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직손씨(一直孫氏) 안동시 일직면(一直面) 송리리(松里里) 마을
◎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造塔里)
안동의 일직손씨(一直孫氏)는 고려 후기의 명신 손홍량(孫洪亮, 1287∼1397)을 중시조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는 안동의 토착성씨 중 하나이다.
일직면 송리리에 있는 ‘손홍량유허비’에 의하면 시조 손응(孫凝)은 원래 성은 순(筍)이었는데, 고려 8대 현종(顯宗)의 이름과 음이 같다하여 손(孫)으로 사성(賜姓)되었으며 신라왕을 따라 일직현에 갔다가 일직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의 세계는 분명하지 않으며 후손들은 손홍량을 일직손씨의 중시조로 삼는다.
손홍량은 현재의 일직면 송리리에서 태어났다. 1309년 문과에 올라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을 거쳐 충정왕 때 벼슬이 판삼사사에 이르렀으며 정평(靖平)이란 시호를 받았다. 손홍량은 밀직사를 지낸 손득수(孫得壽)와 전공판서를 지낸 손득령(孫得齡) 두 아들이 있고, 흥해배씨(興海裵氏)의 안동 입향조 배전(裵詮)이 사위이다.
손득수의 아들 손영유(孫永裕)는 손홍량의 자손으로 조선왕조에서 첫 출사자로 한성판윤을 지냈다. 손영유의 아들 손관(孫寬)은 진성현감을 지냈는데 밀양 용평리로 이거하였다. 손관의 맏아들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는 일직면 송리리에서 나서 밀양 용평리에서 자랐다. 143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병조정랑을 거쳐 집현전학사로 한림원에 있었다. 외직으로 나가 봉산군수에 있다가 단종복위를 꾀하던 학사들이 순절하자 벼슬을 던지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손조서는 도학이 깊고 문장과 학문이 뛰어났으며 밀양의 서산서원(西山書院)과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현재 일직면 조탑리에 일직손씨 집성촌이 있으며, 또 일직면 송리리에는 손득수의 막내아들 손의유(孫義裕)의 후손 몇 집이 살고 있다.
관련유적으로는 일직면 송리리에 손홍량 유허비와 손홍량이 20세 때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고, 일직면 명진리 바랑골에 손홍량의 묘소와 재사인 직산재가 있다. 일직면 조탑리에 손홍량,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을 제향한 타양서원(陀陽書院)이 있다.
손흥량 유허비는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석비이다. 손홍량은 호는 죽석(竹石)이고,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시호는 정평(靖平)으로 일직손씨의 시조이다. 고려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1349년(충정왕 1) 추성보절좌리공신이 되고 판삼사사에 올랐으며,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왕에게서 ‘일직(一直)한 사람’이란 칭찬과 함께 궤장(机杖)과 초상(肖像)을 하사받았다.
1748년(영조 24) 안동 사림이 발기하여 고려 명신인 손홍량(1287∼1379)의 유허(遺墟)에 건립하였다. 손홍량 유허비는 일직면 송리1리 마을 어귀의 도로변에 인접한 마을회관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크기는 높이 2.3m이고, 너비 60㎝이다. 귀부(龜趺)로 된 좌대(座臺) 위에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를 얹은 구조이다. 비각은 단칸 기와집이다.
주변은 관리가 잘되어 비교적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으며, 시멘트 담을 설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유허비에서 약 450m 떨어진 곳에 보물 제57호인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이 있다.
비문(碑文)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조현명(趙顯命)이 짓고, 글씨는 영조 때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제액(題額)을 썼으며, 생원 권서(權紓)가 비문을 썼다.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고려 좌리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 직성군 시정평손공 홍량유허비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쓰다. 숭정(崇禎) 재갑자(再甲子) 9월 일 세우다. 공의 휘(諱)는 홍량(洪亮)이니 복주(福州) 타양현(陀陽縣) 사람이다. 복주는 지금의 안동부(安東府)이다. 본성은 순(荀)이요, 시조 간(幹)은 신라의 왕을 따라 일직군(一直郡)에 갔다가 일직 사람이 되었다. 그 후 고려 현종의 이름자와 음이 같다 하여 성을 손씨로 할 것을 나라에서 명하였다.
증조인 세경(世卿)은 상의직장이고, 조부 연(衍)은 전객령이며, 부는 방(滂)인데 합문지후로 금자광록대부 문하평리상호군에 추증되었고, 모는 안동조씨로 밀직전사(密直殿使) 상호군(上護軍) 송(松)의 따님이다. 충렬왕 정해년(1287)에 공이 일직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장대하면서 영리하였고 장성해서는 더욱 꿋꿋하면서 자상하여 세상을 경영할 청운의 뜻을 품었다.
충선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서 충숙왕·충혜왕·충목왕을 섬겼다. 충목왕 때 상공(相公)에 임명되어 충성을 다하여 정무를 처리함에 너그러움을 기본으로 했기에 대신의 체통을 지켰다. 충정왕 신묘년(1351)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영가(永嘉, 안동)에 돌아갔음은 산수의 낙을 따른 것이다. 그때의 연령이 60세를 넘으셨다. 공민왕 임인년(1362)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공민왕께서 복주에 피난을 가셨다. 이때에 공이 평상복으로 길가에 나가 알현하였더니 왕은 반갑게 가상히 여겼다.
갑진년(1364)에 공이 도성에 가서 국왕께 평난(平亂)을 하례드렸다. 왕께서 즐겁게 하례를 받으신 다음 사례로 공의 초상을 그려서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함께 내리시고 두 아들 득수(得壽)·득령(得齡)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대궐문을 나가게 하니 이 모두가 유례없는 특전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조정 백관들이 전송을 하였으며 특히 명망 높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초은(樵隱) 같은 분들은 공을 위하여 시를 지어 세상에 알렸다.
신우(辛禑·禑王) 5년 기미년(1379) 7월에 공이 돌아가시니 나이 93세였고, 관직은 추성보절 좌리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 상호군(推誠保節 佐理功臣 三重大匡 判三司事 上護軍)으로 직성군(直城君)에 봉했으며 시호를 정평(靖平)이라 받으셨다. 공은 높은 덕망과 거룩한 공훈을 세우고 육조에 걸쳐 중추가 되는 명신이요, 고령의 향수를 누리셨다.
본가에 소장된 문헌이 전하지 못하였고 동사(東史)에 기록된 사덕이 대략 이와 같았다. 공의 배위(配位)는 타양군부인(陀陽郡夫人) 양성이씨(陽城李氏)로 개성부윤 정(挺)의 따님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득수니 관이 밀직대언이고, 차남 득령은 관이 전서이다. 두 따님은 흥해군(興海君)인 배전(裴詮)과 통례문전사인 김오(金悟)에게 출가하였다. 내외 자손 중에 명현(名賢)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모두 다 기록할 수 없다.
공의 초상은 병란 중에 잃어버리고 공의 유지(遺址)만이 일직 송동(松洞)에 남아 있음을 알았다. 사림들이 공을 추모하는 마음이 무궁하도록 간절하여 비를 세워 기념하고자 한다. 아! 공이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간 지 12년 만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공이 세상을 떠나신 지 14년이 되던 해에 고려의 운명이 끝나게 되었다. 공이 재직하고 퇴직하는 것과 생존하고 별세하는 데 따라 국가의 안위가 좌우될 만큼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도다.
무릇 공의 연세가 퇴직할 만큼 고령이 되지 않은 때에 관직에서 물러났음은 혹시 나라 운이 기울어질 조짐을 먼저 아셨던가. 또한 오래 사심을 알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목은 이색 등 제현(諸賢)보다 먼저 일신(一身)을 감추어 명과 몸을 보전한 것일까?
『시전(詩傳)』에 말하기를 ‘슬기롭고 사리에 밝아서 그 신명(身命)을 보전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현명하고 착한 군자는 올바른 판단에 힘썼도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을 두고 말한 것이다.
수충갈성분무공신(輸忠竭誠奮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 풍원부원군 조현명이 글을 짓고, 생원 영가(永嘉) 권서가 쓰고, 두연씨(斗淵氏)가 동엽(東燁)으로 하여금 족후손(族後孫) 병두(炳斗)에게 유래를 쓰게 하고 이어서 음기(陰記)를 잇게 했다. 외손 진성(眞城) 이수걸(李秀杰)이 삼가 쓰다. 무자년 3월일 다시 세우다.”
(靖平公孫洪亮遺墟碑.<前面大字>高麗佐理功臣三重大匡判三司事直城君諡靖平孫公洪亮遺墟碑 左議政 徐命均 書 崇禎 再甲子 九月 日 立.<碑文> 公諱洪亮福州陀陽縣人福州今之安東府也本姓荀始祖幹奉新羅王次一直郡遂爲一直人後避高麗顯宗諱賜姓孫氏曾祖世卿尙衣直長同正祖衍典客令父滂閤門祗侯贈金紫光祿大夫門下評理上護軍母安東曺氏密直殿使上護軍松之女忠烈王丁亥公生于一直里第幼雋穎長益雄偉慨然有經世之志忠宣朝登第歷事忠肅忠惠至忠穆王時拜相公忠藎盡節爲政務寬大得大臣體忠定王辛卯致仕歸永嘉從山水之樂時年六十餘恭愍王壬寅紅巾賊亂作王奔福州公以野服迎於道王嘉之甲辰公入都賀平亂王喜手寫公眞屛几杖以賜命二子扶掖出端門皆異思也及歸傾朝出餞一時名碩如牧隱樵隱諸公爲詩文以長大之辛禑五年己未七月公卒年九十三官至推誠保節佐理功臣三重大匡判三司事上護軍直城君贈諡靖平公公以令德崇勳爲六朝元臣享大耋以終顧家藏文獻不傳其見於東史者大略如此也公配沱陽郡夫人陽城李氏開城尹挺之女生二男二女得壽密直代言得齡典書女適興海君裴詮通禮門殿使金悟內外子孫多名賢不可盡書也公之眞佚於兵火獨公遺址在一直松洞者尙可指認也士林想慕公無窮將樹石以表之嗚乎公告老歸十二年而有紅賊之變公沒十四年而麗運訖公之進退存沒關國家治亂興亡善可見矣抑公年未至而退若有以見於幾先者而又能以壽考先圃牧諸賢以沒身與名俱全詩云旣明且哲以保其身又曰愷悌君子神明所勞公之謂也 輸忠竭誠奮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豊原府院君趙顯命記 生員永嘉權紓書命刻之曰斗淵氏使東燁來責族後孫炳斗以識其由係之陰記 後外裔眞城李秀杰謹書 戊子 三月 日改立)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인보(引甫), 호는 면재(勉齋)·격재(格齋). 정평공(靖平公) 고조부는 손홍량(孫洪亮), 증조부는 좌대언(左代言)을 지낸 손득수(孫得壽), 할아버지는 한성판윤 손영유(孫永裕), 아버지는 장흥고사(長興庫使) 손관(孫寬),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로 김흡(金翕)의 딸, 처는 진주하씨(晉州河氏)로 광흥승(廣興丞) 하숙(河潚)의 딸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손윤하(孫胤河)는 광흥승(廣興丞)을 지냈고, 차남 손윤한(孫胤漢)은 장흥부사를 지냈다. 딸 둘은 부사직을 지낸 류수원(柳秀源)과 고맹원(高猛元)에게 각각 시집갔다.
[활동사항]
손조서는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다. 1432년(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 해 예문관검열을 거쳐 집현전학사에 보직되었다. 1451년(문종 1) 병조정랑을 거쳐 봉산군사(鳳山郡事)를 지냈다. 1456년(세조 2)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이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둔하였으며,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손조서는 평소 사물잠(四勿箴)을 일상생활에 가장 중요한 지침으로 여겨 외고 다녔으며 몸소 실천하려 하였다. 또 손에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들고 다니면서 밤낮으로 연구하여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사육신의 한사람인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과 도의지교를 맺어 경학(經學)을 강론하였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등의 제자를 두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격재집(格齋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