15개 이상 나란히 서 있던 곳은 파헤쳐진 체, 대형호텔을 짓는 듯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 앞에서 아침이면 동 트는 메이리설산을 바라보며 불을 피우고 합장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불 피우는 탑도 없어져 버렸다. 저녁때의 메이리설산은 꼭대기에 길게 띄 구름을 이고 있어서 그 찬란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태워다 준 중국청년 짜파와는 내일 아침 다시 만나기로 하고, 하룻밤 40위엔 하는 싸구려 객잔에 짐을 풀었다.
페어라이스에서 바라 본 메이리설산의 아침
제11일: 싸구려 객잔 안의 어두운 카페에는 술 마시며 카드놀이 하는 중국 젊은이들로 북적였는데, 그들도 내일 메이리설산 안쪽 마을인 위붕(雨崩)으로 갔다가 다음 날 베이스켐프(大本營)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베이스켐프 가는 루트부터 확인하고 내일 날씨에 따라 일정을 정하기로 했다.
염정 가는 길 건너편으로 보이는 옛날의 차마고도
아침에 간단히 라면을 끓여먹고 나오니, 어제 우리를 태워다 주고 더친으로 돌아갔던 짜파가 약속시간 보다 30분이나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일정을 조금 바꿔서 그와 흥정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 동안 꼭 보고 싶었던 염정을 먼저 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 오늘 염정까지 가서 하룻밤 자고, (2) 다음 날 돌아와서 메이리설산 베이스켐프 가는 길의 마지막 마을 시당(西堂)에서 다시 하룻밤 자고, (3) 그 다음 날 위붕으로 올라가서 하룻밤, 베이스켐프 다녀와서 다시 하룻밤 자고, (4) 마지막 날 더친(德欽)까지 태워다 주는 조건으로 총 1,000위안에 계약하였는데, 너무 싼 값에 성사되어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 간의 숙식비는 우리가 부담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다른 파오처(包車)의 값을 알아보았는데 가는데 까지 500위엔을 부르며 그 이하는 안 된다고 딱 거절했었던 것이다.
윈난성 북부의 산은 거의 이런 모습이어서 바위와 토사가 한 없이 흘러내린다.
염정 가는 길의 시작은 좋았다. 한 동안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공사 중인 구간이 나오더니 염정 거의 다 갈 때까지 그 모양이었다. 산비탈에서는 계속 바위와 자갈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으며, 아예 길을 막고 공사하는 데도 여러 곳이었다. 길은 페어라이스에서 계속 내리막이다가 강을 따라 이어지면서 평지를 달리기도 했다. 강 건너편 산비탈에는 산사태로 여기저기 끊긴 채 남아있는 구불구불한 산길이 보였는데, 저 것이 그 “차마고도”란다. 그러나 말까지 매달아 강을 건너게 하던 그런 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로는 찻길은 강을 따라 이어져 있다.
위난성 관할이 끝나는 마을에 길을 막아 놓고 통행을 통제하는 공안사무소가 있었는데, 우리가 외국인이어서 시짱성(西藏省)인 염정에는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쪽에서 사정해 보겟다”고 하여 통행을 허가받았다. 20여분 달려서 다시 좋은 길이 나오는가 싶었더니 그 곳부터 시장성이었던 것이다. 입구에 문을 세워 경계를 알리고 있었는데, 중국인들도 차를 세우고 쉬면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
염정 마을 입구의 검문소 - 누구나 검문을 받고 들어간다.
다시 10여 분 좋은 길로 달리니 염정이 나타났는데, kbs에서 방영한 차마고도에는 보이지 않았던, 현대식건물이 들어 선 작은 도시를 보고 실망이 앞섰다. 공안은 한 참이나 내 설명을 듣더니 통과는 물론 숙박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권을 맡기고 2-3시간 머무는 조건으로 통과하게 되었는데, 짜파도 이곳이 처음이었는지 여러 사람한테 물어 염정마을을 찾아가게 되었다. 길은 마을의 작은 골목으로 빠져서 물이 빠르게 흐르는 계곡까지 돌고 돌아 내려가는데, 역시 파라빌리지 가는 길 만큼이나 위험했다. 가다가 다른 차라도 마주치면 비켜 설 틈도 없었다. 보고 싶었던 염정은 그렇게 20여분 내려가니 나타났다.
염정의 강 이쪽
염정에는 건기인데도 소금밭이 여러 곳 비어있었으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는 곳도 보였다. 두세 군데에서 아낙들이 나와 밭을 만들고 물을 대는 데, 전에 본 것처럼 양동이로 나르지 않고 호스로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밭은 비탈에 기둥을 세우고 석라래를 얹어 판자를 놓은 다음, 붉은 흙을 두껍게 깔아 만들었는데, 석가래 사이로 흘러내려 굳어진 고드름 같은 소금이 가장 좋은 품질이라고 하였다. 맑고 하얀 빛이 보석처럼 빛났다. 이제 막 손질하는 밭도 있고, 소금물이 채워진 밭도 있고, 하얀 소금이 말라있어서 반짝거리는 밭도 있었다. 일하는 여인들도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 않고 나름대로 멋 부린 치장이었다.
저수조에 물을 채우는 아낙들
염전은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강 건너에는 붉은 산 밑에 작은 초원이 있어서 그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마을도 보였으며, 강 상류 쪽에 이 쪽 보다 더 큰 염전이 있었다. 고드름 소금을 보고는 조금 사온다고 맘먹었었는데, 사진 찍느라고 바쁘게 움직이다 그만 잊어버리고 왔는데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고드름 소금
막 걷어 낸 소금
돌아오는 길에 산사태가 나고 그 먼지가 폭풍처럼 계곡을 매웠는데 1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차가 지나갈 때 산사태가 났더라면 그 속에 묻히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아찔했다. 산비탈 길 아래 여기저기에도 산사태로 토사가 길게 흘러내린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곳도 보였다. 밤길은 더 위험할 것
같아 시간을 재촉하여 돌아와야 했다.
염전 바닥에 흙을 바르는 여인
강 건너 마을을 배경으로- 오른쪽 뒷편 멀리 또 다른 염전이 보인다
사진의 저 위쪽에 올라가야 할 도로가 있고 산사태는 계속 일어난다
메이리설산 비탈에 자리 잡고 있는 시당(西堂)은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입구에서 보험료 포함 공원입장료 85위엔(노인은 45위엔)을 내고 들어가서도 밍용빙천(글라시아) 반대방향으로 산자락을 돌고 돌아 3-40분 달려야 도착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짜파가 안내하여 준 집에 방을 얻어 짐을 내려놓고, 함께 길고 고달픈 여행의 피로를 풀기위해 중국에서 맛 들인 다리맥주를 마셨다. 그 집의 절방 같은 넓은 거실에 판을 벌여 놓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먼저 그 집 스물두 살 먹은 예쁜 딸이 시작하여, 짜파와 그 동생 순지, 그리고 우리들까지 차례로 저마다 멋을 부리며 노래를 불렀다. 순지의 노래실력은 대단했다. 가수의 기질이 엿보이기도 했는데, 그는 부르기 힘든 “샹그릴라”를 열창하였고 랩까지 부르는 것이었다. 가수다운 실력이었다.
이 날 저녁 한판의 놀이로 우리는 다음 날부터 한 가족이나 다름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나는 벌써부터 착한 마음씨를 지닌 짜파네를 한국으로 초대할 생각을 굳혔다.
시당 객잔의 법당 겸 거실과 그 집 딸-영어로 간단한 대화 가능
제12일: 다음 날 아침 역시 일찍 찾아 온 짜파의 차를 타고, 메이리설산 베이스켐프로 들어가는 마지막 채크포인트 온천으로 갔다.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입장권 검사를 받고 산행을 시작했는데, 등산로 입구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여러 필의 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산 고개인 야크까지155위엔 이었다. 잘 모르는 길이라 말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나와 친구는 곧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말이 우리 걸음보다 더 느렸으며, 여자들인 마부들도 여간만 힘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지네 가게 앞에서 독일청년과 일행
산을 오르는 길엔 두세 곳의 간이휴게소가 있어서 음료수와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었다. 짜파동생 순지가 그 중 한 곳의 휴게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먼저 가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지 도착하자마자 자기가 만든 도넛 같은 빵을 내 놓는 것이었다. 배도 고팠지만 그 맛도 좋았다. 그 휴게소부터는 눈이 많이 쌓여있어서 길이 미끄럽기도 하고 질컥거리기도 했다.
야크고개에서 바라 본 메이리설산
다시 한 시간 쯤 올라가자 훤히 트인 고개가 나타났는데, 눈부실 만큼 하얀 가운을 머리에서 가슴까지 걸치고 있는 메이리설산 한 쪽이 하늘 높이 버티고 서 있었다. 마침 날씨도 맑았는데, 우리는 그 아름답고도 웅장한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어라이스에서 바라 보았던, 물고기 지느러미 같이 생긴 설봉과 끝이 뾰쪽한 설봉이 나란히, 바로 코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쉼터 한 쪽에는 3층 높이의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아서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저마다 탄성을 지르며 셔터 누르기에 바빴다.
야크고개의 타르쵸
야크고개에서 짜파 그리고 마부아줌마들과
한 참 쉰 다음 말을 돌려보내고, 잘 다음어진 내리막길로 한 시간 쯤 걸으니 분지 같은 지대에 위붕마을이 나타탔다. 위붕은 상촌과 하촌이 있는데, 우리는 20여 호 쯤 되어 보이는 상촌의 짜파네 산장에 짐을 풀었다. 가까이에 예쁘게 지어진 건물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더니 초등학교였는데, 혼자 두 반을 맡아 가르친다는 처녀선생이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고 방명록을 가지고 나와, 한글로 쓰인 페이지를 펼쳐 보이는 것이었다. 작년에 EBS 촬영팀이 다녀가면서 메모를 남긴 것이었다. 반가웠다. 나도 다시 와서 한 동안 머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의 글을 남겼다. 다행히 또 온다면 그 때는 아이들에게 줄 노트 등 학용품을 배낭 가득 짊어지고 와서 저 예쁜 선생님까지 기쁘게 해 주어야지...
위붕마을
짜파네 산장은 2층으로 지어져 있는데, 아래층은 그냥 넓은 공간으로 남아있으며, 부엌과 손님방은 사다리로 올라가는 2층에 있었다. 그런데 방을 제외하고는 문이 없는 마치 커다란 오두막 같았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아궁이에 불이 타고 있는 부엌 앞에 앉아있어도 추웠다. 7-8개 쯤 되는 방에는 햐얀 시트가 깔린 침대가 두 개 또는 세 개 씩 있고, 이불도 깨끗한 것이었다. 단지 화장실이 따로 있어서 조금 불편하였으나 계속해서 뜨거운 물을 공급하여 주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위붕마을 뒷편 메이리설산 베이스 켐프 들어가는 초입
2층 터진 베란다에 나와 짙은 안개 휘감기는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신비스러운 별세계 아니 한 폭의 동양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깊고 높은 산 속의 아담하고 고요한 마을, 자동차 소리도 없고, 비행기 소리도 들릴 수 없는, 자연도 사람들도 때 타지 않은 그런 마을이다. 좁은 골목길은 말과 소들이 어슬렁거리고, 산 밑 밭에는 한 무리 돼지 떼가 야생상태나 다름없이 뛰놀고 있었다. 맑은 바람소리와 그 사이로 들리는 새소리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도 하나같이 바쁘지 않게 그리고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메이리설산 가는 숲의 고목 가운데서
같이 든 중국여인들이 취사를 도와서 장만한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또 밤늦게까지 칭거주라는 독한 술도 마시며 즐거운 산속마을 위붕의 첫 날 밤을 보냈는데, 당연히 흥겨운 노래가 따랐다. 역시 밤에 내려온 순지가 가장 인기 있는 가수였다. 나는 우리민요 “도라지타령”과 가요 “숨어 우는 바람소리”를 불렀다. 나는 그 곳에 오다가 만난, 장춘에서 왔다는 중국여인 미세스 두와 친한 친구가 되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녀는 샹그릴라에 작은 호텔을 하나 사서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더 맘에 들었다.
짜파네 산장의 앞뜰
제13일: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어제 밤까지도 하늘에 별이 총총했었는데 말이다. 비는 가끔 눈이나 진눈개비가 되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나와 친구는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간단한 옷차림으로 베이스켐프를 향해 출발했다. 등산로 입구에 2월부터 4월은 폭설 때문에 입산을 금한다는 표지판이 있었으나 우리는 무시하고 지나쳤다. 숲은 생각보다 울창하고 아름드리 고산목들이 뿌리까지 뽑혀 넘어져 있기도 했다. 말을 타고 오르는 사람이 있는지, 어느 구간은 “말을 타세요”, 또 어느 구간은 가파르니 “말에서 내리시오” 하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그런데 출발할 때 부터 따라온 하얀 삽살개 한 마리가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가는데 내려올 때까지 우리를 안내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이다. 네팔 안나푸르나를 오를 때의 검둥이 생각이 났다.
베이스켐프 가는 길이 난 울창한 숲
우리에게 베이스켐프 가는 길을 안내한 삽살이
나무에 붙은 거대한 혹
산에는 여기저기 붉은 색 중국철쭉이 피어있는데 아직 차가운 날씨 때문인지 활짝 웃는 모습이 아니고 조금 쳐진 모습이었다. 잎도 마찬가지였다. 질컥질컥한 길을 한 시간 여 오르니 눈밭이 나왔는데, 먼저 올라갔던 중국청년들이 내려오면서 더 이상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눈 깊이가 50cm쯤 되고 가파르다면서. 그래도 우리는 힘들여 올라 온 시간이 아까워 계속 길을 찾아 가 보았는데, 산비탈을 반 바퀴 쯤 돌아서니 고개가 나타나고 오색 빛깔로 펄럭이는 타르쵸가 보였다.
언덕을 다시 돌아 내려가니 눈바람 속 건너편, 흰 눈이 길게 깔린 산자락에 작은 건물 몇 개가 내려다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금방 저 곳이 베이스켐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려가서 개울을 건너고 4-500미터 쯤 더 가면 닿을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나 눈발이 거세지고 시야가 흐려서 좋은 경치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내려가지 않기로 하고 그만 돌아섰다. 메이리설산 베이스켐프는 위붕에서 출발하여 천천히 걸어도 3시간쯤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라고 보면 된다. 이 정도의 코스를 위험하다고 돌아 선 중국청년들을 보고 나는 그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려오는 길은 상대적으로 쉬워서 한 시간 반 걸렸다.
저 아래 내려다 보이는 메이리설산 시베이스켐프(大本營)
저녁 때 쯤 되니 짜파의 두 살 터울 형이 두 부인을 데리고 나타났다(부인이 셋이라고 했다). 내일 짜파가 우리랑 같이 내려가니 대신 산장을 지킬 가족을 데리고 온 것이다. 여자들이 오니 부엌부터 깨끗해지고 온 집안이 말끔해 졌다. 이 날 저녁부터 짜파가 만든 이상한 음식을 먹어야 했는데, 독한 칭커주에 계란을 풀어 뜨겁게 데운 것과, 닭고기를 잘게 토막 내어 칭커주에 푹 끓인 것이 그 것이다. 몸에 좋다고 권하는데 먹다 보니 여러 그릇 해치웠다.
베이스켐프 가는 길의 숲
그날 밤 9시부터 우리는 마을 청년들이 손님을 위해 배푸는 춤공연을 볼 수 있었다. 중국의 민속무용은 머무는 곳 마다 볼 수 있었는데, 이 곳 주인은 손님에게 칭커주 까지 계속 따라주며 억지이다 시피 권해서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비교적 작은 마을이지만 아래 위 마을 청년들이 다 모이니 5-60여명 되는 것 같았다. 여성들도 곱게 차려입고 나와서 같이 어울려 노래를 부르는데 어찌나 목소리가 좋고 박자가 잘 맞는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정집 거실인 좁은 공간에서 연통도 없는 화로에 불을 피우고, 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구 담배를 피워대기 때문에 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슬그머니 나와서 밤하늘의 손에 잡힐 것 같은 별들을 바라보며 혼자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제 14일: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2박 3일 숙박 및 식사비로 200원씩을 거두어 주었다. 너무 많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주고 서둘러 배낭을 꾸린 뒤 위붕을 출발했다. 물병이 든 배낭을 짜파가 매고 앞서 올라 간 바람에 나는 목이 타서 죽을 뻔 했다. 그제 내려 올 때 쉬웠던 길이 오늘 올라가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야크고개에 이르러 다시 메이리설산의 아름다운 자태를 바라보며 맘껏 기를 받아 충전시킨 다음 빠른 걸음으로 하산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그제 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많은 젊은이들이 저마다 무리지어 위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만날 때 마다 짜파네 산장을 소개하여 주기를 잊지 않았다.
위봉에서 돌아오는 길
시당으로 오는 길에 우리는 짜파네 집에 들러 간단한 점심을 얻어먹었다. 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의 농장 가운데에 있었는데, 그의 부인은 밭에서 일하는지 보이지 않고 어머니가 음식을 장만하여 내 놓는 것이다. 역시 티벳족 전통가옥으로 거실은 매우 넓었으며, 앞쪽 벽에 마오쩌동과 불교지도자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우리는 그 날 오후 짜파의 짚을 타고 더친까지 와서 숙소를 구한 다음 그들 형제와 마지막 저녁을 같이 먹었다. 다리의 명물인 메기매운탕을 먹었는데 우리의 메기와 비슷한 맛이었다. 내가 짜파네 형제에게 중국아들로 삼고 싶다고 청하니 좋다고 하여, 우리는 이국간 부자지간의 의를 맺었다. 그들은 날 한국아버지(한구어 파바)라고 부르고, 나는 그들을 중국아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제15일: 아침 6시 반에 버스터미널에 나가 샹그릴라 가는 첫 버스 티켓을 사려는데, 매표소 직원이 나와 문을 열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서로 먼저 사려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서툰 중국말로 그들에게 차례로 설 것을 주문하여 한 줄로 세운 뒤 표를 팔도록 하였다. 한국 사람이 중국 오지에 와서 군기(?)를 잡은 셈이다. 그 들 중에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환영하는 사람도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버스 안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중국인한테 두통이 심하니 피우지 말라고 하니 순순히 받아들여주었다.
메이리설산을 배경으로- 버스기사
샹그릴라로 돌아오는 날에는 날씨가 좋아서 메이리설산과 백마설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맘껏 즐길 수 있었다. 버스기사는 내가 아들 삼은 짜파의 친구였는데, 우리를 위하여 메이리설산 전망대 앞에 차를 세워주기까지 해서 퍽이나 고마웠다. 역시 메이리설산은 멋있는 산이다. 외국인을 포함, 많은 사람들이 먼 길을 고생고생하며 찾아 올 만큼 유명한 산인데, 나도 두 번이나 왔지만 다시 또 와 보고 싶은 멋있고 우아한 산이다.
오른쪽 계곡에 밍용빙천(빙하)이 보인다
샹그릴라로 오자마자 나는 매표소를 찾았다. 하바설산 쪽 가는 버스가 있으면 바로 탈 수 있도록 표를 사기위해서이다. 마침 20분 후 백수대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서 표를 끊고 차에 올랐다. 백수대나 하바에서 일박하고 다음 날 호도협을 건너 백수하 등 옥룡설산 풍경구를 구경하면서 리지앙으로 돌아 갈 계획이다.
작은 버스를 타고 샹그릴라 외곽의 한적한 시골길을 빙빙 돌아 먼저 도착한 백수대는 물도 말라있고, 다른 볼거리도 시원찮았으며, 맘에 드는 숙소는 텅 비어있으면서 가격이 비쌌다. 우리는 우왕좌왕하다가 마침 하바까지 가는 버스가 오기에 올라타고 말았다. 하바에 도착하자 정류소 앞 집 객잔 여 주인이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 배낭을 짊어지고 앞장서더니 자기 집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집안에는 프랑스 단체관광객 20여명이 편하게 쉬고있었다. 하바설산을 오르려고 왔다는 것이다.
나시족 민속춤과 노래 공연
주인여자는 나시족인데 여우같았다. 마당 건너 별채 방으로 안내하더니 방값을 120위안이나 부르는 것이다. 지금까지 주어 온 가격이 있기 때문에 깎고 또 깎아 2인실 하나에 80위안으로 매듭지었다. 다른 곳에 비하면 40위안짜리였다. 그렇게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입조심을 당부하는 것이었다. 일단 온수가 나와서 샤워부터 하고 저녁은 한국에서 가져 온 라면을 마지막으로 털어 끓여 먹었다. 밤에는 그 마을 여인들이 총 동원되어 나시족이 노래를 부르며 추는 민속춤을 보여 주었는데, 젊은 여인들의 옷은 더욱 화려했다.
하바에서 바라 본 하바설산
제16일: 하바설산 오르는 일은 2박 3일쯤 걸리기 때문에 포기했다. 아침에 그 집에서 끓여주는 짜디 짠 국수를 먹다 말고, 마침 손님을 찾고 있는 파우처를 발견하여 흥정을 했다. 호도협 올드 패리까지 120원이라고 해서 올라탔다. 그런데 가까운 줄 알았던 호도협은 두 시간 반도 더 걸렸다. 길은 잘 포장되어있었으며, 꾀 높은 산허리를 돌아 달리기 때문에 하바설산은 물론 건너편 옥룡설산까지 다 드러나 보였다. 산 고개에서 잠간 내려 전망을 살피니 저 멀리 동쪽에 그리운 야딩의 선네일 신산 등이 보이는 것이었다. 반가웠다. 야딩에는 선네일, 앙메용, 하나답길의 6000미터 봉 3좌가 모여 있는 곳이다. 이번에 그 곳까지 코스를 잡았으나 동티벳탄 사정이 험악하여 외국인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해서 뺀 것이다.
호도협 끝자락 평지-멀리 희미하게 야딩이 보인다
차는 올드패리 가까운 언덕위에 세워주었다. 우리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30여분이나 땀 흘리며 위험한 비탈길을 따라 가까스로 강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힘든 일이었으나 한 편 재미있는 경험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호랑이가 뛰어 건넌다는 말처럼 좁디좁은 협곡 호도협의 안쪽에 이처럼 넓은 들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 이편저편에 넓은 토지가 깔려있고 큰 마을도 있었다. 이곳에서도 야딩은 계곡 저 끝에 아스라이 보이고 있었다.
호도협 진사강-왼쪽 언덕에서 비탈길로 아슬아슬하게 내려와야 한다
한 참 기다리니 현지인 3-4명이 더 오고 곧 저쪽에 꿈적도 않던 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5분 정도 걸리는 거리의 배삯은 25위안이었다. 호도협은 장강의 지류인 진사강의 물줄기이다. 치어터우 쪽에서는 물살이 매우 빨랐는데 이곳에서는 배가 지날 만큼 폭도 넓어지고 느려진 것이다. 산은 아니지만 아직도 양쪽 언덕이 높이 쳐다보이는 깊은 계곡이다. 그래서 배에서 내리고도 그 쪽 언덕을 오르려면 다시 힘을 빼야 할 것이었는데, 마침 같은 배를 탔던 현지인의 제안에 따라 그들에게 짐을 맡기고 우리는 빈 몸으로 올라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 올라와서는 처음 약속한 돈에 조금 더 얹어 주어야 했다.
호도협 진사강을 건너와서
언덕에서 조금 더 오니 정원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객잔이 있었다. 손님으로는 외국인 젊은 남녀가 점심을 시켜 놓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자는 리징앙으로 가고 조금 나이가 더 든 남자는 샹그릴라로 간다고 했는데 둘 다 그 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조금 쉬었다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파우처를 280위안에 빌려 리지앙으로 떠났다. 하루 밤쯤 쉬어 갈 수 있는 객잔이었으나 리지앙 쪽이 더 나을 것 같아서이다.
따주 객잔 정원에 만발한 꽃
리지앙 가는 찻길도 공사 중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중국은 전 국토가 공사 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길은 조금 털털거리기는 해도 참으로 멋진 여행길이었다. 아름다운 설산 옥룡의 모든 것을 다 보며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거의 옥룡만큼 높은 산비탈을 수없이 돌고 돌아 꼭대기에 이르니 옥룡의 멋진 봉우리들이 바로 코앞에 다가오는 것이었다. 길은 옥룡의 한 끝에서 다른 한 쪽 끝까지 죽 따라가면서 이어졌다. 옥룡의 자락에는 평화로운 마을도 있었지만 여러 곳에 관광지가 조성되어있어서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밤에 보았던 리지앙 구성거리의 중국인들이 낮에는 이곳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백수하와 옥룡설산
백수하 큰 못
우리는 따로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그들이 구채구나 황용처럼 꾸몄다고 하는 백수하를 둘러 볼 수 있었는데, 규모는 작지만 그 곳 물빛 하나는 끝내주었다. 그 상류로 올라가면 좋은 계곡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더 좋은 곳도 보고 왔지 않았는가 말이다.
옥룡설산을 배경르로
리지앙으로 들어오는 길은 넓고 시원하게 뚫렸는데, 내가 달려 본 길 중에서 일직선으로 이처럼 길게 난 길은 처음이다. 무려 10km이상 일방통행으로 건설된 평지의 직선 길을 달렸다. 신시가지에 들어오자 도로 양쪽에 멋진 주택단지가 조성되어있었는데, 단지마다 각기 다른 건축양식에 따라 다양하게 꾸며져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우리나라 관계자들도 좀 따라 배웠으면 하는 맘 간절했다. 년 중 따뜻한 날씨에 아름다운 산이 있고, 아름다운 거리가 있고, 아름다운 마을과 집이 있고, 또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노력만 하면 돈벌이도 쉬울 것이니 리지앙은 참으로 살기 좋은 도시가 아닐 수 없다. 요즘 한국의 많은 은퇴자들이 외국으로 이주하고 있다는데, 리지앙이나 샹그릴라도 그 좋은 대상이 아닐가 한다. 중국이 은퇴이민을 받아준다면 말이다.
수허고진의 고즈넉한 모습
구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수허고진에 들렀는데, 구성 못지않게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 음식점도 다양하고 가운데 물이 흐르는 시가는 한 마디로 휴식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아주 편한 자세로 여유로움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파오처 기사는 이곳을 작은 고성이라고 설명했다.
파오처 기사는 또 저렴하고 깨끗한 숙소까지 안내해 주었는데, 고성에서 80위안 하는 것 보다 더 좋은 호텔의 표준 방과 같은 급의 방을 40위엔에 얻어 주었던 것이다. 고성 외곽에 있었지만 새로 지은 버스터미널에서도 가깝고 조용해서 좋았다. 고성의 만고루가 쳐다보이는, 고성입구에서는 정 반대편이다. 이처럼 고성을 조금만 벗어나면 방값은 훨씬 싸다.
다수의견에 따라 내일 아침 차로 쿤밍으로 직행하기로 하여 호화고속버스표를 각각 214원인가에 끊고 오는 길에 맛사지 집에서 발의 피로를 풀었다. 혼자라도 가보고 싶었던 루꾸호는 포기했다. 리지앙에 다시 들리면 보기로 했던 흑룡담도 잊었다.
제17일: 9시 반 출발하는 2층 버스의 2층에 자리 잡고 리지앙을 떠나는데, 도시를 벗어나면서 보이는 농촌의 모습도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다리에서 보아 온 깨 밭이 이어져 있고, 밀과 보리를 수확하는 모습, 못자리를 하는 모습 등이 한 눈에 들어왔다. 버스는 중간 지점에 쉬면서 점심까지 제공해 주었다. 오면서 항공사에 전화하여 쿤밍 발 비행기 시간도 앞당겨 출발하도록 조치하였다.
쿤밍에 들어서면서, 택시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태양열전지판이 아파트 지붕마다 빈틈없이 설치되어있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는 이런 것도 따라하지 할 줄 모르나? 해마다 수백 수천 명의 공직자들이 해외출장을 다녀온다는데 과연 무엇을 배우고 오는지? 아시아에서 가장 어렵게 산다는 네팔의 히말라야 산속에도 집집마다 태양전지는 필수였다.
제18일: 한스네에서 하루밤을 더 자고, 오늘은 밤 11시 반쯤 공항으로 가서 내일 아침 02시 뜨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한스 민박집은 근처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식집이 있어서 식사를 해결하기도 좋았으며, 가까운 곳에 월마트가 있어서 생필품이나 선물을 사기도 좋았다. 보이차를 사려고 굳이 시내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그 곳에 가면 원하는 것 다 있었다. 유명상표가 붙은 1년 숙성 보이차 한 덩어리(500g)에 우리 돈 18,000원에 샀는데, 덤으로 2년 숙성된 작은 포장의 보이차를 하나를 더 얻게 되어 횡재한 기분이었다.
석림의 다른 모습
리지앙의 민속무용
호도협 나시페밀리 게스트하우스
샹그릴라 장족 민속춤
파라빌리지에서 주인여자와 함께
샹그릴라 구성거리
염정 가는 길의 시장성 입구를 알리는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