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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52. [역경의 열매] 문단열 (1-10) 중3, 내 인생을 바꾼 외국인과의 첫 영어 대화
전도사인 아버지 쫓아 초교만 5곳 다녀 미국인 친구와 만남으로 ‘신세계’ 체험
사진: 중학교 3학년 때 수학여행을 가던 버스 안에서 포즈를 취한 문단열 전도사.
어린 시절 나는 자주 학교를 옮겼다. 아버지가 전국 각지의 교회를 전전하며 전도사로 사역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만 열거해도 화랑초등학교(서울) 순천남초등학교(전남) 화계초등학교(서울) 창경초등학교(서울) 남성초등학교(대전) 등 다섯 곳이나 된다.
새로운 학교에 가면 아이들 텃세에 시달리곤 한다지만 내 경우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덩치가 컸기 때문에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성격도 외향적으로 변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75년 대전으로 이사를 가면서 비로소 한 지역에 ‘정착’하게 됐다.
늘 과묵했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부모로서 극성스러운 면이 적지 않았다. 내가 영어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한 데도 어머니 영향이 컸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을 동네 영어학원에 보냈다. 6학년 형들이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다니는 학원이었다. 오래 다니진 않았지만 아홉 살에 영어 알파벳과 기본 문법을 배우고 나니 영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절부터 영어를 유창하게 했던 건 아니다. ‘외국인과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면 기분이 어떨까’ 상상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영어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어머니의 교육열이 발단이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내게 미국인 친구를 소개시켜줬다. 미국인 선교사의 자녀로 이름은 카일이었다. 카일을 만나자마자 나는 중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영어로 나를 소개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영어문장을 구사하며 질문을 쏟아냈다. ‘네 이름은 뭐니?’ ‘어느 나라 사람이니?’ ‘너희 아버지 이름은 뭐니?’. 그렇게 20분이 흘렀다. 그리고 그 20분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이전까지 내게 외국인은 외계인과 다를 게 없었다. 인간이긴 하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거의 없었으니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카일을 만나면서 ‘아, 서양 사람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세계가 열렸던 것이다.
첫 만남 이후 6개월 넘게 카일과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카일을 통해 다른 외국인 친구도 소개받았다. 대전에 파송된 외국인 선교사들 자녀였다. 난 본격적으로 이들로부터 영어 과외를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과외비였다.
전전긍긍하다 떠오른 묘수는 과외를 통해 과외비를 벌자는 아이디어였다. 나는 초등학생 6∼7명을 상대로 영어 과외를 시작했다. 초등학생으로부터 받은 과외비를 모으니 7만원 정도 됐다. 이 돈을 들고 외국인 친구들을 찾아갔고, 이들에게 돈을 내고 영어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초등학생을 가르친 돈으로 외국인 친구들에게 과외를 받는 일상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내내 계속됐다. 주한미군방송(AFNK)도 열심히 들었고 학교에서 영어시험을 치르면 거의 매번 100점을 받았다.
당시 외국인 친구들은 은연중에 한국인 아이들을 깔보곤 했다. 그들에게 한국은 세계의 수많은 후진국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는 그들이 한국인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기분이 상했다. 나의 목표는 단순했다. 미국인과 영어로 말싸움을 벌여 이기고 싶었다.
영어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과 달리 나의 신앙은 보잘것없었다. ‘절반의 신앙’이었다. 목회자인 아버지를 뒀으니 각종 성령집회와 금식기도에 참여했지만 당시 내가 알던 하나님은 ‘승리자의 하나님’이었다. 주님을 믿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벼랑 끝에 선 인간까지 보듬는 ‘실패자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훗날 30대가 돼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 [역경의 열매] 문단열 (1) 없음
* [역경의 열매] 문단열 (2) 중3, 내 인생을 바꾼 외국인과의 첫 영어 대화
* [역경의 열매] 문단열 (3) 영어는 세상을 보는 창… 하루 10시간 이상 공부
* [역경의 열매] 문단열 (4) 대학커플 아내, 데이트 후엔 꼭 "기도하고 헤어져요"
* [역경의 열매] 문단열 (5) 없음
* [역경의 열매] 문단열 (6) 5억 빚더미 '죽음 문턱'서 만난 사랑의 하나님
* [역경의 열매] 문단열 (7) 비유학·비전공·비학위 '3非 강사'가 스타로
* [역경의 열매] 문단열 (8) 새 소명 '청년사역' 위해 2010년 11월 교회 개척
* [역경의 열매] 문단열 (9) 간판·홈피·홍보 없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교회'
* [역경의 열매] (10·끝) 고난 끝에 얻은 선물은 자식 같은 교회 청년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역경의 열매] 문단열 (3) 영어는 세상을 보는 창… 하루 10시간 이상 공부
연세대 신학과 진학 후 영어 공부 매진… 통역대학원 낙방에 ‘민병철어학원’ 입사
문단열 전도사(왼쪽 세 번째)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경주 여행을 갔다 찍은 사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어느 대학에 진학할지 고민이 많았다. 전공보다는 학교 ‘간판’을 우선해야 할지, ‘간판’보다는 내가 원하는 학과가 중요한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영문학이나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학교의 명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결정한 곳이 연세대 신학과였다. 목회자인 아버지의 뜻이 컸다. 아버지는 아들이 언젠가 목사가 될 수도 있으니 미리 신학을 공부해 놓으라고 조언했다.
반면 어머니는 아들의 신학과 진학을 마뜩잖아 했다. 아버지가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겪은 고충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목사가 목회만 하는 게 아니라 교회에서 때론 ‘정치’도 해야 한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신학에 큰 뜻이 없다 보니 학과 수업에 성실히 임하지 않았다. 졸업할 때까지 전공과목 학점 대부분은 C 혹은 D였다. 모든 관심은 영어에 있었다. 영문과 수업을 신청하거나 도강(盜講)해 영문과 학생처럼 대학시절을 보냈다.
당시 영어가 좋았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영어는 세상을 보는 창(窓)이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미국 선교사 자녀인 카일과 친분을 쌓으면서 ‘타임’과 같은 미국의 시사주간지를 볼 기회가 많았다. 타임엔 한국 언론에서는 다루지 않는 우리나라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보도되고 있었다. 해외 신문이나 잡지들을 읽다 보니 영어를 알아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또 하나의 이유는 영어가 나의 생계수단이 될 것이라 예감했기 때문이다. 영어가 가능해야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영어는 다른 세계와 조우하는 가교였다. 어학에 미쳐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의 이런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생활 대부분을 보냈던 곳은 ‘YES’(연세 잉글리시 소사이어티)라는 영어회화 동아리였다. 나는 대학시절 내내 이곳 동아리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스터디 그룹을 조직해 영어 공부에 열을 올렸고 후배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쳤다. 방학 때도 스터디 그룹을 계속 운영했다.
돌이켜보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하루에 10시간 이상 영어 공부에 매진한 것 같다. 공부를 하지 않을 때에도 영어 생각밖에 없었다. ‘자, 내 앞에 외국인이 앉아 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지금 어떤 말을 할까. 어떤 식으로 내 생각을 영어로 풀어내야 할까….’
어학 공부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과 비슷하다. 비행기는 연료의 상당량을 이륙하는 데 소진한다. 하지만 일정 궤도에 올라가면 연료를 많이 쓰지 않는다. 어학 공부 역시 처음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가면 큰 힘이 들지 않는다. 3∼4개월만 미친 듯 공부해도 확연히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쾌감을 맛보면 어학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외국인의 발음과 리듬을 체화하는 기쁨은 엄청나다.
대학시절 내가 정한 진로는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나의 통번역대학원 합격을 따놓은 당상이라 여겼다. 하지만 대학원 입시에서 나는 두 차례나 낙방하고 말았다. 수석이 목표였는데 합격조차 못하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다른 진로를 고민했지만 신학생이 갈 만한 회사는 별로 없었다. 대기업 입사는 상경계열이나 이공계열 전공자여야 가능했다. 결국 나는 졸업을 앞둔 1986년 12월 서울 강남에 있던 민병철어학원에 입사했다. 누군가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문단열 (4) 대학커플 아내, 데이트 후엔 꼭 "기도하고 헤어져요"
영문과 수업 도강 다니던 신학도 신학강의 듣던 영문학도 아내를 만나
문단열 전도사와 아내 김애리씨. 동갑내기 친구인 두 사람은 대학 시절 처음 만나 1989년 백년가약을 맺었다.
대학 시절 내내 영어 공부에 열중했지만 전공인 신학과 수업을 아예 무시할 순 없었다. 졸업을 하려면 수업을 들어야 했고 숙제도 하고 시험도 치러야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신학생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살았을 법한 신학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신학과 교수님들의 가르침은 내 삶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내가 다닌 연세대 신학과는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는 곳이 아니었다. 어느 한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상식의 신학을 가르친 학교였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었다.
가령 상당수 학생들은 진학과 동시에 자신의 신앙이 무참히 박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교수님들은 신입생들에게 하나님을 부정하는 책들을 읽어보라고 권유했다. 학생들은 무신론을 주장한 영국 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의 저작 등을 읽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앙이 얼마나 얄팍한지 실감했다. 어떤 학생들은 신앙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음주나 흡연을 즐겼고 교회를 멀리했다.
교수님들이 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과정을 밟게 한 이유는 간단했다. 무신론 같은 이론을 극복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교역자가 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교수님들의 가르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신앙의 변증'이 없다면 참된 신앙을 키울 수도 없는 법이니까.
아울러 연세대 신학과는 내가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의 아내를 3학년 2학기 때 처음 만났다. 내가 '영문과 학생 같은 신학생'이었다면 아내는 '신학생 같은 영문학도'였다. 내가 영문과 수업을 일부러 들었듯 아내는 신학과 수업을 챙겨 들었다. 아내는 독특한 신앙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기독교인이 아닌 상황에서 중학교 때 혼자 교회를 갔다 믿음을 키우게 된 인물이었다. 믿음이 신실해 연애시절 데이트를 하고 헤어질 때면 내 손을 잡고 "기도하고 헤어지자"고 말할 정도였다. 우리 두 사람은 1989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대학 시절 내내 영어에 매진했지만 유학은 언감생심이었다. 80년대는 국비 유학생에 뽑히지 않으면 유학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20대 시절 유학 경험이 없다는 게 아쉽지 않은지 묻곤 하는데 당시엔 큰 불만이 없었다. 첫 직장부터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민병철어학원에서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실감했다. 아울러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민병철어학원에서 3년 넘게 근무하다 지인이 서울 신촌에 학원을 차려 첫 이직을 했다. 지인의 학원에서 6개월 정도 일했고 다른 학원도 떠돌며 강의를 했다. 그러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를 맺은 92년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중국어도 잘하고 싶었다. 나는 베이징에서 6개월간 머물며 중국어를 배웠다. 영어를 통해 어학 공부의 재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중국어 공부 역시 흥미로웠다.
한국에 돌아오니 내 나이는 어느덧 20대 후반이었다. 대학생 시절부터 나의 궁극적인 꿈 중 하나는 교육기관 설립이었다. 한국외국어대 같은 외국어 전문 기관을 세우고 싶었다. 이제 그 꿈을 실천에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을 차려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무슨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울 강남에서 한 영어학원을 운영하던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학원 관리하는 일을 배우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나는 그 학원에 실장으로 취업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94년 서울 연세대 앞 한 건물 3층에 학원을 차렸다. '노토어학학원'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학원 운영에 자신이 있었다. 누구보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원 사업이 고난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걸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역경의 열매] 문단열 (5) 없음
***[역경의 열매] 문단열 (6) 5억 빚더미 '죽음 문턱'서 만난 사랑의 하나님
故 하용조 목사의 설교에 용기 얻어 "위기는 기회" 인터넷 교육사업 도전
문단열 전도사가 2002년부터 진행한 EBS 영어 교육 프로그램 '잉글리시 카페'의 한 장면.IMF 외환위기가 터지자 학원 수입은 급감했다. 나는 교육업계에서 성공한 청년사업가로 평가받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하루에도 10통 넘는 채권자들의 전화를 받았다. 나의 인격을 무참히 짓밟는 전화였다.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었다.
만약 당시 대출금이 1억∼2억원 수준이었다면 빚을 탕감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5억원은 내게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나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나이는 겨우 30대 중반이었다. 대출금을 어디서부터, 어떤 방식으로 갚아야 할지 계획조차 세울 수 없었다. 절망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1990년대 말, 언론에서는 외환위기로 경영난을 겪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업가들 이야기가 자주 보도됐다. 나는 좌절을 거듭하다 삶을 포기한 그들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나를 구한 건 서울 용산구 온누리교회에서 들은 고(故) 하용조 목사님의 설교였다. "제사장 옷에 12개의 보석이 박혀 있듯 하나님은 자신의 옷에 당신의 이름을 박아놓았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설교를 듣는데 울음이 터졌다. 어린시절 교회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목회자였던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며 신앙을 키웠던 시간, 고등학교 시절 철야기도를 하며 지새웠던 밤….
완벽하게 잊고 살았던 추억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행복했던 시절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거 있었던 자리에서 나는 지금 얼마나 멀리 와버린 것일까'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걸가'…. 예배는 끝났고, 나는 우느라 눈이 퉁퉁 부은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미로 같은 정글에서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 알려주는 하나님 음성이 곧 구원일 것이다. 하용조 목사님의 설교는 내게 구원이었다. 정글에서 길을 잃어 죽을 수밖에 없게 됐다고 자책하던 나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목사님의 말씀은 내 삶의 터닝 포인트였다.
당시의 깨달음은 신앙적으로도 성숙하는 계기가 됐다. 이전까지 내가 아는 하나님은 '승리자의 하나님'이었다. 믿음의 끝엔 항상 승리가, 성공이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하지만 그때부터 내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됐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멀리 엇나가도, 완전히 실패해도 보듬어주는 분이셨다. 그렇게 나의 신앙은 '절반의 신앙'에서 온전한 신앙으로 거듭났다.
심기일전한 나는 돌파구를 모색했다. 학원 사업을 과감히 접기로 결심했다. 대신 온라인 교육업체를 차려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때는 1999년. 인터넷 열풍을 타고 수많은 벤처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난 시절이었다. 그해 12월 31일, 나는 '펀글리시'라는 인터넷 영어강의 업체를 설립했다. '펀글리시'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하루가 다르게 수강생이 늘었다. 급기야 2003년에는 연매출이 24억원을 기록했다. 각종 신문과 방송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는 문의가 잇따랐다. 2001년 '김치 발음에 빠다를 발라주마'를 시작으로 영어 서적도 여러 권 집필했다.
케이블 교육 채널인 재능방송을 통해 방송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이때쯤이었다. 펀글리시의 원어민 강사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제작진의 부탁으로 나는 '샬라맨'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게 됐다. 선글라스를 끼고 방송 도중 등장해 영어 발음을 가르쳐주는 캐릭터였다.
그리고 어느 날 전국에 내 얼굴을 알릴 기회가 찾아왔다. EBS 성인 대상 영어 교육 프로그램인 '잉글리시 카페'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프로그램은 이전까지는 시도하지 않았던 참신한 구성과 연출로 첫 방송과 동시에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스타 강사'의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문단열 (7) 비유학·비전공·비학위 ‘3非 강사’가 스타로
2002년 EBS ‘잉글리시 카페’ 대히트 그러나 유명세에도 빚은 16억원으로…
문단열 전도사는 2002년 EBS 교육 프로그램 ‘잉글리시 카페’를 통해 ‘스타 강사’로 거듭났다. 사진은 2004년 한 특강 무대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문 전도사의 모습.
1990년대 중반부터 나는 EBS로부터 자주 출연 요청을 받았다. 실제로 오디션을 본 적도 여러 차례 있다. 오디션을 보고 나면 PD들은 항상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출연은 번번이 무산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EBS ‘윗분들’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알려졌다시피 나는 유학을 다녀오지도,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지도 않았다. 영문학 석사나 박사학위도 없다. ‘비유학’ ‘비전공’ ‘비학위’라는 ‘조건’을 갖춘 ‘3비(非) 강사’다. 어쩌면 내가 방송 입문에 실패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가방끈’이 짧다는 이유로 실력까지 평가절하되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그러다 케이블 교육채널인 재능방송의 한 영어 교육 프로그램에 단역으로 잠깐씩 출연해 조금씩 유명해지자 EBS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출연해달라고 부탁해서 갔다가 결국 출연이 무산된 게 3차례나 있었습니다. 이젠 EBS에 출연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작진은 끈질겼다. 계속 전화가 왔다. 속는 셈 치고 첫 방송분 녹화에 임했다. 프로그램명은 ‘잉글리시 카페’였다. 그리고 2002년 8월 26일 진짜로 첫 회가 방영됐다.
기존 영어 교육 프로그램은 정해진 틀이 있었다. 사회자가 특정 문구를 소개하고 원어민 강사가 이 문구를 발음해주는 형태였다. 하지만 ‘잉글리시 카페’는 달랐다. 예능 프로그램들처럼 여러 명이 동시에 나와 수다를 떨며 영어의 재미를 전했다. 라이브 음악 밴드가 함께한다는 점도 특징이었다. 출연자들이 연기를 하며 특정 상황에 들어맞는 영어 문구를 가르쳐주는 것도 특이했다.
‘잉글리시 카페’로 나는 금방 유명해졌다. 시청률은 2∼3% 수준을 꾸준히 유지했다. EBS 프로그램으로는 상당히 높은 시청률이었다. 소위 말하는 ‘대박’이 터진 것이다. 팬 카페가 개설됐고 특강을 요청하는 각계의 요청도 이어졌다. 길거리에 나가면 상당수 사람들이 나를 알아봤다.
하지만 즐겁진 않았다. 사업 실패 후 죽음을 생각하다 고(故) 하용조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뒤부터 희망을 품게 됐지만 내겐 여전히 감당하기 힘든 부채가 있었다. 인터넷 영어 교육 업체인 ‘펀글리시’가 성공했지만 갚아야 할 대출금은 늘어만 갔다. 수입이 생기면 빚을 갚기보단 회사를 키우는 투자금으로 썼기 때문이다. 펀글리시를 시작할 당시 5억원이던 빚은 16억원까지 늘었다.
유명세를 치르면서 빚을 갚으라는 채권자들의 독촉은 더 심해졌다. 전화의 내용은 이랬다. “너 TV에도 나오더라? 유명해졌으니 돈도 많이 벌었겠네. 빨리 빚이나 갚아라.”
상황이 이렇다 보니 거리에서 팬들이 반갑게 인사해도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EBS가 아닌 KBS MBC SBS 등 시청률이 잘 나오는 지상파 방송 3사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나면 채권자들의 독촉 ‘수준’은 한층 더 심해졌다. “TV에 많이 나오지만 출연료는 미미하다”고 항변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채권자들은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유명세를 얻었지만 나는 여전히 돈의 노예였다.
설상가상으로 잘 나가던 펀글리시 역시 2000년대 중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 열풍이 불면서 우후죽순 생겨난 영어회화 관련 인터넷 강의 업체는 수백개였다. 하지만 영어회화는 대면(對面) 교육이 효율적인 분야다. 얼굴을 마주하고 문장과 문장을 주고받아야 실력이 는다.
즉 영어회화와 인터넷 강의는 애초부터 ‘궁합’이 맞을 수 없었다. 2000년대 초반엔 호기심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인터넷으로 영어회화 강의를 수강했지만 별 효과가 없다는 게 입증되면서 수요는 급감했다. 하지만 나는 미련하게도 ‘한 방’을 꿈꾸며 이 사업에 계속 투자했다.
***[역경의 열매] 문단열 (8) 새 소명 ‘청년사역’ 위해 2010년 11월 교회 개척
가수 데뷔 후 특강 전전하던 중에 “교회 개척하라” 하나님의 음성이
문단열 전도사가 2010년 3월 발표한 음반 속지에 실린 그의 사진.
사람의 타고난 성향은 상인(商人)과 장인(匠人)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인은 자신이 만든 상품이 100점 만점이 아닌 90점 수준이어도 상품만 잘 팔리면 제품 개발보다 판매에 중점을 둔다. 반면 장인은 품질을 100점으로 끌어올리는 데 열중한다. 돈이 모이면 곧바로 제품 개발에 투자한다.
그렇다면 나의 성향은 어느 쪽일까. 자평하건대 나는 상인보다는 장인에 가깝다. 이런 사람들은 사업을 하면 안 된다. 사업으로 많은 빚을 지고, 새 업체를 차려 재기에 성공했지만 나는 빚을 갚기보단 교육 콘텐츠 개발에 돈을 쏟아부었다. 사업이 잘되면 잘될수록 더 큰 욕심이 났다.
인터넷 영어 강의 업체인 ‘펀글리시’는 2003년을 기점으로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투자를 계속했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2007년 결국 나는 모든 사업을 접기로 했다. 그때 내가 정한 철칙은 이랬다. ‘내가 몸으로 부딪혀 얻는 수입만으로 살아가자.’ 전국 어디서든 나를 부르는 곳이 있으면 달려갔다. 지방 강연이 한 달에 많게는 20회가 넘었다.
2010년 3월에는 음반을 발표하며 가수로도 데뷔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음악을 좋아했다. 10대 시절엔 성악가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축농증이 심해 성악을 전공할 순 없었다. 음반 취입은 어린 시절부터 꿈꾼 소박한 장래 희망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 새로운 삶을 계획했다. 교회를 개척하자는 거였다. 약 10년 전, 나는 인천온누리교회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이 교회에서 사역하던 공진수 목사님 부탁을 받아 섰던 무대였다. 특강 요청을 받고 처음엔 내가 교회 강단에 설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 거절했는데, 공 목사님의 거듭된 부탁에 결국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교회 청년들 앞에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했다. 설교라기보단 내가 살면서 겪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간증의 무대였다. 그런데 강연이 시작되고 어느 순간부터 청년들이 하나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다 나도 그만 울어버렸다.
그때부터 청년 사역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교회 개척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런데 사업을 그만두고 이런저런 특강 무대를 전전하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혼자 기도를 하고 있는 내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청년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라고.
나는 하나님께 물었다. ‘교인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장소도, 돈도 없는데 어떻게 교회를 짓습니까.’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했다. ‘교인 돈 장소가 없다고 교회를 개척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결국 나는 교회 개척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이전부터 알고 지낸 서울 온누리교회 청년 성도 3명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교회를 개척할 생각인데 같이 해줄 수 있지?”
교회 장소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한 출판사에 부탁했다. 출판사는 “젊은 친구들과 성경 공부를 할 장소가 필요하다”는 나의 요청에 기꺼이 장소를 내줬다. 이 출판사는 그동안 내 영어교재 출간을 맡았던 곳이다. 결국 출판사 건물 지하 공간에서 2010년 11월 28일 개척 예배를 열었다. 교회 이름은 ‘어메이징 그레이스 교회’라고 지었다. 계속 출판사에 신세를 질 수 없어 6개월 뒤엔 서울 합정동 한 건물 지하실을 임대했고, 지금까지 매주일 이곳에서 예배를 드린다.
개척한 지 4년을 앞두고 있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교회는 조금씩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성도 수는 50명 정도이며 대부분이 20대와 30대다. 태어나서 교회를 다녀본 적 없는 사람이 80% 가까이 된다. 나에게 성도들은 자식과도 같다.
***[역경의 열매] 문단열 (9) 간판·홈피·홍보 없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교회’
“주님, 우리 교회 신자는 왜 적을까요” “그 적은 신자도 전부 사랑 못하잖니”
문단열 전도사가 지난 31일 서울 마포구 어메이징 그레이스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어메이징 그레이스 교회’를 개척했지만 성도들을 모으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나는 우리 교회가 수많은 성도가 모이는 대형 교회로 커 나가길 원하지 않는다. 실제로 어메이징 그레이스 교회는 간판도, 홈페이지도 없다. 교회 ‘홍보’를 하지 않는 특이한 교회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역자로서 성도 수가 많아지면 성도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가 힘들다. 나는 우리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 나의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이 친구를 데려오면 새 가족이 생겼다고 여긴다. 하지만 성도 수가 많아지면 나는 이들을 전부 똑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가 없다. 국민일보에 우리 교회 이름이 나가는 게 내 입장에선 오히려 부담이다.
물론 우리 교회에 다니는 성도 수가 지금보다 훨씬 적을 때 종종 이런 기도를 하곤 했다. “주님, 우리 교회에 다니는 신자 수는 왜 이렇게 적습니까?” 거듭된 기도 끝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응답은 이랬다. “너는 그 정도의 적은 신자도 전부 사랑하지 못하고 있잖니.”
교회 홍보를 포기한 것 외에도 우리 교회는 특이한 구석이 많다. 일단 주일 예배는 오후 4시에 드린다. 교회가 주일마다 성도들을 사역의 길로 억지로 내몰아선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성도들이 주일마다 교회 행사에 끌려 다니다 피곤한 몸으로 귀가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주일은 은혜가 넘치고 피로를 푸는 안식일이어야 한다. 오후 늦게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려도 문제될 게 없다.
우리 교회는 여타 교회들이 하는 노방전도도 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행인들을 상대로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유하는 일 자체가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만 키운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열심히 하나님 뜻을 좇다 보면 자연스럽게 전도도 이뤄진다. 학원을 예로 들어보자. 학원 사업을 하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학원 성장에 있어 홍보 전략이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당신 옆의 친구가 특정 학원을 통해 실력이 일취월장하면 자연스럽게 당신도 그 학원을 찾게 된다. 전도 역시 마찬가지다. 특정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달라진 모습을 보이면 그 주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가게 된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교회 성도 수는 현재 50명 수준에 불과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교회에 다니게 된 사람들이다. 나는 특별히 한 일이 없다. 그냥 세 가지 원칙만 지켰다. ①성도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자. ②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자. ③도와줄 수 없다면 기도해주자.
요즘 청년들의 반기독교 정서는 심각한 수준이다. 처음 교회를 개척하고 과연 이 정서를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안티 기독교’ 정서가 강한 청년이라도 교역자가 진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다가가면 결국엔 하나님을 영접할 수밖에 없다. 전도의 답은 결국 사랑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게 왜 목사 안수를 안 받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나는 목사가 될 자신이 없다. 만약 하나님이 한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고, 예수님이 교감 선생님이라면 목사는 반장 정도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반장보다는 ‘줄반장’ 정도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목사 안수를 안 받는 건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한 일종의 선교 전략이기도 하다. 목사보다는 전도사 신분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게 친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청년들은 ‘목사님’보다는 ‘전도사님’을 훨씬 더 편하게 생각한다. 혹시라도 훗날 어떤 계기로 목사 안수를 받는다 해도 ‘목사님’이라고 불리고 싶진 않다. 지금처럼 성도들이 ‘전도사님’이라고, 혹은 ‘선생님’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성도들 앞에서 나는 언제나 친근한 사람이고 싶다.
***[역경의 열매] (10·끝) 고난 끝에 얻은 선물은 자식 같은 교회 청년들
사업실패·대장 수술… 계속되는 역경에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
문단열 전도사의 가족사진.
2011년 5월, 나는 큰 수술을 받았다. 대장에 문제가 생겨 25㎝를 절제했다. 당시 수술은 내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이 됐다. 죽음의 문 앞에 서니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국민일보로부터 ‘역경의 열매’ 코너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내 인생의 역경이 무엇인지 떠올렸을 때 하나는 경제적 역경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이때의 건강 문제였다. 의료진으로부터 수술 이후 못 깨어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눈앞이 깜깜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열매’는 무엇일까. 나는 세속적 기준으로 봤을 때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 아니다. 얼굴은 많이 알려졌지만 돈을 많이 모으지도 못했고 사업에도 수차례 실패했다. 하지만 이런 내게도 열매는 있다. 바로 역경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곧 나의 ‘역경의 열매’다.
우선 경제적 고난과 육체적 고통 속에서 나는 진정한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수술을 받은 이후로는 소위 말하는 인맥 관리를 하지 않는다. 진심을 나누는 인간관계만이 의미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요즘엔 인맥을 쌓기 위해 억지로 나가야 하는 자리엔 절대 가지 않는다.
역경을 통해 우리 가족이 하나로 똘똘 뭉치게 됐다는 점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자 열매이다. 우리 부부는 정말 안 좋은 ‘사건’이 터지면 항상 손을 잡고 외출을 한다. 남들 같으면 울거나 괴로워하며 밤을 지새우겠지만 우리 두 사람은 영화를 보고 맛있는 걸 먹는다.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맞닥뜨리면 일부 가정은 와해되기도 한다지만 우린 오히려 반대였다.
역경 앞에서도 우리 부부가 의연할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다. 우리 두 사람은 안 좋은 일을 겪을 때면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이번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축복과 깨달음을 주실까.’ 실제로 하나님은 역경 뒤에는 언제나 큰 선물을 준비해두고 계셨다.
사업에 거듭 실패해 수차례 좌절하면서 돈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먹고살 정도의 돈이면 충분하다. 명예 역시 마찬가지다. 돈과 명예, 이것은 우리 삶에서 ‘껍데기’에 불과하다. 자식들 역시 대견하게 성장해주었다. 내겐 딸이 2명 있다. 큰딸(24)은 현재 캐나다에서 유학 중이고 작은딸(19)은 재수생이다. 허영심이 전혀 없고 매사에 긍정적인 아이들이다. 다행히 딸들은 신앙적으로도 날로 성숙해지고 있다.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볼 때면 흐뭇하다.
하지만 두 딸 외에도 내겐 자식이 많다. 내가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교회’의 청년들이 내겐 또 다른 자식이다. 굴곡진 시간을 통과해 개척한 이 교회도 내겐 역경의 열매다.
교회를 개척하고 매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매주 신앙의 영양을 공급받는 기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과해 성도들에게 전해지니 영적으로 풍성해진 느낌을 받는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교회의 어린 양들과 앞으로도 계속 사랑을 나누고 싶다. 거듭 말하지만 교회 규모는 지금처럼 ‘개척교회 수준’에 머물러도 상관없다.
처음 하나님을 만난 청년들은 금방 믿음을 키운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러다 다시 신앙이 뜨거워진다. 이러한 과정을 3∼4차례 거친 뒤에 ‘진짜’ 신앙인으로 거듭난다. 전도사로 사역하며 이 모습을 지켜보는 게 내겐 큰 보람이다. 아마도 훗날 천국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이다. 과연 네가 네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랑을 퍼준 애들이, ‘진짜’ 너의 자식이 몇 명인지.
그때가 왔을 때 자랑스러운 모습이고 싶다. 하나님이 “너 때문에 10명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하다. 이것이 바로 내 여생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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