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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스겔 20:1-31
제목 : 입 닥쳐
일시 : 2019년 8월 11일
1.
왜 묻지도 못하게 할까? 묻기도 전에 당신이 하고픈 말을 다 하시는 걸까? 젊은 예언자 에스겔을 일상적인 대화를 못하게 하시고 당신의 말만 하도록 만들더니,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온 장로들의 입을 다물게 한다. 이러니 독재자요 폭군이라는 비난을 듣는 것이 아닌가, 우리 하나님 말이다.
이들이 가상하지 않는가? 예레미야는 탄식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지도 않는 것(2:6)을. 노예살이 하던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파라오의 대군을 홍해에서 수장하며 기적적으로 건져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동행하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던 하나님은 뭐하고 계신가?
어떤 때는 왜 안 묻느냐고 역정을 내시고, 이때는 왜 묻느냐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듣지도 않으시고, 당신 하고픈 말부터 내뱉으시는가, 라는 의아함과 함께 저 하나님이 저리 하시는 데에 나름 이유가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저 장로들이 묻고자 한 것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저런 반응을 하실까?
2.
때는 ‘제 칠년 다섯째 달 십일’이다. 여호야긴 왕과 함께 포로로 바벨론 땅에 잡혀온 지 7년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5년째 되던 해에 환상을 보며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던 때로부터 2년이 지난 시점이고, 6년째 성전 환상을 보았으니 그때로부터 1년 정도 지난 어느 날이다. 학자들은 BC 591년 8월 무렵으로 추정하고, 크리스토퍼 톰 라이트는 아예 날짜를 특정해서 말한다. BC591년 8월 14일.
에스겔이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들은 날짜를 정확하게 기록해 둔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읽은 바에 의하면,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불타고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을 길게, 자세하게, 반복해서 예언했다. 평상시는 ‘벙어리’ 마냥 말을 일절 안하더니 어쩌다가 입을 떼면, 조국의 멸망과 성전의 붕괴를 떠들어댄 지 2년이 지났다.
하나님이 질문 자체를 원천봉쇄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에스겔의 예언에 대한 순종이거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하겠느냐는 것이 아님을 잠정적으로나마 전제해도 무방하리라. 그런데도 입 닥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신구약 성경 전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악인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으심을 바로 앞에서 말했던 하나님과도 어울리지 않으며, 곧 읽게 될 예언의 내용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이 예언한 것이 틀리지 않았느냐는 항의성 방문일 공산이 크다. 끌려온 것은 BC 593년이었고, 지금은 591년, 멸망은 BC 586년이다. 아직 망하지 않았는데 불길한 소리를 자꾸하는 예언자의 입을 다물게 하여, 예언의 말을 그치게 하려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틀렸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바벨론이 망하는 것을 물으러 왔거나 우리가 언제 고국으로 돌아가겠느냐는 물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앞으로 보게 될 예언의 내용을 통해 역추적해야 하는 것이지만, 작업가설로 설정하고 예언을 톱아 보도록 하자.
3.
그런데 번역이 문제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있다. 4절이다. 같은 문장을 두 번이나 반복한다. “인자야 네가 그들을 심판하려느냐”(개역개정) “네가 그들을 심판해야 하지 않겠느냐?”(새번역) 개역개정의 것은 네가 감히 누구라고 저들을 심판하느냐, 심판은 나 야훼가 한다, 뭐 이런 뉘앙스를 풍긴다. 반면, 새번역은 네가 그들의 말에 기죽지 말고 도리어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아예 말도 못 꺼낼 정도로 당당하게 맞서서 이겨라, 뭐 그런 느낌을 준다.
어느 쪽일까? 질문을 하지 못하게 했고, 이후의 내용이 이스라엘의 범죄와 타락, 우상 숭배에 집중한 것으로 보아서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상들의 가증한 일을 알려주라는 것을 보았을 때에 조상들의 행실과 같은 부류의 질문을 갖고 방문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짐작할 수 있다. 안 그래도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메스꺼운 우상 숭배 놀음을 보았던 예언자가 아닌가?
그런 그들이 설사 악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이 이토록 역정을 내신다는 것은, 회개는 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긍정적인 말들, 그러니까 축복과 행복이 될 말씀을 듣고자, 아니 그 말을 하라고, 강제로 요구하고, 강요하기 위해 자신보다 젊은 에스겔을 찾아온 것이라고 말하면 너무 앞서 나간 걸까?
아니다. 앞선 것이 아니다. 이 단락의 처음과 끝은 같다. 질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서두와 말미에 등장한다. 4절의 내용이 31절에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너희가 나에게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수미상관 방식으로 질문을 거부하고, 그 사이에 이스라엘의 배역과 배교에 대한 내용이 주를 차지하는 구조이다. 이 구조에 입각해서 보면, 장로들의 질문은 저 반역의 무리의 행태와 하등 다를 바 없기에 묻지 못하게 했고, 너희 질문이 그 따위 짓이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일별하는 것이다.
4.
예언 시점을 통해서 왜 질문을 차단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읽었다면, 이제는 예언 내용을 통해서 그 이유를 찾아보자.
이 본문을 딱 한 번이라도 정독해 보았다면, 어떤 패턴이 있음을 충분히 감지했을 것이다. 대략 이러하다. 내가 너희들에게 복을 주었는데, 너희들은 반역을 꾀하였고, 그런 너희를 심판하려다가 내 이름과 내 명성에 흠집이 될까봐 심판을 유보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스라엘 역사를 큼직큼직하게 시기 별로 구분하고, 각 시기마다 저 패턴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이집트에서(5-9), 광야에서(10-26), 가나안에서(27-30)이다. 그리고 광야는 다시 두 시기로 구분된다. 그것을 광야 1세대(10-14), 광야 2세대(15-26)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우상 숭배를 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했다는 것이다. 구약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보면, 한 두 개인이 아니라 민족 전체와 국가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은 철두철미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역사이었다. 짧게나마 다윗과 히스기야, 요시야의 시대는 조금 덜했을 뿐.
이런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는 것은 에스겔만이 아니다. 시편에도 여럿 있고, 모세오경에도, 소예언서에도 자주 본다. 나는 오히려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설교(7장)가 생각난다. 그의 설교는 결과적으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듣는 자들의 분노를 자아낸 것인데, 한 마디로 너희들은 종교적으로는 우상을 숭배했고, 사회, 윤리적으로는 불순종했다는 것이 스데반의 일관된 이스라엘 역사 해석이다.
그곳에 보면, 모세가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원한을 풀어주었음에도 바로 이튿날 동족끼리 싸움질을 하던 사람들은 모세의 리더십을 부정한다(행 7:27). 출애굽기의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은 양 갈래다. 폭력적인 구출에 대한 비판 아니면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한 행동. 스데반은 후자의 해석을 취한 것이다.
내가 갑자기 스데반의 설교를 소환하는 까닭이 있다. 에스겔의 역사 회고의 특징 중 하나는 이집트에서도 반역을 했다는 것이다. 이집트에서도 우상 숭배를 했다는 것인데, 다른 구약의 역사 해석에는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에스겔은 너희가 뿌리부터 철저히 우상을 숭배했다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래서 스데반을 끌어들인 것이다. 두 사람은 역사 해석이 동일하다. 연대기로 보자면, 스데반이 에스겔의 노선을 취한 것이다.
지금은 잘 믿는 척해도,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나왔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에스겔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화된 하나님, 인간화된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 곧 우상으로 깎고 다듬은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그 하나님에 합당한 예우와 자세를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우상마냥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은 외친다. 그 입 다물라!
5.
역사란, 그것은 본디 선택이다. 출판으로 말하면 편집이다. 즉 역사란 기억의 편집이다. 무엇을 더하고 뺄 것인지, 어떤 관점으로 기술하는지에 따라 다른 역사가 기록된다. 위에서 본 바 대로, 모세의 행위를 인간의 폭력으로 구원과 해방을 가져오려는 무모한 시도로 읽을 수 있고, 모세의 리더십을 처음부터 부정했다는 것을 부각시킬 수도 있다. 에스겔은 초지일관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를 했으며, 불순종했다는 것을 도드라지게 역사를 회고한다.
그 중 하나가 안식일이다. 한편으로 왜 여기서 안식일이 이토록 중요하게 언급할까, 의구심을 품었고, 다른 한편으로 이만큼 중요하게 강조할 만하지, 그런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했다. 안식일은 알다시피 십계명 중의 네 번째 것이다. 그러니까 10개 중에서 하나다. 10분의 1인 거다. 그 많은 계명 중에서 유독 이것을 띄우는 것이 이상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해도 너무 강조한다 싶은 거다.
그러나 안식일을 강조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창조와 구속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보자. 하나님의 창조의 마지막 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 창조의 클라이맥스는 인간 창조가 아니다. 안식일 창조이다. 그래서 6일 창조가 아니라 7일 창조이다. 창조의 완성은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죽도록 일하다가 죽으라고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엔조이하라고 사람을 만드셨다. 그것은 비단 마지막 날 하루가 아니라 6일의 노동에도 스며들어야 하는 것이다.
위의 것이 창조의 자리에서 본 안식일이라면, 출애굽 구속이라는 측면에서 보자.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뼈 빠지게 노동하다고, 죽어야 끝이 나는 무서운 세상, 이집트에서의 삶을 가나안 땅에 가서도 그리 산다면, 굳이 출애굽할 이유가 없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인 안식을 누리는 곳이어야 한다.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곳이 어디라도 이집트이고,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노예이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도 노예주처럼 살았고, 노예처럼 살았다. 에스겔이 많이 의지하고 있는 신명기의 십계명에서의 안식일은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 전체가 안식을 누리는 사회 구조에 관한 명령이다. 그곳에는 생태적 차원도 포함되어 있다. 가축과 함께 땅도 쉬어야 한다. 그러니까 에덴이라도 해도 되고, 천국이라고 해도 되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의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청사진은 바로 안식일이 있는 사회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곳을 에덴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했는데도, 그것이 그들의 미션이었음에도 그들은 그곳을 자신의 욕망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 나는 안식을 누리고 남은 안식이 없는 삶을 살게 한 죄, 그러나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의 안식마저 욕망에 저당 잡힌 채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자기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남의 안식을 착취하는 시스템이 작동하는 나라로 만들었으니 그들이 그곳에 있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지 않는가.
안식일이 표징이라는 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제대로 지켜내는지를 판가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바로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안식일을 중요시 여겼고, 대표적으로 느헤미야의 개혁 운동의 중심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 시대에서도 핵심 쟁점이 되었다. 안식일 해석을 두고 예수 vs. 바리새파/제사장 그룹의 대결이 벌어졌고,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던 이유 중 하나가 안식일을 어겼다는 것이다.
요는, 안식일 없는 사회, 안식 없는 일상은 하나님의 뜻에 정확하게 배치된다는 것, 나도 안식을 누리고 너도 안식을 누리게 하는 사회를 일구어가라는 소명에 불복종했기에 그들은 안식일 없는 세계 바벨론으로, 안식 없는 나라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강제 노역을 하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지금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그대 내일도 안식은 없으리. 여기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그 어디서도 안식은 없으리.
6.
안식일과 함께 ‘누구나 그대로 실천하면 살 수 있는 율례’라는 인상적인 문구가 자주 반복된다. 그러니까 안식일과 함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강조된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문장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강하게 부각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이 남긴 위대한 유산, 곧 말씀에 대한 사랑은 우리 개신교회가 언제까지나 지켜야 할 재산이지만, 말씀을 개인화, 내면화한 죄가 없지 않다. 사회적, 공적 영역에서의 말씀 실천을 한 개인의 일상으로, 내면으로 축소하는 현상이 심하다.
요지를 다시 말하자. 대표적으로 산상수훈을 지킬 수 없는 윤리로 파악한 마르틴 루터와 라인홀드 니버에게서 보듯이, 우리는 예수의 윤리를, 성서의 윤리를 실천 불가능한 이상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산상수훈을 개인 간의 관계에서는 가능하고 보다 큰 사회라는 틀 속에서는 실천할 수 없다는 주장이 암묵적으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틀로 작동한다. 이것에는 개신교의 칭의론, 즉 이신칭의도 한 몫한다. 믿는다는 것을 근대적인 개인주의, 내면주의로 환원하고 축소하여, 사회적 의미를 탈색시켜 버렸다.
에스겔 시대의 사람들은, 어쩌면 장로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저 불평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왜 이리 어려워요? 지키기 어려운 요구가 왜 이리 많아요? 등등.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통찰을 빌리면, 지킬 수 없는 까다로운 요구이기에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숫제 지킬 의지가 없기에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공자의 <논어>의 한 대화가 생각난다. 염구라는 제자가 선생에게 이리 말을 건넨다.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 그대로 실천하기에는 역부족, 곧 힘에 부칩니다.” 공자의 대답은 이랬다. “힘이 부족하면 중도에 그만 두겠지만, 너는 처음부터 못한다고 선을 그어 버렸다.” 공자가 보기에 그 제자는 진심으로 따를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안하겠다, 못하겠다, 어렵겠다고 스스로를 한계 짓고 그 바운더리 너머로 넘어갈 생각일랑 아예 때려치운 거다.
살아낼 수 있는 율법과 계명, 이해할 수 있고 실천도 가능한 말씀을 왜 어렵다고, 불가능하다고,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하는 걸까? 그렇게 살기 싫은 거다. 그렇게 살면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말씀 탓을 하는 거다. 에라이, 나쁜 사람아. “나는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저렇게 살면 내가 쌓아온 삶이 위태위태해져요. 그래서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자.
변명 그만 두고,
핑계 그만 하고.
그냥 그입 닥쳐~
7.
에스겔이 일별한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구는 ‘내 이름 때문에’(9, 14, 22, 29, 39, 44절)일 것이다. 저 것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무엇을 한다는 듯이 읽히곤 한다. 대표적인 구절이 시편 23편이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은 자기 명예만 중요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지독한 우상 숭배를 심판하는 것을 유보하는 이유라니?
그 누구든지, 명예심과 자존감은 있다. 자기 명예를 타인이 먹칠한다면, 가만 있지 않는다. 요즘 명예 훼손에 대한 재판이 많아진 것으로 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극이나 서양의 고중세 역사 드라마에는 자기 이름과 명예에 목숨을 거는 이들을 숱하게 본다. 이름은 그저 이름에 그치지 않는다. 현대 언어철학이 존재와 존재를 가리키는 기호 사이의 불일치를 많이 토론하지만, 고대나 중세는,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던 고대 중근동의 문화에서는 이름과 존재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이름이 더렵혀지면 죽은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 문화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에 똥칠하는 이스라엘을 가만히 내버려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자기 이름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자기 이름과 가문을 드높이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다하는 사극의 악역과 결코 같지 않다. 에스겔 20장에서 사용되는 쓰임을 주목해야 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는 ‘쓰임’이라고 한 바 있다. 선험적인 전제로 예단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활용되는 맥락을 주시할 때, 그 본뜻이, 진심이 전달되는 법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기 이름 때문에 이스라엘을 감히 심판하지 못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자이고 전지, 전능, 무소, 부재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하나님에게도 약점이 없지 않다. 우리를 향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분은 전능하지 못하다. 또 하나가 당신의 이름, 곧 야훼라는 이름에 합당하게만 행동하신다. 야훼는 출애굽기 3장 ?절에서 보듯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의 이름과 명성에 걸맞게 행동한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배교와 반역에도 끝내 버리지 못하시고 심판을 유보하고 유보하셨던 것이다. 참으로 무던한 우리 하나님!
하나님의 약점을 움켜잡고, 하나님의 멱살을 틀어잡고, 그러시면 아니되옵니다,를 읍소해서 마침내 하나님의 항복 선언을 받아낸 이가 있으니 바로 출애굽의 영웅, 모세이다. 그는 시내산에서 송아지를 우상으로 숭배했을 때와 가네스 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 중 열명의 보고를 듣고 환애굽을 결정하고 모세를 죽이려던 백성들을 죄다 진멸하겠다는 하나님과 대결했다.
그의 저항 무기가 바로 저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하나님의 평판이었다. 그때 모세의 말을 다시 읽어보면, 겉으로는 고상하고 고매한 듯 보여도, 실제로는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답게 처신하세요, 라는 협박이었다. 결국 모세가 승리했다. 아니, 하나님이 져주신 것이지. 아무튼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우리를 향한 심판을 언제든 유보할 의사가 있다. 우리가 돌아오기를 원하시지, 벌주기를 원치 않으시는 게다.
에스겔은 왜 이 대목에서 저 이야기를 할까? 소위 ‘썸’타는 거다. 나, 너희들 죽이기 싫거든, 벌주기 싫거든, 그러니 제발 돌아와 다오, 그러니까 나는 지금도 내 이름을 위해서라면 너희를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몇 번이나 잠정 연기했던 하나님이 이제는 결연히 실행하겠다는 선포이기도 하고. 그러니 질문도 하지 마라. 질문 해봐야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것이나 물을 테니. 나느 내 이름에 합당한 정당한 심판을 하리라.
8.
이 단락은 우리에게 거친 도전장을 내민다. 내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내 욕심을 하나님 턱 밑에 내밀고는 해 달라고 생떼 쓰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이름값을 하고 사는가?
그 율법의 핵심인 안식일을 누리는 삶, 안식을 나누어주는 삶을 사는가?
이 본문에서 강조되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를 살게 하는 율법, 실천할 수 있는 율법이다. 그 율법을 묵상하는가?
우리의 행동은 반복된다. 그 사슬을 끊는 법은? 묵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