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스도의 보혈
<주님의 보혈은 주로 아버지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속죄를 위한 피는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범한 죄를 위하여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용서하심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심판에 떨어지게 된다. 하느님의 죄 사함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행함을 소홀히 여기시거나 감찰하시기 않기 때문이 아니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는 주로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피의 가치를 깨달으려 한다면 반드시 피에 대한 하느님의 평가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만일 우리(내)가 피에 대하여 하느님이 정하신 피의 가치를 조금도 모른다면, 나는 영원히 우리(나)를 위한 피의 가치를 알 수 없다.
오직 성령의 계시로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하느님의 평가를 정확히 깨달을 때만 비로소 피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고, 우리에게 보혈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피의 첫 번째 방면은 하느님을 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구약에서 신약까지 피라는 단어는 항상 속죄의 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이제 레위기 16장과 탈출기(출애굽기) 12-13장을 보기로 하자. 레위기 16장은 속죄일에 대한 것이다. 죄 문제에 대하여 속죄일보다 더 분명하게 설명한 것은 없다. 레위기 16장은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 희생의 피를 지성소에 가져가 하느님 앞에 일곱 번 뿌렸다고 말한다. 속죄일에 속죄 제물은 회막의 바깥뜰에서 회중 앞에서 드려졌다.
거기서의 모든 것은 완전히 노출되어 누구나 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대제사장 외에는 어느 누구도 지성소 안에 들어올 수 없도록 명하셨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오직 피를 가진 대제사장만이 피를 지성소 안에 뿌려 하느님 앞에서 속죄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
이는 대제사장이 구속의 역사를 이루신 예수님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히브9,11-12절은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표에 있어서 대제사장은 구속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다. 대제사장을 제외하고 누구도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또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피를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 피를 하느님이 받으시고 그 안에서 만족을 얻으신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에서 하느님과 갖는 교통이다. 이 교통의 유익(각종 기도의 제목들과 치유와 문제해결)을 얻은 바깥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교통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도록 정하셨다. 그러므로 피는 먼저 하느님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와 유익을 얻는 기도하는 믿는 이들의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피는 먼저 하느님을 위한 것이다. 레위기 16장보다 더 초기의 예표는 탈출기(출애굽기) 12-13장의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피 흘린 유월절 어린양이다. 어린 양의 피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졌고 이스라엘 백성은 피가 발라진 집 안에서 어린 양의 고기를 먹었다.
출애굽기 12,13절은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피가 사람에게 드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드려지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또 다른 예증을 얻는다. 그 이유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진 피를 집 안에서 양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성결과 공의는 우리 인류를 위해 드려질 수 있는 죄가 없는 한 생명을 요구하신다.
피에는 생명이 있는데, 이 피는 나와 나의 죄를 위하여 반드시 부어져야만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정하심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그분의 공의를 만족시킬 피를 그분께 드릴 것을 요구하신다. 하느님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피는 완전히 하느님을 만족케 하셨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우리가 주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양심의 괴로움을 받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우실 때 비로소 양심이 살아난다. 본래 우리의 양심은 죽어 있었다. 양심은 우리 영의 기능, 곧 양심과 직관과 교통의 기능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이다.
양심이 죽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완전히 버리고 하느님께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주님을 믿었을 때 깨어난 우리의 양심은 아주 예민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문제를 야기 시킬 것이다. 곧 죄악의 느낌은 우리에게 크고 두려운 것이 되어, 심지어는 우리가 피의 참된 효능을 보지 못하게 한다.
결국은 우리가 길을 갈 힘을 잃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실제라고 느낀다. 어떤 나만의 특별한 죄들이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죄들을 그리스도의 피보다 더 크게 느끼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이때 우리의 모든 문제는 피의 가치를 주관적으로 느끼고 평가해 보려는 데서 오는 것이다.
피의 가치는 우리가 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곧 우리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피는 하느님을 만족시키는 것임을 알기를 원한다. 우리는 피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평가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럴 때만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발견하게 된다. 그 반대로 만일 피의 가치를 우리의 느낌, 곧 주관적으로 평가하려고 한다면 아무런 수확이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피의 가치를 평가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남게 된다. 이것은 전적으로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달려 있다. 벧전1,18-19절은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노예나 전쟁 포로들은 금이나 은과 같은 돈으로 사서 해방시킬 수 있었다. 이 편지의 수신인들인, 곧 우리 믿는 이들은 이에 비하여 훨씬 더 값비싼 것으로 구속되었다. 곧 그들은 이교적인 과거로부터 해방되었다. 망령된 행실이란 그들이 이교도로서 허망한 우상들에게 예속되어 영위한 삶을 뜻한다(로마1,18-31).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은 유월절 양, 곧 그 피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음의 천사로부터 보호해 준 그 유월절 양을 염두에 둔 것이다(탈출12,5). 또한 그것은 동시에 아마도 이사53,7절을 고려한 것일 것이다. 곧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하느님께서 죄의 값으로 피를 받으실 수 있고, 속죄의 대가로 피를 받으실 수 있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의 죄의 빚을 갚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만일 하느님이 이미 이 피로 만족하셨다면, 이 피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그분의 평가를 따라야 한다. 하느님은 이 피를 받으실 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더하거나 덜하지 말아야 한다.
<소망의 신앙고백>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느님은 그분 보시기에 이 피가 받을 만한 것이며, 그분을 온전히 만족케 했다고 능히 말씀하실 수 있다. 이 피는 하느님을 만족케 했으므로 또한 우리를 만족케 한다. 그러므로 이제 피의 두 번째 방면의 가치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곧 그분이 우리 양심을 깨끗케 한 것이다.
히브10,19-22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느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자.”라고 말한다.
내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이 객관적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서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었다. 이 구절은 마치 세례를 상기시킨다. 이 예수의 피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믿는 자들에게 열렸다. 곧 휘장을 통하여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휘장은 주님의 육체와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우리를 분리시키는 휘장은 주님의 성육신과 생명의 희생을 통하여 제거되었다. 이로써 예수가 행하신 일은 교회 측에 나태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먼 거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붙잡아야 한다.
동시에 이것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에게 발설한 고백을 삶의 수행 속에 굳게 잡아, 이 고백 속에 약속된 미래의 완성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히브11,1). 이를 위하여 나태해지려는 유혹과 교회에 모이기를 멀리하고자 하는 수많은 환경과 유혹(25절)들을 물리치는 것이 필요하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그리스도 앞에 함께 설 수 있기 위하여 서로 서로 격려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신년 특집으로 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 너무나 많이 들어온 이 진리를 애석하게도 우리는 너무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다. 22절을 자세히 읽어보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간격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분을 가까이하려고 할 때 거리끼는 양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거리끼는 이 양심은 나와 하느님 사이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끊임없이 나를 일깨워준다. 이제 보혈의 역사로 하느님 앞에 가로놓인 장애물이 제거해지는 새로운 결과가 산출되었다. 하느님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사실을 신뢰하고 받아드릴 때, 내 양심은 즉시 깨끗이 되고 죄책감도 제거되며, 하느님에 대해서 나의 양심은 더 이상 거리낌을 갖지 않게 된다.
알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
참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