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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하는 마음
야고보서 4:11-12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투고 싸우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본성은 아담 안에서 물려받은 죄악 된 본성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약 220개국의 사람들 중에 가장 잘 다투고 가장 잘 싸우는 민족이 우리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말에는 다른 민족에게 없는 화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 잘 다투고 더 잘 싸우며 삽니다. 그래서 이 화병은 이제 세계 모든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병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비방하는 마음도 다툼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을 보면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방하는 일이 아주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각종 단체나 국가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주관적인 감정과 판단을 개입시켜서 상대방을 비방하고 비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시람들은 왜 이렇게 상대방을 비방하고 비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화가 이렇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안에는 화와 분노가 가득 차 있습니다. 이 화와 분노가 기회만 오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성경은 말세의 징조 중 하나라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3:2-4절 말씀을 보면 종말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산다고 합니다.
지나친 자기 사랑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내용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사실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그것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비방하는 재료로 삼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현실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이런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정치인들에게는 일상이 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비방하지 말라
오늘은 이 비방하는 문제를 살펴봅니다.
야고보서 4:11-12절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 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비방이란 무엇입니까?
‘비방’은 ‘적대감을 가지고 말하다.’ ‘나쁘게 말하다.’ ‘중상모략하다.’ ‘조롱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더하여 ‘거짓말로 상대방의 인격을 깎아내리거나 그 사람의 인격을 매도하는 행위가 바로 비방’입니다.
비방은 주로 말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듣기보다 말하기를 더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하는 말이 진실일 수도 있고 또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듣으며 살아가는 그 많은 말들이 진실일 수도 있고 또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우리가 들은 말이 진실이든지 거짓이든지 관계없이 상대방의 인격을 깎아내리고,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려는 말 즉 비방의 말이라면 우리는 그런 말은 듣는 그것으로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들은 말이 나에게 유익이 된다고 그대로 전달하거나 재생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듣고 전달하고 있는 그런 말들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을 모독하는 말이 되고, 또 그 사람의 인격에 심한 상해를 입힐 수 있는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SNS 상에서 이루어지는 댓글 문화가 아주 발달 되어 있습니다.
악성 댓글이 사람들에게 주는 상처는 대답합니다. 그래서 악성 댓글을 언어폭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언어폭력이란?
언어를 도구로 삼아서 상대방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런 예를 보더라도 상대방의 인격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비난의 말은 삼가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난하는 말과 비난하는 습관을 우리에게서 잘라내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마음이 여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쉽게 그 마음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말을 통해 받게 되는 상처가 그 여린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기도 하는 것입니다.
좁은 길을 가는 성도들
성도들은 좁은 길 가는 사람들입니다.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면 그 언어생활을 절제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논평을 요구받게 될 때 될 수 있으면 상대방을 위로하는 말, 상대방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 해주는 말을 해 주려고 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그 약점을 들추어내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상대방에게 도움이 안 된다면 침묵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 하는 말을 가지고 사람들을 구분해 보면 세 부류로 나눠진다고 합니다.
첫째, 사상을 말하고 진리에 대해 말하며 사는 위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 세상사를 이야기하며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들에 대해 즐겨 이야기하며 사는 협소한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통계에 의하면 사람들이 하며 사는 말의 약 90%가 다른 사람들에 관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한 말은 잘하지 않고 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말을 하며 산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며 살아가는 이 나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시편의 말씀을 보면 1:1절에서는 세 부류의 복 없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복 없는 사람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악인의 꾀를 따르는 사람, 죄인의 길에 서는 사람,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4: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제를 비방하고 형제를 판단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바로 ‘악인의 꾀를 따르는 사람, ’죄인의 길에 서는 사람,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복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산다고 합니까?
‘형제를 비방하고 형제를 판단하는’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사람들과는 함께 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판’이라고 번역 되어 있는 단어 ‘크리노’는 사실 ‘비판’이라기보다는 ‘판단’이라고 번역되어야 할 단어입니다. 이렇게 다시 번역해 보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가 삶 속에 바르게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판단력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은 바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또 바른 판단력이 없으면 유혹을 분별해 내고 유혹을 이겨 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중요한 판단을 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우리가 이것은 옳은 행동이고 저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전혀 판단하지 말고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분별력과 판단력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뱀과 같은 지혜를 가지고 판단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하신 말씀이 바로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뱀과 같은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비둘기와 같은 순결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은 우리가 올바르게 판단하고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지혜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비방 하지 않는 순결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어지는 마태복음 7:3-5절 말씀을 보면 자기 속에 들보가 있으면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 눈에는 들보가 있는데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판단을 하려고 하면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빼내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상대방을 바르게 보고 판단하되 그것도 상대방을 정죄하고 비방하기 위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주려고 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판단하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하여 설사 상대방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옳다고 할지라도, 너희는 그것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심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요. 이 세상 사람들을 판단하시고 심판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 모든 일에 대한 판단은 결국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부득이하게 판단하려고 하면 먼저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너희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먼저 판단한 후에 다른 사람들을 판단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이렇게 한 후에 판단을 해야 죄가 제거된 상태에서 하는 판단이 되고, 그 판단은 상대방을 살리는 판단이 되고, 그 판단을 통해 상대방에게 생명을 더해 주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율법적인 판단의 칼로, 옳고 그름이라는 양날을 가진 판단의 칼로 판단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가 전에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였던 그 말이 자기를 정죄하는 말이 되어 되돌아 오기도 하고, 사람들로부터 내로남불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죄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
자기 죄를 제거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며 사는 판단은 자기는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죽이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들보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방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 즉 현자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함구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침묵이 금이라는 말까지 전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쉽게 판단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은 정치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판단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경솔한 사람, 교만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자기 지식과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도 합니다.
이 사람들이 하며 사는 판단과 비방은 흉악한 살상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은 물로 다른 사람들까지 지옥으로 끌고 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7:2절입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판단하였던 그 말이 도리어 자신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사람들에게 장차 하나님으로부터 공의의 판단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공의로 판단하시는 것입니까?
야고보서 4:11절 말씀을 보면, 이런 사람들은 그 판단하는 행위를 통해,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 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이 말씀은 형제를 판단하는 것과 율법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형제를 판단하는 것과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 같다는 것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뿌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실 영적인 소경입니다. 또 자기 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영적인 소경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소경이 되면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곡해하고 외곡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잘못 해석하고 잘못 이해한 그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들이 바로 성경을 비방하고 성경을 판단하는 것과 똑같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모이면 가끔 성경 말씀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 날 특히 민감한 부분이 구원론과 종말론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와 맞물려서 부활, 휴거, 천국과 지옥, 낙원과 음부, 짐승의 표, 두 증인, 이긴자, 예비처, 백보좌 심판, 작은 책과 같은 민감한 내용들이 토론되기도 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자기 견해와 생각을 밝히는 것 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런 견해들을 처음 접하게 되는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한 더 넓은 이해와 관점을 가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재는 이렇게 되기보다는 자기 이해와 관점을 강요하고 주장하는 일을 한다는 이것은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하면 성경 말씀을 자기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성경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성경을 비방하고 성경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 됩니다.
야고보서 4:11절은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떤 사람이 된다고 합니까?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 자가 아니요 율법의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아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견해가 다른 사람들
어떤 신학적인 견해들은 교회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등과 같은 내용들은 거의 일치를 이루어왔습니다. 그런데 종말론은 다릅니다. 역사적 전천년, 세대주의 전천년, 무천년, 후천년 등 다양한 견해가 있어왔고 또 교회 안에서도 용납되어 왔습니다. 이 서로 다른 견해에 따라 교회 안에서는 계시록 이해, 휴거, 부활, 메시야 왕국, 짐승표 등등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상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교단은 역사적 전천년에서 무천년으로 신학기조가 거의 바뀌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무천년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 신학적인 관점에 따라 성도들의 견해와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와 이해가 다르다고 그 사람을 비방하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입법자와 재판장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확고한 신앙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되,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가진 견해를 명확하게 알려주고 설명해 주되,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비방하기 보다는 침묵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두 세 사람 모이면 악한 마귀는 언제나 타인을 비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줍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건전한 대화를 하다가도 그 대화가 길어지면 꼭 나중에는 타인을 판단하고 비방하게 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납니다.
시편 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들이 되려고 하면 이런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앉아 있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곳에서 빠져 나오라고 합니다. 또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 때에는 이런 사람들과는 그 관계를 끊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내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악을 제거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을 보면 너무 가볍습니다. 너무 쉽게 판단하고,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리고, 너무 쉽게 다른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심지어 진실이 무엇인지 알라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너무 쉽게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가벼운 사람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마음 안에 이 세상 무엇보다 무겁고 신중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무거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이 무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해력과 판단력이 무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행동이 무거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성향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아담 안에서 물려받은 이런 죄의 성향들을 가진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직시하고 죄를 제거해 나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제거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경험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함으로 하나님을 그 마음 안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그 마음 안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무거우심과 같이 무거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무거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성화를 이뤄나가야 하며, 결국 하나님의 거룩함에 함께 참여하는 영화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 길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능력, 은사, 이룬 역사와 업적을 중요시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사람으로 우리가 회복되어 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이르길 원하십니다.
이렇게 그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숙해 가는 삶이 우리 삶의 최고 최대의 목적이 되고 바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삶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 한 주간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함께 가는 길은 그 어떤 길이든지 아름답습니다.
마음을 함께 하고 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부부보다 더 아름다운 부부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이런 부부가 되려면 자기주장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 목표를 향해 자기를 부인하고 그 남편과 아내와 함께 동행 하고 동역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분관계는 이런 부부관계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부들이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으나 그 마음이 따로따로인 부부가 많이 있습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면 바른 삶의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에녹의 믿음의 삶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365세를 살았더라.’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과 일치된 마음과 일치된 뜻과 일치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 마음을 맞추어 살아가기가 힘이 든데 하나님과 그 마음을 맞추어 동행하는 삶을 산 에녹은 정말 위대한 신앙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위대한 삶을 살았던 에녹과 같이 우리 교회는 참 믿음과 참 마음으로 함께 협력하고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정생활이 참 믿음과 참 마음으로 함께 협력하고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삶이 우리가 하나님이 다시 우리 앞에 펼쳐주시고 있는 이 한 주간 동안 살아가는 신앙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