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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말씀/ 누가복음 2:1-20 요절/ 누가복음 2:11 | 2016.12.25 |
성 탄 제 3 강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한 아기로 이 땅에 탄생하신 구주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까? 세상에는 슬픈 소식과 나쁜 소식이 가득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탄절을 해피 홀리데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아는 우리는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아기 예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성탄의 은혜와 기쁨으로 넘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때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전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는 뛰어난 지략으로 공화정의 내란을 일소시키고 제정시대를 열렸습니다.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아구스도 즉 존엄자라는 칭호를 받았고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통일시키고 전쟁을 종식시켰습니다. 그로 인하여 Pax Romana 시대가 시작되었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통치자금을 어디서 모을까 궁리하다가 인두세를 받고자 했습니다. 세금을 걷기 위해 아구스도 황제는 호적령을 내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해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임산부였기에 호적하러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남편 요셉과 함께 먼 거리를 여행했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여행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마침내 베들레헴에 도착했고 거기서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 곧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으로 미가서 5:2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BC 700년경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하나님은 이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가이사 아구스도의 절대권력을 쓰셨습니다. 가아사가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속사를 배경으로 삼아 구속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구속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은 메시야 예수님에 대한 약속이며 신약은 그 약속의 성취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정세나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상황을 보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구원역사를 친히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산모의 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셉은 이 여관 저 여관을 찾아다니며 “방 하나만 주세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해산의 진통을 하는 산모를 위해서 방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마구간에 들어가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7). 구유가 어떤 곳입니까? 성탄카드에 그려진 대로 따뜻하고 아늑하고 낭만적인 곳입니까? 아닙니다. 구유는 짐승의 먹이통으로 불결하고 어둡고 차가운 곳입니다. 이 세상 어떤 어머니가 귀한 맏아들을 낳아 거친 강보로 싸서 그런 구유에 뉘이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마리아는 왜 그 귀한 맏아들을 거친 강보로 싸서 비천한 구유에 뉘일 수밖에 없었습니까?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관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아기 예수님께 방을 내어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행으로 인해 모두들 지쳐 있었습니다.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이 딱딱해지고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 여관에는 아기 예수님이 눌 자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탄생하실 때부터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셨고 냉대를 받으셨고 멸시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 속에서 구유에 뉘이신 아기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찬송가 가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 별들이 반짝이는데 그 어린 주 예수 꼴 위에 자네” 구유에 뉘이신 예수님은 지극히 높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가이사의 궁전에 황태자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찢어지게 가난하고 힘없는 가정에 태어나셨습니까? 왜 강보에 싸여 비천한 구유에 뉘이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가난과 연약함과 슬픔을 깊이 이해하시고 체휼하시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 가난과 연약함과 슬픔의 자리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낮고 비천한 자리에 처해 있는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시고 체휼하시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 스스로 낮아져 비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 구유에 오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낮아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남에게 조금만 무시를 당해도 분노가 일어납니다. 크게 무시를 당하거나 지속적으로 무시를 당하면 증오심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미움 때문에 마음으로 수없이 살인을 하며 일생동안 증오심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하십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분이 자기를 낮추어 비천한 구유에 뉘이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낮아져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그의 낮아지심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낮아져서 가난한 자, 연약한 자, 슬픈 자를 이해하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연약함과 가난과 슬픔과 운명과 상처를 들고 아기 예수님께 나아갈 때 나음을 받고, 인생문제로 고통하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그 밤에 주의 사자가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주의 사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말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10)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정말 있단 말입니까? 세상에는 슬픈 소식과 나쁜 소식으로 가득합니다. 요즈음 한국은 비선실세, 국정농단, 촛불시위, 맞불시위와 같은 말들이 난무합니다. 살인, 폭력, 범죄, 사고의 소식들이 쏟아집니다. 세상에는 기쁨의 소식도 가끔 들려옵니다. 그러나 그런 소식들은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온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나라와 민족과 종족들이 있습니다. 또 많은 계층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종교전쟁, 색깔논쟁, 보수와 진보의 대립, 노사분규 등 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다 함께 기뻐할 수 있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보통의 경우 한쪽에게 기쁜 소식이 되면 다른 쪽에게는 나쁜 소식이 됩니다. 대학 합격 소식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불합격 소식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취업 소식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혼 소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속상한 소식이 됩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복음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것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왜 온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까? 이는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주란 구원자를 말합니다. 구원자는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원해 주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은 우리 인간은 구원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세상을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라고 묘사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과 슬픔과 허무와 절망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이같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주저앉게 하는 것입니까? 바로 죄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명력과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추구합니다. 수험생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인간조건 개선을 통해서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합니다. 청소년들은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를 갈망합니다. 대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얻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외모와 실력과 성격이 좋은 배우자와 결혼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얻어도 행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다윗은 정욕의 뿔에 찔려 간음죄를 짓게 되었을 때 그의 영혼은 시들고 병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왕의 보좌에 앉아 있었으나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그의 얼굴은 산해진미에도 불구하고 꺼칠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자와 같았던 그의 용맹과 기력은 쇠하여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시31:10) 무엇이 아침 해 같이 밝았던 그의 인생을 이처럼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주저앉게 한 것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훌륭한 인간조건을 갖춘다 할지라도 죄가 있는 곳에는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죄는 빛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주저앉게 만듭니다. 죄로 인해 고통하던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았을 때 참 평강과 자유와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죄사함을 받은 자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라고 노래했습니다.
천사는 구주 예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 주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란 뜻입니다. ‘주’라는 말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구주 예수님은 우리의 왕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과 공의로 다스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순종과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주요 그리스도요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구주 예수님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왜 인류의 구주가 구유에 누이신 연약한 한 아기로 오셨습니까? 이는 가이사처럼 힘이나 권세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낮아져 겸손히 섬기시는 섬김의 왕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히 낮아지셔서 우리의 연약함과 상처와 허물을 깊이 이해하시고 싸매 주시고 섬겨주시는 겸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죄인이든지 다 영접하여 주시고 품어 주시고 섬겨 주십니다. 이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십니다. 이 겸손의 왕, 섬김의 왕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받을 때 우리의 영혼은 치유되고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해 집니다. 이 예수님을 믿을 때 누구든지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구주의 표적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한 아기입니다. 가이사는 화려하고 웅장한 대리석 궁전에 있지만 만민의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은 이렇게 아주 낮고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이것을 당신의 표적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이렇게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찾아오시고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홀연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천사들은 하늘나라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지휘 아래 성찬 찬양 연습을 많이 하고 와서 은혜가 넘치는 찬양을 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구주 예수님의 탄생은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과 신실하심과 그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난 타락한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임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데서 오는 참 평화를 맛봅니다. 그리스도는 싸움과 분쟁과 갈등이 많은 세상에 오셔서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시고 평화를 이루십니다. 성탄의 밤 구유에 한 아기로 오신 평화의 왕 예수님을 우리 마음 첫 자리에 모시어 들임으로 구원의 기쁨과 하늘의 평화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목자들은 성탄 복음의 소식을 듣고 “구주가 탄생했다고 근데 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난 그들의 마음은 기쁨과 평강과 소망으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동은 일생동안 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도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구원의 복음을 머리로 아는데서 끝나지 않고 마음에 새기고 삶의 현장에 적용함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왜 가장 큰 선물입니까? 예수님은 나의 구주요 그리스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성탄전야에 함께 모여서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고사리 같은 손을 움직여 아기 예수님을 찬양했고, 악기와 목소리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학생들은 스킷 드라마를 통해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참 자유와 기쁨을 얻었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선물을 주고받으며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일생동안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 주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백성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신 구주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