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으로 알려진 이황과 김종직이 소유한 대토지의 의미는?
조선시대는 지식인, 학자가 부와 권력을 누리는 사회였다.
지식인들이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였으므로 어느 누구도 특권층의 기득권을 비난하거나 비판할 사람이 없었다. 지식인이 지식인을 비난하면 곧 바로 원수나 사문난적이 되고 상민들은 생각이 있어도 입 밖에 내놓으면 곧 바로 양반 모독죄로 물고를 당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지식인은 누구보다 쉽게 정치에 입문하였고 권력을 잡고 부귀를 누렸다. 국민은 정치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들에게 이용만 당하였고 정치를 아는 자들은 권력의 ‘낙수효과’를 누리는 주변 사람들이었으므로 가담하거나 동조하며 침묵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지식인이 권력과 부를 동시에 누릴 수 없는 구조가 되어가고 있다. 참으로 환영할만한 일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이 일단 정치계에 발을 디디면 권력에 맛에 중독이 되어 계속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자 권모술수로 탐욕을 부린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건만 장기 집권을 위하여 전문가, 책사, 보좌관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프로젝트를 만들며 음모가 드러났을 경우 피할 길과 방법까지도 강구하면서 일을 꾸민다.
세상에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정치 자금을 필요로 하는 정치인들이 있고, 그런 정치 자금을 만들어 주고 그 라인으로 쉽게 일확천금을 얻고자 하는 거간꾼들이 있어서 세상을 뒤흔드는 그런 일들이 심심하지 않게 발생한다.
세상에는 인간의 탐욕을, 탐욕으로 지식의 명예와 권력의 영광과 부의 풍요를 추구하는 자를 막을 법이 없기에 아직도 정치세계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흙탕물이 범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 사회는 위선의 시대였다. 선비들이 말과 글로는 스스로 안빈낙도를 노래하며 선비의 덕으로 청빈을 시로 읊으면서도 현실에서는 노비를 가혹하게 부리는 주인이었고 대토지를 가진 기득권자로 행세하였다. 우리에게 황희는 청백리로 알려졌지만 그는 많은 노비와 대토지를 소유한 권력가였다. 가난한 선비로 이름을 날린 이황, 사림의 거두였던 김종직 또한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것과 다르게 대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사대부들이었다.
박종인 저 ⌜대한민국 징비록⌟은 아래와 같이 그들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에 대하여 말한다.
⌜퇴계 이황은 예안, 봉화, 영천과 풍산, 선영 4개 지역에 모두 355필지 2,915두락(마지기)에 이르는 오늘날 평수로 환산하면 58만 3천 평의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노비들이 운영하는 전답 또한 116두락을 소유하고 있었다. 서울에 근무하며 수시로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게으른 노비 중 심한 자는 매를 때려 경계시키라”고 할 만큼 노비 관리도 철저하였다. 이황의 아들 준이 자녀들에게 상속한 노비가 367명이니 이황도 그에 버금가는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황은 이들 노비로부터 받아야 할 공물이 늦으면 ‘통렬히 징계해 하나하나 받으라’고 아들에게 요구했다.
또 다른 사림의 거두 김종직 재산규모는 전답이 602마지기(12만 400평)에 노비는 45명이었다. 마지기는 ‘한 말의 씨앗을 뿌릴 만한 면적’을 뜻한다. 논은 200평이 표준이고 밭은 200평 혹은 100평이 표준이었다.
이황이 소유한 땅은 58만 3천 평이었고 김종직의 소유 전답은 12만 400평이었다. 이들이 정말로 안빈낙도와 칭빈을 실천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사대대부였는지 의문이다.
동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이황의 살림이 <퇴계선생언행록> 6권에 의하면 ‘맑고 가난해 집은 겨우 비바람을 가렸고 거친 밥에 나물 찬으로 사람들이 견뎌내지 못할 정도’였다. ‘굶주림을 면할 수 없을 정도로’로 흉년인 때도 많았다고 한다.
<영남고문서집성>1권에 의하면 김종직은 아내 조씨가 ‘노비들의 농사가 부실해 봄을 넘기기가 어렵다’고 편지를 보낼 만큼 가난했다고 한다.⌟
박종인 저 ⌜대한민국 징비록⌟, 246,247쪽
이황이 기록한 굶어죽을 정도라는 말이 팩트 그대로라면, 60만 평에 이르는 넓은 땅과 노비를 소유하고도 생계가 어려울 정도로 조선의 농업 생산이 엉망이었다는 뜻이다. 팩트 그대로 사대부의 살림살이가 이러했다면 일반 농민들, 천민들의 삶은 오죽하였겠는가? 가히 죽지 못해서 사는 삶이었을 것이다.
지식인 사대부들은 후세의 명예와 영광까지 탐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과장 축소 미화하면서 포장하는 위선의 글을 남겼지만 글을 모르는 상민과 천민들은 역사 속에 굶주림과 천대의 아픔과 탄식을 남기고 말없이 스러져 갔다. 이름 한자 남기지 못한 그들은 국정 운영을 위해 세금을 냈고 공공건설을 위해 부역하였으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들을 군대에 보냈다. 그런데 오늘날조차도 그들이 조선을 이끌고 간 실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왕과 관료 시각으로 역사를 쓰고 있다.
대 토지와 노비를 가진 조선의 대 지주가 흉년이면 굶어죽을 걱정을 하고 평년에도 늘 생계 걱정을 했다니 이 말이 거짓이면 지식인의 위선이고, 진실이면 농업을 천하의 근본이라고 내건 조선왕조의 성리학적 경제정책이 실패이며 조선의 관리, 지식인에게 국가 경제를 견인할 능력이 없었다는 말이다. 각론이 없는 인성론과 위선, 체면, 허례허식과 철저한 계급차별로 유지된 조선의 권력은 민생과 복지에 치졸하게 무능하였다.
정조 때 실학자 박제가는 “물건이 없어서 못 쓰는 것은 가난이지 검소함이 아니다. 조선은 반드시 검소함 탓에 쇠퇴할 것이다.”고 하였다.
조선이 쇠퇴한 첫째 원인은 지식인들이 일반 백성에게 검소함을 강요해 나라를 통째로 가난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둘째는 지식인들의 위선이었다. 겉으로는 도학정치, 청빈을 이상으로 말하나 실제로는 농민과 노비를 수탈하는 탐욕으로 기득권자로서 조용조 세금 개혁을 반대하였고 군 입대 문제도 면제하는 등 모든 책임은 상민과 천민에 넘겼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천국, 향촌의 거대한 사유지에서 중국에서 수입한 화려한 잔으로 술어 부어 마시며 안빈낙도를 주장하며 노비들의 피땀 위에서 자자손손 지식인 관리로 출세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였다.
지식인이자 관리였던 이황과 김종직이 소유한 대 토지는 오늘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부디 그림의 떡을 소유하고 있는 현재 한국의 지식인들이 조선의 지식인들과는 달리 보통 사람들을 절망과 가난으로 몰아넣는 위선과 기만의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
2023.2.18.토
우담초라하니
참고서적
박종인 저 ⌜대한민국 징비록⌟, 와이즈맵,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