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강해 (1)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
왕하 1:1~8
I. 서론
오늘부터 열왕기하를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열왕기하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열왕기하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을 간략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열왕기하는 원래 열왕기상과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분량을 나눈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열왕기상하는 내용과 주제가 같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상하, 역대상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한 권의 책이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 왕들의 기록입니다. (영어 성경 제목은 Kings입니다.) 사무엘서는 사울왕과 다윗왕에 관한 기록입니다. 열왕기서는 솔로몬왕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유다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왕까지의 기록입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서가 다른 점은 열왕기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이 모두 기록이 되어 있음에 반하여, 역대기서는 남유다의 왕들을 위주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독자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서의 독자는 포로가 된 유대인 독자들이 대상이었고, 역대기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제도 다릅니다. 이 부분은 조금 후에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열왕기하는 단순한 이스라엘 왕들의 기록이 아닙니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 왕정의 최고조에서 시작합니다. 솔로몬이 다윗 왕을 계승하고, 오랫동안 고대하던 성전을 지어짐으로 그 절정에 달합니다. 하지만, 솔로몬 임기 말년부터 이스라엘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솔로몬 사후에,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열왕기하는 열왕기상보다 조금 더 어둡습니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부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왕하 17장에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왕하 25장 마지막장에서 남 유다가 멸망하고 맙니다.) 약 460년 동안(464년) 이어진 이스라엘 왕정시대가 끝이 난 것입니다. (BC 1050년 ~ BC 586년: 사울이 왕이 됨 ~ 남유다의 멸망)
열왕기서의 주제는 한 마디로, “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멸망할 수 밖에 없었는가?”입니다. 열왕기서의 독자들은 나라가 패망하여 외국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왜 나라를 잃고 외국 땅에서 포로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수도 없이 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주는 책이 바로 열왕기서입니다. 풀러신학교 John Goldingay(존 골딩게이)교수는 다음과 같이 열왕기서가 기록된 목적을 말했습니다. “포로기까지 이르는 역사를 열왕기가 살펴보고 있는 것은 왜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발생했는가를 설명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열왕기는 일종의 고백형식, 또는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찬양하는 행위’이다.”
II. 본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역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하시야는 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의 줄거리를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아하시야가 자신의 집, 즉 왕궁의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습니다. 치료를 해 보았지만, 상처가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아하시야가 사자를 블레셋 북쪽에 있는 에글론에 보내어 그곳 신인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을 지를 물어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자들이 길을 가던 도중, 엘리야를 만났는데, 엘리야가 사자들에게 왕의 죽음을 예언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을까요? 세 가지 질문으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첫째,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선용하고 있는가?
아하시야의 이전 삶을 생각해 볼 때,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이 든 것은 하나님께서 아하시야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신 기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하시야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왕상 22:51-53,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한 마디로, 아하시야는 “그의 아버지의 길, 그의 어머니의 길,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습니다”. (52절) 아합과 이세벨과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에서 대표적인 악한 왕과 왕비입니다. 아하시야가 이들의 길을 따른 것입니다.
1) 아하시야의 아버지는 아합이었습니다. 아합의 삶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왕상 16: 30-33,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아합의 대표적인 죄는 우상 숭배의 죄였습니다. 아하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합의 길로 행했다는 것은 그도 우상 숭배를 했다는 것입니다.
2) 여로보암의 죄는 열왕기서에서 반복해서 나옵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진 다음에,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왕이 된 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일만 행했습니다.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예배하도록 했습니다. 장막절을 7월 15에 8월 15일로 그 절기의 날짜를 바꾸었습니다. 레위인이 아닌 자를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불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아하시야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무시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아하시야의 생명을 그냥 거두어 가셔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이자 하나님께서 아하시야에게 주신 회개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통이나 환난을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이나 환난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일평생 하나님을 찾지 않을 정도로 평탄한 삶을 살다가 죽는 사람은 축복된 삶을 산 것이 아닙니다. 비록 고통과 환난을 당하더라도 이를 계기를 하나님께 나아올 수만 있다면, 이런 사람이 더 복된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하시야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고통과 환난을 허락하실까요? C. S. Lewis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하나님께서 아하시야에게 마지막 긍휼을 베풀어 주셨지만, 아하시야는 끝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 중에 고통이나 환난 가운데 계신 분이 계십니까? 이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하십니까?
2. 둘째, 나는 하나님을 누구로 생각하고 있는가?
6절, “그들이 말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엘리야가 한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죽음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고 계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천지에 속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지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모든 세계와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의 주인이시고, 창조주이시고, 운행자이십니다.
그런데, 아하시야는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고작 에그론의 잡신인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병이 나을 지를 물은 것입니다. “바알 세붑”이란 “파리의 신”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알”이 “주, 신, 왕”이라는 뜻이고, “세붑”이 “파리”입니다. 그러므로 “바알 세붑”은 “파리의 신”인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파리가 전염병을 가지고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파리의 신이 병과 죽음을 관장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시야는 “바알 세붑”에게 사자를 보내서 자신의 병이 나을 지를 물어보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3. 셋째, 나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서울 사랑의교회를 담임하셨던 고 옥한흠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사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해 사느냐입니다.” 아하시야는 “무엇”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내 병이 나을 것인가 낫지 못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말에는 “누구”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바알 세붑에게 물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여호와께 물어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관심이 더 있습니까? 무엇입니까 아니면 누구입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무엇을 위해 사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해 사느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하시야는 그의 나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이방 우상을 찾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찾지 않았는데, 어떻게 어려움을 당했다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을 위해 이사야 55장 말씀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사 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하나님은 악인도 불의한 자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고통이나 환난에 처해 있으십니까? 혹이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나 환난이 하나님께서 우리는 부르시는 목소리는 아닐까요? 지금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