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조선의 3대 왕 태종이 그의 아들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거처했었던 '수강궁' 터가 1483년 창덕궁의 구역 확장과 더불어 내명부 여인들을 위한 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동궐'로 불리며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부족한 주거공간을 보충해 주며 본격적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창경궁 바로 옆에 위치한 창덕궁과는 반대되는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창덕궁이 조선의 정사가 다뤄지는 공간이었다면, 창경궁은 아늑함과 섬세함이 정말 마음에 드는 공간으로 다가왔다. 그 대상의 모습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은 채 훌륭한 조력자로서 호수 위의 거위가 우아하게 떠 있을 수 있도록 묵묵히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정적이면서도 고풍스러웠고 소란스러움 대신 고즈넉한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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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덩그러니 남아 있는 공간
올해 들어 보수공사에 들어갔던 정전으로 통하는 문 '명정문'의 복원 공사가 완료됨에 따라 창경궁의 모습이 조금씩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왕이 정사를 돌보는 정전과 그 주변 전각들은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처럼 웅장하거나 장엄한 매력 대신 고풍스러움과 소박한 매력이 깃들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파괴된 전각들은 광해군에 의해 복원되며 지금까지 화마를 피해 기특하게도 당시의 건축 양식을 간직한 채 우리들 곁에 남아 있었다.
창덕궁과 창경궁 주변을 담은 그림 '동궐도'를 통해 예전 창경궁 권역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면서 전각들이 많이 파괴되며 지금은 정전과 주요 전각들만 남긴 채 대부분 권역이 풀과 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다른 고궁들에 비해 사람도 많이 찾지 않아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 최적의 장소였지만 여백의 미와 동시에 다가오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게 쳐진 고궁 담벼락과 나무로 인해 도심으로부터 단절된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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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한결 시원해진 바람이 창경궁에 깃든 서사에서 비롯된 감정들을 전해 주는 듯했다. 궁궐에서 벌어진 숱한 이야기와 한 맺힌 서사들을 시작으로 외부로부터 비롯된 국권 침탈의 순간까지 사실과 서사에서 비롯된 분위기가 순간 이 공간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 줬다. 자칫 여운이라도 가실까 주변을 조심스레 돌아보다 눈앞에 벤치에 앉아 바람이 전해 준 감정들을 천천히 되새겨 본다.
텅 빈 공간들은 어느 순간 각자의 서사에 맞게 연극 무대로 탈바꿈 해 있었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인물들이 그 순간을 재현하는 듯했다. 텅 빈 정전 안을 꽉 채운 왕과 아들의 목소리 더불어 치정극에 조선시대의 마지막 왕 순종의 서글픈 모습까지 그렇게 시공간을 초월한 요소들이 모이며 창경궁에서의 또 다른 여행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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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경궁과 창경원
이방원이 아들 세종에게 지존의 자리를 물려주며 붕어하기 전까지 머물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사라지기 전까지 단종이 세조에 의해 폐위 후 노산군으로 강등되며 머무르기도 했으며, 차후 세조 또한 이곳을 거처로 활용하며 뒤를 이은 예종 또한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고 전해 진다. 차후 바로 다음 왕에 의해 창경궁으로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며 본격적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창경궁 또한 화마에 휩싸인 채 조선 초기 건축 양식을 담고 있었던 전각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그 모습을 감추게 된다.
7년에 걸친 전쟁이 마무리된 뒤 정릉동 행궁 시절 경복궁을 제외한 창덕궁을 복원하면서 동시에 창경궁 또한 복원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후 복원 공사를 세자 시절부터 진두지휘했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며 해당 작업이 마무리가 됐고, 당시 복원된 창경궁의 정전 명정전은 약 5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까지도 기적적으로 그 모습을 온전히 간직한 채 우리들 앞에 소중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도 창경궁을 들어가면 명정전을 중심으로 배치된 전각들의 하나의 작은 세상을 구성한 채 온화한 느낌을 건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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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수난의 세월도 잘 견뎌 낸 창경궁도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유원지를 만든다는 명분과 순종의 우울한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를 통해 궁궐 안에 동물들을 들이게 되고 창경궁 대온실 또한 이때 세워지게 된다. 지금 보면 유럽 양식의 온실과 더불어 빼어난 자태에 마냥 아름다워 보이던 건물 뒤편엔 이런 이유들이 내재돼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창경궁 내 주요 전각들을 허물며 "창경원" 으로 격하된 채 당시 '경성'이라 불리는 도시의 유락시설로서 일반에 최초로 공개가 되어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로워졌고, 그로 인해 궁궐이라는 인식 또한 희미해져 갔다.
창경궁 내부에 벚꽃나무를 식재 해 야간에 유려한 풍류도 함께 즐기기 시작한다. 일제에서 해방이 된 후 에도 1983년 12월에 창경궁과 관련한 복원 사업이 결정되면서 현재 과천에 자리한 서울대공원 동물원으로 모든 기능을 옮길 때까지 창경궁은 여전히 유락 시설로 기능하게 된다. 창경궁의 궁역을 상세하게 담고 있는 동궐도의 그 모습처럼 본래의 모습을 완벽한 복원이 불가능 해 소실된 것으로 처리한 후 1985년에 다시 일반에 공개가 됐다. 이후 조선시대 당시 존재했던 창경궁과 종묘를 이어주는 산책로부터 장기계획에 입각해 창경궁의 원형의 모습을 복원하겠다고 하니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해 질지 앞으로의 모습이 희망차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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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사스럽지 못했던 순간
창경궁이라는 말에 담긴 뜻과 다르게 비극적인 서사가 참 많았던 공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으론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를 꼽을 수 있다. 뒤주에 갇혀 최후를 맞이한 공간이 창경궁의 정전 앞 품계석들이 자리 한 명정전 앞이다. 당시 영조는 어릴 적 낳은 첫째를 안타깝게 잃고 얻은 아들이라 기쁨이 매우 컸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문일까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영조는 4살 때부터 엄격하게 대하기 시작하며 갈등이 잦았다 전해진다. 여기서부턴 비롯된 갈등은 대리청정과 관련하여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이후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사도세자는 기행과 반인륜적 범죄를 벌인 게 화근이 되어 폐세자 된 후 뒤주에 갇혀 8일 후 아사하게 된다.
이후 사도세자에게 주지 못했던 애정을 정조에게 주며 그를 후계자로 지목, 차후 국정 운영에 대비해 필요한 작업들과 온갖 관심을 쏟게 된다. 그렇게 즉위한 정조는 수원 화성을 비롯해 갖가지 업적들을 남기며 조선시대의 명군으로 남게 된다. 부모 자식과의 관계는 통상 천륜이라 하여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관계로 여겨진다. 하물며 당시는 성리학적 관념이 살아 숨 쉬던 시대로 당시의 이야기는 듣는 나 조차도 처음에도 믿기 힘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정조 이후 세도정치의 폐단이 모습을 드러내며 조선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데 사실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을 통해 나만의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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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여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공간이던 만큼 우리에게 친숙했던 주인공의 비극 또한 이곳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바로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가 펼쳐졌던 장소 또한 창경궁이다. 궁녀로 입궐해 숙종의 눈에 들었던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내친 후 잠시 중전의 자리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 후 인현왕후를 창경궁 취선당에서 신당을 차리고 저주했다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결국 장희빈은 창경궁 통명전에서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이하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 관련 이야기는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통칭 조선판 '사랑과 전쟁'으로 불리게 된다. 통명전과 취선당은 사도세자의 사건이 벌어졌던 명정전 뒤편에 전각들로 자리해 있으며, 상상이 잘 되지는 않지만 그 당시의 일들이 벌어졌던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간담이 서늘한 느낌을 받게 된다. 문득 지금은 마냥 정적인 이 공간이 세간의 이목을 끌 만한 사건의 중심지였다는 것이 선뜻 현실로 와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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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만 있을 것 같았던 비극은 얼마 지나지 않은 2006년 4월 26일에 한 노인에 의해 또 다른 참사가 발생할 뻔했다. 이 날 창경궁을 찾았던 한 노인은 문정전 문짝에 불을 지르다가 주변에 발각되어 만류와 함께 바로 체포가 됐다고 한다. 이 사람은 과거 숭례문 방화사건을 저질렀던 사람으로 집행유예 기간에 또다시 문화재에 불을 지르려다 발각이 된 상황이다. 한창 창성하고 좋은 일 들만 가득해도 모자랄 이 아름다운 공간이 이제는 서글프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일이 벌어진 직후 다행히 주변에 있던 시민들의 발 빠른 대처로 문정전은 문만 살짝 탔을 뿐 큰 화마를 피할 수 있었고 빠르게 근처에 있는 소화기를 활용해 진화에 성공했다고 전해진다. 대부분 목재 건물로 이뤄진 궁궐 전각들은 그만큼 화재에 취약한 만큼 하마터면 대형 화제로 번질 뻔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후 문화재청은 이분들에게 '고궁 무료 평생 입장권'을 드리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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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려했고, 청아했던 공간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통하는 터널이 완공되고 그 위로 창경궁에서 종묘로 통하는 산책길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본래 2021년 완공 예정이었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는지 완료 시기가 늦춰지고 있는 모양새다. 창경궁은 다른 궁궐들 보다 맑고 고즈넉했으며, 사부작 거리며 산책하기 정말 좋았다. 그 공간이 종묘까지 이어져 거닐 수 있다면 훌륭한 관광자원은 물론 이거니와 장소의 현장감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 수 있는 요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창경궁은 전각들이 복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텅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 자체로도 자연과 잘 어우러진 전각들의 모습 그리고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낸 보호수가 한 편의 그림을 선물해 주고 있었다. 더불어 고층 건물들 주변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건물들을 넘나드는 길이 만들어진 그 순간 진정한 의미로의 시간 여행이 펼쳐지진 않을까 벌써부터 설렘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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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창경궁은 덕수궁과 함께 상시 야간개장을 진행하고 있다. 과거 조선 궁궐의 밤은 횃불과 은은한 청사초롱 불빛 만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고궁의 야간은 창호지를 뚫고 나오는 불빛과 더불어 은은한 불빛과 함께 또 다른 세계로의 분위기를 선사한다. 더불어 높은 고궁의 담벼락과 나무들은 도심 속 시끄러운 소음과 불빛들로부터 훌륭한 외벽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비롯된 몰입감은 정말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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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공사가 진행됨과 동시에 느껴지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 거대한 빌딩 숲 사이와 함께 느껴지는 이질적인 매력을 선 보일 산책로들을 차치하고서라도 현재의 그 고즈넉함을 배로 만들어 주는 섬세함과 온화한 느낌의 궁역 덕분에 경복궁보다 개인적으로 창경궁을 더 좋아라 한다. 웅장하면서도 장엄한 멋은 덜 할 지라도 잠시 바쁜 도심에서 벗어나 도심 한가운데에서 산천초목들에 둘러싸여 고립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과 잔잔한 바람의 숨결까지 모든 것들이 너무 좋다.
앞으로 각종 전각들이 복원되기 시작하면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의 창경궁의 모습이 우리들 앞에 펼쳐질 테다. 하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호기심이 작용하고 있기에 그 나름대로의 기대 또한 벌써부터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앞으로 펼쳐질 우리 내의 소중한 유산들과 그 속에서 만끽할 만한 요소들이 벌써부터 그립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