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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주 동안에 죄악과 불행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2주 동안의 내용을 짧게 짚고 넘어가면,,, 죄는 인간이 지은 것으로 여전히 죄가 활개치는 것은 모든 죄인을 사랑하시고, 모두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해야 한다! 또한 불행은 시작은 인간의 죄로 이 땅에 들어왔지만, 모든 이에게 덤벼들기에 우리는 치료하시는 하나님, 문제를 해결하시고 오히려 능력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 불행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억나시죠?^^
오늘은 고통이란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먼저 살펴볼까요? 약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우리가 고통을 살펴보기 전에 잠시 복에 대해서 오늘 본문을 통해 무엇이 복인지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서 고난당하는 자는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우리가 보는 시선으로는 고통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복의 개념에서는 이 고난, 고통이 복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히브리어로 ‘바라크’라고 하며 그 뜻은 ‘무릎을 꿇다’라는 의미는 지니고 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 무릎은 언제, 누구에게 꿇을까요? 신하가 왕에게 나아갈 때 무릎을 꿇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신하들은 항상 왕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또 무릎을 꿇는 경우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입니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겸손함으로 그분을 만나뵐 때 하는 행위가 바로 무릎을 꿇는 ‘바라크’인 것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복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믿으시면 아멘!
그런데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감사함으로 경배드리기 위해 나아가기도 하지만,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해결함을 얻기 위해 나아가기도 합니다. 비록 힘이 들고, 고통스러워 주님께 나아갔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시작은 문제와 고통 때문이지만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그분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내 생각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고, 소망을 발견하기 때문임을 믿으시면 아멘
그렇다면 인간의 고통은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창세기를 통해 살펴보면 인간의 고통은 최초의 인류였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었기에 이들의 인생은 고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이 땅이 저주를 받은 후 남자는 땅의 소산을 먹기 위해서는 땀을 흘리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여자는 출산하는 고통을 더하게 된 것입니다.
[창3:16-17]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 말씀과 더불어 창2:15 말씀에 더불어 에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신 것으로 보아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도 노동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노동은 고통은 아니었습니다. 죄로 인한 이후부터 노동이 고통이 된 것입니다.
고통의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입니다. 즉, 우리의 몸과 정신을 포함한 우리 삶 전체가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통이 찾아오면 육체만 괴롭다? 마음이 괴롭다?가 아니라 육체와 마음이 함께 괴롭게 됩니다. 육체와 마음이 하나로 연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도, 또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라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몸의 일부분에 상처가 나면 아플까요? 안 아플까요? 아픕니다. 누구라도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오늘 말씀의 중간 결론을 내자면,,, 고통 없는 삶은 있다 없다? 없다! 너무 절망적인가요? 그래서 최종 결론이 아니라 중간 결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땅에서 고통 없는 삶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삶, 더 큰 소망을 얻는 비결을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고통은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육체적으로 너무 힘이 들면 정신이 그것을 견뎌내기가 어렵다!
조용기 목사님께서 초기 사역을 하실 때 한 집에 전도하러 들어가셨습니다. 집에 들어가서 ‘아주머니~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가세요!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라고 이야기했더니 그분이 하시는 말! ‘젊은 양반~ 내 꼬라지를 보세요! 지금 내 삶이 지옥입니다! 여기서 더 무슨 지옥이 있습니까?’ 하면서 애기들은 울고불고, 집안 살림은 엉망이어서 아주머니가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로 대답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으셨답니다.
그렇게 교회로 돌아가셔서 ‘하나님~ 지금 이 삶이 지옥같은 이들에게 구원 받으라고 말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하면서 성경을 찾다가 찾은 구절이 우리가 잘 아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영혼이 잘 되는 것처럼, 범사도 잘 되고, 강건한 삶 즉,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라고 이 말씀을 외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몸 상태가 좋을 때에는 주변의 웬만한 고통은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작은 것도 눈에 거슬리고, 짜증이 나며, 큰 화를 내는 것을 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 상태가 마음 상태에도 분명히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티비에서 한 여인이 매일 저녁마다 팔이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미용사였고, 거의 반 평생동안 이 직업을 통해 가정을 먹여 살린 성실한 아내, 엄마였습니다. 그러다 그만 팔을 다쳐서 수술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일을 관두고 집에서 지냈습니다. 수술도 잘 되었다고 결과는 좋다고 했는데, 이 여인은 밤마다 고통을 호소하고 울부짖었습니다. 촬영을 하는 때에도 너무 아프다고 뒹구르면서 결국 응급차가 와서 이 여인을 모셔갔고, 진통제를 맞고서 잠시 안정을 취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 여인은 처음 수술한 병원을 고소했고, 그 이후에도 여러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아픔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병원에서는 이 여인의 아픔의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여인이 사고가 난 이유는 딸이 만나던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것을 탐탁지 못하게 여겼고, 그 이유로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만 그 상황에서 넘어져서 땅에 손을 짚다가 그만 팔이 다친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 여인은 더 이상 미용을 할 수 없었고, 마음의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한결같이 자상한 남편인데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집에 남편이 오거나, 딸이 들어오면 막 뒹구르면서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고 죽겠다고 합니다. 결국 상담사와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 속의 상처를 드러내자 조금씩 안정을 취하였고, 스스로도 고통이 줄어든 것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예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상당 부분의 고통은 육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늘 말합니다. 성경도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말씀하면서 마음과 생명의 연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과 육체과 관계가 있듯이 우리의 신앙도 고통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평안할 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몸이 너무 괴롭고, 힘이 들면 신앙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영성이 깊었던 사도 바울도 자신에 몸에 있는 ‘가시’를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신앙심이 깊어도 고통은 힘이 듭니다.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전12:7-9]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시면서 그 약함을 오히려 자랑하게 만드셨고, 그 고통에서 완전한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안고 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에서도 사탄은 이 고통을 신앙의 논쟁점으로 부각하며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모든 복을 거두어들이면 욥은 과연 어떻게 할까요? 아마도 그는 하나님을 떠날 것입니다. 그의 신앙은 축복 때문입니다!’ 라면서 하나님을 설득하여 욥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심지어 욥의 몸까지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지만, 계속되는 고통을 참지못하자 욥의 입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쏟아집니다. 왜? 이러한 고통이 자신에게 찾아왔는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 너무나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며,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의미와 목표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2.고통은 인간의 한계를 알려줍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줌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끊으려고 온갖 계책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에 대해 잘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 세상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약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여기서 고난은 ‘나쁜 일을 견뎌내는 것, 고통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요? 불평을 쏟아냅니다! ‘왜 나에게는 이러한 일이 생겼지? 도대체 나는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거야?’ 그러다가 고통이 끝나지 않고, 더 심해지면 불평의 말이 험해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거친 욕설을 하기도 합니다. 신을 향하여 저주를 쏟아내기도 합니다. 때로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이성을 잃고는 가족에게 폭력을 쓰기도 합니다. 술을 먹고 잊어보고자 하고 그것도 안될 것 같으면 마약에 손을 대기까지도 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목숨을 끊음으로 이 고통을 멈추겠다는 무서운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가장 가볍기도 하지만, 가장 무서울 수 있는 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기입니다. 감기는 사람의 면역력이 떨어지면 발생하는 초기의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기로 인해 몸살을 앓게 되는데, 감기의 원인은 대부분 과로입니다. 몸이 너무나 피곤하기에 평소에 이겨내는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몸이 살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기몸살에 걸리면 약을 통해 몸을 쉬게하고 낫게 되는 것이죠.
또한 요새는 정신적이 스트레스가 늘어가는 시대입니다. 과도한 정신적 압박을 받으면, 심한 두통이 오거나 속이 쓰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몸의 질병보다 오히려 정신적인 질병이 많아져서 예전에는 마치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정신과 상담이 요새는 너무나 당연하게 질병의 일환으로 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에 아픔을 통한 고통,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고통뿐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고통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평소에 운동을 안하다가 조금 운동을 시작하면 몸이 어떻게 되나요? 아파합니다. 뛰지 않다가 뛰다보면 다리가 덜덜 떨리고, 심장이 막 터질 것 같습니다. 질병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몸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목욕탕에 가서 갑자기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온 몸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고, 갑자기 차가운 물로 씻으면 덜덜 떨면서 주체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심지어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다보면 머리가 깨지는 통증 느껴보신 분 계신가요?
이러한 고통이 왜 생겨날까요? 이것은 우리가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는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신호가 없다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즉 고통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안전장치라는 은혜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어떤 이들은 이런 몸의 안전장치가 망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천성 무감각증이라는 질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우리 몸의 통증을 느껴도 뇌에서 깨닫지 못해서 살이 베어서 피가 나와도 모릅니다. 뜨거운 것을 만졌는데도 알지 못해서 계속 몸에 화상이 나고 큰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면 고통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오히려 고통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더 안전해진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고통을 단순히 ‘생존을 위한 안전장치’로서 설명하거나, 이해시키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통, 고난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고, 이것을 복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고난 당하는 자가 있거든 기도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불평, 원망, 낙심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시간이 되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많은 성도님들의 신앙 생활을 살펴보면 제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모두들 동감하실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언제 더 기도하는지?
행복할 때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러 많이 나오시나요? 아니면 우리가 고통당하고, 문제로 가득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러 많이 나오시나요? 아마도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 더 나아오는 모습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는 태도이긴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방법, 저 방법을 다 동원해서 해결하고, 버팁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될 때 그때 두손들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어도 살만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인생을 잘 이끌어갈만큼 똑똑하고 능력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식도 쌓고, 경험도 쌓다보면 잘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현재 별 문제가 없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면 그냥 자리에 주저앉거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하나님께 억지로 나옵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 ‘아 이제 내 힘으로 안되겠구나!!!’ 인정하는 순간! 그때부터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내 힘만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고, 나를 인도해줄, 나를 이끌어줄, 나를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고후1:8-9]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수 많은 간증과 신앙이 좋다고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거의 다, 아니 모든 분들이 커다란 삶의 고비, 문제, 고통을 경험하신 분들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고통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신뢰하는 순간!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목사님 그럼 하나님은 좀 너무하시네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당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고통을 당할 때까지, 고통 속에서 방황할 때 ‘어때 이제 맛좀 봤겠지? 너 안되겠지?’ 하시면서 등장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고통을 당하기 전에는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좋은 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나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참 부모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우리의 닫힌 영적인 눈을 열어주는 귀한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고통은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만듭니다.
고통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에게도, 유명한 연예인들에게도, 높은 위치에 있는 대통령과 왕이라 할지라도 고통은 다 겪게 됩니다.
고인이 되신 롯데 신격호 회장은 롯데를 5위권 그룹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 국내 최고층 높이의 롯데월드타워를 완공시킬 때 특혜논란에 휩싸이고, 안전사고까지 잇따랐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영향력을 이용해 경영권을 차지하려는 장남과 차남의 다툼으로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고 대국민 사과까지 해야 했습니다. 2016년에는 경영비리로 실형을 받음으로 불행한 말년을 보내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2010년 10월, TV에서 행복론을 열강하던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 부부가 동반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최윤희 씨는 그동안 정부와 기업체는 물론 여러 TV 프로그램에서 암울한 환경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강연하던 행복 디자이너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폐와 심장질환이 찾아오자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남긴 유서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저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2년전부터 여기저기 몸에서 경계경보가 울렸습니다. 능력에 비해서 너무 많은 일을 하다보니 밧데리가 방전된거래요. 2년 동안 입원 퇴원을 반복하면서 많이 지쳤습니다. 그래도 감사하고 희망을 붙잡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추석 전주 폐에 물이 찼다는 의사의 선고. 숨쉬기가 힘들어 응급실에 실렸고 또 한 번의 절망적인 선고. 그리고 또다시 이번엔 심장에 이상이 생겼어요. 더이상 입원에서 링거 주렁주렁 매달고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혼자 떠나려고 해남 땅끝마을가서 수면제를 먹었는데 남편이 119신고, 추적해서 찾아왔습니다. 저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견딜수가 없고 남편은 그런 저를 혼자 보낼수는 없고… 그래서 동반 떠남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텔에는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 또 용서를 구합니다. 너무 착한 남편,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입니다. 그동안 저를 신뢰해 주고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죄송 또 죄송합니다. 그러나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2010. 10. 7
이처럼 고통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해 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있습니다. 솔로몬입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볼까요?
[전1:2-3] 2.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우리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목표로 살면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겪게되는 수많은 크고 작은 고통에서 그 누구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결국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인생이기에 이 땅의 삶은 전혀 행복해보이지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오히려 이 땅에서의 고통으로 인해 우리는 허무하게 끝나는 이 땅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나라를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 슬픔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행복의 나라를 예비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고통을 겪을 때 이 땅을 보며 한숨을 쉬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나를 보라’며 내가 너의 소망이고, 내가 너의 행복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목표를 이 땅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걸어간다면 한 걸음, 한 걸음이 하늘 나라를 향한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눈을 들어 주를 보라 주의 영광을 보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주의 영광을 보라
주는 빛 거룩과 진리 능력의
주의 영광 나타나셨네
선포하라 선하신 주 주의 인자는 영원함이라
선포하라 선하신 주 주의 인자는 영원함이라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은 단 하루를 살더라도 하늘나라에서 받는 상급, 하늘나라에서 사는 기대를 선택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소망함이 없는 인생은 고통을 두려워하며 피하고 때론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인생은 담대하게 고통 속으로 뛰어 듭니다.
롬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만약 이 땅에 고통이 없다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무슨 짓?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서 ‘이곳이 좋사오니~~’라고 말하면서 주저앉으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 너무나 좋으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곳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마련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곳에 소망을 두어야만 합니다. 바로 고통이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는 씨앗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 고통이 가득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예수로서 우리의 고통을 함께 겪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심으로 죄로부터 자유함을 주시고, 완전한 자유와 승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는 사랑을 배웠고, 영생에 대한 소망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죄를 통해 용서와 관용을 배웁시다!
불행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납시다!
고통을 통해 사랑하고 소망하는 법을 배웁시다!
이 땅에서 우리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죄 때문에, 불행으로 인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한숨이 나오고, 두려움과 걱정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죄악을 이기신 승리의 깃발인 십자가를 붙들게 되면 죄를 이기며, 불행을 견디고, 고통을 뚫고 일어서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 경기 침체, 가정의 문제,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두려움이 아닌! 승리의 깃발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승리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