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미 고인돌이란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 시대의 무덤을 말한다.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불리는 고인돌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과 영국과 스위스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의 유럽 지역, 중동지역, 북아프리카 지역, 인도 남부 지역, 자바,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동남아시아 지역 등 전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형태의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받침돌 위에 덮개돌이 있는 탁자모양을 띄고 있다.
고인돌은 한국의 경우 청동기시대에 조성되었으며, 일본의 경우 죠몽(繩文) 후기에서 야요이(彌生) 중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서유럽 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시대 초기까지 축조되었다. 계급분화가 시작된 청동기 시대에 주로 만들어진 고인돌은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돌화살촉이나 간검돌, 민무늬 토기, 청동 제품 등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많은 고인돌에서 부장품이 아예 출토되지 않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해 이차장(二次葬) 또는 세골장(洗骨葬 : 1차로 가매장하여 살을 썩혀 없애고 뼈만 추려 묻는 장례)용의 무덤일 가능성도 띄고 있다.
□ 기 능 고인돌이 왜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19세기 말 서양인 Allen, Hulbert, Underwood 등과 일본인들은 무덤으로 활용되었다는 분묘설과 제사를 모시던 곳이었다는 제단설을 제기하였었다. 이후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현재는 덮개돌의 형태와 하부구조, 입자와 군집내에서의 위치, 껴묻거리 등을 통해 무덤, 제단, 묘표석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무덤으로서의 기능 1961년 황북 황주 심촌리 긴동, 함북 김책 덕인리 고인돌 무덤방에서 사람뼈가 조사되었고, 1962년 국립중앙박물관은 3월9일~3월21일, 7월6일~7월13일까지 충북 제원군 황석리(현재 충북 제천군 청풍면 황석리) 고인돌에 대한 발굴을 실시하였다. 이 가운데 13호 유적에서 완전한 형태의 성인 남자뼈가 보고되면서 고인돌은 무덤이라는 것이 학계에 일반화되었다. 전남지방에서는 아직 사람뼈가 출토되지는 않았지만 고인돌 무덤방의 규모로 보아 당시의 장례방법을 추정할수 있는데, 무덤으로서 적당한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무덤방의 길이와 폭이 다양하여 바로퍼묻기, 굽혀묻기, 육탈 후 뼈만 묻기등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 제단으로서의 기능 학자들 사이에서 고인돌의 입자와 형태를 통해 무덤방이 없는 전형적인 남방식과, 입지조건?굄돌로 보이는 무덤방을 처음부터 이룰 수 없게 만든 북방식 고인돌을 제단 고인돌로 파악하였다. 이들은 제단의 성격을 띤 고인돌은 종교 또는 신앙 행사 장소이거나 여러 의식을 거행하였기 때문에 혈연 집단의 묘역과는 다른 세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째, 고인돌 묘역을 이룬 떼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1기만 독립적인 입지를 가진것 둘째, 거대한 괴석형 덮개돌에 대형 굄돌이 받치고 있어 겉으로 보기에도 웅장하여 다른 고인돌과 구별되는 규모와 형태 셋째, 계곡에서는 그 끝 부분에, 고인돌떼를 이룬 곳에서는 가장 지대가 높은 곳으로 주위를 관망할 수 있는 입지 등으로 요약된다. 이와같은 제단의 성격을 띤 고인돌들은 겉으로 웅장하게 보이는 괴석형 덮개돌에 대형 굄돌 4~6개가 괸 전형적인 남방식, ㅁ자형 무덤방을 지닌 북방식, 기둥형 굄돌을 한 판석형 덮개돌들이다. 이들은 집단의 제단이나 집회장소로 활용하기 적당한 입지를 가지 고 있는데, 계곡 끝 평지와 산기슭에 있는 경우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도 아울러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 묘표석으로서의 기능 묘표석으로서의 기능은 묘역을 상징하는 기념물 내지 묘역을 만든 집단의 권위와 힘을 드러내기 위한것, 또는 묘역을 표시하는 단순한 기능 등으로 보인다. 고인돌떼 안에 존재하는 유형은 다시 제단 고인돌과 같은 규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떼의 중앙이나 한쪽에 치우쳐 위치한 것과, 앞보다 작은 규모이거나 소형으로 그 자체는 무덤방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구분된다. 첫째 유형은 평여동 산본 유적처럼 고인돌떼의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것과 오림동에서처럼 고인돌떼 중앙에 있는 형태가 있다. 둘째 유형은 여러 무덤방이 있는 가운데 무덤방이 없는 고인돌이 놓여있는 경우가 있다.
고인돌을 축조할 때 가장 세심한 가운데 골라지고 만들어지는 것은 덮개돌이다. 덮개돌은 고인돌의 외형적인 모습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동시에 특별한 상징을 부여하기도해 그만큼 중요시되었다. 고인돌을 만들 때 덮개돌의 크기와 모양 그리고 재질 등이 가장 고려되었다. 덮개돌의 돌감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암질을 선택해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때문에 각 지역의 덮개돌의 재질을 살펴보면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요령 지역에서는 대부분이 화강암이고, 길림은 화강암을 비롯하여 각력암?사암이 많으며, 북한은 화강암?석회암?점판암?편마암 등 다양하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화강암이 주를 이루나 편마암?사암?규암 등의 여러 가지 석질이 사용되었다. 운반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덮개돌은 보통 고인돌의 축조 위치와 가까운 곳에서 채석되었다. 강화도 고려산에 위치한 부근리 고인돌은 화강 편마암의 일종인 흑운모 편마암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위치에서 3km 떨어진 샘말 뒷산 경사면에서 같은 석질의 암반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곳에는 채석하다 남은 듯한 돌들이 모여 있으며 근처의 어느 바위 하나에는 연질의 광맥을 따라 홈을 파다가 중지한 흔적도 있다. 이렇게 고인돌이 위치한 지역 근처에 대부분 채석장이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5km 이상 멀리 떨어진 높고 험한 산꼭대기에서 비슷한 모양과 석질의 판석형 바위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또한 경기도 연천 통현리 고인돌은 인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다공질의 현무암으로 축조되어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덮개돌의 크기와 모양은 이러한 덮개돌의 석질과 관련이 깊다. 후대에 단단하고 날카로운 절기가 도입되면서 단단한 화강암도 쉽게 덮개돌로 쓸 수 있었지만 그전에는 아무래도 연모가 쉬운 석질이 이용되었다. 이에 따라 덮개돌의 모양이나 크기 나아가서는 고인도의 형식도 결정되었을 것이다. 강화도의 고인돌은 흑운모 편마암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흑운모 편마암은 충격을 주면 평평한 판석으로 잘라지는 것들로 울퉁불퉁하게 물결모양의 판으로 절리된다. 그러나 강화도 고인돌의 덮개돌 모양을 살펴보면 평평한 판면 모양을 띄고 있어 나름대로 다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의 입지와 방향 설정은 청동기인들의 생활 영역과 관련이 깊다. 고인돌이 위치해 있는 곳은 강가 들판이나 구릉, 산기슭, 고갯마루 등으로 모두 당시 사람들의 활동 범위에 속하는 지역이다. 때문에 주변에서 쉽게 동시대 다른 유적들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 조사된 상황을 보면 평지나 구릉 지대에 고인돌이 있을 경우 대부분 근처에 물줄기가 있어 서로간의 관련성을 시사하여 주고 있다. 여러 개의 고인돌이 하천의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나열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발견되어 둘 사이의 관계가 더욱 주목받기도 했다. 평지에 고인돌이 분포한 지역을 구분하여 살펴보면 넓은 평야지대의 평지?하천을 낀 산악 지대의 협소한 계곡 평지?강변 퇴적 평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주로 산과 인접한 구릉 경사면 아래에 위치한 평지나 산기슭 아래의 평지에 대부분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고인돌 덮개돌을 구하기 쉽고 또 덮개돌 운반 등 축조에 따른 어려움을 덜기 위해서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고인돌이 평지에 위치한 경우 가까이에 하천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가 식수 및 농업용수를 얻기 용이한 곳에 산 자를 위한 집터를 만들고 그와 가까운 곳에 죽은 자를 위한 고인돌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하천 옆에 고인돌이 축조되었을 경우 덮개돌의 방향이나 군집배치 방향 또는 무덤방의 방향이 하천의 흐름과 나란하게 열을 지어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계곡 평지에 위치해 있는 나주 판촌리?마산리?광주 충효동?고흥 장수리?순천 대치리 고인돌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모두 계곡과 하천의 흐름 방향과 군집배치 방향이 일치하고 있다. 순천 대곡리?화순 절산리?보성 시천리 나군?곡성 공북리?보성 죽산리 다군 등은 강변 평지에 분포한 고인돌 유적으로 역시 강의 흐름과 일치하여 나열되어 있다. 남한강 옆 충적 대지 위에 자리한 제천 청풍면 황석리 고인돌은 무덤방의 방향이나 군집배치 방향 모두 강의 흐름과 일치하고 있어 주목을 받았다. 구릉상에 분포된 고인돌은 세장한(가늘고 길게 뻗어 내린) 구릉에 위치한 것과 평야 지대의 저평한 구릉에 위치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세장한 구릉에 보다 많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구릉에 위치한 고인돌의 군집배치를 보면 구릉 방향으로 열을 지어 나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릉의 방향과 직각으로 십자를 그리듯이 열을 지어 위치한 유적도 발견되지만 대부분 구릉의 방향과 일치한다. 화순 청랑리?보성 덕치리 신기?봉갑리 고수월?월산리 반월 고인돌 유지가 전자의 예이며, 강진 영복리?순천 신평리 금평?월산리 사비 고인돌군은 후자의 예이다. 고갯마루에 위치한 고인돌은 산마루에 있는 것과 구릉마루에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산마루는 비교적 높은 지형으로 경사가 심하며, 구릉마루는 반대로 경사가 낮다. 둘 다 당시 청동기인들의 교통로 역할을 했던 길목에 해당된다. 이는 고인돌 축조 집단이 자신의 활동 영역 가까이에 묘역을 조성하여 생활했음을 보여준다. 산기슭에 위치한 고인돌은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경사면 또는 산중턱과 산기슭에 형성된 대지상에 분포하고 있다. 산기슭에 위치한 고인돌 역시 하천이나 구릉에 축조된 고인돌과 마찬가지로 가까이 있는 지형 즉 산줄기과 나란히 열을 지어 군집배치가 되어 있다. 순천 오봉리?순천 우산리 ?여수 적량동 고인돌 유지에서는 30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산줄기 방향으로 3~4열을 지어 서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처럼 평지?구릉?산마루?산기슭 등 고인돌의 위치한 지형은 제 각각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고인돌의 재료가 되는 돌감을 구하기 쉽고 운반하기 알맞은 거리의 장소라는 것, 둘째 당시 사람들의 생활 영역권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장소라는 것, 조망이 좋거나 아늑하여 죽은 자가 안식하기 좋은 장소라는 것 등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또한 조사된 자료가 제한적이고 예외적인 경우가 많지만 고인돌이 열을 지어 서 있는 방향이나 무덤방 또는 덮개돌이 놓인 방향은 절대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연 지세인 산줄기나 물 흐름의 방향에 영향을 받아 놓여졌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을 축조하였던 집단은 어떤 절대적인 방위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주변 지세를 고려하여 방향을 잡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자연숭배사상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크게 무덤방 안에 넣어둔 부장용 유물과 무덤방 주변에서 발견되는 의례용 유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부장용 유물은 죽은 이가 소유했던 물건이거나 그를 위해 새로 만들어진 것을 주검과 함께 무덤방에 넣어준 유물로 대부분 형태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무덤방에 남겨진 이러한 부장용 유물은 무덤 주인의 성별이나 신분 및 주검의 방향들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부장용 유물은 기능에 따라 다시 무기류?토기류?장신구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부장된 무기류 가운데 가장 많이 출토되는 것은 간돌검과 간돌화살촉이다. 간돌검은 보통 무덤방에서 1점씩 발견되고, 돌화살촉은 여러 점씩 출토된다. 간돌검은 자루가 달린 자루식과 자루가 없는 슴베식이 있다. 자루식 간돌검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금강과 보성강, 낙동강 유역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슴베식 간돌검에 손잡이를 부착하면 자루식이 되는데 충남 부여 송국리 집자리에서 탄화된 자루가 슴베식과 함께 발견되었다. 간돌검은 죽은 이의 오른쪽과 왼쪽 엉덩이 부분, 다리쪽, 머리쪽, 가슴 위 등 여러 위치에 놓여졌으나 주로 오른쪽 엉덩이 부분에 위치되었다. 돌화살촉은 보통 3~5점이 주검의 배 부근에서 간돌검과 함께 발견된다. 특수 계층의 권력을 상징을 청동기는 소수의 지도자들만이 소유한 도구로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 하나이다. 비파형 동검 세형 동검 청동방울 청동 도끼 청동끌 등이 발견되었다. 요령식 동검으로도 알려진 비파형 동검은 금강 유역에서도 나타나지만 대부분 한반도 남해안 지역인 여수반도에서 많이 출토된다. 여수 반도에서 발견된 비파형 동검은 반파품이거나 재가공한 것이 많다. 무덤방에서 발견된 토기류는 붉은 간토기와 가지문 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북한에서는 표주박의 한쪽이 잘린 형태인 묵방리형 토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붉은 간토기는 표면에 산화철을 발라 광택이 나게 구운 토기이다. 붉은 색을 띄고 있어 홍도라고도 한다. 무덤에 부장될 때 죽은 이의 다리 쪽에 놓여진 것도 있지만 머리 쪽에 부장된 것이 많다. 이 토기는 남한강 유역, 금강, 보성강, 남해안 지역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가지문 토기는 어깨 부근에 흑색 가지문이 있는 토기로 남해안 지역의 고인돌 유지에서 출토되었다. 죽은 이룰 위해 부장된 장신구는 대부분 옥제품이 많다. 곱은곡과 벽옥제 대롱옥이 대표적인 옥장신구 이다. 곱은옥은 푸른 바탕에 흰 반점이 있는 천하석제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한쪽 머리에 조그마한 구멍이 있다. 대게 허리가 굽어져 있는 것이 많은데, 구멍이 있는 머리쪽이 좀 넓다. 충북 제원 황석리에서는 머리 쪽에서 출토되어 귀걸이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롱옥은 벽옥제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가운데 구멍이 관통되어 있어 줄로 연결해 목걸이처럼 쓸 수 있다. 1점만 출토된 곳도 있지만 수점에서 수집점이 목 부근이나 가슴부근에서 발견되었다. 의례용 유물은 무덤방이 아닌 그 주위나 묘역 시설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죽은 이를 애도하는 의미의 장송용과 제사와 관련된 제의용, 생활용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장송용 유물은 간돌검을 세 조각으로 쪼개어 포개 놓은 것이라든가 무덤방 옆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제의용 유물은 제의를 지낸 후 일부러 깨뜨려 주위에 뿌린 석기의 파편이 대부분이며, 생활용 유물은 고인돌 축조 시에 사용했던 공구류로 돌끌이나 돌자귀와 같은 것들이다. 의례용 유물들은 깨진 채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일부에서는 그 파편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어 제의 후 죽은 이에 대한 애도를 표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별히 처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부장품은 죽은 이에 대한 애도와 존경 등을 표시한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고인돌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무덤 주인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거나 청동기 시대의 내세관과 조영관을 반영하고 있어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부장품 가운데 죽은 이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것은 청동검이다. 청동검은 현세에서 자기를 보호하고 상대방을 제압하는데 쓰인 무기인 동시에 희소성이 높아 권력을 상징에 주는 징표이기도 했다. 때론 석검이 청동검과 함께 발견되거나 같은 위치에서 출토되기도 하는데 이는 서로간의 같은 기능 즉 상징적인 의미가 같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청동기인들의 내세관과 조영관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간돌검을 들 수 있다. 여수 오림동 고인돌 덮개돌에는 건돌검을 새겨 놓고 이를 향해 기원하는 인물상이 있다. 이 암각화는 죽은 이를 수호하는 의미의 그림이다. 또한 고인돌에 부장된 간돌검은 살았을 당시의 권위나 신분을 죽은 후에도 누리라는 염원에서 주검 곁이 넣어준 것이다. 이를 통해 청동기인들이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재생과 부활의 의미로 붉은 토기의 그 파편 조각을 부장하거나 붉은 흙은 무덤 주위에 뿌리기도 했다. 붉은 색은 피와 같은 색으로 부활의 의미를 가진다. 영원한 생명을 염원한 당시 신앙관을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