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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주변탐방
일 시 : 2013.5.2 (목) 10:30 - 17:30
모임장소 : 소요산 역
탐방코스 : 소요산역 - 백마고지역(통근열차) - 임꺽정동상 - 점심식사 - 고석정 -
엄태웅길 - 한탄강 상류 - 직탕폭포 - 도피안사 - 노동당사 - 백마고지역-
의정부(저녁식사) - 귀가
참 석 : 공경섭, 김대근, 김동소, 김상협, 김중선, 장순기, 조광규, 이상열, (8명)
소요산역
동두천시 소요산역 승용차 전용 주차장 완공
경기도 동두천시는 "총 공사비 2억4000만원을 투입해 지난 2010년 11월 착공한 소요산역 앞 승용차 전용주차장이 완공됐다"고 한다 시 관계자는 "주차장이 완공돼 불법 주정차로 인한 민원은 완전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며 "소요산역 주차장은 승용차 전용 주차장으로 소요산역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시는 소요산역 앞 주차장 완공과 더불어 광장 부지내 일부토지가 소유권 분쟁으로 사업이 지연되고 있으나 법적인 문제가 종결되면 사업예산을 확보한다고 한다
포격으로 인해 산은 그 형태가 변해버렸다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 사상 가장 치열하게 진지전이 전개되었던 시기인 1952년 10월에,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395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10일 동안에 걸쳐 치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 제38군 소속 3개 사단의 연속적인 공격을 받아 이를 물리치는 동안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제1포병단의 화력지원과 유엔 공군의 항공근접지원하에 완강히 대항하여 중공군 10,000여명을 격멸하고 백마고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었으나 대규모의 전면공세를 실시할 태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휴전 회담장에서는 서로 유리한 휴전조건을 쟁취하려는 협상이 진행 중에 있었기 때문에 쌍방은 그 결과를 주시하면서 군사력 증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 전 상황 개전 초기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 압록강까지 도달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여 2차례나 38선을 오르내린 끝에 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는 현재의 휴전선 일대에서 쌍방간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당시는 전쟁 지속 능력이 이미 한계에 달한 북조선 측의 요청에 의해 휴전 협상이 계속되었던 시기로 현 접촉선이 군사 분계선이 될 것에 대비, 전투는 더욱 격렬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2년 9월 이후에는 수도고지, 지형능선 , 불모고지 일대에서 쌍방 손실을 고려하지 않은 혈전이 계속되었는데, 10월에 들어서자마자 중공군은 백마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모택동으로부터 "만세군" 칭호까지 받은 중공군 정예 제38군 3개 사단(112 · 113 · 114사단)을 동원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전투의식이 박약한 노약자와 비당원을 제외한 정예 병력을 동원하여 백마고지와 유사한 지형에서 3개월간 예행연습을 실시했으며, 공격 전 고지 동쪽의 봉래호를 폭파하고 역곡천을 범람시켜 국군을 고립 도살을 획책했다. 또한 이번 작전을 통해 철원을 중심으로 한 전략적 요지 확보, 수도권 지역 대공세를 위한 공격 발판 구축, 중부전선 일대 국군 주보급로 차단을 기도(企圖)하였다.
9사단은 당시 적의 기도를 백마고지를 탈취하여 철원평야를 제압하는 동시에 차기대공세를 위한 발판을 구축하며 철원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지역을 통제함으로써 중부전선에서 전략적 이점을 확보하고 아군을 크게 위협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10월 3일에 중공군 군관 1명이 귀순하여 "중공군 제114사단이 10. 4∼6일 사이에 백마고지에 대한 공격을 할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에 사단은 백마고지 방어병력을 2개 대대규모로 증강하고 사단예비로 하여금 즉각 역습에 임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정찰활동을 강화하였다. 봉래호 뚝을 파괴하여 역곡천을 범람시키며 중공군 제38군 제114사단이 19:15 제30연대가 방어하고 있는 백마고지 일대로 공격해 들어왔다. 적은 제340연대가 1개 대대를 고지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투입하였다. 그러나 연대는 이 날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였다.
중공군은 이날 밤 백마고지 공격에 앞서 좌인접 미 제2사단 방어지역이며 백마고지 서남방 3㎞ 지점의 화살머리고지(281)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는 백마고지에 대한 양동작전으로 판단되었으며, 이 고지에 배치된 프랑스대대는 지원화력의 엄호하에 근접전투를 벌여가며 적의 파상공격을 방어하였다. 계속 압력을 가하였으며, 국군은 제30연대가 일시 고지 정상으로부터 철수하였으나 약 2시간후 사단으로부터 탈환명령을 받은 제28연대가 역습을 감행함으로써 이를 다시 탈환하였다. 연대는 탈환 즉시 적의 반격에 대비하여 진지를 강화하는 작업에 주력하였다.
10월 8일 새벽 고지일대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자 적은 제5차 공세를 재개하였다. 이날 적은 전날까지의 공격이 여의치 못하자 중공군 제38군 예비인 제112사단 제334연대를 투입하였던 것이다. 제대로 받지 못한 가운데 08:10 주봉을 적에게 피탈당하고 말았다. 사단은 17:00 제28연대 제3대대를 투입 또다시 반격을 개시하였다. 대대는 적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장장 8시간여의 격전을 거듭한 끝에 23:05 마침내 주봉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사단은 적포로의 진술을 기초로 적의 공격이 당분간 계속되리라 판단하고, 제29연대를 백마고지에 운용할 복안으로 사단예비로 전환하였다.
9일밤 자정이 지나면서 중공군은 또다시 집요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근 3시간에 걸친 파상공격으로 밀어닥친 적은 새벽 03:00 고지주봉과 그 우측능선의 일부를 다시 수중에 넣는데 성공하였다. 이 날밤 제29연대로 하여금 역습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연대는 적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자정 무렵 고지 주봉을 점령하고 적을 격퇴하였다. 개미떼처럼 기어오르고 있었으며 04:00무렵부터 피아간에는 수류탄 투척전과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처절한 전투가 전개되었으나 국군 제29연대 제1대대가 주봉에서 9부능선으로 철수한 후 제2대대의 증원을 받은 후 역습을 감행, 이날 06:30 다시 정상을 탈환하였다. 12일 아침 반격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공격함으로써 이를 재탈환하였으며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피탈되었다. 이에 제28연대가 다시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 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하였다.
1994년 백마고지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거의 궤멸상태에 이른 중공군 제38군은 예하 사단을 축차로 철수시켜 전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편 화살머리 고지의 프랑스대대도 많은 인명손실을 입었지만 끝까지 진지를 확보하였고, 이로써 좌익으로부터 백마고지에 미치는 적의 위협을 차단하여 제9사단의 백마고지 방어에 기여하였다.
임꺽정(任巨正) 백정의 핏줄로 태어나 병해대사에게 글을 배우지만 글보다는 무예에 늘 관심이 있다. 역발산 기개세(力拔山氣蓋世)를 지닌 인물로 늘 호탕하지만 머리보다는 몸을 쓰는데 더 능하다는 면에서 항우와 많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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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정은 한탄강변에 있는 정자이다.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이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려 승려 무외(無畏)의 고석정기와 김량경의 시 등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적 임꺽정이 고석정 앞에 솟아 있는 고석바위의 큰 구멍 안에 숨어 지냈다고 하는데, 이 바위에는 성지, 도력이 새겨져 있고 구멍 안의 벽면에는 유명대, 본읍금만이라고 새겨 있다. 현재 2층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져 1971년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것이다. 순담은 고석정에서 2㎞ 떨어진 곳에 있는 계곡을 일컬으며, 조선 영조(재위1724∼1776) 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1691∼1767)가 요양하던 곳이다. 이름의 유래는, 순조(재위 1800∼1834)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1743∼1806)가 20평 정도의 연못을 파고 물풀인 순채를 옮겨다 심고서 ‘순담’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기묘한 바위와 깎아 내린 벼랑 등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계곡에서는 보기 드문 하얀 모래밭이 천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강원도 철원은 30만년전에 폭발하여 흘러넘친 용암대지로 형성된 도시입니다. 30만년이라는장구한 세월이지만 한반도 대부분의 대지가 2억5천만년에서 3억년 이상된 대지인데 그에 비하면 철원땅은 애송이 취급도 해주기 어려운 아주 젖 비린내가 팍팍너는 젊디 젊은땅입니다. 그렇게 젊은 땅 이다보니 시뻘건 용암이 식으면서 형성된 기둥모양의 주상절리의 날카로운 각이 아지 채 풍화되지 않아서 날카롭게 살아있 습니다. 그런 생생한 현장을 볼 수 있는 곳이 한탄강을 중심으로한 양쪽에 깍아지른 절벽인데 철원군에서 한탄강을 따라 자전거 도로를 만 들었습니다. 이 자전거 도로를 따라가다보면 사계절 각각 다른 아름다운 한탄강의 경치와 특별한 풍경을 만너실 수 있습니다. 특히 올 해는 철원군에서 철원군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배우 엄태웅을 철원군 홍보대사로 임명하고 엄태웅 로드를 일부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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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사적기 寺蹟記〉에 의하면 당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조성하여 철원에 있는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기 위해 암소 등에 싣고 운반하는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 사방으로 찾아보니 현재의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어 865년(신라 경문왕 5)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절의 이름은 철조불상이 피안(彼岸 : 열반의 세계)에 이르렀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1898년 불탔으나 당시의 주지 월운(月運)이 신도 강대용의 도움을 받아 중건했고, 1914년에는 주지 김의권에 의해서 신축·개수되었으나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의 철조불상과 대좌 및 석탑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뒤 1959년 이명재 소장이 15사단 장병과 함께 재건했으며, 현재는 군에서 파견된 군승(軍僧)과 주지 김상기가 관리하고 있지만 휴전선 북쪽 민통선 북방에 위치하고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법당과 요사채,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철원 도피안사 3층석탑(보물 제223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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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년) 도선국사가
높이 91cm의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을 제조 철원읍 율리리에 소재한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하여
여러 승려들과 같이 가다가 잠시 쉬고 있을 때 이 불상이 갑자기 없어져
그 부근 일대를 찾다가 현위치에 그 불상이 안좌한 자세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이 불상을 모셨다 한다.
당시 철조불상이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에 이르러렀다 하여 절이름이 도피안사로 명명되었으
며 절내에는 도선국사가 제조한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사나불좌상과
보물 제 223호로 지정된 높이 4.1m의 화강암 재료로 된 3층 석탑이 보존되어 있다.
전에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제한되었으나,
현재는 누구나 자유로이 출입
할 수 있다.
철의 삼각전망대를 지나 구철원으로 오다보면 앙상한 뼈대만 남은 건물들을 볼 수 있어요. 주민에게 대출을 해 주던 제 2금융조합, 농산물의 품질을 검사하던 농산물검사소, 일제시대 때 역곡천의 얼음을 저장해 놓던 얼음창고 등이 있는데요. 이 건물들을 다 지나면 노동당사가 나옵니다. 구철원에 남아 있는 건물들은 모두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준답니다.
[통일을 꿈꾸며...]
시멘트 건물의 우중충한 퇴색 때문일까? 쳐다만 봐도 흉가처럼 으스스해 뒷걸음쳐집니다. 해방 직후에 세워 한국전쟁 때까지 사용한 조선 노동당 철원군 당사였어요. 조선 노동당은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으로 1개 마을 당 쌀 200가마씩을 거뒀다고 하는데요. 분단 탓입니다. 그 처참한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을 노동당사는 지금도 흉물스럽답니다. 검게 그을린 3층 건물의 앞뒤엔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고 계단을 타고 올라가 보면 안의 벽조차 허물어져 있어요.
[화려한 날은 가고..]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철원에는 2만여 명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 시가지가 하루아침에 초토화되어 송장처럼 누워있는 것이죠. 시가지뿐만이 아닙니다. 백마고지에서는 30만발이나 되는 포탄이 작렬했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삽슬봉은 산 높이가 3m나 깍여 나갔다고 합니다. 삽슬봉은 미군 조종사들이 공중에서 보니 폭격 맞는 사이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내렸다고 해서 아이스크림 고지로 이름이 바뀌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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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의 역사가 숨쉬는 전적지를 잘 둘러보셨군요.ㅇ
의미있는 여행이 되어서 참으로 멋져보입니다. 모두들 짜
친구!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그 역사의 현장을 다시 되돌아 볼 수 있도록 생생하게 안내 해 준 친구의 노고에 감읍 그리고 감사를 드리네.
철도 중단점, 백마고지, 철원 노동당사,신흥사의 말사인 到彼岸寺, 백마고지 전승비등 처절했던 우리나라 현대사의 모든것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를 올려주시고 안내해 주셔서 비록 탐방은 함께는 못했지만 친구가 올려준 자료를 통해서 .....
친구! 감사 또 감사 드리네.....
사진 잘 보았네 감기가 너무 심해서 ..안타까웠네 6월에는 꼭 참석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