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단지 벚꽃 번개할 때 막거리를 마셨던 먹거리장터가 이 글에 등장하는 수영장을 메꾼 주차장입니다. 2014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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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정치는 고도의 일반화이고, 문학은 고도의 특수화야. …… 네가 정치가라면 뉘앙스를 허용할 수 있겠어? 네가 예술가라면 뉘앙스는 너의 과제야. 너의 과제는 단순화가 아니라고. 네가 아무리 단순하게 헤밍웨이 풍으로 쓰겠다고 작정해도 너의 과제는 뉘앙스를 전하는 거다. 복잡하게 얽힌 걸 명료하게 하고 모순을 수용하는 것. 모순을 지우고 모순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모순 안에 놓여 있는 고통받는 인간을 보는 것이야. 혼돈을 허용하고 그걸 받아들이는 것, 반드시 그걸 받아들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선전이 돼 버려.” ―필립 로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에서
그리하여 나는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정치가가, 정치적으로 속물인 우리가, 내가, 뉘앙스를 허용하기를. 뉘앙스를 자신의 과제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단순화 하려는 욕망의 불을 끔으로써 모순을 생산해내지 않기를. 고통받는 대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 가증스런 선전일랑 이젠 제발 그만 두기를.
<에피소드 1>
지하철을 탔다. 전동차 안이 어수선하다. 어디서부터 탑승했는지 모르겠는 어린여치 한 마리가 원인이다. 풀잎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만 무성한 데 저도 놀랐는지 여치는 벽에서 맞은 편 유리로, 한 사람의 무릎에서 다른 사람의 배낭으로, 다시 벽으로, 날아가 앉는다. 그래도 거기가 가장 풀밭에 가깝다고 생각한 걸까. 가녀린 날갯소리는 뭉뚱그려진 모든 소음들보다 주파수가 높다. 바퀴벌레라도 되는 듯 여치가 날아가는 방향에서 크고 작은 비명을 질러대고 머리를 감싸 쥐거나 총알이라도 피하려는 듯 머리를 좌우로 움직였던 사람들은 조금 머쓱해진다. 다만 아리따운 제 여자가 실신하려는 액션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자 여자를 구하기 위해 남자는 망설이지 않고 엄지와 중지를 팽팽하게 말아쥔 채 벽에 붙어 숨을 고르고 있는 여치에게 접근한다. 단숨에 튕겨버릴 기세다.
<에피소드 2>
아파트 단지 내에 어린이를 위한 옥외수영장이 있었다. 아직은 꿈이 있던 아득한 시대의 이야기다. 여름방학과 동시에 개장해서 광복절을 전후로 문을 닫았는데, 그 동안에는 동네 꼬마들이 오글오글했다. 88수영장. 올림픽의 주 무대였던 잠실 지역이어서 실내수영장도 몇 군데 있었지만, 한강고수부지의 수영장이 마련되기 전이었고, 입장료도 싸고 접근성이 좋아 인근지역 아이들까지 자주 이용하곤 하였다. 물은 얕고 전망대는 높았으며, 아이들은 어렸고 안전요원은 젊었다. 아이들이 새까맣게 그을려 흰 이를 반짝이며 재잘재잘 지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웠다. 입구에서 들고나는 아이들의 눈에 소금물을 뿌려주던 예쁜 알바생도 있었건만, 꼭 한두 차례씩 아폴로눈병이란 것이 돌아 수영장 철조망에 붙어 안을 들여다보는 아이들의 애간장이 녹아나곤 했다. 어느 해, 아이 한 명이 죽었다. 훈련된 안전요원과 그렇게 많은 아이들의 눈이 있었는데도 아이는 죽은 지 1시간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에피소드 3>
존 레논이 죽었을 때 슬픔에 잠긴 오노 요코가 두 주 넘게 오직 초콜릿과 송이버섯만으로 최소한의 끼니를 잇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30여 년 전의 일이다. 예술적 온도가 맞았던 두 사람이 서로 예술적 상승을 부추기며 벌였던 대담하고 열정적인 러브스토리를 오노 요코의 초콜릿과 송이버섯이 완성 시키누나, 나는 억수로 감동했었다. 평소 음식에 대한 그녀의 기호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초콜릿의 열기와 송이버섯의 고요가 그녀의 추위와 때 아닌 광기를 진정시켜 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송이버섯이야 접근가능성이 쉽지 않은 음식이므로 열외로 친다면, 초콜릿을 포함해 수백 종류의 과자가 있다는 것은 적어도 생의 위로이고 축복이다. 어느 시인은 “별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과 별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라고 노래했지만, 오노 요코에게는 초콜릿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과자 하나에 적어도 그런 것 하나씩은 갖고 있다. 과자예찬론자들은 늙지도 않는 입맛을 가지고 있어서 추억이며 사랑들은 늘어만 간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늘어나는 것은 추억과 사랑만이 아니게 된 것에 나는 혀를 찬다. 체중이 이렇게 버젓할 줄이야. 스타일에 대한 예의로 하는 수 없이 가끔 과자의 열량을 아니 확인할 수 없는 바, 과자 마니아인 내가 애호하는 비스킷A가 256Kcal, 크래커B가 180Kcal 여서 그 맛과 양이 주는 만족감에 비하면 밥을 줄이면 줄였지 과자를 줄일 하등의 이유가 없어보였다. 어느 날 우연히 비스킷A의 직육면체를 뒤적이면서 실상을 파악하게 되기 전까지 말이다. ‘1회 제공량 256Kcal : 1회 제공량 3개(54g), 총 약 4.5회 제공량 243g.’ 나를 안심시켰던 저칼로리는 사실 비스킷 한 봉지의 1/4.5에 해당하는 양이었고, 하나를 다 먹는다고 했을 때 실제 총 열량은 1152Kcal에 달했다. 이 비스킷 두 봉지면 성인여성의 하루 권장 칼로리에 육박한다. 내친 김에 살펴본 크래커B의 180Kcal도 소위 ‘1일 제공량’에 불과했으며, 이는 전체 양의 1/4에 불과한 것이다.
결말이 열린 세 개의 에피소드에서 뉘앙스는 살았을 수도 죽었을 수도, 진짜일 수도 가짜일 수도 있다. 뉘앙스를 이용하는 쪽은 고도로 세련되고, 이용당하는 쪽은 고도로 무력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사건의 발생이나 사후의 문제해결방식은 사회 구성원들의 패러다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하나의 패턴을 이룬다는 것이다. 공식이 산출될 정도이니, 굳이 결말이 필요할 이유가 없다. 결말은 읽는 이의 관점을 따라간다.
있고 없고의 여부에 따라 정치와 예술로 나뉘는 기준이 되는 뉘앙스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 정치가 탐하는 매력적인 전략이 될 수도 있다. 뉘앙스가 태생적으로 음란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정치는 표면적으로 그럴 수 있을 만큼 진화했다. 그러나 숙명적으로 정치는 죽었다 깨어나도 뉘앙스를 가질 수 없다. 이해관계가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얽히고설킨다. 숨기려고 할수록 그것의 표피는 응결된다. 단단함 속에서 뉘앙스는 죽는다. 뉘앙스가 죽었다 깨어나도 정치적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와는 달리 예술의 출발점은 무목적적 목적성이다. 정치적으로 행동할 때조차 예술은 뉘앙스를 풍미한다. 참여예술 차원을 곧 넘어선다. 따라서 이해관계가 전제된 예술이나 뉘앙스가 없는 예술은 이미 정치다.
예술은 정치적일 수도 있는 비정치에 속하기 때문에 사실 정치와 예술은 대등한 분류법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정치와 비정치가 이치에 맞다. 그래야 비정치에서 뉘앙스가 사회적으로 확산된다. 예술적 뉘앙스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예술가가 전하는 뉘앙스를 접할 창구는 일반대중에게 생각보다 적다. 확산은 무리다. 그러나 확산은 필요하다. 그래야 세상이 살만해진다. 그러므로 뉘앙스는 예술을 포함해 비정치 전반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정치에 관계되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예술에 관계되는 방식으로서의 비정치가 세 개의 에피소드를 알레고리에서 은유로 만들어줄 것이다. 정치적으로 무한 반복되는 알레고리를 끊어줄 것이다.
여치가 새까만 피를 터뜨리며 튕겨져 죽든 어디 역에선가 누군가의 손에 들려 무사히 하차하든, 수영장을 폐쇄하고 콘크리트로 메꿔 주차장을 만들든 추방이나 삭제ㆍ격리로서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는 추모의 벽을 만들고 수영장을 아이들에게 돌려주든, 과자회사의 권유대로 과자 한 봉지를 4.5일에 나누어먹느라 추억도 사랑도 4.5 등분이 나든 자본의 논리에 진저리를 치면서 과자를 아예 끊어버리든 에피소드의 결말은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무엇이 비정치고 무엇이 뉘앙슨가. 가령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우리가 수건을 들고 있을지, 세숫물을 대신 버려줄지, 쪼그리고 앉아 어두운 세수를 같이할지, 물의 온도와 파동을 온몸으로 느낄지, 어두운 세수를 하는 누진 세상을 담요처럼 펼쳐들고 햇볕을 쪼여줄지, 적어도 어두운 세수를 하는 당신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지를 고민하는 방식이 그것일까.
*김근의 시집 제목
-《예술가》 2014.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