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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12절-3편1절: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3편.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1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길에서 망하리니.’ 왜?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지 않아서. 입을 어느 때 맞추느냐? 사랑할 때 맞춘다.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사랑할 수 있느냐? 인간들은 인인관계 인격적인 면이 들어있기 때문에 소원 목적이나 인격적인 면에서 다르면 사랑을 못한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 같아야 사랑이 된다. 통한다. 길을 가는데 아무나 붙잡고 통하자고 하면 되느냐?
입을 맞추라는 거기에는 아가페 사랑이 들어있고, 의사단일성이 들어있다. 또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성이 들어있다. 이런 의미들이 들어있다. 아들에게 입을 맞추라는 것은 아들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주님을 사랑하라 그 말이다.
주님을 사랑치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 그러니 아들을 사랑하라. 즉 주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렇다면 천국에 갈 사람을 보고 이 말을 하는 거냐, 지옥 갈 사람을 보고 이 말을 하는 거냐? 천국에 갈 사람을 보고 얘기하는 거다.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를 지옥 갈 사람으로 여겨진다면 주님을 사랑을 안 해도 될 것이다. 자기가 하늘나라에 갈 사람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주님을 사랑하면 된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다 어디로 갈 자냐? 천국에 갈 자다.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는 걸 한 번만 하고 말까, 여러 번 사랑할수록 좋은 거냐? 여러 번. 그러면 남녀 간의 사랑도 여러 번 사랑하는 게 좋으냐, 한 번만 하고 말까? 주님께 한 번만 입을 맞추고 말까, 여러 번 입을 맞출까? 그러면 우리 주님은 육의 사랑을 원하느냐, 영의 사랑을 원하느냐? 예수님은 영의 사랑이다.
주님을 사랑치 아니하면 진노가 있다고 했는데, 우리에게는 성화구원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한 번만 아니라 계속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시들해지기도 하고, 또 열심히 믿다가 바람이 푹 빠지는 경험도 있다. 처음에는 ‘진리가 참 좋다’ 하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더니 나중에는 슬며시 시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또 하나님께서 침을 한 번 찌르면 ‘아이고, 하면서 열심히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일들이 상당히 많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계속적으로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식지 않고 계속 불타올라서 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커지는 거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커지는 거다. 지혜지식이 커지고, 도덕성이 커지고, 능력성이 커지고. 그런데 우리가 교회적으로 볼 때 교훈적인 측면에서 맨날 ‘예수 믿고 잘 되자. 뭘 이뤄달라’ 하는 건 안 들어도 된다. 일 년 열두 달 그런 소리는 안 들어도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치가 들어있기 때문에 말씀을 이치적으로 자꾸 밝혀나가서 그걸 자기가 깨달을수록 그만큼 자유자가 된다. 또한 그만큼 자기에게 무장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밖으로 나가게 된다. 사람을 보고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를 않는다.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서 경험적으로 말을 한다면 가르칠 때 어떤 사람들이 제일 어려운가 하면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기가 참 힘들다. 어른을 가르치는 건 아이들보다 쉽다. 그런데 어른들 중에는 어떤 사람이 제일 힘든가 하니 여기저기서 구정물을 먹고 온 사람이 참 힘들다. 처음부터 전혀 모르는 사람이 교회에 왔다면 이 사람에게 옳은 것을 주면 굉장히 빨리 자란다. 튼튼하게 자란다. 그런데 어디서 구정물을 먹고 온 사람은 먼저는 그동안 구정물을 먹고 이질적으로 올라간 그것을 끄집어 내린 후에 다시 진리로 올려야 하는데 끄집어 내리는 것부터가 힘들다.
이질적으로 올라간 그것은 허물어지게 돼 있고, 그 사람은 망하게 돼 있고,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 상태로는 올려줄 수가 없는 거다. 터가 잘못돼 있으면 먼저는 그걸 자기 스스로 버리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해타산적으로 더 좋은 것을 주어야 하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실력이 없으면 맨 윽박지르기나 하고 무조건 나쁘다고만 하게 된다. ‘왜 충성봉사 안 하느냐? 뭐가 어쩌고’ 하며 맨날 때리기만 한다. 그러면 그걸 듣는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신앙 양심적으로 자기를 쳐다보면 그런 것 같고 하니까 ‘잘못했습니다’ 하게 되는데, 맨날 잘못했다고는 하는데 지식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그게 안 고쳐진다.
사람을 보면 참 희한하다. 제일 우습고, 제일 더럽고, 제일 사랑스럽고, 제일 고상하고, 또 제일 추하고 한 게 사람의 마음이라. 어떤 때는 개가 기어가다 똥을 싸놓은 것보다도 더 더러운 게 사람의 마음이다.
‘길에서 망하리니.’ 출생해서 죽을 때까지 좁은 길 생명 길을 가는 사람은 망하지를 않는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 길을 가는 나그네다. 진리의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나그네는 망하지를 않는다. 뭐가 안 망하느냐? 사업을 하면 안 망한다는 말이냐? 구원이 안 망한다. 사람 만들어지는 것, 하나님의 본질로 닮아나가는 것,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능력성으로 만들어지는 사람은 망하지를 않는다. 이 길로만 가면 계속 성공이다. 손해를 보는 것은 없다.
이런 사람은 세상살이에서 환경과 처소에 따라서 적절하게 자기의 활동이 나온다. 밥 먹고 사는 것도 그렇게 나오는 거다. 모든 매사의 판단이 정확하고, 사람의 마음이 넓어지고, 지혜로워지고, 세상을 보고 원망불평을 하지를 않고, 현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그 면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 마음이 아주 고상해진다. 넓어지니 참 아름답다.
우리 인간은 아름다운 게 좋다. 그런데 모양이 아름다움보다 마음이 아름다움이 그렇게 고상하다. 이게 참 아름다운 거다. 아가서에 보면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 여자는 흑인여자다. 흑인이라면 입술이 굉장히 클 텐데, 어쨌든 솔로몬이 이 여자를 그렇게 보고 싶어 했다. 이게 뭐냐? 나그네 일생 길에서 생명 길을 가는 사람의 속 중심을 말하는 거다. 마음이 고약하면 미스코리아 진선미처럼 잘 생겼어도 마귀가 가면을 쓴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사람은 살아갈수록 깨달음이 되고 마음이 아름다워야 한다. 갈수록 마음속의 신앙이 건강미가 나야 한다.
세상 길 사망 길을 가면 갈수록 망하는 거다. 사람이 배워갈수록 살아갈수록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도덕성 능력성이 여물어져 가야 하는 건데 사망 길을 가는 자는 이게 없다. 그러니 나이는 먹어서 골백살이 되어도 마음속에 만들어진 것은 없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 중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어도 맨 술이나 먹고, 담배나 피고, 집에 들어오면 식구들과 싸우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속에 뭐가 들어 있겠느냐? 이 사람은 망한 거다. 사람이 망했다. 인격 면에서 망했다.
사망 길로 가면 사람이 망한다. 누구를 사랑을 안 해서 망한 거냐? 예수님을 사랑을 안 해서 망했다. 예수님을 사랑을 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옮아져 오는 건데 그러지를 않았으니 그 사람은 망한 거다. 우리는 인생길을 가면서 출생을 해서 죽음의 길을 가는 나그네인데, 이 기간 동안에 천국의 교훈을 받고 생명 길로만 가면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돼 있다.
가르치는 인도자들은 이걸 알아야 한다. 교인들을 나그네로서 생명 길로 가게 하면서 사람을 성공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건 없이 성도들을 세상에 더 빠뜨리고 있다. 사람을 망하게 만들고 있다. 이게 마지막 시대의 교회다.
사람이 하루 배우고 이틀 배우고, 한 주 배우고 두 주 배우고 이렇게 죽을 때까지 계속 배우고 깨닫고 만들어지면 영원 궁극적 결과적 최종적 목적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실속 있게 된다. 이걸 구원이라고 한다. ‘지옥에서 천국’ 그런 차원만이 아니라 잘 배우고 실력이 커져서 영능의 실력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도 구원이라고 하는 거다. 원대한 구원이다. 이러면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체화 된 실력을 가지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그 천국을 누리게 된다. 인간표현으로 말을 한다면 주님과 가깝게 지내게 된다. 예수 믿을 바에야 이렇게 믿어야 한다. 이게 구원이라. 사망 길로 가면 이 구원이 안 된다. 이룰구원 성화구원이 안 된다. 안 되니까 ‘길에서 망하리니’ 그렇게 되는 거다.
우리는 사람이 망한 것을 알아야 한다. 공부는 잘 하는데, 돈을 잘 벌고 잘 먹고 부자로 사는데 인격적인 측면에서 속사람이 망한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나그네요 안 믿는 사람도 나그네인데, 창세 이후 많은 인간들이 출생을 해서 무덤에까지 나그네 길을 가면서 물질적으로 성공을 했다고 해도 넓은 길로 갔다면 그 사람은 망한 거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면 그 사람이 성공을 했다고 보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람이 만들어졌구나. 못 만들어졌구나’ 하는 이 성공과 망함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볼 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하늘나라에 대하여 성공을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목회를 성공한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큰 집을 지니고, 큰 건물을 세우고, 교인들이 많으면 목회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건 사람의 인격적 속사람의 성장 면과는 다르다. 외부 표면으로 성공한 것과, 속사람이 성공한 것과는 별개문제다. 잘 먹고 잘 사는 것과, 사람이 바로 만들어지는 것과는 별개문제다.
우리는 나그네 인생길을 가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천국성에 대한 성공을 거두고 가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을 믿은 효력이 있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뜻대로, 하나님의 지시대로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살면 이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성공을 거두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영원히 망하는 사람도 있고, 영원히 성공하는 그런 면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면 진리를 사랑하게 된다. 진리사랑은 주님사랑이다.
3장
이 시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다. 다윗이 피해 다닌 것을 역사적으로 본다면 사울 왕 때 다윗이 사울을 대적하지 않고 피하여 도망을 다닌 때도 있었다. 이 때 다윗은 사울 왕에게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골리앗을 죽였음에도 이로 인해서 사울의 미움을 사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군사들을 이끌고 다윗을 쫓아다니면서 죽이려고 애를 썼다.
그 후에 다윗이 죄를 지어서 다윗의 가정에 살인이 일어나고 엄청난 재앙이 일어난다. 이 재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주실 때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주는 재앙이 있고,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 아주 어려운 일이 닥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재앙이라고 표현을 하는 게 아니라 올려주려고 하는 시험이다. 다윗에게는 죄를 지어서 온 재앙이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하고 일어났는데, 아버지로서 아들과 맞서서 싸울 수가 없어서 아들을 피해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울면서 갔다. 다윗을 따르는 자들은 전부가 싸움에 능한 용사들이다. 그러니까 압살롬과 싸우면 이길 수 있는 거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과 싸우지 않고 피해서 갔다.
전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 사울을 죽일 기회가 많이 있었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겨 버렸다. 자기 아들까지 반역을 하여 일어나는 세상인데 남이야 오죽하랴. 그러니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온 세상이 다윗을 대적하는 것으로 말이 나올 만도 하다. 그래서 1절의 말이 나오는 거다.
1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이 말을 하는 다윗의 심정을 우리가 이해할만 하다. 그런데 다윗은 한 번의 실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선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대적이 많을까?
우리는 이 ‘대적’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대적’이라 할 때 어떤 대적들이 있을까? 첫째는 인간끼리의 대적이 있다. 인간 대 인간끼리 대적이 있다. 또 신앙 면에서 볼 때 성도들끼리의 대적이 있고, 또한 성도와 불신자들과의 대적도 있다. 그리고 진리와 비진리의 대적이 있다.
그러면 누구를 향해서 ‘나의 대적이다’ 할 때 누가 누구의 대적이 되는 건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과 대적이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거다. 그리고 불신세상 인간 대 인간끼리 대적을 할 경우에는 누가 하나님 앞에 대적이냐? 둘 다 대적이 된다. 마음이 좋고 나쁘고가 문제가 아니라 둘 다 선악과 따먹은 상태이기 때문에 둘 다 하나님과 대적으로 돼 있는 거다. 그리고 둘 다 예수를 믿는데 진리의 성도와 비진리의 성도가 있다면 비진리의 성도가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거다.
비진리라고 할 때는 불신자를 말할 수도 있고, 세상화된 교인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세속화된 교인과, 안 믿는 사람의 경우에 하나님이 어느 쪽 편이겠느냐? 둘 다 아니다. 둘 다 하나님과 대적이 되고 있다. 세속화된 교인은 성경을 가지고 있고, ‘주여,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고, 그런 교인들끼리 오다가다 만나면 ‘할렐루야’ 한다. 또 교인들끼리 서로 흉을 보기도 하고 ‘우리 하나님, 어쩌고 저쩌고’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걸 보시고 어느 편을 들겠느냐?
현재적 자기는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쪽에 속해있는 사상인지, 사망 길 넓은 길을 가는 쪽에 속해있는 사상인지, 아니면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선악과 따먹은 사람 쪽에 속해있는 사상인지? 사망 길을 가는 사람들은 누구와 대적이 되고 있느냐? 생명 길을 가는 교인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다면 누구와 대적인가? 같은 교인인데 다른 교인을 흉을 보는 교인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편이 되겠느냐? 흉을 보는 교인은 하나님과 대적이 된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고 원수로 삼고 있는데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 되겠느냐? 다윗의 편이 되는 거다. 자기의 신앙의 질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하나님의 대적이 안 되는 거다. 대적을 잘 볼 줄 알아야 한다.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 날까지 우주만물은, 온 세상은 존재나 물질이나 사건이나 그 어떤 존재나 환경도 전부는 예수 믿는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사역을 위해서 역사를 진행시키고 계신다. 여기서 인간 자기는 길을 가는 나그네로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 운동에 동참 협조 순종을 하면서 가게 된다. 이렇게 가는 자는 하나님께 소속이고, 이렇게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입장이다. 질에서 이렇게 드러나는 거다.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다 그런 게 아니라 그 속의 마음의 질을 두고 말을 하는 거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만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받은 그대로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산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과 반대의 정신 사상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적으로 놓여있는 거다. 그 성질 자체가 대적이다. 이 성질을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르면 자기는 항상 하나님과 대적이 되어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 자기가 하나님과 대적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속에서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있다면 그 성질이 하나님의 소원 목적과 대적과 대립이 되어있는 거다.
그렇다면 안 믿는 사람이 예수를 믿으려고 교회에 나갔는데 세속화 된 교회로 갔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향해서 ‘너는 내 아들이구나. 내 편이구나’ 그렇게 보겠느냐, 여전히 하나님과 대적이 되어 있겠느냐? 여전히 대적이다. 왜 그러냐?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데 왜 대적이냐? 비진리이기 때문이다. 소원 목적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 식으로 믿기 때문이다.
비진리는 참이 아닌 거짓이다. 불 탈 것을 소원 목적하고 간구하고 믿는 거다. 하나님은 불타지 않는 것, 예수님처럼 자기를 만들어 준다고 하는 건데, 진리를 사랑하면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건데 자꾸 물질을 선택을 하고,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뭐가 잘 된다’ 자꾸 이렇게 나간다면 이건 하나님과 대적이다. 그 성질이 대적으로 되어있다. 그래도 예수만 믿으면 되는 거냐?
신앙 면에서 ‘가짜다. 진짜다’ 하는 말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진짜는 진짜지만 가짜는 전혀 아니다’ 그 말이냐, ‘가짜는 진짜와 비슷하다’ 그 말이냐? 비슷하다 그 말이다. 신앙 면에서 가짜라고 할 때는 외모 모양새는 진짜와 비슷한데 질적인 면에서 전혀 다른 것을 말하는 거다. 표면이 진짜와 전혀 다른 것은 굳이 ‘진짜다. 가짜다’ 하는 표현을 붙일 필요가 없는 거다.
다윗은 신정통치를 하는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다. 신정통치란 하나님의 말씀통치를 말한다. 신정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이 입혀지는 거다. 역사적으로 다윗의 이 통치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통치를 하는 신정통치다. 이게 이스라엘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통치는 이방인들의 세계에는 없는 신정통치라야 한다. 말씀통치, 진리통치, 생명통치, 영이 잘되라고 하는 통치,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통치라야 한다. 그런데 세속화 된 기독교는 신정통치가 아니라 순 인간 조작배기 인본주의 통치다. 그러니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지지 않는 거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잡고 쓰시는 구원운동이 바로 신정통치이다. 이 구원운동을 반대한다면 반대하는 그 자는 하나님과 대적이요,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사람과도 대적이 되는 거다. 세상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은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 있는 거다. 반면에 좁은 길 생명 길을 가는 성도는 하나님과 결합된 성도다. 따라서 좁은 길 생명 길을 가는 성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세상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의 일을 도울 수가 없는 거다. 비진리를 도울 수가 없는 거다.
세상 넓은 길을 가는 자들을 돕게 되면 비진리의 세력이 자꾸 커진다. 이렇게 되면 그들이 하나님과 더 팽팽하게 맞서는 결과가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루아침에 때려 부술 수도 있는 건데, 문제는 진리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큰 방해물로 다가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세상 넓은 길, 비진리로 가르치는 교회에서 배출이 되는 종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황충이 떼들처럼 나오는 거다. 그러니 진리대로 바로 살고자 하는 자만이 아니라 자기 교회 성도들까지 이들에게 큰 고난을 당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진리는 비진리 운동에 협조 동참할 수가 없는 거다.
진리의 교회라면 진리의 성도를 자꾸 배출을 해서 진리로 커져야 한다. 이게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을 지나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꾸 커진다. 질적으로 먼저 커지고, 이 질에 의해서 양적으로도 커져야 한다. 진리운동과 세속화된 교회운동은 정신 사상적인 싸움이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여기서 다윗의 대적이 단순히 압살롬을 뜻함인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대적하는 원수를 다 대적자로 보는 것인가? 단순히 사울 왕이나 압살롬만을 대적자로 본다면 그 때 당시로 보면 사울 왕도 죽어 없어지고 또 압살롬도 죽어 없어진다면 이제는 다윗 왕의 대적이 없어지는 거냐? 아니다. 대적은 계속 있는 거다.
현재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도 사울 왕이나 압살롬만 죽으면 대적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오늘날도 사울성(性) 압살롬성, 즉 압살롬이나 사울이 가지고 있었던 성격 성질을 가진 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의 기도도 다윗처럼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하는 기도가 나오는 거다.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대적이 많다. 이방 불신사상을 가진 자들은 물론이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속화된 자들이 다 우리의 대적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대적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자기가 몰라서 대적이 되기도 하고, 상대가 대적노릇을 하고 있는데도 그걸 몰라서 자기가 은연중에 대적 편에 붙어서 진리대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적자에 대해 정확히 모르면 자기 역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대적자를 먼저 내 속에서 찾아야 하느냐, 남의 속에서 찾아야 하느냐? 내 속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원 목적이 질적으로 하나님의 것과 같은지 다른지를 먼저 내 속에서 찾고, 그 다음에는 교회 안에서 찾아야 한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대적자가 많다. 목사도 하나님의 대적자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의 메시지의 소원 목적을 봐야 한다. ‘저게 하나님의 소원 목적인지, 목사 자기의 소원 목적인지’ 그걸 심사해서 인간의 소원 목적으로 말이 되어나오면 그곳에서 탈출을 해야 한다. 왜 그래야 되는 거냐? 그런 곳에 있게 되면 하나님과 대적이 되니까. 하나님과 대적이 된 세속화된 곳에 붙어있으면 안 된다. 교회의 교훈은 ‘진리냐, 비진리냐’ 하는 면에서 아주 엄격한 거다. 외부적 활동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리사상에서 엄격하게 다루는 거다.
갑과 을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겨도 둘 다 하나님 앞에 대적자가 될 수가 있다. 첫째는 영적 구원 면의 대적자가 있다. 자타의 성화구원 면에 방해자라면 이건 하나님과 대적이 된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이거는 일반적인 건데, 일반 사회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 대적자가 있다. 이건 알기가 쉽다.
현재까지 교회인 자기는 어느 면의 대적자를 하나님 앞에 대적자로 보았느냐? 하나님 앞에 대적자를 모르면 이방 윤리 도덕성적인 면의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의 대적자로만 보게 된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세속화로 나가며 자타의 성화구원에 방해를 하는 예수를 믿는 자나, 일반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 죄를 짓는 불신자나 다 대적자로 돼 있는 거다.
그리고 자기 앞에 하나님의 대적자가 나타났을 때 자기가 어느 편에 가서 붙어있나 그것부터 먼저 심사를 해야 한다. 상대가 대적자로 나타났을 때 나부터 하나님 앞에 대적자로 돼 있는 건지, 아니면 세상에게 대적으로 되어있는 건지를 알아야 한다. ‘나는 예수를 믿고 있으니 하나님 편이거니’ 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너는 나와 대적을 하고 있다’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대적자를 나에게 보내줄 수도 있는 거다.
내 눈 앞에 미운 사람이 왔을 때 그 사람에게 ‘누가 보내서 나에게 왔느냐’ 하고 묻는다면 나를 어떻게 하려고 자기 마음대로 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영의 눈, 신앙의 눈으로 봤을 때 제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깨닫게 해주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서 온 것이다. 내가 누구와 대적이 되어있는가를 살피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원수가 왔을 때는 내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지 않나를 먼저 살펴야 한다. 이걸 먼저 못 살피면 인간 대 인간끼리의 대적으로만 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싫어라 하고 원수 시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나를 고치라고 심부름으로 보낸 것인데 그 사람을 보낸 하나님의 뜻이 내 속에서 없어져 버린다. 내 속에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못 찾으면 그렇게 된다. 그러니 먼저 내 속을 빨리 살펴라.
내가 하나님 반대편이 서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편에 가서 서시겠느냐? 하나님 당신은 제 자리에 서 있는 거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내 원수의 뒤에 서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잡고 나를 공격하게 한다. 이런 게 성경에 다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반대 되는 짓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방군인들을 앞세우고 와서 이스라엘을 막 정복을 한다. 그러니 자기를 잘 살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