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들이(1)
아무리 훌륭한 시설이 있어도 활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누구나 평소에 공기의 존재에 대한 필요성을 망각하고 지내듯 문화예술에 대한 무관심 역시 동일한 현상이다.
이따금 전람회나 공연에 참석을 한다. 주로 아내와 동행하는데 각박한 일상에서 해방감과 소소한 기쁨을 느낀다.
최근 연 이틀에 걸쳐 전시장과 박물관을 찾았다. 갈 때마다 체계적인 사전교육과 예비지식의 부족함을 절감한다.
첫째 날에는 ‘예술의 전당’ 내에 있는 ‘서예박물관’으로 『남정(南丁) 최정균(崔正均)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찾아갔다. 「이정용」 시인과 함께 입구에서 선생의 장자인 「최용원」 친구를 만나 상세한 안내와 설명을 들었다. 생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영상자료를 보니 마치 면전에서 인사를 드리는 기분이었다. 서예가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화백 등 기라성 같은 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서예뿐만 아니라, 독보적인 문인화의 지평을 새롭게 열고, 이 땅에 처음으로 원광대학교에 서예학과를 개설하신 분이다.
선생의 아들과는 그 옛날에 우연히도 같은 날에 편입 시험을 치루고 한 반이 되었다. 가끔 그의 집에 놀러가 난생 처음으로 선생이 비장하신 꼬냑 술을 따라 마시기도 하였다. 이층집안에는 묵향이 은은하고 각종 그림과 서예작품도 여러 편이 걸려 있었다. 묵직한 장서도 정돈이 가지런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의 아버지는 선친과도 교분이 두터운 분으로 당시 이미 서예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남정(南丁) 최정균(崔正均:1924~2001)선생이셨다. 이미 집에도 선생이 ‘지덕겸수(知德兼修)’라고 쓰신 작품이 걸려 있었다. 각 선친께서도 적극적으로 성원하시어 둘이는 각별하게 지냈다. 나중에 서울로 이사한 부암동 자택으로 어른께 문안 인사를 올리고 환대를 받았는데 무심한 세월만 지나고 말았다.
처음으로 선생을 대면한 것은 1971년 1월 초였다. 선생의 부름을 받고 찾아간 것이다. 귀한 글씨를 준비하셨다가 육사 입학을 축하한다는 내용과 낙관을 찍어 선물로 주셨다. 영조와 정조 시대에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쓴 글이었다. 어떤 어려움도 꿋꿋이 이겨내고 청운의 꿈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이루길 성원하는 내용으로 가보(家寶)로써 잘 보관하고 있다.
여하튼 「남정」 선생은 한 시대를 빛 낸 서예의 대가이시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한학을 배워 한문에도 능통하셨고,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少太山) 대종사」로부터 사사(師事) 하셨다. 국전에 3회 입선과 6회의 특선을 하였으며, 추천 및 초대 작가와 국전 심사위원과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하셨다.
일찍이 한국 근,현대 서화사의 대표적 작가인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선생에게 15년간을 수학하여 수제자로서 명성을 떨친 분이다. 세한도(歲寒圖)를 일인으로부터 찾아오신 「소전」 선생은 독보적인 소전체(小篆體)를 완성하신 대가로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을 서도(書道) 혹은 서법(書法)이란 용어 대신에 서예(書藝)라는 우리 고유의 말을 정립하신 분이다.
「남정」 선생께서는 스승인 「소전」 선생이 와병하자 서울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여 조석으로 말벗이 되어 수발을 들었으며, 「소전」 선생이 작고하신 후에도 본인이 떠나실 때 까지 11년 동안을 기일이면 챙기는 제자의 도리를 다하신 분이다. 「남정」 선생은 「추사 김정희」와 「소전 손재형」의 맥을 이어 서화동원(書畵同源:글씨와 그림은 본질적으로 같다)을 실천한 서화가로 평가받는다. 문인화(文人畵)의 매화와 연꽃 분야에 정통하셨으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신 분이다. 서예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쟁쟁한 제자들이 현역에서 활동 중이다.
사실 문인화는 시(詩), 서(書), 화(畵)가 하나로 이루어지는데 이를 구비한 작가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낸다 하나 생각을 한문 시문으로 표현하기가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요즘엔 한문을 예전처럼 익히지 않으니 스스로 시를 짓기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씨와 그림은 잘 표현하고서도 한글로 시를 지으니 그 운치와 멋이 격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육사졸업을 하는 해에 후배들에게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선생의 글씨를 받아 기증을 하였다. 사전에 선친을 통해 전후 사정을 말씀드리고 주말에 내려가 인사를 드리고 작품을 받았다. 바로 상경하여 당시 청량리 대왕코너에 있는 표구사에 맡기고 다음 주말에 찾기로 하였다. 그 다음 주말에 갔더니 주인이 연신 난감해하며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작업을 하면서 실수로 작품을 망쳤다는 것이다. 이미 엎어진 물인지라 바로 다시 연락을 드려 다시 작품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벽면에 걸어두고 떠났는데 몇 해가 지나 국어과 강사와 훈육관으로 근무하면서 제자리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다시 생도대대장으로 부임해보니 창고에서 낮잠을 자고 있어 바로 제 자리에 둔 일이 있다.
최근에 지금도 건재한지 궁금하여 마침 박물관장으로 있는 후배인 김 박사에게 소재확인을 부탁하였다. 아마 환경정리를 하면서 무지의 소치로 분실한 듯 작품의 소재를 알 수 없다는 소식이 왔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전시장에는 당대 최고의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이 즐비했다. 선생이 교유했던 따뜻한 인간관계의 한 단면이었다. 회갑연이나 자녀의 결혼 시에 주고받은 대가들의 유작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남농 허건」선생의 회갑연을 축하하는 당대의 최고 서화가 16인이 합동으로 만든 병풍은 그야말로 국보급 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선생의 석란도(石蘭圖)를 비롯한 많은 격조 높은 작품의 수준이 대단하였다. 유족들은 「남정」 선생이 남긴 다수의 유작을 『서예박물관』에 기증하였다. 하지만 언젠가 고향 땅에도 기념관이 세워지길 소망한다.
친구의 동생 중 세 명이 서울 미대를 졸업하고 우리 문화를 지키고 보전하고 있다. 곧바로 선생의 노작인 ‘한국근세명가서화’인 『서화동원(書畵同源)』과 ‘작품과 회고집’인 『정창여회(靜窓餘懷)』 두 권을 흔쾌히 보내준 친구의 깊은 우정에 감사한다. 이는 단순한 서적 이상의 보물이다.
여하튼 첫 날의 나들이는 친구들도 만나고 여러 서화(書畵) 대가들의 작품을 구경하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선친 친구의 아들들이 한데모여 세교(世交)의 정을 나누는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다음 날에 역시 최고 명필의 한 분이셨던 「강암」 선생의 아들인 친구도 여러 예술가들과 더불어 전시장에 다녀갔다는 소식이 왔다. 모두가 향후에도 대를 이어 오래도록 형제 이상의 교유가 지속되길 바란다.
(2024.5.5.작성/5.15.발표)
※ 다음 기회에 2부를 올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