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無逸翁(榮觀) 訓子書[무일옹(영관) 훈자서]
참의공 휘는 영관(榮觀․1737~1803)은 괴봉공파(魁峯公派) 호연정(浩然亭) 수징(壽徵)의 손자, 낙와공의 아들로 자는 중빈(仲賓) 호는 무일옹(無逸翁)이다. 공은 손자 백(栢)의 추은으로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지장록 p. 1120)
「嗟汝子侄孫聽余言先世忠孝相傳汝亦聞知也君子立揚之道載在方冊在汝勉力如何而田舍保身之道亦不可不勤務農桑奉祭祀和兄弟敎子孫撫奴僕敬官吏愼斯六者爲可嗟爾成祚事親之誠根於天性又爾弼祚事親之誠尤爲出倫幸執大焉今爾諸侄孫相勉以忠孝不墜吾先訓是余之望也」
〈해설〉슬프지만 너희 자, 질, 손은 내말을 들으라. 선세에는 충효를 상전함을 너희 또한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군자의 도리는 입신양명하는 것은 책에 실려 있으니 너희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노력하느냐에 달려있으며 전사는 몸을 보호하는 길이니 부지런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농사와 잠업에 힘쓰며 제사를 받들어 봉행해야한다.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손을 가르치며 노복을 어루만지며 관리를 공경하는 여섯 가지를 삼가면 가할 것이다. 슬프다. 너희 성조는 사친의 정성이 천성에 뿌리 하였다. 너 필조 또한 사친의 성의가 남보다 뛰어나 무엇보다 크게 다행이다. 이제 너희들 조카와 손자들은 충효에 힘쓰고 선조의 가르침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ㅁ 帽巖齋(啓哲) 遺稿[모암재(계철) 유고]
휘 啓哲(庚子1840~癸丑1913)은 괴봉공파로 아버지 휘 장(樟)과 어머니 인동 장씨 사이의 4남 중 장남이다. 자는 치선(致善), 호는 모암재(帽巖齋)다. 1874년(甲戌) 설폐정관(說弊呈官)으로 일하면서 억울함을 당했는데, 암행어사에 의해 구출됐다.
1894년(甲午) 동비토벌도방수장(東匪討伐都防守將)에 임명돼 농민군을 토벌하는 입장이었으나 공무를 공평하게 처리했다. 한편 장흥부의 정묘지(丁卯誌)에는 공이 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소재 충렬공의 재각인 하산재(霞山齋)가 퇴락하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 長興府八景偶吟(장흥부팔경우음)
獅子歸雲(사자산으로 돌아가는 구름)
忽於在後忽於先 갑자기 뒤에 있다 앞에 있다가
始發何時太古年 어느 때 비로소 태고시대 발했나.
遙連大海靑嵐際 먼 대해 닿아 푸른 이내 내릴 때
半落中天白日邊 중천에 반쯤 기운 태양은 저물어간다.
朝從帝嶽神仙列 아침부터 제암산은 신선 줄지었고
暮宿烽坮老佛眠 저녁 봉수대 묵은 늙은 남자 졸고 있다.
若將劒筑登其上 칼 축 지니고 이 정상 오른다면
將氣悲歌走趙燕 장한기개 비가 연조사내는 바쁘겠다.
장검축(將劒筑) : 전국시대 자객(刺客) 형가(荊軻)와 그의 벗 고점리(高漸離)를 두고 한 말이다. 형가는 연(燕)나라 태자 단(太子丹)을 위해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려 칼을 던졌으나 실패해 죽었고, 고점리도 형가의 복수를 위해 축(筑)이라는 악기를 던졌지만 역시 실패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億佛暮熢(억불산 저녁봉화)
億佛迎熢次第知 억불산 봉화는 영접하는 차례 아니
速於星火有何遲 왜 저리 느리냐 해도 성화보다 빠르다.
踰山踰水傳千里 산 넘고 물 건너 일천리 전하니
如矢如風送一時 화살 같고 바람 같아 일시에 보낸다.
昔年條約流年約 예전 조약은 세월 흘러간 조약이고
今日此期昨日期 오늘 이 기약은 어제 기약이다.
洛陽城裹烟花夕 낙양성 저녁 안개 속 꽃들
北闕春光萬歲之 봄빛 북쪽 대궐 만세 축수 기원한다.
獨谷靑風(독취정의 맑은 바람)
爽氣淸名百世香 굳센 기운 맑은 명성 백세 향기
千林一抹布靑裳 온 수풀 베치마 푸른색 찍어 발랐다.
噓來五柳人先醉 허허 오류선생은 남보다 먼저 취하니
流去四明客有狂 사명에 미친 객 있었으나 풍류 떠났다.
響生叢竹坮傳石 우거진 대밭 울림일어 석대에 전하니
地近鑑湖月滿鄕 지대 가까운 감호 달빛 고을에 넘친다.
不用一錢何幸漏 한 푼 쓸모없어도 뚫려 얼마나 다행인가
聞其消息到山陽 그 소식 듣다가 보성 땅 이르렀다.
五柳(오류) : 진(晉)나라 도잠(陶潛)이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자칭 '오류선생'이라 하면서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었다. 오류선생의 호는 연명(淵明)이고, 자는 원량(元亮) 혹은 연명(淵明)이고, 본명은 잠(潛)이다. 오류(五柳) 선생이라고 불리며,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유명한 도연명(365~427)은 전원으로 돌아가 술과 국화를 사랑하며 살았던 육조시대의 대시인이다.
四明客有狂 : 당 현종(唐玄宗) 때의 시인 하지장(賀知章)의 호이다.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고 술을 좋아했는데 이백(李白)의 <대주억하감(對酒憶賀監)> 에 "사명에 미친 나그네 있었으니/ 풍류 넘치는 하계진이로다/ 장안에서 한 번 서로 만나서는/ 나를 적선인이라 불렀었지/ 그 옛날 술을 그리도 좋아하더니 어느새 솔 밑의 티끌이 되었구려/ 금 거북으로 술 바꿔 마시던 일/ 생각만 하면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山陽(산양) - 보성의 옛 지명. 보성의 별칭.
獨醉亭(독취정) : 장흥읍 덕제리에 있는 누정. 김병용이 세웠다는데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며 해질 무렵 강이 물든 낙조를 경탄하면서, 이곳에 정자를 짓고 정제(亭題)도 혼자 취한다고 독취정이라 했다. 정자 아래에는 깊고 넓은 독실소(犢失所)가 있으며, 배로 건너가 낚시하는 강 연안이라는 곳이 있다. 강가 풀밭에 매어놓은 송아지를 소의 큰 메기가 물고 들어가서 독(犢)과 실(失)을 붙여 독실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돌이 많은 골짜기라 해서 독실[石谷]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144-089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88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88일차에는 '선조님들(무일옹, 모암재)의 유고'가 밴드에 게재됩니다.
[본문내용- 선조님들의 유고]/ 무곡
무일옹의 '훈자서'가 눈길을 끕니다.
역시 형제간의 우애와 자손교육 등에 대하여 강조를 하셨습니다.
미래를 담보하는데는 상기의 '훈자서' 내용이 최고의 덕목으로 보입니다./ 무곡
억불산과 사자산이 괴봉공 후손들의 작품 글귀에 나오니 반갑네요. 장흥의 산들이 아버지 마음처럼 우람하고 어미니 품처럼 포근합니다./ 벽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