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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강산 신중현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아름다운 강산 김정미 1973년도 NOW 음반 수록곡. 신중현 스스로 자신의 음악에 가장 부합하는 보컬리스트로 첫 손을 꼽았던 김정미는 몽환적 관능으로 무장한 한국 사이키델릭 록 음악의 새로운 역사를 열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김정미 특유의 부유하는 듯한 목소리는 신들린 신중현의 기타 연주와 더불어 초월의 합일을 단숨에 이루어낸다. 그리고 <아름다운 강산>. 이 고금의 걸작은 김정미의 버전에 이르러 그저 '건전가요'가 아니라 꿈꾸는 듯한 도취의 아름다운 여행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이 앨범은 한국의 대중음악이 무려 삼십여 년 전에 어떤 위대함을 성취했는지를 알려주는 소중한 시금석이다. 우선 먼저 아름다운 강산은 김정미 음악에서 가장 유명한 곡입니다. 김정미의 아름다운 강산은 두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밴드 더멘과 함께 부른 아름다운강산이고, 또 하나는 김정미가 솔로로 부른 아름다운 강산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들은 아름다운 강산의 오리지널 보컬이 김정미라는 걸 잘 모릅니다. 음악은 유명한데, 오리지널 가수는 누군지 잘 모른다는 것이죠. 이것은 한국 가요사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한국 대중 음악사의 비극입니다. 아름다운강산은 지금도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려지고 있습니다. 김정미 이후에 대표적인 후배 가수가 이선희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강산이 일반 대중가요도 아니요, 그렇다고 건전가요는 더더욱 아니기에 오리지널 김정미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는 진짜 아름다운 강산의 사이키델릭한 맛을 절대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건전 가요로만 들렸던 아름다운 강산을 오리지널 김정미 버젼으로 들어보면 지금까지 들었던 아름다운 강산의 사운드가 완전히 뒤집히는 파격적인 소리로 들려 올것입니다. 김정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신중현 사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신중현은 자신의 작품을 가장 잘 소화해 낸 가수로 펄 씨스터즈와 함께 김정미를 꼽고 있다. 김정미는 제2의 김추자라고 불려질 만큼 김추자의 창법을 닮았다. 김추자와 김정미, 모두 신중현에게 창법 지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정미는 신중현의 창법 지도를 가장 제대로 받았던 가수였다. 김정미는 김추자에 비해 성량은 풍부하지 못하지만 신중현 음악 스타일에 걸맞은 창법, 특히 사이키델릭 창법에서는 독보적인 가수였다. 김정미의 노래가 지니는 매력은 우선은 섹시하다는 데 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치 한편의 에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1960년대 말부터 사이키델릭에 심취했던 신중현은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이키델릭 작품들을 발표했다. 특히 1971년에 가수로 데뷔한 김정미에게 집중적으로 사이키델릭 작품들을 부르게 했다. 김정미는 <봄>, <햇님>, <바람>과 같은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작품을 불러서 인기를 끌었다. 음악잡지인 『대중가요』에 김정미의 인기가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1972년 봄이다. 1972년 유니버살레코드사에서 ‘김정미 최신가요집’ 음반(KLS-44, 1LP)이 제작되었는데 이것이 김정미의 첫 녹음이었다. 이 음반에는 신중현의 작품 <잊어야 한다면>, <간다고 하지 마오>, <언제나>, <나 생각나네>, <기다리는 마음>, <가나다라마바>, <잊었던 사랑>, <못잊어>가 담겨있다. 이 음반에서 반주는 그룹 ‘더 맨’이 맡았다. ‘김정미 NOW’ 음반(성음제작소 SEL-100 023, 1LP)은 1973년 11월에 제작되었다. 이 음반에는 <봄>, <햇님>, <바람>, <불어라 봄바람>(김자림 작사), <당신의 꿈>, <아름다운 강산>, <고독한 마음>, <비가 오네>, <가나다라마바>와 같은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걸작과 한국전통음악과 록을 접목한 <나도 몰래>가 담겨있다. 이 음반의 앞표지에는 꽃밭을 배경으로 한 김정미의 인물 사진이 실려있는데, 이 사진은 신중현이 촬영한 것이며 꽃은 사이키델릭을 상징한다. 김정미는 1977년 9월에 지구레코드공사에서 제작한 음반(JLS-1201239, 1LP)에서 김성욱 작사, 김영광 작곡의 <나는 바본가 봐>, 하중희 작사, 김용선 작곡의 <셋방살이>, 김태완 작사, 김영광 작곡의 <너를 보내고>,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작곡, 지명길 역사의 <난 정말 몰라요>(Move Over), 김성욱 작사, 김영광 작곡의 <너를 갖고파>를 녹음했다. 김정미는 이 음반을 끝으로 가요계를 떠났다. 1974년 9월에 지구레코드공사에서 제작된 김정미의 음반(JLS-120920, 1LP)은 신중현, 김정미 콤비가 마지막으로 이뤄 낸 사이키델릭 음악 음반이다. 이 음반에는 신중현의 작품 <이건 너무하잖아요>, <생각해>, <담배꽁초>, <갈대>(남지연 작사), <당신이>, <너와 나>가 담겨있다. 김정미의 녹음이 담겨있는 음반으로 지금까지 13장이 확인되었다. 김정미의 음반 가운데 신중현의 작품이 담겨있는 것은 12장이며, 신중현 외의 작곡가들의 작품이 담겨있는 것은 1장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기리는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일이 있었으나 신중현은 거부 하였다. 이 후 권력에 맞설 수 없는 힘 없는 자의 마음을 그린 노래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아름다운 강산>이다. 김정미, 1953. 4. 23 ~ 서울출생 사업가(운수업) 김순성씨의 1남 5녀중에 둘째 딸로 서울에서 태어난 김정미는 고등학교 3학년인 1971년 신중현 사단에 들어와 영화《대합실의 여인,늑대와고양이들 OST]》를 불러 국내에선 특이한 경력으로《사이키델릭록 보컬리스트》로 데뷔 한다. 당시 외국의 여성 사이키델릭 록 보컬리스트로는《제퍼슨 에어프레인》의 보컬,그레이스 슬릭(영어: Grace Slick) /《빅브라더&더홀딩컴퍼니》의 보컬 제니스 조플린(영어: Janis Lyn Joplin) / 《마마스&파파스》의 미셸 필립스(영어: Michelle Phillips)/캐스 엘리엇(영어: Cass Elliot)가 유일함. 그 후 신중현 록밴드 《TheMen,엽전》의《록보컬리스트》로 활약, 신중현과 실험적인《한국사이키델릭록》의 기념비 적인 음반NOW,바람앨범을 발표 하였지만 자신의 노래에 계속 되는 창법 저속과 금지곡 판정으로 결국 자신의 음반까지 소각 처리 되자 6년간의 음악 활동을 마치고 1977년에 음악계를 떠났다. 김추자와 창법이 비슷한 것은 모두 신중현이 노래를 지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미는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애시드록)창법을 구사하며 종국엔 두 사람의 창법은 확연한 차이가 난다. 대부분 신중현이 작곡한 김정미의 음악은사이키델릭 록으로 관능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록음악 대부’ 신중현씨, 명품 펜더기타 헌정 받아 2009년 12월 15일, 한국 록음악의 대부’로 불리는 기타리스트 신중현씨가 서울 신사동 제지마스에서 세계적 기타제조업체 펜더사의 리처드 맥도널드 부사장으로부터 특별히 제작된 맞춤형 기타를 헌정받고 있다. 기타의 신 '신중현'‥생애 마지막 공연 기타와 한몸으로 울린 신중현의 록 무대>신중현, 12월 美 4개 도시 순회공연신중현, 고희 넘긴 나이에 美 팝시장 진출오늘의 주요기사 1차메모(6월21일.월)신중현 "하늘이 준 기타, 연주로 보답해야"신중현 "우리의 록음악 해외가 인정했다"두 아들과 협연, 김삿갓 시리즈까지 음악인생 '총정리' 현란한 백색 조명 속에 기타와 한 몸이 된 신중현(72)의 몸짓은 빼어난 행위 예술을 연상케 했다. 앙코르 곡을 끝으로 펜더 기타를 바닥에 가볍게 떨어뜨린 그가 양팔을 위로 올려 두 손으로 'V'를 그리자 관객은 기립박수로 노장의 50여년 음악인생에 경의를 표했다. 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신중현 헌정 기타 기념 콘서트'에서다. 이번 공연은 신중현이 지난해 12월 미국의 기타전문회사 펜더로부터 아시아 뮤지션으로는 처음 기타를 헌정받은 걸 기념해 열고 있는 순회 공연의 일환이다. 조명이 꺼지고 대형 스크린에 '신중현'이라는 이름 석자가 떠오르자 객석에서는 휘파람과 굵직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 환호 속에 흰색 양복과 '백구두'를 신고 등장한 신중현은 핀 조명 아래서 기타 솔로로 '아리랑'을 연주하며 첫 무대를 시작했다. 그의 두 아들인 시나위의 기타리스트 신대철, 서울전자음악단의 신윤철이 밴드 연주자로 참여해 아버지를 보필했다. <기타와 한몸으로 울린 신중현의 록 무대> 1부는 신중현이 미8군 활동 때와 그룹사운드 시절 곡, 그가 작곡해 다른 가수가 히트시킨 곡을 당시의 흑백 사진을 배경으로 차분한 설명을 곁들여 연주하고 노래하는 무대로 꾸며졌다. 연주할 때 꼿꼿하게 등을 펴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문 모습은 20대 때와 변함이 없었다. 그룹 애드포 시절 곡인 '빗 속의 여인',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잔', 이정화의 '봄비'와 '꽃잎',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장현의 '미련', 김정미의 '바람'과 '잊어야 한다면', 김완선의 '리듬 속에 그춤을', 신중현과엽전들의 '미인' 등 히트 넘버는 중장년 관객들에게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신중현은 "로큰롤 시대였던 1950년대 중반 미8군에서 음악을 시작해 1970년대 중반에는 로큰롤을 많이 했다"며 "'커피 한잔'은 신나는 로큰롤 곡"이라고 소개하는 등 여러 곡들이 태어나던 당시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음악하는데 희망이 안 보여 월남(베트남)에 가려고 했죠. 그런데 펄시스터즈가 찾아와 노래를 달라고 했어요. '님아'를 작곡해줬는데 히트해 결국 외국을 못 갔죠. 이때부터 신인 가수들이 곡을 받으려고 줄을 섰어요. 이후 남자 가수를 '픽업'해 장현의 '미련'도 작곡했죠." 또 유신정권 시절인 1974년 대마초 파동을 겪은 후 활동이 금지되자 다시 미8군으로 돌아가 연주했던 곡이라는 팝 넘버 '호텔 캘리포니아'를 기타 연주로만 들려준 무대는 객석을 숨죽이게 만드는 큰 울림이 있었다. 이어 1980년대 말 그가 해금된 후 록이 사라지고 댄스 음악이 판치던 때 만들었다는 '리듬 속에 그 춤을'이 강렬한 드럼 비트의 록 사운드로 흘러나오자 객석에서는 '와~'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미인'으로 1부를 흥겹게 마무리하고 이어진 2부는 신중현이 김삿갓의 시에 곡을 붙인 시리즈인 '봉우리' '돈' '훈장' '요강' 등의 토속적 록과 1970년대를 풍미했던 사이키델릭(환각제 복용 후의 도취 상태를 재현한 듯한) 록으로 채워졌다. 신중현은 "토속적인 록을 하고 싶어 김삿갓의 시를 빌렸다"며 "김삿갓은 얼굴도 가린 채 자연에 묻혀 시를 지어 가장 순수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는 꾸밈없고 솔직한 시"라고 설명했다. 이 레퍼토리는 관객들에게 생소했지만 느린 랩을 하는 듯한 가사에 '쟁쟁쟁쟁' 울려퍼지는 반복된 기타 리프가 마치 동양과 서양의 색깔을 버무린 듯 새로운 장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신중현은 바로 음악의 표정을 바꿔 '선녀' '알 수 없네' '그날들' 등 몽환적인 사운드의 사이키델릭 록을 들려줬다. 그는 "대마초 등 환각제의 힘을 빌려 음악의 이미지를 착안할 수 있지만 거기에 빠져들면 자기가 희생된다"며 "환각제는 중독성이 있다"는 나름 회한의 설명도 했다. 이날 그는 대부분의 곡을 기타 연주에 보컬까지 곁들여 들려줬다. 보컬은 때론 거칠게 갈라지고 힘이 달렸지만 기타 넥의 지판을 움직이는 그의 손놀림은 시간이 더할수록 힘찼다. 공연을 본 50대 주부 강모 씨는 "'커피 한잔'을 들으니 옛 애인과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던 생각이 난다"며 "아버지가 대단한 뮤지션이니, 피는 못속인다고 두 아들이 함께 해 더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강산'으로 마무리된 이날 공연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부터 아이돌 밴드 씨엔블루, 많은 일반인 기타리스트들이 관람했다. 김종진은 "'커피 한잔' 등 선배님의 초창기 곡부터 히트 넘버들의 방점을 찍은 '리듬 속에 그 춤을'까지 뮤지션들에게는 충격적인 명곡들이었다"며 "김삿갓 시리즈는 나도 잘 모르던 새로운 음악 세계였다"고 감탄했다. 그는 "또 버스를 대절해 통영에서 온 50-60대 아주머니들이 아방가르드에 가까운 사이키델릭 록을 이해하고 즐기는 모습에 우리 음악가들이 정신차려야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한편, 신중현이 단독 콘서트를 여는 것은 이번 투어가 마지막으로, 사진작가 김중만 씨는 그의 이날 공연과 전날 국내 기타리스트를 소집해 찍은 사진을 화보집으로 제작해 신중현에게 저작권까지 헌정한다. 글출처:서울=연합뉴스,이은정 기자 신중현 申重鉉,1940.11.4 ~ 한국 록음악의 대부인 신중현은 상징적인 인물로 통한다. 트로트가 주류를 이루었던 60년대의 가요계에 로큰롤을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록커로서 대중음악 장르의 복합화와 다양화에 기여했다. 신중현의 활동사는 곧 국내 록음악 발달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중학교 때 부터 기타를 익힌 신중현은 미군 통신용 무전기로 AFKN 전파를 잡아서 외국 음악을 들으며 독학을 했다. 1955년 경에 그는 김광수의 주선으로 라이브홀과 백화점에서 엄토미, 송민영, 김광수등과 함께 공연활동을 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 기타연주 실력이 소문나 음악학원의 강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6개월동안 음악학원 강사일을 한 신중현은 미8군 쇼무대에 서게 되면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에서 많은 인기를 얻게 된 그는 1959년에 함께 일하던 선배들과 앨범을 발매, 이것이 첫 녹음이며 이 음반에는 재즈풍으로 편곡된 동요와 한국 민요가 담겨있다. 신중현은 1962년에 황무지와 다름없는 국내 음악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음악 교육에 힘쓴 이교숙에게 음악 이론을 배우게 되었고 이 기간동안 앞으로 음악 활동을 하는데 중요한 작곡,편곡등의 실력을 키워갔다. 그 해 신중현은 한국 최초의 록 그룹 <에드 훠(Add 4)>를 결성했다. 물론 에드 훠 이전에도 그룹이 있었지만 어떤 그룹으로 활동했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어 <에드 훠>를 최초의 록 그룹이라 규정했다. 에드 훠는 결성된지 2년후에 첫 앨범을 발표, 이 앨범은 한국 최초의 록 음반이며 한국 최초의 록 창작곡으로 기록되었고 `빗속의 여인`, `커피 한잔`, `내 속을 태우는 구려` 등 신중현의 대표적인 노래들이 수록되었다. 그는 <에드 훠> 앨범에 장미화를 데뷔시키기도 했다. <에드 훠>는 부산에서부터 인기몰이를 시작하여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계속적인 공연으로 큰 인기를 누린 에드 훠는 해체된 1965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70년 초반에 <퀘션스>라는 그룹을 결성한 신중현은 `김상희 리싸이틀 쇼`에 참여 반주를 담당했고, 이 쇼는 음반으로 제작되어 신중현의 곡들이 담기기도 했다. 신중현은 <퀘션스>와 함께 공연실황 앨범을 발표했는데 이 앨범은 음반회사에서 몰래 녹음해서 불법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렇게 가수들의 앨범에도 참여하였던 <퀘션스>는 그해 가을에 해체되었다. 김추자와 캐롤음반을 발표한 신중현은 김추자의 앨범에 자신이 작사, 작곡, 편곡까지 했던 `님은 먼곳에`를 수록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이 곡을 패티 김에게 주려고 했지만 갑자기 패티 김이 자취를 감춰 버리자 급한대로 김추자에게 주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김추자의 앨범은 삼판까지 제작되는 큰 인기를 누렸다. 이 무렵 신중현이 발표한 `봄비`를 일본 음악쪽에서 높게 평가하여 여러가지 좋은 조건을 내걸고 끌어가려했다. 당시 일본 음악 수준은 우리나라보다 낮았기 때문에 그를 데려감으로써 음악적 수준을 높이려 했었다. 그러나 신중현은 그들이 일본인, 일본이름으로 활동해야만 한다는 조건을 내걸자 단호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는 1980년에 그룹 <뮤직파워>를 결성하고 자신의 독집음반을 발표했다. 신중현은 1986년 록의 활성화를 위해 전용 라이브 클럽 `록 월드(Rock world)`를 개관했다. (신대철, 김종서, 임재범 등 `시나위`의 멤버들은 이곳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스튜디오 `우드스탁`을 개관했다. 30년이 넘는 기간동안 꾸준히 자신의 음악 세계를 추구하면서 활동해온 신중현은 1994년 앨범 `무위자연`을 발표했다. 그리고 전기 기타 산조를 완성시키면서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1996년과 1997년에는 헌정앨범 `A Tribute to 신중현`과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김삿갓`을 내놓았다. 특히 `A Tribute to 신중현`은 국내 최고의 뮤직션들이 대거 참여하여 만든 헌정 앨범으로 국내 최초의 헌정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김삿갓`은 김삿갓의 시에 곡을 붙인 곡으로 고전적인 맛과 현대적인 맛이 어우려진 앨범이라는 평를 받았다. 한편 그는 신군부 집권 후 해금되었으나 그의 노래는 1987년까지 금지곡이 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르며 그의 곡들도 해금조치 되면서 그는 다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음악계로 나왔을 때는, 이미 대중음악계의 판도는 통기타음악, 댄스음악 쪽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중이었고 락 음악 세계에서도 이미 기나긴 세월동안 큰 변화가 있었기에 그는 다시 음악의 중심에 서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그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하여 은퇴 공연을 가졌다. 그의 은퇴 공연은 지난 2006년 7월 15일에 있었다. 한편, 그의 아들 신대철 또한 그를 이어 록 밴드 시나위의 기타리스트를 맡고 있다. 음원출처:http://club.catholic.or.kr 이미지출처:http://pds99.cafe.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