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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원행을 떠나기 위하여는 늘 서둘러야 했다. 행락철이면 겪는 귀경의 지체도 문제지만 일찍 해가 진다는 하느님의 섭리를 염두에 두고 일정을 잡아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가을부터 짧아지기 시작하는 석양빛의 길이는 꼭 노루꼬리만하다. 일교차가 극심한 요즈음 새벽 날이 차다. 정확한 시간에 오신 트레커들의 배려에 힘 입어 정시에 서울을 출발할 수 있었다. 2시간의 시간을 흘려 보낸 후 비로서 옥전2리 계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깊은 산속의 마을은 늘 옹기종기 한 것이 특징이다. 옅은 운해가 계곡을 감싸며 기류따라 돌아 나가고 어느집 굴뚝에서는 아침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거렸다. 낮선 이방인들의 출몰에 당황한 개들이 짖어대고 숲에서
흘러 넘치는 피톤치드가 트레커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른 아침 신선한 공기 하나만으로도 내가 살아 있음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이다. 맑고 정숙한 공기에 적극적으로 포웅하려 하는 나의 신체의 모든 기능들은 끝내 나를 상쾌하게 이끌어 준다. 참되고 올바른 일에 감동을 느끼도록 만드신 이치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며 창조주께 감사 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첫걸음 옮긴 후, 30여분 만에 스스로 오류를 발견하였다. 옛기억을 더듬어 찾은 옥전계곡 그 당시 환경과 달랐다. 차편이 없어 옥전재를 넘어 주론계곡으로 넘던 길을 놓친 후 다시 아래로 내려 왔으나 도저히 계곡입구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외지에 들어 온 전원주택 주인들이 집을 지어 그 길을 막아 놓았던 것이다. 참으로 참담했다. 길 초입을 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트레커들은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파스칼 형제님도 계곡을 가로질러 놓은 다리 난간에 앉아 무료함을 달래고 있고.....
어렵사리 현주민의 도움으로 길꽃등을 찾았다. 어느집 추녀끝을 맴돌아 나가야 비로서 길이 열리는 것이다. 두 개의 임도를 가로 지른 후 계곡밑으로 떨어져야 배론성지로 향하는 길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첫번쩨 임도로 올라서서 시계를 보았다. 벌써 10시가 넘었다. 이 상태로 라면 11시30분 미사참례는 어렵다. 조급해 진다. 육신이 즉각 반응한다. 30여분 지체를 계곡을 질러 올라붙어 단축하기로 하였다. 옛길이 희미하게 보이는 순간 접어 들었다. 부러져 너브러진 나무가지들이 길을 막는다. 조심 조심 계곡에 붙어 지내는 돌맹이를 밟고 넘어서서 고도를 높여 나갔다. 그리고 간혹 뒤를 살폈다. 당황, 난색, 의지, 염려 등등이 트레커들 얼굴에 드려졌다. 주어진 과정을 거친 후 모두 임도에 올러섰다. 시간은 벌써 10시 45분. 여기서 다시 0.9km 임도 따라 걸은 후 계곡을 타고 넘어서야 배론으로 나가는 길을 만난다. 두 줄기의 길중 오른쪽 길은 주론산 정상을 통해 박달재로 가는 길이고 왼쪽 길은 배론성지로 내려 서는 길이다.
길이 좋은, 추색이 얼핏하게 물든 숲 길이 아흔아홉 구비처럼 길게 다가 온다. 하늘이 청명하다. 새소리마저 높고 청아하다. 경쾌해야 할 발걸음에 생각이 짓누른다. 어쩔것인가? 계곡을 타고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남도 삼백리 술익은 마을 마다 타는 저녁노을 보며 걷는 시인의 심정처럼 그렇게 임도 숲길을 걷다 배론성지에 도착하여 대기중인 차를 불러 이동할 것인가.... 몰두하다 바로 결론을 얻었다.
결국 차단기가 있는 삼거리 이곳에서 쉬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우측 길을 포기한 후 손전화기를 꺼낸 후 다이알을 돌렸다. 임도끝 지점으로 오라는 부탁을 남기고 끊었다. 비로서 마음이 편해졌다. 우리들은 일상속에서 수많은 생각을 지어내고 그 생각에 대하여 행동으로 옮기려할 때 마다 많은 결론을 얻어야 한다. 그런 결론에는 늘 고민과 고심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공이든 실패이든 내려야 하는 결정 순간 만큼은 홀가분해 진다.
한분 한분 자신의 걸음의 몫따라 삼거리에 도착하여 쉬기 시작하였다. 가장 이상적인 걷기란 50분 정도 걸은 후 10분간 휴식한 후 다시 걷는 것이다. 쉴 때 스트레칭이나 행장을 수습하고 물을 마시거나 행동식을 섭취하여 열량을 보충하는 것을 트레커들은 잊지 말고 해야 할 일이다.
후미 트레커들이 내려 오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언제나 자연과 동화된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순하고 아름답다. 인간의 모태가 자연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면서 카메라를 치겨 세웠다. 화인더에 잡힌 피사체, 자연스러움이 듬뿍 담긴 자연 그대로였다. 스스로 모든 것을 이뤄 나간다하여 우린 자연이라 부른다.
그런 동기부여는 창조의 주체자 이신 하느님께서 만드신 섭리겠지만 그 관리에는 우리들도 스스로 참여해야 한다. 숲을 가꾸는 일은 바로 생명을 가꾸는 일이다. 사람의 감정과 인성을 가꾸는 일이 종교라면 모든 생명의 존재성은 자연 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숲을 파괴하기 보다는 가꾸는 일이 더욱 더 중요한 것이다.
이젠 맨 꼴찌트레커들이 출현하였다. 잠시 휴식을 권한 후 향 후 계획을 알렸다. 그리고 행동식을 나누고 잠시 환담 후
더 늘어지기 전에 트레커들을 세워 걷기 시작하였다. 이젠 1.5km 만 걸으면 임도 끝이다. 그곳까지 찿아 온 차편을 이용하여 배론을 방문하면 된다.
직선에서 다시 곡선으로 이어지는 숲길이 참 아름답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흙의 감촉, 수많은 신경의 촉수들이 잠에서 깨어나 나에 몸에 활력을 넣어 준다. 이 느낌이 바로 트레킹의 매력이다. 그리고 동행하는 사람과 나누는 정담은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우리들의 의식을 정돈해 준다. 보고 듣는 것이 좋은 자연속의 걸음, 그 걸음마다 소중한 삶의 인성이 쌓이는 것이다. 행복한 걸음이 숲길따라 이어졌다. 숲길 언저리에 피어난 앙증맞은 버섯들 그리고 가을맞이 꽃들이 아름답다. 이른 아침부터 우린 평화의 길을 평화의 마음으로 걷고 있는 것이다. 시작에 있어 소요가 있었지만 그 먹구름은 전부 가셨다. 마음은 이렇게 항상 좋고 나쁨사이를 이동하며 우리들의 삶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관리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신앙심이란 마음을 늘 관리하고 자제하며 바름으로 나가려는 의지의 결정체인 것이다.
차가 오는 시간동안 우리들은 맑은 계곡물에 발을 씻고, 손을 담그고 짙어가는 추색을 느끼며 쉬다. 차에 올라 배론으로 향했다.
12시30분경에 도착한 배론, 마~악 미사참례를 마치고 나오는 순례자들이 넘쳐났다. 우린 살며 시 야외 태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게 하는 것처럼 준비해 온 도시락 펼쳐 놓고 나누었다.
임시로 만든 작은 종지그릇에 담아 보내 온 이웃 트레커의 반찬들, 맛이 색다르고, 좋고, 깔금, 감칠 맛이 가득해서 좋다. 보내 온 정성과 우정이 은행잎 황금색처럼 황홀하다. 나눔은 항상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에게 행복을 기여해 준다. 나눔은 참 소중한 생각이며 실천이며 행복의 보금자리이다. 식사를 끝낸 후 인증샷을 만들었다.
느릿한 가을빛, 그 빛이 사물을 밝혀 평화를 드러나게 한다. 빠름 빠름에 익숙한 몸과 마음을 잠시 느릿함에 가두고 가을빛과 함께 여유로움 속을 거닐었다. 충만과 여백의 차이, 그 소중함을 배론에서 깨닫는다.
문경새재를 넘으려 하시다 주막거리가 있던 진안리에서 선종하신 최양업신부님! 이곳으로 모셔져 장례미사가 치뤄지고 이곳에 모셔 진다. 신부님의 동상 모습은 배티나 배론이나 한결같다. 개나리봇짐을 걸머지신 행장차림은 늘 선교 행장이시다. 땀의 순교자이신 신부님 앞에 섰다. 그리고 화살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아뢴다. 그리고 방죽을 본떠 만든 성전 용골과 늑골이 웅장하게 다기 온다. 주론이 있어 배론이란 지명을 얻게 된 이곳은 박해를 피해 만든 교우촌이었다. 옹기와 숯을 굽고 서로 의지하며 천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였다. 이곳에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지고 통상조약으로 박해가 풀리자 신학교는 여주 부엉골로 이전하였다가 다시 용산신학교로 그리고 이어서 혜화동으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른다. 또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는 박해를 피해 도망와 세필로 깨알같은 글씨로 비단에 1만4천여자를 써서 북경 주교에 보낼 백서를 만든다. 1) 주문모신부와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2) 조선 왕과 조정의 당파와 천주교의 박해 3) 천주교의 위기에 대하여 소상하게 밝히며 강력한 지원을 요청한다. 16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했던 그는 총명한 천재였다. 정조가 아껴 용상에서 내려와 손을 잡아 주자 그는 죽을 때까지 손을 명주천으로 감싸고 다녔던 사람이었다. 사영이 천주학쟁이란 보고를 받은 정조는 안타까워했다. 그에 운명은 학문적으로 배움의 의지를 갖고 만난 정약종에 의하여 결정된다. 천주학에 대한 배움을 받은 그는 금새 빠진다. 그리고 끝내 정약현의 사위가 되어 진심으로 천주를 공경하는 삶을 살다 결국 순교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심부름하던 이가 체포되어 백서는 전달되지 못하지만 사 후 오랜 시간끝에 결국 바틴칸으로 전달되어 지금 바티칸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그의 이름처럼 순교로서 기쁘고 복된 영화를 이어 나간 사람이 바로 황사영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주관이다.
성수로 몸과 마음을 씻어낸 후 성전에 들었다. 그리고 잠시 명상에 잠겼다. 생각과 행위에 있어 잘못된 점을 상세하게 아뢰며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만 다음 일정이 기다려 목례를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 섰다. 성전 모습을 다시 보면서 신앙 선교용선을 최양업토마스 신부님께서 거대한 박해와 저항의 바다를 손수 노를 젓어 나가는 형상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영치기 영차 구술땀을 흘리며~~~ 노를 젓어 나가시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선각자와 선구자는 늘 외롭지만 위대한 역사를 남긴 것처럼 토마스신부님도 위대한 선교의 위업을 남기신 것이다.
가을빛이 너무 좋은 가을 오후,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하느님과 그의 충실했던 종 최양업신부님에게 다가 가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가파른 길을 오르며 기도의 나눔 시간, 그것은 신자들의 마음이었으며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작은 소명이었다. 작은자의 몫을 더욱 더 작게 만들어 나누어야 하는 소명속에는 분명 평화가 스며 있다. 노란빛이 나뭇잎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 빛 그늘을 통하여 낭아한 기도소리가 천지간에 퍼져 울려 배론성지 숲속으로 한 마리의 곱고 고운 태극나비가 되어 떠 다닌다. 자연의 빛! 그 속에서 생명은 잉태되고 자라나며 끝에 가서는 사멸되어 다시 진토가 되는 것이 모든 생명체들의 순리다. 자연의 순환의 이치를 안다면 치열함을 버리고 공존의 평화를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끝에 묘역 앞에 섰다. 그리고 눈을 감고 당시를 추측으로 회상하며 땀이 깊고 깊이 스민 신부님의 고단한 선교,성소사명감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먼길을 떠나 이 배론으로 운구된 신부님은 장례미사를 통하여 온전한 하늘나라 사제가 된 것이다.
부모님을 순교로 잃고 형제들은 뿔뿔히 헤어져야 했던 한사람으로서 견디기 어려웠던 현실을 신부님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그 인간적 아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린 신부님의 공덕에 대하여 끊임없는 기도로서 갚아 나가야 한다.
참례를 하면서 예절에 대한 예를 갖추며 절을 올렸다. 반배로 마무리하면서 주님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들에게 신부님의 영과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도록 기쁨을 내려 주소서 기도 드렸다.
그리고 땀의 순교자를 위한 성가를 다함께 불러 드렸다.
비로서 배론의 성지순례를 마감하면서 함께 모였다.
의령 남씨로서 남종삼의 7대조인 선의 후손에서는 8명의 판서가 배출된 명문가였다. 원래 남종삼은 남상교의 종제인 남탄교의 아들이었으나 딸만 둔 장손의 대를 잇고자 상교의 집안으로 입적하여 장성하게 된다. 명문가의 자제인 남상교는 여덟살 때 고을 백일장에 나가 이름을 알리는 총기가 있었다. 순조 때 과거에 나가 벼슬길에 오른다. 남상교의 고향은 충주 백운면 화당리였다.
지금은 제천시에 편입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충주에 속한 고을이었다. 대구현풍 현감을 비롯한 영덕의 영해부사를 보다 헌종 때는
충주목사가 되어 고향에 금의환향하기도 한다. 그러나 천주의 신앙을 받아 드리고 아우구스티노란 본명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갈등에 휘쌓인다. 유교적 양반의 전통이 깊은 충주는 유풍이 거센 곳으로 신앙생활이 용이하지 않았던 곳이다. 높은 관직도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남상교는 미련없이 관직에서 물러 난다. 그리고 지금의 제천땅 산깊고 물맑은 학산리로 숨어 들어
거처를 마련한다. 이곳에 거처를 마련한 이유는 산 하나만 넘어서면 박해시기에 세운 신학교가 있고 푸르티에신부와 프티니콜라신부가 있어 영성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상교는 83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옥중에서 남종삼의 부인과 세 장손, 차남, 장녀, 차녀들이 창녕으로 종살이조로 귀향살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만 주님의 뜻이라며 동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옥중에 갇힌 남상교를 흠모하고 존경하던 충주지역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현감이었던 유남규에게 석방에 대하여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놀란 현감은 유생들에게 배교를 승락한다는 뜻을 받아오라 하지만 남상교는 끝낸 배교를 하지 않다 4월17일
삼짓날 옥사를 하게 된다. 묘재란 남상교가 지은 옥호인지 아니면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하여 만들어진 별칭인지 확실하지 않다.
학산리는 이곳에 지명이지만 묘재(妙才)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글 재주가 뛰어난 남상교와 남종삼을 기리면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남종삼 성인은 103위 한국 성인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다. 남종삼은 부친의 부임지를 따라다니며 글공부를 했다.그가 언제 입교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1860년 무렵으로 보인다. 한양에 사는 이윤일의 집에 가서 베르뇌 주교, 다블뤼 신부등을 만나고 서학에 관한 책을 얻어 읽은 그는 천주학의 오묘한 진리에 탄복해 영세를 했다. 그의 입교 후 가족들도 모두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아버지 남상교는신앙에만 전념하고자 묘재로 이사해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1866년 병인박해 때 공주로 유배되어 순교할 때까지 아들 남종삼이 찾아오면 가르침을 베풀며 신앙과 조국애를 일깨운다.높은 학문을 성취한 남종삼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지방 장관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지 벼슬에 오르고 고종 초에는 왕족의 자제를 가르치기에 이른다. 그는 당시 부패된 관리들 중에서 유일하게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다.그러나 그는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 되는 한편 향교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의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고 당연하게도 관리직을 내놓았다. 남씨 부자의 묘재 정착은 평소에 상종하던 이들과의 생활 풍습이 신앙 계명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으로,남씨 부자에게는 높은 벼슬, 명예와 권세, 안락한 생활 등 양반으로 누릴수 있는 영화와 특권을 스스로 끊어 버린 일대 결단이었다.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말경,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어 다시 임금 앞에서 경서를 논했다. 그 때에 두만강을 사이에 둔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면서 통상을 요구 했다. 조야는 어찌할 줄 모르던 차에 남종삼은 "이이제이 방아책(以夷制夷防我策)"이라 하여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다.대원군은 그의 건의를 쾌히 받아 들였으며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모두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전교 여행 중이어서 약속시간 내에 찾아내지 못했고 대원군의 초조는 분노로 바뀌었다. 얼마 후 두 주교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 이미 때는 늦어 대원군은 정권 유지의 간계로 천주교 박해를 결심했던 터였다.남 승지는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닫고 묘재로 내려가 부친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남상교는 그의 말을 듣고 "너는 천주교를 위(忠)을 다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너의 신명(身命)을 잃게 되었으니 앞으로 악형을 당하더라도 성교(聖敎)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삼가라."고 가르쳤다.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받은 남 승지는 치명을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을 찾아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한양으로 향했다. 이미 한양으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져 있던 그는 결국 한양을 채 못 들어와 고양군 축배더리 마을이라는 곳에서 붙잡히고 의금부로 끌려가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 그리고 베르뇌, 다블뤼 주교와 함께 병인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된다.부친 남상교도 붙잡혀 공주로, 장자 규희는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하고 처 이소사, 차남 명희와 두 딸은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되어 노비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이소사도 창녕에서 순교하니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한 셈이다. 남종삼 요한은 1984년 시성되었다.
남상교의 아들은 남종삼이며 그에 아들 남규희는 어리다는 이유로 생존할 수 있었다. 환난을 피한 남규희는 안성군 미양면 갈전리에 삶의 뿌리를 내린 후 유복자 남상철(1891 – 1978) 낳는다. 생후 1개월만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외가에서 자란다. 남상철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후 통신강의로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 후 충북 장호원 감곡 성당에서 운영하던 매괴 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다.그 후 면장과 충북 도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해방 후 영친왕 환국 추진운동과 더불어 추진위원장을 지냈으며 교회사와 교회 사적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를 거듭하다.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발굴하여 경향잡지 1962년부터 1963년 1월까지 한국천주교의 요람지 주어사의 발견이라는 주제로 연재를 한다. 5명의 선교순조를 지닌 가문의 가풍답게 3남 5녀의 자식들에게 사심없이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따르라고 가르쳤으며 그 중 3명의 딸은 수녀가 되었다. 노환으로 1978년7월13일 삼양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선종하였다. 그는 선종하기 전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당시 성북구 길음동에 성당 부지를 1968년 기증하여 길음동 성당이 건립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 하였으며 생존 시 재속프란치스코에 입교하여 프란치스칸으로서 많은 헌신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순교자 후예 남상철 프란치스코
순교 선조 후손으로 부끄럽지 않은 오롯한 삶
- 한 생애를 오롯이 교회에 몸 바친 순교자의 후예 남상철 선생.
'순교자 후예' 남상철(프란치스코). 평생을 교회의 아들로 산 그에게 순교자 남상교(아우구스티노, 1784~1866), 남종삼(요한, 1817~1866) 등 순교자들 후손이라는 사실은 빛나는 영예였을까, 아니면 크나큰 부담이었을까. 이에 대한 고뇌와 심경은 그의 삶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고뇌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당신들을 닮지 못하는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며 자신의 한 생애를 교회를 위해 바쳤다. 그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청빈과 정결, 순명의 삶을 살아가려 했다. 더불어 순교자 현양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종내엔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주어사와 천진암 터를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교회를 위해 자신의 한 생애를 오롯이 바친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본다.
순교자 후예로 태어나 가시밭길을 걷다
증조부 남상교와 조부 남종삼 등 그의 가문 순교자 5위의 신원이 회복된 것은 1895년의 일이다. 1894년 7월부터 1년 8개월간 개화파 내각이 추진한 갑오개혁으로 남상철 가문에 복권이 이뤄졌다. '모반부도죄(謀叛不道罪)'라는 죄명도 씻겼고, 관명(官名)도 복구됐으며, 후손들도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다. 남상철의 나이 5살 때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참으로 힘겨웠다. '15살 미만은 사형에 처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박해에서 살아남아 두 누이 데레사ㆍ막달레나와 함께 경기도 안성에 정착한 아버지 남규희는 아들 상철이 태어나기도 전에 선종했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생후 1개월 만에 어머니마저 산고로 잃고 외가에서 자랐다. 선조들의 복권은 그에게 자유를 안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열심한 신앙생활과 함께 한학을 익혔고 장성해서는 일본 와세다대학 통신 강의로 법학을 독학했다. 졸업 뒤 충북 장호원(현 감곡)본당에서 회장으로 일하는 한편 본당에서 운영하던 매괴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또 1921년부터 20년간 감곡면장으로 일하며 충청북도 의회 의원을 겸해 행정능력을 보여줬다.
가정에도 충실했다. 하지만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서상순(엘리사벳)씨와 혼인해 5남 5녀를 둬 유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두 아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10남매 가운데 형우(요한 세례자)ㆍ순우(레지나)ㆍ공우(가롤리나) 등 세 딸은 모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입회, 수도의 길을 걸어 그에게 기쁨을 안겼다.
이처럼 투철한 신앙과 화목한 가정, 폭넓은 영향력, 치밀한 관리 능력으로 그는 교회에 정평이 나 있었다. 많은 사제들 추천으로 그는 경성대목구(현 서울대교구)청으로 자리를 옮겨 대목구 일을 돕게 된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0년 교회는 조선총독부 강요로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대목구 연맹'을 출범시킨다. 이 단체에서 경성대목구장 노기남 주교를 도와 활동하던 그는 1942년 어쩔 수 없이 이사장까지 맡았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는 일제 당국의 압력과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해가며 바람 앞 등불과도 같은 한국천주교회를 지키며 발전에 이바지했다.
용서와 화해, 선교의 삶을 살다
교회에서 일하던 그는 순교자 후예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다. 1939년 7월 경성대목구 종현(명동)성당에서 오기선 신부 주례로 봉헌된 미사에서 그는 아우구스티노라는 수도명으로 입회한 뒤 이듬해 10월 종신서약을 한다. 이후 그는 39년간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몸 담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성 프란치스코 제자로 충실했다.
광복 뒤 미 군정청 교섭 대표로 활약한 그는 혼란스런 해방 공간에서 노 주교, 장면(요한) 박사 등과 함께 시국문제를 협의하며 희망에 찬 새 조국 건설에 힘을 보탰다. 1947년 그가 고종황제의 일곱째 아들 영왕 환국추진위원회 회장으로 추대돼 활동한 것은 그가 프란치스칸으로서 얼마나 깊은 영성 속에서 화해의 삶을 실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왕 환국이 이뤄지기까지는 17년이 걸렸지만, 그는 자신의 직계 선조 5위를 치명케 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손자를 환국시키고자 갖은 애를 다 썼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3)라는 하느님 말씀을 좇기 위해서였다. 그리고서 1963년에 영왕이 귀국하자 회장으로서 그는 따뜻하게 영왕을 맞아들였다.
그는 선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은 인물이기도 했다. 6ㆍ25전쟁 이전부터 서울 삼양동 자택을 공소로 내줬다. 당시 이 지역엔 가까이는 길음동성당, 멀리는 의정부성당밖에 없어 신자들이 모일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집을 기증해 미아3동(현 미아동)성당 설립에 이바지했다.
또 제4대 재속 프란치스코회 서울형제회 회장을 지내며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살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계속했다. 1967년엔 미사에 참례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로 대퇴골 골절상을 입기도 했지만, 휠체어를 타고서도 임종 전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 서울형제회 회장직도 사임했다. 그렇지만 그 불편한 몸으로도 그는 선종하기까지 재속 프란치스칸으로 최선을 다했다.
한국 천주교회사의 뿌리를 찾다
말년엔 한국교회 뿌리 찾기에 몰두했다. 선교사 도움 없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한국교회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는 그 시발점인 '주어사 강학회' 연구에 몰입했다. 성호 이익 학통을 이어받은 권철신(암브로시오)과 정약전, 이벽(요한 세례자) 등이 모여 강학하고 이 과정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현장인 주어사와 천진암을 찾고자 수년간 문헌 고증과 함께 경기도 여주와 양평, 광주 일대 답사를 거듭했다.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주어사 터 찾기 여정을 계속한 건 순교자 현양 일념에서였다. 당시 주어사는 여주군 산북면 하품2리(점란산골) 앵자봉 서쪽 기슭에 있는 사찰이었다는 기록, 한 승려가 잉어를 따라 가던 꿈을 꾸고 얻은 터라는 창건 비화만 전해져 왔다. 오랜 고생 끝에 그는 1962년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에서 주어사 터를 확인하는 비석을 발견한다.
그 오랜 여정은 「경향잡지」 1962년 11ㆍ12월호 및 1963년 1월호에 '한국천주교회 요람지인 주어사가 발견됨'이라는 글 3편에 실렸다. 당시 답사를 통해 그는 주어사 창건 시점은 1698년 이전으로, 나중에 폐사돼 그 절터가 논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냈다. 발견된 비석은 높이 91㎝, 폭 33㎝ 크기였으며, 이 비석은 현재 서울 절두산순교성지에 보존돼 있다. 그는 이 비석을 근거로 주어사와 천진암 성역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교회에 호소했으며, 그의 선종 이후 천진암 터를 중심으로 성지가 개발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웃을 위해, 교회를 위해 온전히 자신의 것을 다 내어준 사람, 순교자 후손 남상철은 그런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평생 동안 교회에서 솔선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 번도 교회를 이용한 적이 없으며, 스스로를 낮춰 늘 겸손하게 봉사의 삶을 살았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자기를 비우며 철저한 가난을 추구했듯이, 그도 일생을 통해 자기 비움과 나눔, 가난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1978년 87살을 일기로 하느님 품에 안긴 그는 유서에서조차도 자신보다는 교회와 성직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당부하고 "치명한 선조들의 덕을 본받도록 힘쓰라"는 말을 후손에 남겼다. 평소 자손들에게도 늘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닮으라고 가르친 그는 순교자 후손답게 참된 신앙인으로서 길을 걸었고,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세속에서 복음을 실천하며 표양을 보였다.
- 1968년 10월 6일 바티칸 베드로대성당 앞에서 거행된 증조부 남종삼 순교자 시복식에 참석한 남상철(왼쪽)씨와 부인 서상순씨, 자녀들(뒤쪽).
- 39년간 재속 프란치스칸으로 산 남상철(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씨가 1963년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거행된 재속 프란치스코회 종신서원식(허원식)을 마친 뒤 다미아노 십자가를 든 회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야고바 트레키에서는 성지순례를 위한 기도문을 별도로 만들어 갖고 다닌다. 그 기도문을 꺼내 성지순례를 위한 기도를 다함께 봉송하였다. 그리고 성가를 부르며 조선시대 천주교인중 가장 반열에 올랐던 승지 남종삼을 기리며 묘재 뜰안에 한참 머물렀다. 그리고 옛 공소자리를 보면서 세월의 흐름을 눈치챘다. 지금은 공소를 10m 동쪽으로 이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국희 모니카 회장께서 뜰에 자란 잡초를 제거하느냐 앉아 있었다. 재촉을하며 일으켜 세우자 손에는 토끼풀이 한움큼 들려 있었다. 다음 행선지를 가기 위하여 출발하기 앞서
조용히 양손으로 대문을 잡아 당긴 후 맹꽁이 자물쇠를 어설푸게 걸어 잠궜다. 그리고 담 넘어로 보이는 승지님의 흉상을 보면 목례를 드린 후 자리를 떴다. 성지순례를 끝내니 아침 처음 마음의 불편했던 일들이 전부 사라졌다. 편안한 마음으로 치악산 계곡 트레킹으로 심신을 평정하기 위하여 구룡사 계곡을 찾았다. 조용한 마음으로 평화의 마음으로 아주 천천히 숲길을 걸었다. 해질녁의 숲은 고요했다. 옛적 화전을 일궈 살던 촌락으로 가던 길을 찾아 일부러 그 길로 내려섰다. 평화의 피톤치드가 숲에 빠져 나와 공기와 더불어 춤사래를 만든다. 한번의 숨으로 모든 것이 정화된다. 지독한 평화의 선물이다. 다들 좋아하며 손을 들어 환호하고 그 기쁨들을 숲에 남겨두며 길을 걸었다. 행복한 순례었다. 가을이 익어가는 저녁 마음에 평화의 노을이 물들어갔다. 동행한 트레커들에게 소중한 마음의 평화를 전한다. 평화를 빕니다. 아멘.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