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때다. 아침상을 물리는데 아재가 대문 앞에서 깍두기 달라고 소리친다. 일찍부터 이 집 저 집에서 거두어 모은 동치미, 콩나물, 멸치볶음들이 리어카에 실려 있다. 가마솥을 실은 손수레가 솔 안으로 올라가자, 쌀과 국거리, 김치와 나물, 술과 돼지수육 등이 뒤따른다. 공동으로 마련해 놓은 그릇과 수저, 상들을 따라 엄마와 동네 아지매들도 올라간다.
몇 개의 아궁이에서 장작이 활활 타고, 벌건 소고깃국과 하얀 쌀밥이 구수하게 익고 있다. 맛깔스러운 참꽃 화전이 솥뚜껑에서 지져지고 숭덩숭덩 썬 돼지 수육과 팥고물을 묻힌 찰떡도 있다. 동네 사람들은 흥이 넘쳐 서로 권하느라 왁자하다. 탁주 말통 뚜껑이 열리고 술잔이 채워지자 얼큰하게 취한 어른들의 춤과 노래가 시작됐다. 뒷집 할매의 창이 나오자 낭간할매가 팔다리를 내저으며 너울춤을 춘다. 아재의 늴리리 맘보에 맞춰 아버지가 무릎 사이에 술병을 끼우고 찰찰찰 박자를 치자 아지매들도 몸을 흔든다. 신명 있는 자가 노래하며 곱사춤을 추니, 점잖고 얌전하던 사람들이 겅중겅중 웃짜웃짜 어깨춤으로 화답한다. 어른들의 흥에 겨운 춤을 구경하는 꼬맹이들까지 신이 나서 고개를 까딱거린다.
경주박물관 남쪽의 무지개다리를 지나면 한쪽에 냇물을 끼고 남산에 기대앉은 ‘해맞이마을’이다. 동네 꼭대기에 산과 들을 물고 아름드리 소나무 대여섯 그루 아래 둥그렇게 잔디를 펼친 곳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솔 안’이라고 불렀다. 매년 개구리와 벌레가 동면에서 깨어 움직인다는 경칩 쯤 이면, 여기에서 ‘놀음’이라는 봄맞이 행사를 거하게 했다.
어울려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다. 마을 사람들은 추렴한 음식을 먹으며 마주 보는 눈이 둥글게 휘어지고 입꼬리는 귀에 걸렸다. 신나게 노래하고 춤춰 겨울 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 낸 후 몸 안의 세포마저 흔들어 깨웠다. 집은 대문을 열어 놓은 채 올라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온 힘을 쏟아 올해 농사에 풍년이 들고 소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는 공동의 힘을 만들었다. 그 기운을 솔 안에다 차곡차곡 심었다.
공간은 그 안에 사는 삶에 따라 특별한 장소가 된다. 사람과 함께 변하고 세월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진다. 솔 안은 해맞이마을 제일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동네 사람들의 바람이 심어져 있다. 논밭에서 일하다 여름 햇볕이 너무 뜨겁거나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을 때 그리로 가면 소나무는 가지를 넓게 펴서 햇살을 가리고 빗물을 막아 주었다. 해결되지 않는 일로 마음이 복작거릴 때도 그곳 잔디에 앉아 시원한 솔바람을 쐬면 마음이 가라앉으며 실마리가 풀렸다. 솔 안 이야말로 해맞이마을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었다.
서울을 다녀오던 길에 예정에 없던 친정으로 갔다. 무지개다리 옆으로 큰 길이 열렸으며 마을을 연결하는 찻길도 생기고 뒷마을로 가는 고살길도 넓혀졌다. 동네마다 경운기를 몇 대씩 갖췄고 두세 집 건너 자가용도 있다. 시내로 가려면 걸어서 두 부락을 지나 차를 타야했지만 이제 하루 세 번씩 시내버스가 들어온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분가할 필요가 없어져 대가족이 늘어나며 마을에 젊은이가 많아졌다. 나지막한 초가집 일색이던 시골집들이 콘크리트 양옥과 점잖은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몇 집이 늘어났지만 대부분은 세대를 바꾸어 그대로 살고 있다.
동생네가 사는 친정집이 텅 비었다. 평상에 앉았더니 저 위 솔 안에서 솔잎들이 바람에 살랑거린다. 불현듯 어린 시절이 떠올라 밭두렁을 밟고 올라갔다. 신발을 벗어든 채 잔디밭을 한 바퀴 빙 돌아본다. 반백 년이 넘게 흘러 세상은 달라졌지만, 이곳은 변한 것이, 별로 없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흙과 강물은 풋기가 어렸으며 햇살과 바람을 담은 이끼도 싱그럽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잔디 속에 드문드문 난 클로버 초자 그대로다.
옛날 아궁이가 있던 곳을 지나 어른들이 회돌던 자리로 갔다. 고요로운 터를 골라 앉으니 찌뿌둥하던 마음이 올라온다. 아들네가 서울에서 집을 팔면서 새 집을 계약할 때까지 이사 오지 않는다는 약속을 말로 하고 계약서에 쓰지 않았다. 이사 갈 집은 구해지지 않았는데 날짜가 다가오니 부동산에서 집을 비우라 한다. 일정 기간 살 곳이 없어졌다. 야무지지 못해 욕보는 게 마음 아프고, 괜히 부모까지 속상하게 한다싶어 화도 난다. 약게 살 필요는 없지만 꾀부리는 사람에게 당하지는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을 모아 솔 안에 펼쳐 낸다. 머리가 어수선해 눈을 감았다. 소나무 가지에서 금싸라기 같은 햇살이 내려와 이마에 꽂힌다. 어디선가 신나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숟가락 꽂은 됫병을 정강이에 끼워 흔드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동네 어른들이 빙 둘러서서 노래를 부른다. 후렴까지 마치자 햇살에 실려 먼지처럼 사라지고 만다. 따뜻한 울림이 등줄기를 타고 온몸으로 전해진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역경에 부닥치고 그것을 해결해 가면서 길을 닦아 나간다. 많은 실수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솔방울들이 우두두 떨어진다. 안타까워하지 말고 자식이 헤쳐나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봐 줘야 한다는 선친의 말씀이 들리는 듯하다. 솔 안에 심어진 해맞이마을 어른들의 마음 덩어리가 나를 다독인다. 애면글면하지 마라. 믿고 기다리면 자식은 걱정을 끊어 더 큰 사람이 될 것이다.
솔바람이 한차례 지나간다. 머리가 시원해지고 마음이 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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