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재발견
김현주
한국 여행에서 내게 설렘을 주는 일은 헌책방을 발견하는 일이다. 우연히 헌책방 하나를 찾았다. 몹시 반가웠지만 그 중고 서적 파는 집은 지나칠 때마다 닫혀 있었다. 일부러 가보아도 닫혀 있고 해서 실망하던 중에 어느 날 드디어 책방 문이 열려 있었다. 입구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양쪽으로 책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그곳에서 발견한 고흐 전기는 두꺼운 책이었다.
나는 고흐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언제였다고 기억할 수 없지만 오래전에 고흐의 전기를 읽었었다. 초등학교 때였을 거다. 그때 위인전을 꽤 읽었었다. 삼십여 년 전에 암스테르담에 갔을 때 고흐 백주기 전시회가 있었고 고흐 작품집도 고흐 그림의 카피도 샀었다. 가장 고흐답지 않은 카피 두 점을 산 기억이 있다. 그날 그곳을 방문한 덴마크 여왕도 먼발치에서 봤었다. 지금은 유명하지만, 고흐는 자기 귀도 자른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불운한 천재 화가였다. 그러나 그뿐 나는 고흐의 그림을 그렇게 선호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까지 다가오지 않았달까. 고흐 그림들을 확대하고 스크린으로 만들어 온 벽과 바닥으로 움직이는 전시회에 가서도 손주들이 즐기는 모습에 더 맘을 쓰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고흐 습작을 할 때도 하필이면 왜 고흐 그림을 습작시킬까 의아했다. 그러나 내가 고흐가 그린 그림을 습작하고 다른 사람들의 습작들이 형태를 보이는 걸 보면서 조금씩 눈이 뜨이는 느낌이었다. 강렬하다고만 보이던 색깔이 절묘하다 확실하구나 싶었다. 왜 그렇게 배배 꼬며 돌려 돌려 그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싶었는데 왠지 아주 강렬하게 느끼면 그렇게 그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강렬한 느낌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표현하게 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고흐 그림을 더 습작해야겠다고 생각하게까지 됐다. 아마도 나는 고흐를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망설이다가 고흐의 전기를 샀다. 이미 다른 책을 꽤 샀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 책이 무거워 어떻게 짐을 쌀지 걱정스러웠지만.
고흐의 전기를 읽기 시작했다. 어빙 스톤이란 전기 작가에 의해 쓰였는데 소설처럼 상세한 심리 묘사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읽는 전기여서일까. 너무 소설 같잖아. 전기소설이 이래도 돼? 전기는 어떻게 써야 진실해 보일까에 더 신경을 쓰며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가 고흐와 고흐의 동생 테오가 나눈 편지들을 통해 고흐의 감정들에까지 자세하게 이해하게 됐다는 것을 알면서 믿음이 갔다.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약지 못한 고흐가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모욕적인 거절을 당하고 상처를 받는 것 등 이 바보스러운 사람을 어떡하면 좋아라고 생각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무엇이든 제대로 야무지게 해내지 못해 고흐는 집안의 골칫덩어리였으나 목사이던 아버지의 바람에 순응해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고직하고 순수한 사람이라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하고 준비하지만, 틀에 박힌 형식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직해 보이지 않는 고흐였다. 정식 목사임준을 받지 못했다.
다른 루트를 통해 탄광촌에 설교하는 사람으로 보내졌고 그는 최선을 다할 뿐 아니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으로 사람들을 도왔다. 탄광촌의 열악한 모습은 인간이 그렇게 살 수도 있을까 싶게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곳에서 자기 몸이 부서지라 돕지만 역부족이었다. 탄광촌에서 가장 참혹한 상태의 인간의 삶을 보며 고흐는 가슴아파했다. 전에 읽고 그냥 지나쳐버렸던 대목 같다. 고흐의 재발견이랄까. 고흐가 무엇으로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했는지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어린아이까지 동원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좁은 땅굴 속에서 노동을 착취당하는 광부들의 삶을 보며 고흐는 몸을 던져 도와보려 애써 보지만 탄광촌이 무너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렇게 마음을 써도 워낙 인생에서 믿을만한 것 보다는 혹독한 폭력에만 익숙했던 그들은 고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흐도 믿을수 없어 했고 고흐를 비웃었다. 몸부림쳐 봐도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쩌지 못하면서 결국 하나님이 계시는지 회의하기 시작했고 그곳도 쫓겨나듯 떠났다.
참혹한 탄광촌 얘기를 읽으면서 인간의 잔인함, 무력함, 빠져나갈수 없는 운명적 가난과 불행들이 무섭게 다가왔다. 고흐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의 절망이 느껴졌다. 거기 인간의 처절한 좌절감속에서 연민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바보스러운 사람이 고흐였다. 그곳을 떠나 아주 지친 상태에서 어떻게 살지 몰라 방황하다가 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촌을 좋아했으나 다시 한번 거절과 모멸을 경험해야 했고. 27살 늦은 나이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하자 그림을 그리는 일이 그의 모든 것이 되어 버렸다. 스케치의 대부분이 참혹한 가운데 일상을 살아가는 농민들과 노동자였다. 그림모델을 서준 매춘부에게 모질게 못 하고 다른 남자의 아기를 임신한 매춘부와 살게 된다. 어떡하든 그 여자를 다시 거리로 보내지 않으려고 한 결정이었다.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혼자 살기도 어렵고 그림 재료를 사기도 모자라는데도 그렇게 했다. 이 남자는 구제불능이었다. 자기도 힘든 처지에서 불쌍한 사람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 후의 모든 얘기가 안타까워 내 가슴을 쳤다. 그의 그림에의 열정은 아픈 인간들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었고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표현하려는 열정에 기인했다.
예전에 내가 읽고 알던 고흐는 얼마나 단편적이었던가. 오래전에 내가 읽었던 고흐 전기가 아이들을 위해 편집된 위인전이었는지 모르겠다. 이번에 내가 사들인 책과 같았는데 내가 슬렁슬렁 읽었는지도 정확한 기억이 없다. 어쨌든 나는 고흐를 새로 발견했고 그의 삶과 작품이 새롭게 내 가슴에 다가왔다. 나이가 들어 같은 책을 다시 읽는 건 좋은 일인 것 같다. 새로운 발견 새로운 깊이의 아픔을 경험했다. 누가 책은 우물과 같다고 했던가. 새로운 물을 퍼올린듯 고흐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아픔을 같이 공감하게 될 것 같다. 고흐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만종,을 그린 밀레였다. 가난과 노동으로 찌든 삶 속에서도 교회 종소리에 농사를 짓던 손을 멈추고 머리를 숙여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이다. 고흐의 유명한 초기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은 투박하고 어둡고 거칠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들의 삶을 그대로 표현하다 보니 회색 갈색 검은색으로만 그려졌고 너무 사실적이었다. 그래서 고흐의 재능을 알아보는 몇 사람이 있어도 고흐의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모네 등의 작가의 아름다운 소재와 색깔에 비해 고흐의 작품들은 너무 어두웠다. 고흐는 그런 노동자 농부 광부에 대한 연민을 버릴 수 없었다. 동생 테오의 헌신적 도움이 없었으면 생명을 연장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고흐는 계속 동생의 격려를 받아 색깔의 세계를 발견하고 자기 나름의 기법을 발달시켜 나갔다. 그림에 대한 무서운 열정을 가지고 살았지만, 세상을 살아가기엔 서툴렀고 드디어 정신적으로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번에 고흐의 전기를 다시 읽으며 고흐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다. 아니 고흐를 통해 인생에 대한 나의 이해가 달라졌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 운명적으로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나 일생을 그렇게 살다 가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무겁게 맘에 남았다. 진작에 같은 전기를 읽었어도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의 나의 정신적 나이에 따라 책에 대한 나의 이해나 관심이 달랐음을 알겠다. 그림이나 책이나 오늘 내게 감동을 주는 부분이 다른 것은 나의 보는 눈 읽는 눈이 나이와 함께 조금 달라졌달까. 좋은 책은 다시 읽어야겠다. 고흐의 재발견이 그걸 말해 준다.
2024년 10월 11일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