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초계 정씨 개관(槪觀)
01 정씨(鄭氏)의 유래(由來)와 종류
정씨는 고대 중국 영양(榮陽)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영양은 하남성 개봉도의 현(縣)으로 주나라 때에는 동괴국(東괵國)이다. 이 유래에 대해서도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주나라 선왕(宣王)의 동생의 친구를 봉우정(封于鄭)이라 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견해는 주나라의 여왕(女王)이 소자우(小子友)를 봉우정(封于鄭)하니 이가 환공(桓公)이고 그 후손들이 정씨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정씨에 대한 기록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인다. 그 기록에 의하면, 신라 6촌 중 취산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가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에 진지촌이 본피부(本彼部)로 바뀌어 불리면서 정씨의 성을 하사 받았다. 당시의 신라왕족의 성씨는 박(朴), 석(昔), 김(金)씨였다. 본피부는 현재의 경주시 중심부에 있었으므로 정씨는 일찍부터 한반도 남단에 자리잡고 살던 선주민(先住民)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오늘날 정씨의 각 본관별 시조들은 모두 지백호의 원손(遠孫)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지만 그 혈연적 계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쨌든 정씨는 일반적으로 같은 혈손으로, 그 중 경주 정씨가 종통(宗統)이라는 것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정씨는 신라 9성 중의 하나로 역사적으로 명문 가문의 지위를 누려 왔으며, 특히 조선에 이르러서는 동래 정씨를 으뜸으로 연일 정씨, 청주 정씨, 온양 정씨, 진주 정씨, 봉화 정씨, 하동 정씨 등이 상당한 세력을 떨쳤다. 또한, 초계 정씨도 조선 중기 때까지는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동성이족(同姓異族)으로서는 중국에서 귀화한 서산 정씨와 낭야 정씨가 있다. 서산 정씨의 시조 신보(臣(保)는 원래 중국의 절강(浙江) 사람으로 송(宋)나라 원외부(員外部) 벼슬에 있다가 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망명해 온 것으로 보인다.
1975년도 국세조사에서 정(鄭)씨는 가구수 29만 8.291가구이고 전국 가구 구성비 4.4%로 249성 중 제 5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42만 2,200가구에 178만 648명으로 성별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 5위였다. 성관(姓貫)은 초계, 경주, 동래, 연일, 진주, 하동, 해주, 온양, 청주, 광주 등 122개의 본관(本貫)이 조사되었는데 주요 본관의 시조와 분파(分派)에 대해서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경주를 관향으로 하는 정씨는 시조가 진후(珍厚)로 고려 때에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이며 문정공(文貞公)이다.
② 동래를 관향으로 하는 정씨는 신라 때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희문을 원조로 하나, 그 이후의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세계를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그 후 세계가 확실한 지원(之遠)을 1세조로 하여 이어지고 있다.
③ 초계를 관향으로 하는 정씨는 시조가 배걸(倍傑)로 고려 때에 예부상서(禮部尙書)이다.
④ 연일을 관향으로 하는 정씨는 시조가 종은(宗殷)으로 신라 때에 간관(諫官)이며 그 후손 의경(宜卿)은 연일의 호장(戶長)이다.
⑤ 진주를 관향으로 하는 정씨는 시조가 수규(守珪)로 고려 때에 벼슬이 내부령(內部令)이다.
⑥ 해주를 관향으로 하는 정씨는 시조가 숙(肅)으로 고려 때에 정랑(正郞)이고 후손 역(易)은 정도공(貞度公)이다.
⑦ 하동을 관향으로 하는 정씨는 시조가 세유(世裕)로 고려 때에 벼슬이 병마사(兵馬使)이다.
⑧ 온양을 관향으로 하는 정씨는 시조가 보천(普天)으로 고려 때에 벼슬이 상서(尙書)이고 후손 응휴(응休)는 어사감찰(御使監察)이다.
⑨ 청주를 관향으로 하는 정씨는 시조가 극경(克卿)으로 고려 때에 랑장(郞長)이다.
⑩ 광주를 관향으로 하는 정씨는 시조가 신호(臣扈)로 고려 때에 전직(殿直)이다.
⑪ 나주를 관향으로 하는 정씨는 시조가 해(諧)로 고려 때에 군기감(軍器監)이다.
⑫ 봉화를 관향으로 하는 정씨는 시조가 공미(公美)로 고려 때에 호장(戶長)이다.
<정(鄭)씨의 본관(本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