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 12월 29일 1808 - 7월 31 1875년)은 노스캐롤라이나 주 레일리 라는 시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슴니다. 그의 아버지(Jacob Johnson,)는 그가 세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Mary "Polly" McDonough Johnson)은 양복점의 재봉사였는데 그녀는 거기서 만난 견습공과 재혼을 합니다. 그의 어머니와 의붓아버지는 안드류와 그의 동생을 양복점에서 견습공으로 일을 하게 합니다. 앤드류는 늘 상류층으로부터 받는 편견이 심히 불쾌해 꼭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골돌이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견습공일이 지겹고 싫증이 난 존슨은 16살 되던 해 동생과 함께 양복점 일을 때려치우고 집을 뛰쳐나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다시 돌아왔고 그들의 고용주는 둘을 순회 재단사로 일하게 했습니다. 얼마 후 그의 가족은 노예주인 테네시 주 “그린 빌”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때 미국의 남부의 대부분 주는 노예제도를 지지 했습니다. 존슨은 양복점 일을 착실히 배워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양복점 사업을 하게 되었고 그의 근면과 착실한 노력에 양복점 사업은 날로 번창해 갔습니다.
그는 1827 년에 “엘리자 맥카델”이란 처녀와 결혼을 합니다. 엘리자는 존슨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에게 체계적인 공부를 가르치고 사업에 대한 조언을 합니다. 엘리자는 결핵을 앓고 있었지만 50 년의 결혼 생활을 통해 가장 믿음직스런 후원자로 또 튼튼한 정치적 동반자의 역할을 어김없이 해냈습니다.
존슨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의 양복점은 그에게 정치를 논 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 되어 주었고 그는 점점 주위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해 이것이 그의 정치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1829년에 그는 그린 빌 시의 구청장으로 선출 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 후에는 “그린 빌” 시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1831 년 Nat Turner Rebellion(1831 년에 버지니아 햄톤 카운티에서 일어난 노예 해방운동) 후 테네시 주에서도 흑인들이 자유롭게 투표할 권리를 부르짖었고 존슨은 이를지지 했으며 이것은 그를 정치적으로 수면위로 떠오르게 했습니다.
1835년 그는 테네시 주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존슨은 정부가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쓸데없는 낭비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또 테네시 주의 노예제도 폐지와 북부의 유니언(남부의 연방군과 반대되는 군인) 을 지원했습니다. 1843년 그는 테네시 주에서는 처음으로 민주 당원으로 미국 하원으로 입성을 하게 됩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그는 자연 같은 남부 의원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습니다.
1853년 그는 테네시 주의 군정 주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857년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남북전쟁 때 테네시주(州)가 연방을 탈퇴한 후에도 유일한 남부 출신의 상원의원으로 워싱턴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노예주인 남부 테네시 주 출신 민주 당원이었지만,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후 공화당의 링컨의 노예해방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공화당 대통령인 링컨 대통령의 런닝 메이트로 부통령이 돼 링컨이 암살된 후 미국의 제17대 대통령을 승계했습니다. 그러나 임기중에는 의회와 원활한 관계를 갖지 못했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법으로 흑인들에게 평등권을 보장해 주려던 북부 급진파의 노력은 남부세력의 거부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당시 남부지역에서는 1867년 테네시에서 조직된 큐클럭스클랜(Ku Klux Klans)이 남부 전역으로 확대돼 흑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폭력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의회 내의 북부 급진파는 남부에 대한 그간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책임을 존슨 대통령에게 돌렸습니다.
1865년 4월 15일 미국 17대 대통령(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으로 취임한 (저격으로 사망한 링컨 대통령을 승계) 존슨 대통령이 구노예제 세력의 부활을 허용하는 반동적 재건정책을 수행하고자, 공화당의 급진파가 제출한 법안에 전부 거부권을 행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존슨 대통령이 의회의 급진파와 가까운 국방장관 에드윈 스탠턴(Edwin M. Stenton)을 해임하자, 의회는 상원의 동의 없이는 대통령이 임의대로 각료를 해임할 수 없도록 하는 신분 보장법(The Tenure of office Act)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하원에서는 존슨 대통령 탄핵안을 표결에 붙이면서 상원에 대해서도 탄핵안을 지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이유는 연방의회의 정책에 대한 반대와 또 그러한 정책을 비판할 때 대통령의 품위를 손상하는 과격한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상원에서 탄핵재판이 열렸으나 존슨 대통령이 각료를 해임한 것은 월권행위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또 만약 탄핵안이 통과돼 대통령이 물러나 공석이 될 경우, 위험한 선례를 남기게 된다는 우려가 탄핵안을 부결시켰다. 존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시도는 막상 투표가 시작되었을 때 7명의 공화당 의원이 반란을 일으켜, 1표차로 부결이 되었씁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존슨 대통령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탄핵 재판을 받은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남겼습니다.
미국 제17대 대통령(1865~69). 시의회의원· 주 민주당 하원의원· 주 상원의원· 연방하원 의원· 테네시 군정 주지사로 임명. 연방 상원의원을 역임하였습니다. 1850년대 중반에 자영농지법(Homestead)을 지지했고 남북전쟁 때에는 노예제도를 인정하였으나, 남부의 연방이탈에는 반대해 전쟁 파 민주당원이 되었습니다. 1862년 테네시 주 군정관, 1864년 3월 4일, 링컨정권의 부통령이 되었으며 이듬해(1865년 4월 15일) 링컨이 암살되자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그 뒤 1868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후보지명에 나섰지만 지명을 얻지 못했다. 1875년 1월 전직 대통령으로 유일하게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1864년 링컨 대통령이 암살되자 대통령직을 승계한 그는 이듬해 4월 미국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재임 기간 중 1867년 국무장관 수워드(William Seward)로 하여금 러시아로부터 알라스카(Alaska)를 단돈 720만 불에 매입 합니다. 당시 국회에서는 ‘얼어붙은 불모지 땅, 쓸모없는 얼음 박스’를 산다고 온갖 비난을 하며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알라스카는 감추어진 무한한 보고이기에 다음 세대를 위하여 사두자”며 의회의 동의도 받지 않고 반대를 무릅쓰고 매입했습니다. 오늘날 알라스카는 미국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자 천연가스, 석유, 금 등의 천연자연이 가장 풍부한 미국의 영토이지요. 또 세계적으로 알려진 관광지 역활도 잘 해 내고 있습니다. 알라스카 주에서는 그 땅 매입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수워드" 의 이름을 딴 수워드 도시가 있으며, 매년 3월 마지막 월요일을 ‘수워드 기념일’(Seward Memorial Day)로 지정하였습니다.
알래스카는 미국 땅 5분의 1, 남한의 17배나 되며 미국의 몇 개주를 합친 것만큼 엄청나게 큰 땅입니다. 의회가 대통령을 소환해 알래스카를 사들인 것에 대해 공격하자 공동조사단을 구성해 알래스카에 탐사를 보낸 후 책임질 것이 있으면 책임을 지겠다고 답변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Alaska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할 때 알라스카의 무한한 가치를 예견했던 분이 바로 초등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존슨 대통령이었습니다. 누가 그의 식견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는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식견을 겸비한 사람이었고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정확히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옳다고 믿는 것은 어떤 난관에고 굽히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분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일화도 많이 알려져 있지요. 그가 시의회 의원 자격으로 워싱턴에서 연설할 때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비웃었다고 합니다. “양복쟁이 출신 주제에!”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아주 재치 있게 받아넘겼습니다. “어느 신사께서 제가 재단사였다고 하시는데요. 네, 좋습니다. 저는 그 일을 할 때도 일등이었습니다. 저는 손님과의 약속을 꼭 지켰고 제 옷은 언제나 최고였지요.”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비록 대통령 공천을 받지는 못했지만 대통령 후보로 뛰던 시절 상대 당 후보가 “미국 대통령이 초등학교도 못나왔다는 게 말이 됩니까?”라고 인신공격을 하자 존슨은 차분하게 다음과 같이 대꾸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그분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전 인류의 구원자이자 지도자로서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응수 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습관에서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존슨은 자신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오늘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매일의 삶을 충실히 산분이었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과거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고, 현재는 쏜 살 같이 가며, 미래는 천천히 다가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뉴욕 타임스 보도
존슨 대통령이 상원에서 탄핵 재판 받는 장면
앤드류 존슨 대통령 가족들
탄핵재판 콤미티 멥버들
안드류 대통령의 생가
안드류 대통령
퍼스트 레이디 엘자와 존슨 대통령
엘자 존슨 19세 때
17 대 대통령 앤드류 존슨
탄핵재판
엘리자 존슨
안드류 존슨 대통령이 묻힌 테네시 그린 빌 시의 국립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