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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의 연구실을 엿보다
ㅡ시집,『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2011년, 김혜영 『지혜』
이재복(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1. 기호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김혜영의 시는 모던하다. 이 말은 너무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시에서의 모던이란 현대시와의 관계를 통해 정립될 수 있는 개념이다. 모던 혹은 현대시라는 말의 이면에는 기존의 것에 대한 ‘새로움’이라는 의미가 내재해 있다. 이때의 새로움은 먼저 낭만주의자들의 축축하고 말랑말랑한 시를 거부하고 드라이하고 하드한 시를 추구한 이미지즘과 현대의 고도 문명 하에서 사고와 감각의 분열을 일으킨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그리고 이성과 도덕에 의해 질서화되고 논리적으로 조작된 의식의 세계와는 달리 인간 정신의 순수하고 원초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현대시는 모호하고 복잡하며 난해하기까지 한 것이다.
현대시의 이러한 새로움은 무엇보다도 시의 형식과 기법의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현대시의 새로움은 언어에 대한 민감한 자의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에 대한 자의식은 ‘시란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인가?’하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시란 주어진다는 생각이 팽배하여 언어에 대한 정서적인 강렬성에만 관심을 보였을 뿐 선택과 결합 등 구조화된 인식에 대해서는 이렇다할만한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어의 구성과 구조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된 것은 이미지즘과 다다이즘 운동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시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인식은 시의 언어에 대한 탐구에 언어학, 기호학 등과 같은 방법론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이 방법론들은 시의 언어를 구조적으로 인식하여 그것이 지니고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미의 법칙이나 질서를 드러나게 한다. 설령 시의 언어가 의식을 넘어 무의식의 상태를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니고 있는 미적인 세계를 구조화할 수 있다면 그만큼 시 창작과 해석의 지평은 확장될 수 있다.
김혜영 시의 모던함 역시 언어에 대한 자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시인에게 언어란 하나의 기호이다. 이 사실은 시인이 언어를 인간과 세계 전반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이해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호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소통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기호는 단순히 기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소통은 애매성과 복잡성을 띠게 된다. 특히 상징으로 표시되는 시의 기호는 이러한 특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다. 시인은 이 기호를 만들어내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시인의 욕망은 시적 대상이 지니고 있는 은폐된 의미의 기호화를 겨냥한다. 시적 대상의 은폐된 의미는 그것이 탈은폐 될 때 존재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을 탈은폐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방법과 도구가 필요하다. 다의성을 지니고 있는 시적 대상을 온전하게 탈은폐시키기 위해서는 개념화된 도구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개념화된 도구적 연관성 없는 시적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지 그리고 이해와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념화된 도구적 연관성 없이 시적 대상을 드러낸다는 것은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개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존재성과 친밀한 거리를 유지하고, 다양하고 깊이 있는 통찰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 역시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시적 대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당신이란 상상 속의 기호를 혼자
사랑했지요. 비늘이 벗겨진 물고기 한 마리를
유리병에 넣어 보냈지요. 만 년이 지난 뒤
무의식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죠. 당신이란
기호가 꽃으로 피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당신이 흡혈귀처럼 내 피를 빨아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십오 년이 지난 가을이었죠.
당신만 피를 빠는 줄 알았는데 난 당신의
다리에 붙어서 이(邇)처럼 당신의 살갗에
혀를 갖다 대곤 했죠. … (중략) …
밤마다 낡은 옷장 문을 열고 내려와
이부자리에 나란히 눕는 당신이란 기호는
거대한 박쥐가 되어 천장으로 올라갔지요.
형광등이 뜨거울 거야. 조심해. 얄밉기도
하지만 당신이란 기호가 오래 오래 내 곁에
머물기를 바라지요. 혼자 찬밥을 먹는
중세의 겨울 저녁을 견딜 수 없을 거야
당신이란 기호를 그리워하는 또 하나의 기호.
- 「기호 이야기」 부분 인용
시인에게 시적 대상은 하나의 기호로 존재한다. 시인은 그 기호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애착을 보인다. 이 애착의 정도는 시간으로 표상된다. 시인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시적 대상인 당신의 존재를 알고 싶어 한다. 시인은 십오 년이 지나 ‘당신이란 기호가 꽃으로 피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과 ‘흡혈귀처럼 내 피를 빨아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둘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이 둘을 연결해보면 ‘흡혈귀처럼 내 피를 빨아 먹었기 때문에 당신이란 기호가 꽃으로 피었던 적이 있었다’가 된다. 나와 당신과의 관계가 피를 나눌 정도로 친밀하며 그것의 의미가 꽃으로 표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나와 당신과의 이러한 관계를 시간 속에 유폐시키고 싶어 한다. 그것의 강렬한 표현이 바로 ‘비늘이 벗겨진 물고기 한 마리를 유리병에 넣어 보냈지요. 만 년이 지난 뒤 무의식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죠.’이다. 비늘이 벗겨져 유리병 속에 넣어진 물고기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며, 이것은 물고기, 다시 말하면 당신을 시인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이 투사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유리병 속에 넣어진 물고기처럼 당신 역시 그렇게 만 년이 지난 뒤에도 어디론가 떠나지 않고 의식이 아닌 무의식으로라도 남아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것이다. 나와 당신 혹은 시인과 당신과의 이러한 관계가 만 년의 시간을 견디면서 존재한다면 이들 사이에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친연성과 필연성이 자연스럽게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나와 당신 사이의 관계는 기호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시 속의 당신은 기호이다. 시인이 ‘당신이라는 기호’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 하나의 기호라면 시인이 생각하는 기호는 단순히 기표 차원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닌 기의 차원에서 성립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신이라는 기호의 기의에는 시인이 상상하고 체험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시인은 이것을 ‘기호 이야기’라고 명명하고 있다. 단순히 기호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기호 이야기라고 한 데에는 기호에서 기의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기호 이야기란 서사에서 말하는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의 기호 이야기는 ‘꽃’, ‘흡혈귀’, ‘이’, ‘옷장’, ‘박쥐’, ‘중세’ 등의 질료가 표상하고 있는 것처럼 사건을 통한 갈등의 해결보다는 상징을 통한 애매하고 복잡한 세계내 진실의 환기내지 현현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만들어내는 기호 이야기는 낯설면서도 강렬한 매혹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프랑켄슈타인의 피로와 프로이트의 욕망은 어떻게 만나는가?
시에서 중요한 것이 만들어낸다는 의미라면 시인에게 이것은 일정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인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때 먼저 고려하게 되는 것은 그 대상이 은폐하고 있는 형상이다. 이 형상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찾아내고 발견하기 위해 시인은 자신의 감각은 물론 인지와 이해 판단이라는 사유의 능력까지 모두 동원한다. 하지만 대상이 은폐하고 있는 형상은 눈에 보이는 차원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 혹은 의식의 차원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차원까지 들여다보아야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감각하고 사유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 누구나 시인이 되고 또 좋은 시를 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시인이 대상이 은폐하고 있는 형상을 발견하여 그것을 시로 구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으며, 이 과정에서 커다란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인이 창작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늘 대상(세계)이 은폐하고 있는 형상과 그것을 의미화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쓰기는 신성한 창조 행위라는 의미 부여에 앞서 개인의 욕망의 산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시쓰기 역시 욕망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구도자처럼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매번 알면서도 또 다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시인의 시쓰기의 역사는 인간의 욕망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간의 궤적을 이루면서 변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의 역사에 비해 시쓰기의 역사는 예술이나 미학의 속성상 자신이 발견하고 형상화한 대상에 대해 깊은 자의식과 회의를 더 강하게 드러낸다. 자신이 만들어낸 시에 대한 자의식과 회의를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 보이려는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절망’과 '기교’ 사이의 딜레마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절망은 기교를 낳고 기교는 다시 절망을 낳는다는 아방가르드 시인의 말은 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속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기교와 절망 사이를 오가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시 혹은 세계에 대한 허무함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알 듯 모를 듯 수수께끼 같은
기호로 가득 찬
말랑말랑한 시계 안에서 길을 물으니
가느다란 손가락이 모나리자의 옷을 벗긴다
살결이 떨어져나간 양파처럼
하나 둘 벗길수록
아무것도 없다!
- 「말랑말랑한 시계 안에서」 부분 인용.
라고 말한다. 시인의 말 속에는 기호에 대한 회의가 강하게 배어 있다. ‘알듯 모를 듯 수수께끼 같은 기호’로 세상이 가득 차 있다면 그 세상에 은폐된 의미를 발견하여 그것을 형상화한다고 하더라도 기호 자체가 알듯 모를 듯 수수께끼 같기 때문에 그 은폐된 의미 역시 알 듯 모를 듯 수수께끼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의 은폐된 의미는 기호를 통해서만이 그 존재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시인의 회의는 곧 기호와 세계에 대한 회의일 뿐만 아니라 시, 더 나아가 예술 전반에 대한 회의가 되는 것이다. 예술 전반에 대한 시인의 회의는 혐오로까지 발전한다. 시인은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구경꾼으로만 남을 지도 몰라. 더러운 예술이야
지쳤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 몸의 소리가 들리니?
버려진 것이라 말하더군. 물컹거리는 비계덩이
출렁이는 흐름이 보이니? 구조화되는 것은 아니지
조각보처럼 태어나는 몸
사각사각 스치는 모델의 다리에 털이 없군
음모도 깍은 것 같아
자를 수 있어 다행이야
덕지덕지 천을 이어 붙이듯 금속 조각을
이어나간다. 프랑켄슈타인의 파편으로 연결된
몸과 몸이 전시실에 고독하게 서 있어
- 「프랑켄슈타인」 부분 인용
에서처럼 예술 작품을 ‘더러운 예술’이라고 말한다. 시인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예술에 대한 피로감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지쳤다’고 한 것일까? 시인이 욕망한 예술은 구경꾼으로만 남는 더러운 예술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남는 그런 예술이다. 하지만 시인의 예술은 버려지고 소외된 채 전시실에 고독하게 서 있는 존재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시인이 욕망한 주인공으로 남는 예술이란 천의무봉한 몸을 가진 존재를 말한다. 사람들은 천의무봉한 몸을 보러 오지 ‘물컹거리는 비계덩이’ 같은 몸이나 ‘덕지덕지 천을 이어 붙이듯 금속 조각을 이어 만든 몸’을 보러 오지는 않는다. 시인은 이 ‘덕지덕지 이어 붙여 만든 몸’을 ‘프랑켄슈타인의 파편으로 연결된 몸’에다 비유한다. 시인이 프랑켄슈타인을 끌어들인 것은 비극으로 끝난 그의 인간의 몸의 개조 욕망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인간의 몸의 개조 욕망처럼 시인의 기호를 통한 구성 및 구조 욕망 역시 그 안에 부정성과 비극성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파편은 불완전함의 표상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욕망은 완전한, 다시 말하면 천의무봉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자신이 만든 괴물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일관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프랑켄슈타인의 파편으로 조각상을 만드는 예술가(시인) 역시 이와 처지가 다르지 않다. 프랑켄슈타인이 가진 증오와 복수심, 시인이 가지고 있는 피로감(지침)은 모두 자신이 만든 대상에 대한 회의와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증오와 복수심이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은 곧 욕망의 끝을 의미한다. 프랑켄슈타인을 살아가게 한 힘이 욕망에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욕망의 끝은 그의 인간 몸의 개조 계획과 실행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극도의 피로감은 자신의 만드는 행위를 가능하게 한 힘인 욕망의 피로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피로감이 극에 달하고 그것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면 욕망도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기호 이야기도 여기에서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문제는 시인의 이 극에 달한 피로감을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점이다. 시인이 ‘더러운 예술’이라고 한 것은 예술을 끝장내려는 의미와 함께 그것을 좀더 천의무봉한 예술로 승화시키려고 하는 의미 또한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의 극에 달한 피로감을 풀어주고 다시 천의무봉한 예술에 대한 욕망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겉으로 드러난 차원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심층의 차원을 들여다보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이 극도의 피로감은 시적 대상에 대한 ‘불감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이 불감증을 치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감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인은 이 물음에 대해 ‘불감증을 치료하는 정신분석가’라는 말로 대신한다. 정신분석가로서 시인은 그 불감증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 우선, 아이처럼 단순하게 웃어요. 옆집에 사는 무뚝뚝한 동물에게 아침마다 안녕! 엉덩이와 징그러운 발가락이 떠오르면 눈을 감으세요. 순간순간 집중하세요. 설거지할 땐 손만 씻고, 길을 걸을 땐 구두를 벗고, 운전할 땐 라디오를 켜세요. 당신을 비난한 기괴한 식물은 잊어버리세요. 환영일 따름이지요. 환상은 상대적인 세계이니까요. 물고기가 몰려와 당신 입술에 정액을 뿌릴 거예요. 푸르스름한 초승달이 속옷을 갈아입을 무렵, 태평양으로 여행을 떠나시죠. 진료비를 완납한 후에
- 「불감증을 치료하는 정신분석가」 부분 인용.
시인이 제시하는 치료의 방법이 개념적인 지식의 나열이 아닌 불감증에 걸린 환자의 심층을 탐색하고 그 증상과 만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신분석가로서 시인이 제시하는 치료 방법은 환자의 심층에 있는 ‘환영’이나 ‘환상’을 들추어내어 그것과 대면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눈을 감으세요’, ‘잊어버리세요’라고 한 대상은 ‘무뚝뚝한 동물의 엉덩이와 징그러운 발가락’과 ’기괴한 식물‘이다. 이 동물과 식물은 환자의 무의식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은폐되어 있다가 그것이 응축과 전치의 과정을 거쳐 이미지와 상징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정신분석가가 되어 제시한 치료법은 무의식의 심층에 내재하고 있는 환영이나 환상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다. 무의식 속에 은폐된 환영이나 환상은 환자의 억압의 산물이다. 시인은 정신분석가로서 환자의 무의식을 보고 있지만 기실 그 환자란 시인에 다름 아니다. 자신을 환자로 치환해 놓고 그의 무의식의 심층을 들여다봄으로써 자신이 처한 극도의 피로감의 정체를 탐색해 보려 한 것이다.
시인이 자신의 무의식의 심층에 내재한 환상이나 환영을 즐기는 긍극적인 목적은 기호가 가지는 개념이라든가 체계 혹은 구조로 인해 발생한 극도의 피로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데에 있다. 기호가 가지는 개념, 체계, 구조는 아버지의 법의 산물이다. 아버지의 법은 이상하거나 기괴한 것을 상징적인 질서의 세계로부터 추방시켜 안정성을 추구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법에 의해 추방된 것들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억압된 채 상징계의 질서를 전복하고 해체하려는 힘의 실체로 존재한다. 그것은 「이상한 글쓰기」에서 보여준 ‘그녀’와 다르지 않다. 그녀는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달아나는 그녀에게 매번
속았어. 도마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변명만 늘
어놓는 그녀. 편집증을 앓는 것 같아. 강박증도
있는 것 같아. 음모는 음모를 불러오고 그녀를
삭제할 수도 삽입할 수도 없어. 이상하고 기괴한
얼룩이야.
-「이상한 글쓰기」 부분 인용.
에서처럼 ‘이상하고 기괴한 얼룩’과 같은 존재이다. 이 이상하고 기괴한 얼룩은 상징계의 억압이 만들어낸 상처로 극도의 피로감에 지친 시인을 다시 욕망의 회로 속으로 편입시킬 에너지 같은 것이다. 이 이상하고 기괴한 얼룩이 글쓰기의 욕망을 불어넣어 시인은 극도의 글쓰기의 피로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이상하고 기괴한 얼룩이라고 하면서도 그것을 다시 ‘이상한 글쓰기’라고 명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이 이상한 글쓰기라고 명명했지만 기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낯설고 새로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이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프로이트는 자신을 낯설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게 하는 기호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시인은 프로이트를 읽고 싶어 한다. 그런데 시인이 프로이트를 읽은 시간이 오후(저녁이나 밤)가 아니라 오전(아침이나 낮)이다. 오전은 아버지의 감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간인데도 시인은 오전에 프로이트를 읽고 싶어 한다. 다른 시간이 아닌 이런 오전에 프로이트를 읽는다는 것은 ‘목사(아버지)의 금지’와 ‘아이의 수음’(「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사이에서 형성되는 강한 긴장을 예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피로한 글쓰기에 대응하는 이상한(욕망의) 글쓰기의 탄생을 엿볼 수 있다.
3. 신화는 어떻게 부활하는가?
시쓰기에 대한 피로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인이 택한 방법이 프로이트를 읽거나 정신분석가가 되어 환자의 환상이나 환영을 즐기게 하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무의식을 탐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시쓰기를 가능하게 하는가? 하는 점이 시인으로 하여금 프로이트를 읽게 했다면 그것은 개인의 의식을 넘어 무의식의 차원으로 기호 이야기를 확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호 이야기의 확장은 시인의 시쓰기의 실존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모색은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호 이야기를 구성하고 구조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로감은 이렇게 시적 대상으로서의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프로이트를 읽음으로써 상징계의 투명함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불투명한 세계를 경험하여 그것을 기호의 응축과 전치를 통해 드러내고, 그것이 곧 기호 이야기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시인의 기호 이야기의 확장이 ‘프랑켄슈타인’을 거쳐 ‘프로이트’로 이어지고, 다시 ‘프로이트’에서 ‘J’로 이어진다. J 역시 프랑켄슈타인이나 프로이트처럼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욕망한다. 하지만 J가 탐색하고 욕망하는 대상 혹은 세계는 이들과는 차이가 있다. 시인이 프랑켄슈타인과 프로이트를 통해 문명화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을 기호 이야기에 담고 있다면 J를 통해서는 문명화된 세계와는 대척점에 있는 신화의 세계를 지향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새벽 2시
바하의 음악이 들리는 시각
사냥꾼 J는 인디언 마을로 떠난다
짙은 녹색으로 물든 숲속
쿠퍼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디언을 만나러 가는 걸까
남자의 어깨에 달빛이 내려앉는다
미시시피강으로 내려가는 연어의 뺨을 후려갈기는 곰
퍼득거리는 살찐 연어를 물어뜯는 곰의
뒤통수를 겨냥하며 내티 범포*가 다가간다
탕!
곰이 쓰러지면 내티 범포는 순수한 아담이 된다
…(중략)…
안개 자욱한 인디언 숲속에서
북극성을 따라가는 말 잔등에 앉아
다시, 총구를 겨눈다
- 「J의 연구실」 부분 인용.
J가 떠나고자 하는 곳은 ‘인디언 마을’이다. 시인이 이곳으로 떠나고자 하는 데에는 문명화가 되면서 우리 인간이 상실한 순수함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자연이 가지고 있는 순수함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J가 떠나고자 하는 인디언 마을은 여전히 그러한 자연의 순수함이 살아 있는 곳이다. 그것에는 ‘연어의 뺨을 후려갈기고 퍼득거리는 살찐 연어를 물어뜯는 곰’이 있고, 그 곰을 사냥하는 ‘내티 범포라는 사냥꾼’이 있다. 연어를 곰이 먹고, 그 곰을 다시 사냥꾼이 먹는 생태계의 먹이 사슬이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사냥은 욕망의 과잉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의 순응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곳에서 곰을 사냥하는 내티 범포를 ‘순수한 아담’으로 표현한 것이나 ‘말이 북극성을 따라간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J는 인디언 마을로 갈 수 없다. 그가 떠나고자 하는 인디언 마을은 쿠퍼의 소설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J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의 서재에 꽂혀 있는 쿠퍼의 소설을 읽으면서 내티 범포의 사냥을 상상하는 것이다. J는 내티 범포같은 사냥꾼이 아니라 그 사냥꾼의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는 연구자인 것이다. 왜 이 시의 제목이 ‘J의 연구실’인지 생각해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다. J가 시인의 대체된 기호라면 시인은 연구실에서 프로이트를 읽고 또 페니모어 쿠퍼의 소설『레더스타킹 이야기』(Letherstocking Tales)을 읽으면서 무의식과 자연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근대 이후 급속한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그로 인해 불안이라는 징후를 앓게 된다. 인간이 자연 속에 혹은 자연과 더불어 살 때에는 욕망이 적절히 통제되고 조절되면서 과도한 결핍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지만 문명화가 되면서 인간은 타자(상품이나 매체)에 의해 욕망이 끊임없이 불어넣어지게 되고 그 결과 결핍과 충족이라는 회로 속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욕망의 회로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프로이트 식으로 무의식을 탐구하거나 아니면 J처럼 자연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시인이 생각하는 자연의 회복이란 곧 인간의 문명이 상실한 신화를 불러내 기호로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J가 떠나고 싶어 하는 인디언 마을은 이러한 신화가 훼손되지 않은 채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문명화된 상징의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문명화된 세계와는 달리 이 세계에서는 혼돈이 중요한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어떤 투명한 구분이나 경계 없이 혼돈의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기호의 세계가 가능하다. 가령
황금 가지를 가진 나무가
기다란 다리를 내밀어 길이 되었네
끝이 없는 길
끝없이 갈라지는 나무 가지 끝에
달린 하얀 손가락들
뾰족한 지붕 위로 걸어가는 책
입 안에서 나와 공기의 집으로 사라진 말들
…(중략)…
우주 나무 한 그루에
당신과 나는 빨간 입술을 매달았네
아이로 태어나는 저 황금빛 사과들
- 「우주나무 한 그루」 부분 인용.
에 드러난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우주나무 한 그루’가 상징하고 있듯이 우주는 하나에서 나서 각기 다른 것으로 분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주나무 한 그루에 있는 ‘하얀 손가락들’, ‘걸어가는 책’, ‘사라진 말들’, ‘빨간 입술’, ‘황금빛 사과들’은 이 나무가 기다란 다리를 내밀어서 만든 길에 매달린 것들이다. 이 사실은 각각의 존재들이 다르면서 같고 같으면서 다르다는, 애매하고 복잡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주나무는 끝없이 길을 만들고 또 끝이 없는 길을 만든다. 우주나무의 이 무한한 생명력에 시인이 매혹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주나무에 빨간 입술을 매달았는데 그것이 아이가 되고 또 황금빛 사과들이 되는 신화의 세계는 틀에 박힌 개념화되고 구조화된 세계에서 일어나는 피로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영감으로 가득 찬 그런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신단수’부터 ‘현무’와 ‘무용총’을 거쳐 ‘오시리스’, ‘이시스’, ‘메두사’, ‘마리아’, ‘호루스’, ‘아프로디테’ 등 동서양의 신화를 시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그것을 기호화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신화의 세계가 드러내는 혼돈은 시쓰기의 피로감에 지친 시인에게 환상과 환영의 상태를 제공함으로써 또 다른 낯설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고대의 신화가 현대에 와서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도 그것이 가지는 현실과는 다른 환상과 환영의 속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의 부활은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의 시간의 경계를 해체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주라는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시적 상상력의 넓이와 깊이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신화 부활의 진정한 의미가 과거와 전통에 대한 환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것을 초월해 현재와 현대의 상황을 예각화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데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J의 연구실」은 시인의 이러한 의도를 잘 보여주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신화의 부활을 간절하게 희구하는 데에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황폐하며 불모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역설이 내재해 있다. J의 총이 비록 인디언 마을의 곰을 사냥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읽고 우리가 순수한 아담이 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자각과 함께 현문명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할 수 있는 계기는 제공하리라고 본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의 시의 사회적인 효용성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4. J에게
J의 연구실을 엿보고 싶은 이유가 북극성을 따라가는 말 잔등에 앉아 총구를 겨누는 그의 모습이 멋져서가 아니다. J가 쏜 총에 곰이 쓰려지면 순수한 아담이 되는 신화 같은 이야기는 지금, 여기의 찌들고 병든 문명 속에서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아름다운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J가 쏜 총에 곰이 쓰러지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는 늘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J가 쏜 총에 곰이 쓰러지지 않고, 북극성이 그가 가는 길의 좌표가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환상이 환멸로 바뀌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극도의 피로감 속에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인 환상과 신화를 꿈꾸었듯이 다시 그 꿈속에서 극도의 피로감이 만연한 현실과의 대면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J의 연구실 서재에 꽂힌 책들이 모두 기호 만들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한 번도 펼쳐지지 못한 채 무덤 속으로 가야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J 역시 ‘자신의 시집이 패잔병처럼 버려질지도 모른다’(「책들의 무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J의 불안은 단순히 J라는 한 개인의 실존적 불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 혹은 예술이 사회 속에서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하며, 그것이 사회 속에서 지니는 가치내지 효용성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해 어떤 답을 할지 그것은 전적으로 J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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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복 문학평론가
1966년 충북 제천에서 출생. 한양대학교대학원 졸업, 현대문학 박사. 1996년 《소설과 사상》으로 등단. 저서로는 『몸』, 『비만한 이성』, 『몸의 위기』 등이 있음. 2004년 제5회 젊은 평론가상, 고석규 비평 문학상, 2009년 제7회 애지문학상(평론)등 수상. 현재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첫댓글 여자들의 시가 왜 획일화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