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림교인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 4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전히 많은 분들이 사경회에 참석하고 계십니다.
보통은 이렇게 첫날 많이 오시고 둘째 날부터 점점점 줄어드는데 참 우리 삼패동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말씀을 사랑하시는 성도님이라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듭니다.
그리고 많이 격려가 됩니다. 그리고 반응들이 너무 좋으세요.
그래서 어제도 제가 집에 운전하러 가면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그리고 복음이 우리를 정말 기쁘게 만들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예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뭐가 예배죠?
교회에 와서 찬송 부르고 또 말씀 듣고 기도하고 그것이 예배입니까?
구약시대의 예배는 뭐였죠? 제사였죠 제사 제사가 예배였어요.
그러면 그 제사의 핵심은 뭐였죠? 네 양 잡는 게 핵심이었잖아요.
그럼 예배드리러 가면 그들은 항상 뭘 가지고 왔어요?
양을 가지고 가는 거예요. 그게 예배의 본질이에요.
그래서 성서에 가서 양을 잡으면서 뭘 기억하라고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양이 되셔서 돌아가실 것을 그 당시에는 거슬이었죠.
그렇죠 미래였으니까. 그래서 예배의 본질은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에요.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하는 거예요. 그럼 그 말씀 속에 뭐가 있어야 돼요?
십자가의 피가 있어야죠 찬양 속에 뭐가 있어야 됩니까?
십자가의 피가 있어야 돼요. 기도 속에 뭐가 있어야 돼요?
십자가의 피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두 사람이 만나든 소그룹으로 만나든 대집회로 만나든 항상 우리가 이 예배드리는 목적은 뭐냐 하면 2천년 전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에요.
아멘입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든지 혼자 있을 때도 어떻게 하는 거예요?
기억하는 거예요. 나를 위해 예수님이 돌아가셨지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지 나 같은 이런 죄인을 위해서 이미 나의 모든 죗값을 치러주셨지
주님 감사합니다. 이 고백이 아침에도 나오고 점심에도 나오고 저녁에도 나오는 삶이 예배예요.
교회를 왔는데 예배는 드리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돌아가요.
예배 드린 거예요 안 드린 거예요 안 드린 거예요. 그건 가인의 제사예요.
형식은 있지만 본질이 없는 거예요. 본질이 뭔데요?
양의 피잖아요. 양의 피 아벨은 양의 피를 갖고 제사를 드렸거든요.
그러나 가인의 제사에는 양의 피가 없었던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어떤 예배든 그 예배에 나왔을 때는 반드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돼요.
그래서 두 명이 들리든 3명이 들리든 4명이 드리든 가정예배를 드리든 혼자 말씀 묵상을 하든 항상 마음속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와 같은 이런 죄인을 위해서 돌아가셨을까라고 기억을 한다면 그것은 최고의 아름다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악기가 훌륭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노래를 잘 못 불러도 돼요.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닫기 전에는요. 왜
예배에 꼭 대예배 때 첫 찬미는 왜 찬미 앞부분에 있는 거 부르잖아요.
경배와 찬양과 관련된 그 찬미는 별로 재미도 없는데 왜 자꾸 그런 차이만 부를까 했어요.
근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하니까 영광과 찬송과 종기를 하나님 앞에 돌려드리고 싶은 거예요.
그분이 이루시고 그분이 행하신 일 때문에 그분을 찬양하는 일이 너무나 기쁜 일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처참히 부를 때도 아주 힘차게 하나님을 높여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의 아침에 눈이 딱 떠질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제일 먼저 하십니까?
어떤 생각을 제일 먼저 해야 될 것 같아요. 눈이 딱 떠지면 휴대폰에 손이 딱 가가지고 카톡 온 거 있나 이렇게 하시면 안 되겠죠.
그죠? 밤사이에 무슨 뉴스가 있었나 이렇게 하시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돼요. 우리의 눈이 탁 떠지고 의식이 들어오는 그 첫 번째 순간에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될까요?
진짜 해야 되겠다 그것도 매우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저는 무슨 생각을 하냐면 저의 첫마디는 하나님 저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저와 같은 이런 죄인을 값없이 은혜로 용서해 주셔서 주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게 저의 첫 고백이에요. 눈이 딱 떠지면서 내가 깼구나라는 의식이 딱 들어오는 순간에 저의 첫 번째 고백이에요.
오늘 아침에도 했어요. 내일 아침에도 할 겁니다.
제 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제가 깨어나자마자 저의 첫 고백은 그 고백이 될 거예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화장실을 다녀온 다음에 그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될까요?
기도를 해야 됩니다. 기도를 최소한 얼마큼이요 이건 정말 최소한입니다.
100번 양보해서 너무나 힘들어하는 분들을 위해서 최소한 30분을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교회 지도자라면 적어도 한 1시간 정도는 그죠?
기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근데 여러분 우리가 기도가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1시간이 너무 짧아요.
정말 저는 일어나자마자 그냥 침대에서 씻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기도를 하거든요.
침대에 그냥 이렇게 벽을 기대고 앉아서 편안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면 짧은 기도나 여러 명이서 같이 하거나 이럴 때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타당하고 또 좋지만 그러나 개인 기도를 오래 할 때는 무릎 꿇고 하면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저는 그냥 침대에 앉아서 일어나자마자 저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구별해서 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최소한 1시간은 기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시간이 너무 꿀송이 같아요. 그 시간에 저의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또 저의 소원들과 하나님 앞에 하고 싶은 모든 생각들을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어떻게 기도하냐면 이렇게 기도해요. 저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 지금부터 1시간 동안 하나님이랑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 1시간 동안 제가 첫 번째로 어떤 주제를 가지고 좀 이야기를 나눌까요
하고 곰곰히 생각을 해요. 그럼 하나님이 어떤 주제를 딱 떠오르게 해주세요.
누구의 얼굴이 지나가게 한다든지 아니면 뭐 어떤 사역이 생각이 난다든지 어떤 사람이 생각이 난다든지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할 때는 그 어떤 일에 대한 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 아래요.
그게 기도의 본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사업이 지금 되게 어려워요.
그러면 우리가 대부분 어떻게 기도하냐면 하나님 사업이 너무 어렵습니다.
잘 되게 해주십시오. 땡 그다음에는 할 말이 없어요.
그다음에 뭘 얘기를 하죠? 근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 사업이 잘 되지 않아서 마음이 너무 불안해요.
바라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고 지금 내 속 마음이 어떤지를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당기는 게 기도의 목적이 아니고
나를 하나님이 있는 대로 끌어올리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에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는 우리의 심령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펼쳐내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이렇게 이렇게 사업이 안 돼서 이렇게 내가 빚을 질까 봐 걱정이 되고 이렇게 해서 내가 우리 가족을 부양하지 못할까 봐 겁이 나고 이렇게 되면 이런 결과가 있게 되고 저런 결과가 있게 되고 이런 이런 일들이 발생할까 봐 제가 너무 두렵고 떨립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생각들을 하나님 앞에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게 기도할 때 정말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 기도가 주제가 아닌데 조금 샜습니다만 많은 분들이 기도를 오래 하라고 말씀을 드리면 굉장히 기도를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기까지만 일단 좀 말씀을 드리고요.
또 기회가 된다면 또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다 같이 요한복음
우리 3장 3절에 있는 말씀도 같이 읽고요. 여러분 정말 우리의 신앙을 뜨겁게 유지하고 싶다면 기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을 뜨겁게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기도가 게을리하고 등한이 되면 우리의 신앙은 식어갑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보고 말씀을 아무리 많이 외워도 기도가 없으면 신앙은 성장하지 않아요.
100%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삼패동교회 성도님들은 기도 열심히 하고 계시죠.
네 고맙습니다. 우리 다 같이 요한복음 3장 3절에 있는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시작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이 저녁에 저희를 이곳 사경회의 자리에 초청하여 주시고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셨사오니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저녁의 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새기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고, 우리의 온 심령과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 안에 들어가는 귀한 시간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저희가 계속해서 로마서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첫 번째로 중요한 거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거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고요?
죄인이라는 거 이거를 결코 잊으면 안 돼요. 두 번째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어떻게 하셨다고요?
용서하셨다. 이 두 가지만 잊지 않으면 됩니다. 여러분 웨슬리라고 아시죠?
감리교회를 시작하신 선구자죠. 마지막 죽기 직전에 남긴 두 마디 문장이 있대요.
나는 내가 너무나 큰 죄인인 것을
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신 것을 믿는다.
마지막 남긴 말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은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잊지 않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걸려 있으니까 말이죠.
로마서 3장 우리 28절 다 같이 한번 좀 읽고요. 오늘은 적어도 5장까지는 저희가 다 끝을 내야 합니다.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이게 사도바울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로마서의 요지라 그랬죠.
여러분 기억하시죠? 우리 용서받은 사람입니까?
못 받은 사람입니까? 아멘 우리는 용서받은 사람이에요.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문제는 다 끝났어요.
그럼 어떤 분들은 아니 그러면 우리의 이 죗된 본성은 도대체 왜 올라오는 것이며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겠느냐라고 물으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내일 설명드릴게요.
그거는 우리 6장에 가면 더 명확하게 그리고 7장까지 이 부분은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를 그러나 지금 우선 기억해야 되는 거 첫 번째는 우리는 죄인이다.
그런데 그 죄의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
이걸 믿는 것을 뭐라고 부른다고요? 믿음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 믿음이 있어야만 이걸 믿어야만 우리 마음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고 행복이 있고 이 신앙이 참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라는 거를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은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어요.
그러면 율법은 필요 없는 것이냐
그럼 율법은 우리가 막 범하고 이미 용서받은 거니까 맨날 범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겠네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여기에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31절 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런 즉 시작 그런 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괴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믿음으로 용서를 받았다는 뜻이 율법을 경홀히 여긴다는 뜻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가 이런 모든 죄악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하나님이 값없이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진짜 믿으면 그다음에는 그 율법을 존경하고 그 율법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서 올라와야 돼요.
만약 이것이 올라오지 않으면 안 믿은 거예요. 이것이 올라오지 않고 마음대로 죄 짓고 뭐 이렇게 해도 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직 믿음이 뭔지 모르는 거예요.
내 죄가 십자가에서 어떻게 용서받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거예요.
깨닫지 못한 거예요. 왜냐하면 이걸 깨닫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단코 하나님의 말씀 이 율법을 하찮게 여길 수가 없어요.
이 율법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는데, 이 율법을 어긴 것 때문에 나를 위해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그분을 또다시 못 받기 위해서 율법을 어긴다고요.
물론 우리가 연약해서 쓰러질 수 있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쉽게 율법에 대해 절대로 생각할 수가 없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얘기하는 거예요.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런 태도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절대로 나올 수가 없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도의 문제예요. 4장부터 제가 쭉 읽어가겠습니다.
이제 여러분 4장부터는 4장에는 특별히 사도바울이 예제를 들어줘요.
우리가 왜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았냐 이미 용서는 베풀어진 것이다.
구약에 살았던 사람들도 이미 용서받고 뭐 했다고요?
베풀어졌어요. 그들에게도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값을 치르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시지는 않았지만 용서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베풀어진 것이기 때문에 온 인류에게 베풀어진 거예요.
그것을 믿었던 두 사람의 예를 가져다가 유대인들이 훌륭하게 생각하는 그 두 사람을 가져다가 우리가 왜 믿음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 이미 그 용서가 베풀어졌는지를 바울은 설명해 주고 있는 거예요.
한번 보겠습니다. 그런 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오 아브라함에 대해서 내가 얘기를 해보겠다 이런 뜻이에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아브라함 생각하면 딱 떠오르는 사건이 뭐죠?
이삭을 바치는 사건 이삭을 바칠 만한 그런 행위를 했잖아요.
아브라함이 그죠? 그러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은
아 의로운 사람이야라고 생각할 때 그가 한 행동을 떠올리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행동 때문에 의롭게 된 걸까요?
절대 아니라는 얘기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3절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에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여러분 아브라함은 노아 홍수 이후 노아홍수 전에도 마찬가지예요.
아담과 하와는 사람들에게 뭘 설명하고 알려줬을까요?
그의 자녀들에게 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줬을까요?
얘들아 우리가 원래는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엄마 아빠가 죄를 지었어.
그래서 우리가 영원히 죽었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해 주셨어.
그리고 우리가 지은 이 죄에 대한 값을 치르시고 언젠가 우리를 다시 에덴동산으로 데려가실 거예요.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 그 사실을 믿었던 아들이 있고 믿지 않았던 아들이 있는 거예요.
그 약속을 믿었던 아들은 누구죠? 아벨이죠
믿지 않았던 아들은 누굽니까? 가인이에요. 가인은 믿지 않았어요.
그 사실을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나 기쁨이나 고마움이 없었던 거예요.
그러나 아벨은 자신이 드리는 제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어요.
왜 양을 죽여야 하는지, 이 양이 누구를 상징하는지 그건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때로부터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눠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그 기별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 기별을 모르는 사람들이 나눠주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기별을 아는 사람들은 아벨의 후손으로 새의 후손으로 계속 살아가면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를 수 있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그런 일을 행하실 거라는 걸 믿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감사와 기쁨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도록 이끌어가는 거예요.
그러나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악이 너무 과장해가지고
의인들을 다 소멸시킬 위기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악인들을 멸하셨죠.
그래서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다음에 또다시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의 후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예요.
그중에 한 사람이 누구였냐면 아브라함이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어요.
왜냐하면 특별한 백성으로 삼고 그 백성을 통해서 어떤 기별을 전하시기 위해서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실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 값없이 용서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이 복음 이 복음을 끊임없이 전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거예요.
온 세상 사람들에게. 그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과 이유는 무엇이냐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해서 뭘 세우고자 하셨냐면 국가를 세워주고자 하셨어요.
왜 하나님이 국가를 세우고자 하셨을까요? 왜 국가를 세우셨을까요?
국가 안 세우면 안 됩니까? 꼭 국가가 있어야 돼요.
왜 있어야 되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 전했습니까?
안 전했어요?
복음 안 전했잖아요. 자기들만 믿고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다 멸망받았잖아요.
근데 왜 국가가 필요하죠? 국가를 세우신 유일한 이유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겠지만은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서 국가를 세우신 거예요.
여러분 신데렐라 이야기 진짜 신데렐라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과거에 신데렐라 이야기를 진짜라고 믿고 계신 분 계세요?
그거 지어낸 얘기잖아요. 그죠? 누군가가 쓴 거예요.
근데 이순신 장군 이야기는요. 가짜라고 생각하시는 분 보셨어요?
이순신 장군 보셨어요? 그렇죠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써놓은 글을 통해서 아는 거예요.
근데 신데라도 써놓은 글인데요. 근데 차이가 뭐죠?
왜 똑같은 글인데 신데렐라는 가짜고 왜 이순신은 진짜라고 믿죠?
왜냐하면 이순신 장군은 역사의 기록 가운데 있거든요.
역사라는 것은 한 나라의 국가의 역사를 의미하는 거예요.
조선의 후예들이 살아가고 있고 그 선조들이 기록된 조선 왕족이라는 그런
책들을 통해서 그 국가에 있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거예요.
만약 하나님께서 이 저기 뭐야 코란 있잖아요. 코란 코란은 한 사람이 쓴 거잖아요.
한 사람이 동굴에 들어가 갖고 쓴 거예요. 그렇게 쓰여진 책은 이게 진짜 하나님이 주신 건지 아닌지 그 사람이 생각으로 써낸 건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성경은 한 민족의 역사를 담고 있어요. 특별히 구약 성경은 그래서 구약성경의 출애굽기는 어떻게 시작된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출애굽 광복절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이 나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부터 시작을 해가지고 그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해놓는 거야.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어떻게 했고, 가나안 땅에 어떻게 들어갔으며, 사사 시대는 어떻게 지났고 왕이 다스리는 시대가 어떻게 도래해가지고 그 왕들이 세상을 어떻게 통치했으며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족보들이 여기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는 거예요.
누가 반박합니까? 이거를
어떤 사람이 이것을 지워낸 책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 민족들이 여전히 버젓이 거기에 살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이 믿을 만한 책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시기 위해서 단순히 한 사람을 불러다가 이걸 다 쓸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쓰지 않으시고 한 민족 국가를 세우시면서 그 국가가 세워지는 전 과정에 있는 모든 사건들을 기록하게 하시고 그 사건들을 표상으로 삼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올 것인지를 그 표상 속에 보여주신 거예요.
제도 속에 사람이 살았던 경험 속에 다 묻어넣으신 거예요.
그래서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성경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주신 이유와 목적이 뭐냐 다시 말하면 후대의 사람들이 이 성경의 기록을 보고 뭘 깨닫게 하기 위해서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이 사실 이 엄청난 사실 그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라는 그 한 주제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이 전 과정을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 끊임없이 창조 때와 범죄로부터 모든 사람들은 이 기별을 받아들일 것이냐 예수님이 나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다는 이 기별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이 선악간의 대쟁투를 계속해서 지금까지 해온 거예요.
그중에 아브라함이 그중에 한 사람이었고요. 그 아브라함도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의롭게 된 것이냐 여러분 아브라함은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뭘 믿은 거예요? 그 약속을 믿었던 거예요.
전해져 내려오던 아버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 가운데 들어가게 해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믿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고 하니까 그 약속을 믿고 있으니까 가는 거예요.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이시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서 그 믿음이 아브라함을 어떤 것으로 여겼다고요?
의롭다고 여긴 거예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렇게 나를 의롭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뭐 했으니까요 믿었으니까요.
나 같은 죄인은 죽을 수밖에 없고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은 그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이 미쁘시고 선하시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너대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다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붙잡고 있었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신 거예요.
그의 삶은 의롭지 않습니다. 그의 삶이 어떻게 의로워요?
그의 삶도 역시 죄악으로 점철되어 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하셨어요.
의롭지 않은 그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에요.
그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3절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에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삭시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는 이와 이를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일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여러분 우리 일 좀 많이 했습니까?
우리가 좀 의로워지기 위해서 좀 열심히 좀 일 좀 해보셨어요?
그 일 가지고 의로워진다고요 우리의 노력 가지고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다고요.
지금 여기 뭐라고 합니까? 일을 아니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사실은 하나님 앞에 뭐 좀 괜찮아 보이려고 어떻게 나갈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우리는 정말 이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우리 영역이 아니에요.
우리가 아무리 거칠레를 하고 아무리 선한 척하고 아무리 훌륭한 노력한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속에 뼈저리게 들어가 있는 죄의 DNA를 어떻게 없앨 거예요?
안 됩니다. 이거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오셔서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라고 선언해버리신 거예요.
여러분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선언하실 때 여러분 예수님께 뭐 좀 보태드린 거 있으신가요?
집사님 뭐 좀 보태드린 거 있으십니까? 없죠 우리가 뭘 보태드렸습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보태드린 게 없어요. 근데 그분이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죗값을 치르고 우리를 용서해 주신 거예요.
어떤 분들이 제가 이렇게 얘기를 하면 그렇게 물으시더라고요.
아니 그럼 목사님 아니 뭐 무조건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뭐 막 용서해 준다는 게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되죠.
말이 됩니다. 여러분 왜 말이 되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여러분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아담한테 야 아담아 내가 너를 좀 창조하고 싶은데 내가 너를 좀 창조해도 되겠냐 물으셨어요?
안 물으셨어요? 어떻게 물어봐요?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어떻게 물어봐요?
물어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담 가와를 그분이 그냥 창조하신 거예요.
그래서 아담 가운은 딱 태어나보니까 창조되어 있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 아담 가와가 기분 나쁠 수도 있잖아요.
아니 내가 누가 뭐 창조해달라고 했나? 아니 내가 내가 언제 창조해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왜 나를 갑자기 창조하셨어요? 난 창조해 주시는 거 원치 않아요?
여러분 그런 마음을 가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뭐라고 말씀하신 거냐면 그래 내가 너희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그냥 내 직권으로 그냥 강제로 창조한 거 맞아.
그렇기 때문에 내가 창조했다고 해서 너희들이 나와 함께 영원히 무조건 의무적으로 살아야 된다고 내가 너희들한테 얘기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니네가 만약에 원래 있었던 그 흙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면 방법이 한 가지 있어 그게 뭐죠?
선악과를 먹으라고 그래서 선악가를 주신 거예요.
그래서 창조가 일방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너희들을 선택하라는 거예요.
내가 너희를 일방적으로 선택한 그 창조를 받아들이고 나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인지 내가 그 행복을 위해서 창조했으니까.
그러나 원치 않으면 오케이 너희들의 의사를 존중해 줄게.
근데 아담 가옥 어떻게 했어요? 먹었잖아요. 그 자유 의지를 가지고.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먹은 것은 사실은 속아서 먹은 거예요.
맞습니까? 속아서 먹은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건 완전 당한 거예요.
지금 그러니까 이거는 그래 너희의 자의도 있었지만은 그러나 너희가 속아서 먹은 거니까.
오케이
그 문제는 내가 책임을 져줄게. 한 번은 내가 책임을 져준다.
왜냐하면 이것은 너희의 의사라고 내가 판단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 거냐면 아담과 하와에게 그 죄의 책임을 묻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친히 그의 죗값을 치르신 거예요.
그다음에 뭘 베푸셨어요? 용서를 베푸신 거예요 누구에게 누구에게 용서를 베푸셨어요?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 거예요. 인류의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 거예요.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 똑같지 않아요 처음이랑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몇 명만 창조하신 게 아니라 온 인류를 창조하신 거잖아요.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나는 온 인류를 다 창조하신 거잖아요.
그쵸? 물으셨어요? 안 물으셨어요? 안 묻고 그 선물을 모두에게 줬단 말이에요.
근데 범죄로 인해서 잃어버리니까 다시금 그걸 찾아가지고 다시 온 인류에게 묻지 않으시고 온 인류에게 다시 주신 거예요.
마치 장기를 두다가 장군 하고 들어왔는데 외통수예요.
갈 길이 없어. 그러니까 어떻게 한 거예요? 물려주는 거예요?
오케이 한 번은 물려준다. 너가 실수했으니까 다시 물려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금 그 은혜를 우리가 갑 없이 뭐 한 거예요?
받은 거예요. 우리가 여러분 우리가 그걸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한 일이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근데 왜 자꾸만 우리는 뭔가 해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해요.
그게 사단이 우리한테 주는 생각들이죠. 이거는 창조 때 줬던 거를 다시 한 번 똑같이 준 거예요.
우리가 속아서 넘어간 거니까. 그래서 창조가 다시 한 번 재창조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인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여야 됩니까?
아니면 거절해야 됩니까? 믿고 받아들여야죠. 장군 해가지고 한 수만 불러주세요.
했는데 딱 불러줬는데 그럼 진짜 너 제대로 둬야 돼.
근데 한 수 물러준다.
제대로 둬 했는데 거기다 똑같이 또 갖다 놓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나를 주인으로 섬겨야 돼.
나만 주인을 섬기고 내 말을 들어야 돼. 그리고 절대로 이 선악가 먹지 마.
하나님 말씀하셨어요. 근데 먹었어요. 그래 너 이번에 실수했지 그러니까 내가 죗값은 대신 치를게.
그리고 다시금 너를 용서하고 회복시킨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어떤 형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냐면 다 지금 어디 앞에 서 있는 거예요?
선악가 앞에 서 있는 거예요. 그 은혜의 왕국이 우리에게 시작된 거예요.
지금 왜 용서받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시잖아요.
그 의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에덴 동산에서 선악가 앞에 서 있었던 선악가를 먹기 전에 아담과 하와의 상태와 똑같은 상태가 있는 거예요.
지금 다른 건 죄된 본성이 있다는 것
은 다르지만은 그러나 결정권과 선택권은 똑같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이제 우리가 선택해야 돼요. 여러분 선악가 다시 먹으시겠습니까?
안 먹으시겠습니까? 이제 선악가를 다시 먹겠다고 선택하는 것은 누구의 의사예요?
내 의사예요. 이제는 거기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되는 거예요.
이미 한 번 하나님께서 그 죄를 물리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단 말이에요.
그럼 이제는 누구를 선택해야 돼요? 그 용서를 받아들여야 되잖아요.
그리고 누구만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돼요.
예수님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야 되는 거예요.
근데 또 예수님만 나의 삶의 주인은 안 되고 다시 사단의 음성을 듣고 사단이 하라는 거 시키는 거 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그건 내 선택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 구원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거예요.
그래서 구속의 경유는 뭐냐 하면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인간들의 죄를 값없이 용서해 주시면서 하나님의 그다음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랑을 이해하고 깨닫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온 생애를 바쳐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결정이 우리에게 확고부동하게 새겨지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주신 거예요.
그게 구속의 경륜이에요. 그래서 우리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는 거예요.
내가 누구를 섬길 것인가 그 선택이 확고부동하게 세워지면 영원한 생명 가운데 들어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선택은 강제하는 선택이 아니에요. 그 선택은 절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늘에 가면 영원토록 선악가를 먹지 않을 거예요.
저는 거기 선악가가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을 겁니다.
왜요? 우리가 이 전 과정을 다 겪었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고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들인데 그걸 다시 먹어요.
다시 먹을 사람은 거기 못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다시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물론 가봐야 알겠지만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죄악 세상에서 우리가 이 죄인 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그분의 선하심을 알기 때문에 이제는 영원토록 우리의 결정권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오직 우리의 삶의 1순위 0순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겠다는 선택이 우리 마음속에서 항상 있는 거예요.
그 선택을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강제하지 않으시고 여기서도 강제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가지고 이 땅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그 구속의 경륜의 시작이 어디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냐 하면
바로 이미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에 대한 확신과 믿음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 그 믿음을 구스에게 붙들어야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실 수 있는 거예요.
그 믿음이 희미해지면 또다시 사단에게로 가는 거예요.
또다시 또다시 사단의 길로 계속 가요. 그래서 우리의 심령과 마음은 항상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용서하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가 계속 새겨져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일주일에 세 번씩이나 모여가지고 예배를 드리면서 그 십자가를 기억하는 거예요.
또 기억하고 나가면 또 잊어 먹어요. 또 아침에도 기억 일어나서 기억했는데 또 하다 보면 또 잊어 먹어요.
그럼 또 또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죄의 문제가 발생하거나 연약해지면 넘어지면 즉시로 나를 용서해 주셨지 주님 고맙습니다.
다시 양을 얼른 잡고
용서받고 그 은혜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을 사랑하고 우리의 온 마음과 생애를 그분께 들여서 따라가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네 빨리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6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두 번째 지금 예제로 든 사람은 누구예요?
다윗이에요. 다윗 그러면서 여기 7절 8절은 이거 다윗이 시편에서 언급한 것인데 다윗이 이 구절을 왜 언급했을까요?
들어보세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짐을 받는 자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시지 아니할 사람은 복이 있도다.
다윗이 왜 이야기했을까요? 자기가 용서받은 경험이 있잖아요.
지금 이게 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거냐면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 지금 일 일하는 자 은혜 이건 지금 다 용서와 관련된 거예요.
용서 하나님이 우리를
갑없이 용서해 주셨는데 자꾸만 그 용서를 내 행위나 어떤 뭘 가지고 살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방식으로 구원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지금 사도바울이 논리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면서 지금 여기 이제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나와요.
왜냐하면 이 당시에 이슈가 되었던 게 뭐냐면은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인들은 뭘 받아야 된다고 믿었어요.
할례 믿음 플러스 믿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반드시 뭐가 있어야 돼요?
할례 할례는 행위를 대표하는 거예요. 뭔가 행위도 우리의 구원이 여러분 믿음 플러스 행위로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오직 믿음으로만 받습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거예요.
그런데 행위는 따라와요. 행위가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는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원을 받아요.
그런데 그 피로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삶 가운데 행위가 나타나는 걸 통해서 증명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행위는 사실 구원받는 조건이 절대로 될 수는 없어요.
그러나 표식은 될 수 있어요. 이 사람이 정말 구원을 누리고 있는 삶인지 아닌지는 그 행위가 증명해 주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은 행위는 절대로 구원의 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거 쭉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내 후손이 이와 같으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에게 되게 하려 하심이라 쭉 이제 하고 21절에 약속하신 것을 또한 능이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오.
의로 여기심을 받는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의 죽으심과 부활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이 죽을 때 함께 죽었고, 예수님이 일어나실 때 함께 일어나서 그분의 용서가 우리에게 베풀어졌고,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모든 세상에 있는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분 한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참 의로운 사람이오.
하나님이 지금 이분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 거예요?
의롭다고 봐주시는 거예요. 왜요? 그분이 의롭습니까?
아유 지금 옆에 계신 분이 의로운 구석이 하나라도 보이세요 이분이 한 개도 의로운 게 없지.
이게 어디가 의로워요? 이분이요 완전 썩어 문드러진 죄인 중에 괴수 아니에요.
그렇게 안 보이시나요? 그렇게 보이시죠? 그렇죠 차마 말씀 못하시고 네 그렇게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눈을 가지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보고 계시는 거예요.
왜요? 왜요? 누구 때문에요? 나 때문은 아니에요.
여러분 확실한 것은 저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외롭게 보시지는 않으세요 근데
2천년 전에 나를 대신하여 나의 죄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그 예수님의 의로우심 때문에 오늘 우리 모두를 의롭다고 봐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이걸 깨닫고 나면 정말 저 밖에 있는 사람 너무 불쌍해 보이지 않아요.
그걸 모르고 있잖아요. 지금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마음만 열고 나와가지고 그걸 붙잡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데 그걸 모르는데 여러분이 가만히 있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드시죠.
그러면 어떻게 나가서 전도해야 될지가 궁금하시죠?
제가 디지털 선교부장이거든요. 저한테 시간을 좀 주시면 제가 정말로 쉽고 재미있게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법을 여기 교회에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작년에 2023년에 시범 사업으로 이 사업을 했는데 너무들 좋아하시고 좋은 열매들이 있어요.
여러분 원하시면 제게 말씀해 주시면 제가 목사님의 허락을 받고 여러분들이 그 방법을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요. 여기까지만 일단 예고편으로 들려드리고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지 않습니까?
우리 제칠 안식일 예루살렘 교인들이 왜 이단으로 지목받고 있는지 아세요?
우리는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고 건강 식사를 하고 뭐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이단이라고 오해받는다고 생각해요.
근데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가 오해받고 있는 것은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믿기 때문에 그러니까 외부에서 봤을 때 우리가 그렇게 신앙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를 이단으로 지적하는 거예요.
제가 비엔나에 있을 때 이제 비엔나에 가기 전에 CBN 방송을 들으시는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를 하셨어요.
그래서 목사님 제 친구가 독일에 있습니다. 가시면 한번 방문을 좀 해 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주소를 받아서 그분 잘 모르는 분이었는데
오스트리아에 가가지고 얼마나 되나 찍어봤더니 1천kg가 넘어요.
그래서 제가 그분한테 집사님 제가 천 킬로가 넘어서 도무지 방무등 할 수는 없고 원하시면 제가 그 권사님이신데 권사님이랑 집사님이랑 제가 셋이서 제가 뭐 비엔나에게 할 것도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성경 공부나 하시자고 그래갖고 간 지 6개월 만에 성경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권사님이랑 돌아올 때까지 성경 공부를 했어요.
코로나 시작될 때부터 일주일에 2시간씩 해가지고 3년 반 동안 성경 공부를 했어요.
그분이 나중에 이제 결국에 가서 침례도 받으시고 이렇게 하셨는데 제가 그분이랑 2년 반을 공부를 한 다음에 그때 코로나 기간 동안에 제가 그분한테 말씀드렸어요.
아니 권사님 저랑 2년 반이나 공부하셨는데 제가 그렇게 재미가 없습니까?
어째 이렇게 한 분도 소개를 안 시켜주십니까? 그랬더니 이분이 50분한테 문자를 보내 내가 재림교회 목사랑 공부를 하는데 엄청 재밌다 공부할 사람
그분이 이제 간호사로 오셔가지고 독일에 이제 정착해 사시는 분이었는데 두 분이 반응을 했어요.
개신교회 사 집사님 두 분이 그래서 그분들을 또 놓고 일주일에 두 번씩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이분들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제가 공부할 때 안식일 이런 교리를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저는 그분들을 딱 보니까 그분들이 복음이 뭔지 몰라요.
복음만 계속 가르치고 넣어주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분이 아무 말도 하질 못해요.
왜냐하면 안식일 교인들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고 행위로 구원을 얻는 사람처럼 보이는 줄 알았는데 하는 걸 보니까 본인들이 믿는 것보다 구원에 대한 훨씬 더 강한 확신이 있고 막 뜨거움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복음을 확실하게 딱 깨닫도록 도와주니까 그다음부터는 제가 하는 모든 가르침들을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구원이 확실해지니까 너무 놀라워요. 그래서 그분 중에 한 분은
올 1월달에 저한테 연락을 주셨어요. 목사님 제가 올 1월부로 1월 첫째 안식일부로 독일에 있는 현지인 교회에 입교를 했습니다.
그분은 순고음교회 집사님이셨는데 그분은 순복음교회에서 침례를 받으셨대요.
거기 침례를 주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더 침례를 받으실 필요는 없고 이제 입교하고 우리 교인이 되셔서 거기 한인 교회가 없기 때문에 현지 독일 말을 잘하시니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더라고요.
여러분 우리가 이 복음이 확실하면 사람들은요. 우리를 반대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구원은 한식일이 주는 게 아니잖아요. 구원은 영혼 불멸이 주는 게 아니잖아요.
구원은 건강 기별이 구원을 주는 게 아니잖아요. 구원은 복음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신 거잖아요.
그 십자가에 대한 구원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뜨거움이 있으면 사람들은요.
우리에게 달라붙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할 때
우리에게 기쁨이 있고 확신이 있고 행복이 있고 만족이 있거든요.
더 경험들을 얘기하고 싶지만 지금 시간이 일단 5장에서 중요한 거 몇 개만 다루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5장은 로마서의 백미라고 불러요.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장 한 장을 꼽으라면 아마 바울은 로마서 5장을 꼽을 겁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정상 최정상이 로마서 5장이에요.
이 몇 절을 보시냐면은 일단 1절부터 제가 읽어볼게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뭐에 쓰니요?
받았으니 지금 여태까지 쭉 설명한 것에 약간 결론적으로 얘기를 하죠.
그렇죠. 우리가 이미 뭐 했다고요? 받았다고 받았다고 의롭다 하심을 이미 뭐 했다고요?
제가 내일 좀 설명을 드리겠지만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아니에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에요. 이게 완전 다릅니다.
의로운 것과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다른 의미예요.
내일 그 부분을 추가로 더 설명드리겠지만 혹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근데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뭘 누려요?
화평을 누리는 거예요. 우리 장로님이시죠? 네 우리 장로님과 제가 정말 대판 싸웠어요.
너무 큰 제가 잘못을 했어요. 그래서 제 마음속에 우리 장로님이 저를 다시는 안 보실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제가 가지고 있어요. 지금 그럼 제가 교회에 오면 마음이 편할까요?
제가 장로님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그 마음이 너무 불편하겠죠.
그죠? 근데 알고 봤더니 장로님이 저를 다 용서하고 사랑으로 따뜻하게 맞아주신다고 우리 집사님이 얘기를 해 주시는 거예요.
진짜요? 안 믿어지는데 내가 그렇게 그렇게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 장로님한테 장로님 집 전 재산 5천억을 제가 다 날렸는데 어떻게 저를 용서해 주실 수가 있어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저는 그거 못 믿어요. 여러분 5천억이나 제가 장로님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어떻게 용서를 합니까? 그게 용서가 됩니까? 그게
그러나 예수님은 5천억이 아니라 5천억보다 더 귀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잖아요.
우리가 안 믿어지는 거예요. 그게 잘. 근데 그걸 안 믿으면 장로님이랑의 관계는 항상 어떻게 남아 있는 거예요?
서먹서먹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는 없는 거예요. 그러나 그래요 정말로요?
그래서 제가 한번 믿어볼게요 하고 용기를 내가지고 장로님한테 딱 나갔더니 장로님 따뜻하게 딱 안아주는 거예요.
그때로부터 장로님과 저의 모든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거예요?
화평의 관계로 들어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수없이 성경에 얘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 화평의 관계 안으로 절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거예요.
근데 사도 바울이 뭐라고 얘기를 해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뭐라고 했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뭘 누리자고요?
누리자고 누리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언제 용서받았다고 그랬죠?
6천 년 전에 용서받았고 2천년 전에 확정되었고 그죠?
그리고 우리가 믿을 때 누리는 거예요. 용서를 6천 년 전에 용서받았고 그 용서가 사실은 하나님이 용서하셨지만 만약에 십자가에서 실패했다면 물려야 돼요.
용서도 아직 못 받은 걸로 되는 거예요. 그죠? 근데 4천년이 지난 후에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성공하셨어요.
그래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단단한 쇠사슬로 우리의 구원이 확증되어졌죠.
그때. 그래서 우리는 그때 용서가 확증되어진 거예요.
그러나 믿지 않았을 때는 그걸 누리지 못해요. 그런데 우리가 믿기 시작할 때 예수님을 내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 사실을 믿을 때 우리가 누림이 시작되는 거예요.
화평이 시작되는 거예요.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6절부터 그러면 1절까지 지금 제가 시간을 좀 드릴 테니까 읽어보시고 6절부터 10절까지의 우리가 용서받을 그때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용서를 받았는지를 설명하는 단어들 4개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약간 구절이에요. 구절 6절부터 10절 사이에 우리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용서를 베푸셨는지 를 설명하는 구절 찾으신 분 손 한번 들고 하나씩 말씀해 보실까요?
우리가 뭐 할 때요? 연약할 때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뭐 하셨다고요?
우리가 뭐 죄의 문제 다 해결하고 의로워졌기 때문에 그분이 돌아가신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못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또 그다음에요. 경건치 않은 자가 두 번째죠. 그죠?
경건치 않을 때 예수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그다음에요.
우리가 8절에 죄인 되었을 때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렇죠 죄인 되었을 때 그리고 마지막이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우리 힘으로는 이것을 회복시키거나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없어요.
여러분 죄라는 단어가 그 뜻이 뭔지 여러분 들어보셨죠?
뭐죠? 빗나가다는 뜻을 가지고 있잖아. 빛나가다는 뜻 착 해가지고 쐈는데 관역에서 빗나가는 게 죄예요.
명중을 못하는 거야 의를 소유해야 되는데 명중을 못 시키는 거예요.
제가 저번에 언젠가 양평교회 거기 이제 목사님이 병가를 내셔서 저희 부장들이 계속 이렇게 오래 좀 많이 다니면서 설교를 했거든요.
이제 제 설교 차례가 돼가지고 제가 설교하러 가는데 그때 아시안게임이 한창 하고 있었어요.
근데 저녁에 이제 제가 그 마수가 먹고 싶어서 마쿠스를 이렇게 먹고 이제 예배드리러 가려고 먹고 있는데 아시안게임이 tv에 이렇게 막 나오더라고요.
근데 거기에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이 양궁 그 마지막 결승전을 이집트인가 어느 나라랑 하고 있었어요.
근데 마지막 우리 선수가 9점인가 10점을 쏘면 우리가 이기는 거예요.
근데 그분이 쫙 당겨서 화살 싹 썼는데 과녁에 명중 딱 하는 순간 식당에서 온 사람들이 하면서 승리의 함성을 보내더라고요.
여러분 우리가 관역에다 활 쏘면 어떻게 돼요?
다 빛나가요 우리는 그 맞출 수가 없어요. 그런데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가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화를 받으셔가지고 착 서셨는데 그게 어떻게 된 거예요?
명중 근데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시냐면 이거 너가 쏜 거야 이거 누가 쏜 거라고요?
내가 쏜 거라고 그 이루신 의 우리 죗값을 치러 죽어야 되잖아요.
그 죽음을 누가 죽으신 거라고요? 예수님이 죽으셨어요?
예수님이 그 죽음이 내 죽음이라고요 내 죽음 여러분 이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지 않습니까?
이것만 이제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를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뭐 한다고요?
즐거워한다고 여러분 깨닫고 나니까 이렇게 덩실덩실 춤추고 싶지 않으십니까?
저는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고 싶어요. 어떻게 나 같은 이런 죄인이 휘웃는혜를 누릴 수 있을까 여러분 우리가 이 은혜가 식지 않도록 하려면 뭐 해야 된다고 그랬어요?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받으신 이 감명과 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은혜를 사그러들고 싶지 않다면 끊임없이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나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다고 고백해야 돼요.
그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속에 있는 이 기쁨과 은혜가 사그라들지 않는 거예요.
기도를 멈추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자신 있게 얘기하지 못해요.
하나님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다 형식적이 되고 피상적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어요.
내가 하나님과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야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상대방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는 거예요.
기도의 시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마지막으로 12절부터 21절까지는 사도바울이 뭘 설명하고 있냐면 똑같은 이야기를 7번 반복합니다.
7번 반복해요. 진짜 놀라워요. 여러분 얼마나 중요하면 사도바울이 똑같은 이야기를 7번이나 반복할까요?
12절에 저기 앞에 띄어져 있는데 12절 한번 볼까요?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누구를 통해서 들어왔다고요?
아담을 통해서 들어온 거예요. 그다음에 뭐가 들어왔어요?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였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죠.
그쵸? 그런데 14절에 그러나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하면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하고, 그러나 15절에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음, 즉 더욱 한 사람의 은혜로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은 많은 사람들에게 넘쳤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서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지만 한 사람의 은혜로 모든 사람이 살게 되었다.
이 개념을 사도바울이 몇 번 얘기한다고요?
7번 얘기해요. 확실하게 보이는 건 6번이고 자세하게 보면 7번까지 보여요.
여러분 얼마나 중요하면 계속 읽어볼게요. 16절입니다.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 같지 않으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지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노릇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그런 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지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여러분 보이십니까? 똑같은 구절을 지금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이 의미가 여러분 느껴지시나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한 사람의 죄 아담의 죄로 인해서 우리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뭐 되었다고요?
억울하세요? 안 억울하세요? 억울하지 않으세요?
억울하죠 왜 아담 때문에 여러분 우리 진짜 솔직히 우리 에덴 동산에 있었으면 서악가 먹었을까요?
안 먹었을까요? 안 먹었죠? 그걸 왜 먹습니까?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죠? 집사님 드셨겠습니까? 예 드셨겠어요? 집사님 드셨겠습니까?
안 드셨을 거라고 여러분 원래 죄를 정제할 때는 이루어진 것까지 그걸 뭐라고 그러죠?
범죄 무슨 추정의 무슨 원칙이 있던데 그죠? 벌어진 일만 가지고 정제를 할 수 있는 거예요.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제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요 그죠?
그럼 우리는 거기 에덴 동산에 없었으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얘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하나님
왜 우리가 죽어야 됩니까? 왜 내가 죽어야 됩니까?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아담만 죽어야지 왜 왜 나까지 같이 죽어야 됩니까?
여러분 좀 당당해지십시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얘기할 수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다 같이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나님 아담이 범죄했는데 왜 내가 죽어야 합니까?
나는 선악과 안 먹었을 텐데 여러분 근데 이게 논리예요.
이게 아담인데 아담 안에 누가 들어 있었어요? 온 인류가 다 들어 있었어요.
왜냐면 아담으로부터 태어난 거기 때문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의로웠죠.
그죠? 선악과를 먹는 순간 아담이 죄인이 되었죠.
그죠? 근데 아담 안에 누가 있었어요? 여러분과 내가 제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그냥 뭐가 돼버린 거예요?
죄인이 된 거예요 그게 너무 억울한 거예요. 사실은 그래서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 거예요.
아무것도 안 했지만 죄인으로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뭘 지은 거예요?
죄를 지은 거예요? 안 짓고 살 수가 없어요. 죄인이 어떻게 죄를 안 지어요?
그럼 의인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한테 하나님 이거 정말 억울합니다.
너무너무 억울해요. 왜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제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라고 얘기를 하려 그랬더니 2천년 전에 누가 오셨어요?
누구로 오신 거예요? 둘째 아담으로 아담을 대신하여 오신 거잖아요.
그죠? 그러면 둘째 아담으로 오셨으니까 예수님 안에 누가 있었어요?
여러분과 제가 있었던 거예요. 온 인류가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의인이 되셨어요.
그럼 예수님 안에서 누구도 의인 된 거예요? 나도 의인 된 거예요.
이게 지금 사도바울의 논리예요. 사도바울의 논리 우리가 왜 의인되었냐 우리가 의로웠기 때문에 의인된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아담 대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그분이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죽었고 그분과 함께 부활함으로 우리가 의로운 사람으로 여김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 난 진짜 억울해요. 화나요 하고 얘기하려고 그랬더니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내가 다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어요.
할 말이 있어요. 없어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뭐만 남았냐면 우리의 선택만 남은 거예요.
그 용서하심을 내가 믿고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그분께 나의 삶을 다 바쳐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명령에 내가 순종하고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내가 또다시 선악가를 먹고 불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이제는 나를 위해서 그렇게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이제는 내 마음속에서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 하고자 하는 결심으로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살아갈 것인가 결국 구원은 이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산패동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너무나 감사하지 않습니까?
이 구원이 우리의 어떠함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지 않으세요?
이걸 기억하면은
콧노래가 나와요. 제가 원래 콧노래를 안 부르는 사람인데 이걸 생각할 때마다 참 감사하고 깊은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이제로부터 영원한 세대까지 우리의 심령 가운데 자라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주의 은혜에 정말 감사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갑없이 의롭다 여겨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제는 사단이 우리를 속이고 또 거짓으로 유혹할 때마다 하나님 우리가 속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를 이미 용서하셨다는 이 사실을 붙들고 우리의 온 생애와 마음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clovanot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