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칼빈의 믿음론, 기독교강요 제3권 3장 3(1559년 라틴어 최종판 완역, 문병호 옮김, PP.44-45)
3. 단지 불명확(不明確)하기만 한 믿음은 없으며 그것은 믿음이 아님
실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지(無知)인데, 지금 우리에게 불명확(不明確)한 것 대부분은 우리가 육체(肉體)의 무거운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현존(現存)에로 나아갈 미래의 어느 때까지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판단을 유예하고 마음을 다하여 교회와의 하나됨을 지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구실로 겸손(謙遜)을 가장(假裝)한 무지(無知)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새기고자 하는 것은 더없이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믿음은 교회(敎會)에 대한 경외(敬畏)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知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요 17:3).
우리는 스콜라주의자들 자신의 불명확성에 의해서 조장된 이런 미로(迷路)가 어떠한지를 지켜보고 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현혹되어, 무엇이든 교회라는 명목하에 규정되기만 하면, 심지어 극악한 오류일지라도, 그것을 마치 포고된 말씀이라도 되는 양 사려분별(思慮分別) 없이 취해 버린다.
이러한 무모한 편의성에 뒤따르는 긴박한 파멸이 마치 그린 듯이 바로 앞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콜라주의자들은 이를 무기로 삼아 자기들의 입장을 변명하고 있다.
그들은 어떠한 것도 분명히 믿지 않고 언제나 “교회의 믿음이 여차여차하다."라는 조건을 단다.
곧 그들은 오류 가운데 진리가, 어둠 가운데 빛이 무지 가운데 올바른 지식이 보유된다는 환상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 대한 더 이상의 논의를 괘념치 말자.
우리에게는 그저 독자가 이러한 것들과 우리의 것들을 비교해 보게끔 권고하는 것으로 족하다.
왜냐하면 진리의 명료함 그 자체로써, 충분히 숙련된 논박을 그들에게 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많은 무지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말하는 불명확한 믿음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교회의 권위와 판단에 동의하기만 한다면, 자기들의 무지 속에 갇혀 무감각하게 지내거나 심지어 그 무지를 자랑하거나 하는 것이 잘 믿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해(理解)가 믿음과 결합되어 있다는 성경(聖經) 도처(到處)의 가르침이 마치 그렇지 않기라도 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