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진 모세 신부
<성주간 화요일 강론>
(2024. 3. 26. 화)(요한 13,21ㄴ-33.36-38)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33)”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6-38)”
1)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마르 14,50).
공관복음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8,7-9).”
더욱이 베드로 사도는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서
예수님의 체포를 막으려고 했습니다(요한 18,10).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합해서 생각하면, 제자들은 비겁하게
달아난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흩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마르 14,27).”
이 말씀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배반한다는 뜻이 아니라, 목자를 잃은 양들이 흩어지는 것처럼
제자들이 구심점을 잃고 흩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흩어짐’은 잠깐 동안의 일이었고,
제자들은 다시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요한 20,19).
제자들의 공동체가 붕괴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방어하거나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했어야 하지 않은가? 그것이
제자의 도리가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다음 말씀을,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 군대는 로마제국의 전체 군대보다
훨씬 더 수가 많고, 로마제국 군대를 하느님의 힘으로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의 군대는 9군단까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또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2) 유다의 배반은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서
반대쪽으로 간 일, 즉 박해자들 편에 선 일입니다.
<완전히 편을 바꾼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흩어진 일이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일은, 겁에 질려서 그런 것이지
편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나 다른 제자들의 행동을 배반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데, 유다의 경우에는 ‘배반자 유다’ 라는
고정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3) 배반자 유다는 자기 잘못을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고
자살해 버렸습니다(마태 27,3-5).
그것은 큰 죄를 더 큰 죄로 덮으려고 한,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했지만
크게 통회하고 바로 돌아왔습니다(마르 14,72).
그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배반자 유다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나버렸지만, 베드로 사도는
위대한 사도요 순교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성 목요일 밤부터 일요일 아침까지의 시간이
참으로 힘들고 어렵고 복잡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그들을 모두 위대한 사도요 순교자로
변화시키는 ‘담금질’ 같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4) 우리의 신앙 여정도 온갖 걸림돌들을 극복하는
담금질 과정의 연속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주저앉아 있기도 하고,
중단하고 싶어질 때도 생깁니다.
그러나 사도들처럼 다시 일어나서 걸어가면 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계속 노력하면,
주님께서 분명히 지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22,32).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