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군 민통선 북방마을③
수복 초기에는 일일출입허가를 받아야만 민통선 안 자기 농토에 들어갈 수 있었다. 농사일이 바쁜 농번기철에는 출입 허용 시간을 연장해달라는 주민들 요구가 빈번했고, 군부대는 작전상 불가하다고 맞섰다. 안보가 최우선인 60~70년대에는 주민과 관공서가 관할 부대장의 눈치만 봐야했다. 이후 아예 농번기 때에 농사지을 남자들만 일정한 기간 동안 통제된 장소에 모아놓고 천막에서 숙영하는 가유숙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군인들의 점호를 받아야 했다. 전쟁의 상흔이 가라앉고 체제가 안정되면서 주민들의 옛 고향 입주에 대한 열망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휴전선 인근 수많은 황무지와 유휴지를 개척해 농지확장은 물론 식량증산이라는 과업을 완수하고, 첨예한 남북대치상황에서 국가안보체제도 강화하고 대북심리전에서 우위를 확보할 목적으로 민북마을(선전마을)을 건설하게 된다.
철원군 최초의 민북마을(자립안정촌) 월하리 전경
민북마을은 일반적으로 전략촌이라고 통칭되는데 실제로는 입주 배경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 그 명칭으로는 초창기 자립안정촌과 이후에 가장 많이 건설된 재건촌, 박대통령 집권 후반기에 파주 대성동과 철원 유곡리 두 곳에만 시범적으로 건설된 통일촌 등이 있다. 민북마을이 크게 3부류로 구분되는 기준은 조성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마을 조성과정에 정부가 얼마나 깊숙이 주도적으로 개입했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철원군에서는 1959년 철원읍 월하리 72세대를 필두로, 1968년 철원읍 대마1리 150세대, 대마2리 97세대, 1970년 김화읍 생창리 100세대. 1973년 김화읍 유곡리 60세대, 1974년 갈말읍 동막리 50세대, 정연리 120세대, 1979년 동송읍 이길리 68세대, 양지리 100세대, 1980년 관전리 32세대, 1960년 근남면 마현1리 66세대, 1968년 마현2리 60세대 등 총 14개 민북마을을 조성하여 975세대를 입주시켰다. 그러나 입주 초기 너무 근시안적으로 공사해 70년대 후반 대대적으로 보수한다.
철원역사문화연구소 김 영 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