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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푸른 시의 방
한강의 「거울 저편의 겨울 8」감상 / 장석남
거울 저편의 겨울 8
한 강 (1970~ )
흰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눈먼 남자 둘이서
앞뒤로 나란히
구두와 지팡이의 리듬에 맞춰 걷고 있었다
앞의 남자가
더듬더듬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의 남자는 앞의 남자의 등을
보호하듯 팔로 감싸며 따라 들어갔다
미소 띤 얼굴로
유리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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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1970년 광주 출생. 연세대 국문학과 졸업.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에 시, 1994년 〈서울신문〉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당선. 소설집『여수의 사랑』『그대의 차가운 손』외.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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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없다. 아무 말도 없을뿐더러 다른 어떤 소리도 지워진 채 구두와 지팡이의 또각거리는 소리만이 또렷하다. 다른 아무 움직임도 없다. 그저 백발이 된 맹인 남자 둘(그들은 자신의 머리가 백발인지 알지 못하리라!)의 우정 어린 한 장면만이 또렷하게 부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숙연히 바라봤을 또 한 사람의 눈빛을 상상한다. 아마도 겨울 하늘처럼, 유리창처럼 젖었으리라.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우정에 대하여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생각해본다.
우리가 보는, 보이는 것들이 과연 정말 세상인가? 이런 괴이한 질문이 온다.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도 있지 않은가. 가령 사랑 같은 것, 그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눈 감고 바라본다. 안 보이는 사랑. 안 보이는 사랑에 대하여 많이 생각해봐야 하는 날짜들이다.
장석남 (시인)
한강의「첫새벽」감상 / 황인숙
첫새벽
한강(1970∼ )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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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삼킨 듯 서늘해지는 시다. 한강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서 옮겼다. ‘피 흘리는 언어로 뜨겁고도 차가운’ 시들을 읽으면서 그의 참담한 시간을 엿보는 듯했다. 「희랍어 시간」에서 「소년이 온다」까지, 한강 씨는 점점 소설을 잘 쓴다고 감탄했는데, 예술은 삶의 고통을 담보하게 마련인가….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시 「그때」)
불행에 대한 체감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큰 불행을 겪으면 삶이 망가지기 쉽다. 우선 불행 자체가 고통이고, 자기가 불행한 사람에 속한다는 사실이 수치심과 열패감의 나락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불행은 삶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감각을 깊게 한다. 예민하고 명민하고 강한 사람인 시인은 그렇게 다시 떨치고 일어난다. 박명(薄命)을 박명(薄明)으로 만든다.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화자는 영하의 바람이 부는 새벽거리에 나선다. 감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왜? 그 오랜 밤의 절망과 슬픔을 정갈하게 갈무리하려고. 정수리까지 살얼음 지는 그 감각으로 단단한 걸음을 내딛는 첫새벽이다.
황인숙 (시인)
한강의 「파란 돌」 감상 / 곽재구
파란 돌
한 강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은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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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살아 있는데 죽어 있는 삶. 당신은 경험한 적이 없는가? 수십 년 한반도의 남쪽에서 생명을 부리고 살아온 이라면 이를 경험하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 독재정권의 하수인이거나 부동산 투기로 벌 돈을 다 번 이라면 모르겠다. 모순인 줄 알면서도 다운 계약서를 쓰고 위장 전입을 하고 남의 논문을 표절한 적이 있는 이라면 아픔은 더 클 것이다.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그 아픔을 전가하지 않으려는 치열한 반성과 의지에 따라 세상은 진보한다. 그러니 한때 죽어 있던 이는 다시 살아야 한다. 부끄러움을 이기고 꼭 살아서 녹슨 시간의 구리거울을 닦아 내야 한다.
곽재구 (시인)
한강의 「괜찮아」 감상 / 나민애
괜찮아
한 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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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부커상 수상자인 소설가 한강은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가 이름이 워낙 유명하여 소설가인 줄로만 알고 계신 분들에게 한강 시집의 일독을 추천한다. 그의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소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후회 없음을 보증하기 위해 한 편의 시를 소개한다. 아이를 키워본 모든 엄마와 아빠는 이 시를 읽는 순간 이해하고 말 것이다. 저 속에 바로 나와 아이의 시간이 담겨 있음을 말이다. 울지 않는 아이는 없다. 울어야 할 때 울어야 살 수 있다. 그런데 아이가 계속 울면 엄마 아빠는 통곡하고 싶다. ‘왜 그래’, ‘뭐가 더 필요해’, ‘나도 힘들어’ 이런 생각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괴로운 한때, 시 속의 엄마는 ‘왜 그래’ 대신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엄마는 뭔가 깨닫게 된다.
사실, 이 시는 아이와 부모의 이야기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 시는 ‘왜 그래’와 ‘괜찮아’의 이야기다. 나아가 모든 우리의 영원한 울음에 관한 시다. 이유 없이 우는 아이, 이유 있어 우는 아이는 마흔의 내 안에도 있고, 서른의 당신 안에도 있다. ‘왜 그래’라는 말로는 그 울음을 결코 그치게 할 수 없다. 눈물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므로 우선 닦아줘야 한다. ‘괜찮아’라는 말이 마음의 손수건이 되어 줄 것이다. 이 손수건을 들어 우리의 울음을 닦아주는 법을 이 시는 알려주고 있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유월 / 한강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
유채꽃 만발하던 뒤안길에는
빗발이 쓰러뜨린 풀잎, 풀잎들 몸
못 일으키고
얼얼한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
발바닥만이 아니었다
밤새 앓아 정든 胃위 장도 아니었다
무엇이 나를 걷게 했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
등을 떠밀고
맥없이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웠는가 깨무는
혀끝을 감싸주었는가
비틀거리는 것은 햇빛이 아니었다,
아름다워라 山川, 빛나는
물살도 아니었다
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
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
숙주이니, 병들 대로 병들면
떠나가려는가
발을 멈추면
휘청거려도 내 발 대지에 묶어줄
너,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
거기 피어 있었다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라
나는 귀를 막았지만
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로
막을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한강의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감상 / 반칠환, 박준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 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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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른 아침 당신은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죠. 그때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죠. 무엇인가 영원히 다가오고 있다고, 지금도 영원히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당신은 밥을 먹었죠. 아침 햇살에 밤새 캄캄했던 모든 빛깔들이 깨어났죠. 지나가는 것의 아쉬움과 다가오는 것의 설렘 사이, 아침의 눈부심과 저녁의 어둑함 사이, 인생.
반칠환 (시인)
이틀에 한 번 정도 밥을 합니다. 압력솥을 쓸 때도 있고 조금 수월하게 전기밥솥으로 밥을 지을 때도 있습니다. 언제 한번은 쌀을 씻다가 조금 먼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뜨물을 버릴 때마다 얼마간의 쌀알이 함께 쓸려나가는 것인데, 그러니 알이 작지 않고 커다란 쌀 품종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쌀알 한 톨이 참외만 하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밥 한 공기에 쌀 한 톨만 담으면 되니 참 편하겠다 하고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잘한 밥알을 씹을 때 입속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감각은 사라지겠지요. 밥을 한 주걱 푸고 다시 한 주걱을 더 담는 마음도, 실수로 흘린 밥알을 주워먹는 순간도 함께 사라지겠지요.
봄이 잘도 지나고 있습니다. 봄이 사라지고 있다 해도 될 만큼. 물론 이 봄에도 우리는 쌀을 씻어 밥을 짓고 저녁을 먹어야지요. 아침에는 아침을, 점심에는 점심을 먹고요. 영원할 때까지만 영원히.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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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 「서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저녁의 대화 / 한강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고 긴 그림자가 내 목줄기에 새겨진다.
아니,
나는 삼켜지지 않아.
이 운명의 체스판을
오래 끌 거야,
해가 지고 밤이 검고
검어져 다시
푸르러 질 때까지
혀를 적실 거야
냄새 맡을 거야
겹겹이 밤의 소리를 듣고
겹겹이 밤의 색채를 읽고
당신 귓속에 노래할 거야
나직이, 더없이,
더없이 부드럽게.
그 노래에 취한 당신이
내 무릎에 깃들어
잠들 때까지.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은 그림자는 검푸른 그림자
검푸른
그림자
한강, 「저녁의 대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몇 개의 이야기 6 / 한강
어디 있니. 너에게 말을 붙이려고 왔어. 내 목소리 들리니. 인생 말고 마음, 마음을 걸려고 왔어. 저녁이 내릴 때마다 겨울의 나무들은 희고 시린 뼈들을 꼿꼿이 펴는 것처럼 보여. 알고 있니. 모든 가혹함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가혹해.
한강, 「몇 개의 이야기 6」,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거울 저편의 겨울 2 / 한강
새벽에
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
어떤 꿈은 양심처럼
무슨 숙제처럼
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빛을
던진다면
빛은
공 같은 걸까
어디로 팔을 뻗어
어떻게 던질까
얼마나 멀게, 또는 가깝게
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
때로
두 손으로 간산히 그러쥐어 모은
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따뜻했는지도 모르지만
차갑거나
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거나
하얗게 증발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한다
한강, 「거울 저편의 겨울 2」,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새벽에 들은 노래 / 한강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저녁의 소묘 / 한강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평화도,
오랜 지옥도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히도록
외등은 희고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도록
그의 눈을 적신 것은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
한강, 「저녁의 소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서울의 겨울 12 / 한강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한강, 「서울의 겨울 12」,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여름날은 간다 / 한강
검은 옷의 친구를 일별하고 발인 전에 돌아오는 아침 차창 밖으로 늦여름의 나무들 햇빛 속에 서 있었다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랬지 우린 너무 짧게 만났지 우우우 몸을 떨어 울었다 해도 틈이 없었지 새어들 숨구멍 없었지 소리 죽여 두 손 내밀었다 해도 그 손 향해 문득 놀라 돌아봤다 해도
한강, 「여름날은 간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효에게. 200. 겨울 / 한강
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
겁먹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
밀려오길래
우리 몸을 지나 계속
차오르기만 할 줄 알았나 보다
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
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
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뒤로 숨겠지
마치 내가
그 어떤 것,
바다로부터조차 널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기침이 깊어
먹은 것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며
엄마, 엄마를 부르던 것처럼
마치 나에게
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
하지만 곧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저 번쩍이는 거대한 흐름과
시간과
成長,
집요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
함께 품었던 시절의 은밀함을
처음부터 모래로 지은
이 몸에 새겨두는 일뿐인 걸
괜찮아
아직 바다는
오지 않으니까
우리를 쓸어 가기 전까지
우린 이렇게 나란히 서 있을 테니까
흰 돌과 조개껍데기를 더 주울 테니까
파도에 젖은 신발을 말릴 테니까
까끌거리는 모래를 털며
때로는
주저앉아 더러운 손으로
눈을 훔치기도 하며
한강, 「효에게. 200. 겨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피 흐르는 눈 2 / 한강
여덟 살이 된 아이에게
인디언 식으로 내 이름을 지어달라 했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아이가 지어준 내 이름이다
(제 이름은 반짝이는 숲이라 했다)
그후 깊은 밤이면 눈을 감을 때마다
눈꺼풀 밖으로
육각형의 눈이 내렸지만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피의 수면
펄펄 내리는 눈 속에
두 눈을 잠그고 누워 있었다
한강, 「피 흐르는 눈 2」,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심장이라는 사물 / 한강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ㄱ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한강, 「심장이라는 사물」,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새벽에 들은 노래 3 / 한강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3」,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